게이트: 리셋
10화
복도 저편에서 박성렬의 구두 소리가 로비 쪽으로 사라졌다.
정도윤이 벽에서 등을 뗐다. “간다.”
김하사가 단말기를 접었다. “따라가냐, 아니면 따로 움직이냐.”
“따로. 지금 필요한 건 대숙청 파형과 나락의 교차 검증이다.”
“내 안전가옥밖에 없겠군.”
두 사람은 비상계단으로 내려가 지하 3층에 세워둔 낡은 검은색 세단에 올랐다. 번호판은 진흙으로 절반이 가려져 있었다. 차가 길드를 빠져나왔다. 새벽의 상암동 하늘은 마나 잔광 탓에 평소보다 붉었다. 김하사가 백미러로 그 빛을 한 번 확인하고 속도를 더 냈다.
안전가옥은 용산구 오래된 다세대주택 반지하였다. 철문 두 개를 통과하자 좁은 거실에서 서버 랙 다섯 대가 돌아가고 있었다. 냉각 팬 소음이 방 전체를 채웠다.
정도윤이 테이블 위에 시계를 풀었다. 뒷판 각인 G1-Λ-7이 드러났다.
김하사가 서버에서 대숙청 파형 데이터를 띄웠다. 12년 전 게이트 1호점 Λ 구역의 마나 스파이크 그래프. 불규칙한 진폭, 47.3Hz 부근의 비정상적 공명 대역.
“똑같군.” 김하사가 손가락으로 화면을 짚었다. “나락 초기 파형에서 같은 주파수 대역 나왔다. 대숙청 때는 희생자 열네 명 중 여덟이 Λ 구역이었어.”
정도윤이 시계를 다시 집었다. “Λ가 구역 표시가 아니면.”
“뭐겠냐.”
“순서일 수도 있다.”
침묵. 서버 냉각 팬만 윙윙거렸다.
정도윤이 전생의 기억을 꺼냈다. 나락 붕괴 직전, 희생자 스물셋의 시체가 게이트 중심부에서 바깥쪽으로 방사형으로 누워 있었다. 최하위 등급자일수록 중앙에 가까웠다.
“던전 코어가 요구하는 건 가장 낮은 등급이다. 입장 인원 중 최하위 각성자 한 명을 받아들이고, 생존자는 역순으로 통과한다.”
“역순.”
“마지막으로 들어간 자가 코어에 가장 가까우니 먼저 죽는다.”
김하사가 낮게 휘파람을 불었다. “강민준은 아마 맨 앞으로 들어가겠지.”
“들어가게 만든다. 단독 클리어가 가능하다고 믿게 하면 선발대를 전부 밖에 두고 혼자 진입할 거다.”
“규칙을 모르니 최하위 각성자가 누군지도 모르고.”
“입장 순서를 자기 멋대로 바꾼 S급은 규칙 앞에선 최하위 등급보다 먼저 죽는다.”
김하사가 웃었다. 이빨 사이로 바람이 샜다. “E급 하나 없이 S급이 먼저 나가떨어지는 꼴을 보게 될 줄이야.”
정도윤이 시계를 손목에 채웠다. “문제는 박성렬이다. 전 병력을 상암동에 집결시키면 강민준이 단독 진입하기 전에 게이트가 닫힐 수도 있다.”
“닫히면?”
“나락은 문턱을 채워야 완전 개방된다. 충분한 희생자가 발생하기 전에는 핵심부가 열리지 않는다.”
김하사가 단말기를 조작했다. 상암동 집결 명령—아르고 전 병력, 오전 6시까지 동원.
“시간이 빠듯하군.”
“아니다. 강민준은 명령을 무시하고 먼저 들어간다. 단독 클리어 유혹을 참을 성격이 못 된다.”
“확신?”
“전생에서도 그랬다.” 정도윤의 목소리가 건조해졌다. “다만 그땐 E급 열두 명을 방패로 썼다.”
김하사의 눈빛이 굳었다. 손가락으로 테이블을 세 번 두드렸다.
“계획은 들었다. 실행은 내일 아침.”
“아니다. 지금 곧바로다.”
새벽 5시 47분. 아르고 길드 비상 이사회실.
스물일곱 좌석 중 스물이 찼다. 중앙 홀로그램 디스플레이에 상암동 게이트의 마나 파형이 실시간으로 떠올랐다. 붉은 선이 불규칙하게 진동했다.
박성렬이 상석에서 손을 들어 회의를 열었다. 아이스 아메리카노는 내려놓지 않았다.
“긴급 소집 이유는 하나입니다. 길드 내부의 기밀 유출 사태.”
간부들이 웅성였다. 왼쪽 벽면에 보안팀 로그가 표시됐다—오전 3시 12분, E급 분석관 정도윤, 외부 협력업체 김하사, 게이트 1호점 대숙청 기밀 파일 접근.
“두 사람은 현재 길드 제명 절차에 회부됩니다. 보안팀은 즉시 신병을 확보하십시오.”
문이 열렸다.
강민준이 들어왔다. 왼쪽 갈비뼈에 붕대를 감은 채였지만 걸음은 당당했다. 금빛 마나 아우라는 옅었으나 눈빛은 날카로웠다.
“제명이면 충분하지 않나.”
박성렬이 고개를 돌렸다. “길드장님.”
“관리청 재조사까지 겹친 마당에 E급 하나, 외부 협력업체 하나 처리하는 데 이사회 소집이라.” 강민준이 자리로 걸어가며 말했다. 호탕한 어조에 비웃음이 깔렸다. “신경 쓸 놈이 따로 있지 않아?”
“기밀 유출은 사안이 무겁습니다.”
“알아서 처리해. 나는 상암동 정리하고 온다.”
강민준이 손가락으로 붕대를 한 번 튕겼다. 금빛 입자가 흩어졌다.
“단독으로.”
회의실이 술렁였다. 박성렬의 안경에 형광등 불빛이 반사됐다.
“게이트 완전 개방 전 단독 진입은 이사회 승인이 필요합니다.”
“필요 없어. S급 권한이다.”
강민준이 돌아서며 문을 향해 걸어갔다. 어깨 너머로 말을 던졌다.
“그리고 그 두 놈, 제명 말고 상암동으로 보내. E급은 E급답게 쓰이게.”
박성렬이 안경을 천천히 닦았다. 손가락이 평소보다 빨랐다. 그가 단말기를 들었다.
“보안팀. 정도윤과 김하사를 이사회실로 즉시 소환하십시오.”
이사회실의 긴 타원형 테이블. 열여덟 명의 간부가 착석했다. 벽면 모니터에는 원격 참석자들의 얼굴이 띄워져 있고, 중앙 홀로그램은 꺼진 상태였다.
박성렬이 일어서서 태블릿을 내려다봤다. “정도윤 분석관. 징계안 제1호. 외부 미승인 정보를 작전에 적용한 혐의. 길드 규정 제27조에 따라 직위 해제 및 제명을 상정합니다.”
출입문 옆 보조 의자에 정도윤이 앉아 있었다. 김하사는 뒤 벽에 기대 섰다. “이의 있습니다.” 일어서지도 않고 건조하게 내뱉었다.
“이의 사유를 말씀해 주시죠.” 박성렬이 안경을 벗었다. 닦지 않았다.
“먼저 확인할 게 있습니다.” 정도윤이 조끼 주머니에서 작은 수첩을 꺼내 페이지를 넘겼다. “게이트 1호점 사건 보고서. 사망 처리된 각성자는 총 14명. 그중 3명의 기록이 조작된 보고서에서 누락됐습니다.” 누군가의 펜이 탁자에 떨어졌다.
박성렬의 손가락이 태블릿 가장자리를 눌렀다. “그건 이번 징계 안건과 무관합니다.”
“무관하지 않습니다.” 정도윤이 고개를 들었다. “그 보고서의 결재자는 당시 전략국장 박성렬 국장님이십니다. 제가 외부 정보를 사용했다면, 국장님은 조작된 공식 문서를 사용하신 겁니다. 어느 쪽이 더 중징계 사유죠.”
입회 진행관이 박성렬을 바라봤다. 간부들 사이로 낮은 웅성임이 번졌다. 박성렬이 안경을 다시 쓰며 반 톤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그 자료의 출처가 어디입니까.”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하지만 청문회에서 밝혀진 한세아 전 팀장의 데이터 칩과 동일한 경로입니다.” “한세아의 칩은 불법적으로 유출된——” “유출 경로는 모릅니다.” 정도윤이 말을 잘랐다. “내용만 확인했습니다.”
강민준이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대 팔짱을 꼈다. 금색 동공이 희미하게 빛났다. “재밌네. E급이 무슨 배짱으로.”
원격 접속자 하나가 입을 열었다. “국장님. 지금 이 회의의 목적은 게이트 작전 관련 징계로 알고 있습니다.
과거 사건의 증거 적절성 논의는——” 박성렬이 손을 들었다. “맞습니다. 본 안건은 오늘 상정. 제명 여부는 표결로——”
“잠깐.” 강민준이 팔짱을 푼 손가락으로 테이블을 두 번 두드렸다. 일어서지 않았다. “방금 그 보고서 얘기. 진짜냐.” 회의실 전체 표정을 훑으며 기다렸다. 박성렬의 입술이 열렸다 닫혔다.
정도윤이 느리게 수첩을 접었다. “게이트 나락을 혼자 클리어하고 싶지 않습니까.”
강민준의 눈썹이 올라갔다. “내 능력으로 충분하다. 여럿이 갈 필요는 없지.” “맞습니다. 규칙만 알면.”
실내 공기가 얼어붙었다. 박성렬의 손이 태블릿으로 향했다. 강민준은 시선을 옮기지 않았다. “규칙을 안다고.” “예.” “어디까지.”
정도윤이 손목시계의 유리를 가볍게 쓸었다. “문턱 조건. 해제 타이밍. 마지막까지.”
“듣자.” 강민준이 상체를 앞으로 기울였다. “네놈 말이 맞으면, 난 아르고를 세울 수 있는 기록을 만든다. S급 최초 단독 클리어. 틀리면.” 낮게 웃었다. “E급 한 명 사라지는 거야 별일 아니지.”
박성렬이 일어서려 하자 강민준이 손바닥 하나로 멈춰 세웠다. “형식은 나중에. 지금은 이 얘기다.”
진행관이 정도윤을 돌아봤다. 정도윤은 여전히 앉아 있었다. “길드장님.
게이트 나락의 규칙은 오직 저만 알고 있습니다. 단독 진입을 결정하시면, 그 직전에 전부 전달하겠습니다.” “지금 말하라는 거다.” “지금 말하면 이 회의록에 남습니다. 관리청도 열람 가능합니다.” 정도윤이 살짝 어깨를 기울였다. “독점 정보는 혼자 써야 가치가 있습니다.”
강민준이 무게를 재듯 천천히 고개를 두 번 끄덕였다. 박성렬의 태블릿 화면이 꺼졌다. 안경 너머 눈이 붉게 충혈된 채였다. “길드장님. 이 자는——” “됐다.”
강민준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190센티미터의 체구가 회의실을 압도했다. “표결은 보류.”
탁자 위로 다시 웅성임이 번졌다. 강민준이 정도윤을 향해 턱짓했다. 웃고 있었다.
“징계안은 이번이 마지막이다. 규칙이 틀리면 네놈은 그 자리에서 끝이다. 그게 내 조건이다.”
비상 이사회실 문이 열리고 간부들의 발소리가 복도로 쏟아졌다. 김하사가 벽에서 등을 떼며 말했다.
“전부 다 나왔다.”
“아니다.”
정도윤이 태블릿을 꺼냈다. 박성렬의 암호화 채널이 아직 살아 있었다. 로비로 향하는 발소리에 맞춰 메시지가 떴다.
‘회의 종료. 관리청 견제 심각. 복귀 시점 조율 필요.’
3초 뒤, 강민준의 음성 변환 답장.
‘들어와 있다.’
김하사가 턱을 긁었다.
“저 새끼, 게이트 안에서도 바깥 정치 계산 중이네.”
“계산할 여유가 있다고 착각하는 거다.”
정도윤이 태블릿을 접었다. 복도 끝에서 엘리베이터가 열리는 소리.
“가자.”
로비.
벽면 스크린에 상암동 현장 데이터가 떠올랐다. 마나 파형이 붉은 영역에서 떨리고 있었다. 출입 게이트 저편으로 박성렬이 내려왔다. 태블릿을 든 손이 떨리고 있었다.
그때 로비의 모든 스크린과 모니터가 동시에 꺼졌다. 2초의 정적. 화면이 다시 켜지고 강민준의 얼굴이 떴다. 어두운 게이트 경계면 내부. 왼쪽 광대뼈 흉터가 번들거렸다.
“들리나.”
로비 스피커로 목소리가 울리자 박성렬의 걸음이 멈췄다.
“아르고 전 병력에 하달한다. 상암동 게이트 나락은 내가 단독으로 클리어한다. 어떤 지원 병력도 경계면 안으로 들이지 마라.”
박성렬이 스크린을 향해 걸어갔다.
“길드장님, 그건 무모한——”
“박 국장.”
강민준의 낮은 톤이 로비를 내리눌렀다.
“자네가 방금 회의에서 관리청한테 얼마나 휘둘렸는지 내가 다 듣고 있었다.”
박성렬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자네 교범대로면 이 게이트는 열두 명 더 넣어야 깨진다. 하지만 이번엔 내 방식으로 간다. 관리청이 입 털기 전에 나락 코어를 내 손으로 부순다. 그게 가장 깔끔한 해결책이다.”
간부들 사이에서 웅성거림이 일었다.
“전략보좌는 누구십니까.”
강민준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정도윤. 그 E급 분석관.”
웅성거림이 멎었다.
“게이트 구조 분석. 딱 그 놈이 필요하다. 실전은 내가 한다.”
박성렬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셨다.
“길드장님, 그 작자는 한세아 퇴출된——”
“한세아는 이미 해임됐다. 자네가 주도한 일 아닌가. 그럼 이제 그 라인의 인력은 내가 재배치한다. 문제 있나.”
박성렬이 대답하지 못했다. 주먹을 꽉 쥔 손등에 핏줄이 돋았다.
“72시간이다. 그 안에 나락을 닫는다. 방해하지 마라.”
화면이 꺼졌다. 김하사가 낮게 휘파람을 불었다.
“저 미친 새끼. 완전히 꽂혔네.”
정도윤은 손목시계를 만지작거렸다. 전 병력 대기 명령. 단독 클리어 선언.
전략보좌 임명. 함정의 세 가지 조건이 모두 충족됐다. 박성렬이 돌아서며 정도윤을 응시했다. 살의가 담긴 눈빛이었지만 입을 열지 못하고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밤. 김하사의 안전가옥. 방음 벽면에 모니터 여섯 대가 켜져 있었다. 김하사가 문을 잠그고 냉장고에서 맥주 두 캔을 꺼냈다.
“축하한다. 네놈, 길드 전략보좌 됐다.”
“명목상이다.”
정도윤이 모니터 앞에 앉아 한세아에게서 받은 칩의 데이터와 김하사의 대숙청 파일을 나란히 띄웠다.
“강민준은 72시간 안에 게이트 문을 연다. 완전 개방 시점에 마나 밀도가 임계점을 넘으면——”
“규칙이 발동한다.”
김하사가 맥주를 테이블에 내려놓으며 물었다.
“그 규칙이라는 게 정확히 뭐냐. S급 하나 통째로 삼킬 근거가 있긴 한 거냐.”
정도윤이 칩의 데이터 파일을 열었다. 나락 게이트 마나 파형의 상승 곡선과 대숙청 사건 직전의 파형을 겹쳐 그린 그래프였다. 기울기, 중간 진폭, 불규칙 스파이크까지 두 그래프가 포개졌다.
“게이트는 진화한다. 하지만 이 게이트만큼은 12년 전과 똑같은 패턴으로 혈액을 요구한다.”
김하사가 그래프를 들여다봤다. 맥주 캔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미끼 개방 때 뿌린 유인파. 저게 희생자 모으는 단계였다면.”
“완전 개방은 이미 모인 희생자를 정리하는 단계다. 나락은 내부에 들어온 마나 총량이 일정 수준을 넘으면, 가장 높은 마나 개체부터 역제압한다.”
김하사가 숨을 들이쉬었다.
“가장 높은 개체. 그게 지금——”
“강민준이다.”
정도윤이 시계를 풀어 천천히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게이트는 이미 강민준의 마나 파형을 기억했다. 예비 개방 때 신성력 70%를 봉쇄당한 게 그 증거다. 이번에 완전 개방되면 규칙이 강민준을 먼저 집어삼킬 것이다.”
정도윤이 시계 옆에 데이터칩을 두었다. 모니터 위로 김하사의 서버에서 복원한 생존자 명단이 스크롤됐다. 람다 구역. G1-Λ-7. 선배의 이름이 목록 아래쪽에 있었다.
“박성렬은 어떡하냐.”
“강민준이 나락에서 무너지면, 관리청 재조사는 자동으로 박성렬에게 집중된다. 증거는 이미 충분하다. 우리가 직접 손대지 않아도 된다.”
김하사가 맥주를 한 번에 삼키고 빈 캔을 구겨 쓰레기통에 던졌다.
“좋다. 그림은 그려졌네.”
정도윤이 시계를 내려다봤다. 바늘이 11시 47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G1-Λ-7 각인이 지하실 형광등 아래서 희미하게 빛났다. 그가 중얼거렸다.
“이제 게이트가 아니라, 그들의 무덤이 열린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