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verStory

게이트: 리셋

8화

오전 10시. 아르고 길드 중앙 전략 회의실.

길쭉한 타원형 테이블을 따라 열일곱 명이 앉았다. 길드 임원들과 중립파 간부들. 탁자 위에는 태블릿이 놓였고, 감사 자료는 전날 밤 이미 배포됐다. 공기의 밀도가 달랐다.

박성렬이 정면에서 일어섰다. 손에 작은 리모컨.

“모두 자료는 확인하셨을 겁니다. 오늘 청문회는 한세아 전략팀장의 직무 수행 적격성을 검증하는 자리입니다.”

벽면 스크린이 켜졌다. 첫 슬라이드.

『E급 각성자 KR-E-2241. 기동 타입: 정찰. 배속 일자: 12년 전. 상태: 실종 후 사망 처리.』

한세아의 손이 테이블 아래로 내려갔다. 만년필을 쥐지 않았다.

“KR-E-2241. 이 식별 번호를 아십니까.”

박성렬의 목소리는 부드러웠다.

한세아가 고개를 들었다.

“압니다.”

“친오빠 한정우 씨의 식별 번호입니다.”

회의실 구석에서 누군가 태블릿을 내려놓았다. 작은 소리.

박성렬이 리모컨을 눌렀다. 다음 슬라이드. 만년필 등록 정보. 구매 기록. 한세아의 서명.

“이 만년필의 각인 번호가 KR-E-2241입니다. 부길드장께서 게이트 작전마다 휴대하는 물품이죠.”

한 박자.

“전략팀장의 모든 판단은 이 번호와 함께합니다. 지난 그림자 미궁 작전도, 그 전의 C급 게이트 분석도.”

한세아의 어깨가 1센티미터 올라갔다.

“사적 복수심을 지휘 체계에 주입하셨습니다.”

박성렬이 안경을 벗었다. 닦지 않았다. 접어서 주머니에 넣었다.

“12년 전 게이트 1호점 작전에서 실종된 E급. 그 작전의 지휘관은 당시 전략국장. 현 전략부 국장입니다. 부길드장께서 최근 이 기록에 접근한 로그도 확보했습니다.”

중립파 간부 하나가 헛기침을 했다. 다른 이는 교차한 팔을 풀었다.

한세아가 일어섰다.

“로그는 인정합니다. 결론은 부정합니다.”

태블릿을 들어 올렸다. 화면에 작전 데이터 로그.

“그림자 미궁 작전. 박 국장의 정면 돌파 교본을 적용했다면 사상자 6명 이상이 예측됩니다. 제 판단은 변이 징후 인지 3분 50초 만에 철수 경로를 변경한 것입니다. 전원 생존의 근거는 데이터에—”

“그 데이터를 어디서 얻으셨습니까.”

박성렬의 질문은 부드러웠다. 탁자 반대편에서 누군가 고개를 들었다.

한세아가 대답을 삼켰다. 0.3초.

“내부 분석입니다.”

“분석 팀장이 누굽니까.”

침묵.

박성렬이 리모컨을 다시 눌렀다. 세 번째 슬라이드. 익명의 메일 헤더 일부. 날짜. 제목: 『그림자 미궁 변이 전조 보고』.

“이 정보는 공식 채널에 없던 것입니다. 외부에서 유입됐고, 부길드장은 그 출처를 밝히지 않은 채 작전에 반영했습니다.”

수신자 란에 한세아의 이메일 주소.

“규정 제27조. 외부 미승인 정보의 작전 적용은 직위 해제 사유입니다.”

탁자 저쪽에서 중립파 간부가 입을 열었다.

“출처를 밝히면 절차 문제로 넘어갈 수도 있지 않나.”

한세아의 손가락이 태블릿 가장자리를 눌렀다. 손끝이 하얘졌다.

“밝힐 수 없습니다.”

박성렬이 입꼬리를 올렸다. 표정이 아니라 각도였다.

“그렇다면 더 논의할 게 없습니다.”

리모컨의 붉은 버튼. 마지막 슬라이드.

『직위 해제 발의. 규정 제27조에 근거. 표결 안건.』

“찬반 투표를 진행합니다.”

회의실 전체가 멎었다. 한세아의 시선이 중립파를 훑었다. 세 명이 시선을 피했다. 한 명은 고개를 저었다.

문이 열렸다.

강민준이었다.

검은색 맞춤 슈트. 금빛 마나 아우라가 어깨 주변에서 희미하게 일렁였다. 그가 문틀에 손을 얹은 채 웃었다.

“재밌는 시간이군.”

회의실의 모든 고개가 돌아갔다. 박성렬의 손에서 마우스 움직임이 멎었다.

아르고 길드 중앙 전략 회의실. 오전 11시 2분.

장내는 이미 반쯤 무덤이었다. 중립파 간부들은 태블릿을 내려놓은 채 시선을 탁자 모서리에 박았다. 한세아는 선 채로 만년필을 쥐고 있었다. 뚜껑은 닫혀 있었다.

박성렬이 안경을 벗어 닦으며 입을 열었다.

“부길드장의 사적 감정 개입이 입증된 이상, 전략 판단의 공정성을 더는 신뢰할 수 없습니다. 길드 규정 제27조에 따라——”

문이 열렸다.

무거운 목재 문짝이 벽에 닿기 전에 공기가 먼저 바뀌었다. 금빛 마나 아우라가 회의실 전체를 한 차례 쓸었다. 탁자 위 서류 모서리들이 일제히 들썩였다.

강민준이 걸어 들어왔다.

검은색 맞춤 슈트. 왼쪽 가슴의 아르고 황금 배지가 희미하게 발광하고 있었다. 임원석까지 일곱 걸음.

구두 소리가 하나씩 침묵을 찍었다. 착석. 그는 팔걸이에 팔꿈치를 올리고 턱을 괴었다.

“계속하시지, 국장.”

박성렬이 목을 가다듬었다.

“제27조에 따른 직위 해제 발의를 공식화합니다.”

회의실 구석의 계측 장비 패널이 한 번 깜빡였다. 입회 진행관이 태블릿을 들었다.

“재적 임원 12인 중 7인의 동의로——”

“거기에 내 이름 넣어.”

강민준이 손가락 하나로 탁자를 톡 쳤다. 소리는 작았다. 파장은 컸다. 간부 두 명의 어깨가 동시에 굳었다.

한세아가 처음으로 고개를 들었다. 시선은 강민준의 금빛 동공을 향했다.

“길드장도 아닌 S급 각성자 한 사람의 지지로 해임을 가결할 셈이요.”

“아니.”

강민준이 웃었다. 호탕했다. 허공의 마나 아우라가 2차례 진동했다.

“네가 만든 구멍을 메우는 거지.”

그가 상체를 앞으로 기울였다.

“전략팀장. 너는 똑똑해. 머리 하나는 인정한다고.”

계측 장비 패널이 다시 깜빡였다. 이번엔 빨랐다. 주황색 표시등이 3초 간격으로 점멸했다.

“근데 그 머리가 길드보다 네 오빠를 먼저 생각해.”

한세아의 오른손이 만년필을 감싸쥐었다. 손끝이 희었다.

강민준이 말을 이었다.

“E급 각성자 하나. 12년 전 실종자. 그거 하나로 전략 판단이 흔들리는 팀장이라면——”

계측 장비에서 경고음이 울렸다.

짧았다. 길지 않았다. 하지만 회의실 전체가 들었다.

패널 화면에 붉은 로그가 한 줄 떴다. 『마나 파형 이상: 47.3Hz 대역 인위적 증폭 감지. 측정 한계 초과.』 박성렬의 시선이 패널을 스쳤다. 한 박자 늦게 다시 강민준에게 돌아왔다.

강민준은 패널을 보지 않았다.

“——길드 전체의 리스크다.”

진행관이 패널을 내려다보다가 고개를 들었다.

“계측 오류입니다. 재부팅 중.”

강민준이 손바닥을 탁자에 내려놓았다. 마나 아우라가 수축했다. 패널 화면이 정상으로 돌아왔다.

“발의 가결.”

박성렬의 목소리가 이전보다 반 톤 높았다. 그는 안경을 썼다.

“찬성 8인. 부길드장 한세아의 직위 해제가 가결되었습니다.”

한세아가 만년필에서 손을 떼었다.

탁자 위에 수평으로 놓았다. 금색 클립이 천장 조명에 반사됐다.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맨 끝자리 방청석에서 정도윤이 시계를 만지며 일어섰다. 소리가 나지 않았다.

진행관이 태블릿에 마지막 줄을 입력했다.

『직위 해제: 2017년 1월 26일 11:07. 계측 로그 첨부.』

한세아가 몸을 돌렸다. 발걸음은 정확히 문을 향했다.

지문을 통로로 밀어낸 손이 있었다.

한세아였다. 경비 두 명이 어깨 양옆에 붙어 그녀를 에스코트하고 있었다. 왼쪽 경비가 팔꿈치를 잡으려 하자 한세아가 반 걸음 비틀며 정도윤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오른손이 스쳤다. 차가운 금속이 손바닥 안으로 밀려 들어왔다.

데이터 칩이었다.

“내부 감사 파일에는 없는 원본 로그.”

한세아의 목소리는 숨결 한 줌만큼 낮았다. 그녀의 왼손은 여전히 만년필을 쥐고 있었다.

정도윤은 손가락을 접었다. 칩이 주먹 안으로 말려들었다.

“저기, 뭘 건네는 겁니까.”

박성렬의 수행 비서가 통로 저쪽에서 다가왔다. 검은 양복. 오른손이 무전기를 더듬고 있었다.

한세아는 이미 몸을 돌렸다. 경비들이 그녀를 감싸며 회의실 후문으로 걸음을 옮겼다. 구두 굽 소리가 세 번 울리고 멎었다. 문이 닫혔다.

수행 비서가 정도윤 앞에 섰다.

“손에 쥔 것 보여주십시오.”

정도윤이 오른손을 폈다. 빈 손바닥. 왼손은 바지 주머니에 들어가 있었다. 칩은 이미 허벅지 옆 천 안쪽으로 밀어 넣은 뒤였다.

“아무것도 없습니다.”

수행 비서가 눈을 가늘게 떴다. 한 박자 정도윤을 노려보고는 무전기를 들었다.

“국장님. 물건은 확인 못 했습니다. E급 하나가 통로에서 접촉.”

무전기 너머로 박성렬의 목소리가 작게 새어 나왔다.

“내보내. 방청석에서 퇴장 조치.”

수행 비서가 턱짓했다. 청문회장 출입구 쪽에서 보안요원 한 명이 걸어왔다. 정도윤은 말없이 몸을 돌렸다. 주머니 속 칩의 모서리가 손가락 마디에 닿았다.

통로를 빠져나가며 뒤를 돌아봤다. 회의실 유리벽 너머로 강민준이 의자에 기대 앉아 휴대폰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한세아가 앉았던 자리는 비어 있었다.

오후 3시. 아르고 길드 로비.

로비는 한산했다. 접수대 앞 대기석에 두 명, 안내 모니터 아래 서 있는 방문객 한 명. 정도윤은 중앙 기둥 옆 벤치에 앉았다. 오른손으로 바지 주머니를 눌렀다. 칩은 그대로였다.

휴대폰이 진동했다. 암호화 메시지. 발신자는 김하사.

『게시판 떴다. 니네 길드 S급 그 인간, 비공식 재검증 요청. 내부망에 업로드. 』

정도윤이 길드 인트라넷에 접속했다. 사내 게시판 상단에 붉은 태그의 공지가 떠 있었다. 『강민준 S급 마나 파형 비공식 재검증 요청 — 훈련장 측정 로그 기반』.

작성자는 익명 처리. 조회수 300을 넘어가고 있었다. 댓글은 닫혀 있었다.

휴대폰이 다시 울렸다. 두 번째 메시지.

『그리고 하나 더. 나락 관측 센터에서 전조 포착. 기존 S급 데이터랑 안 맞는대. 니 쪽 로비 모니터도 곧 뜰 거다. 』

정도윤이 고개를 들었다. 로비 중앙의 대형 모니터가 깜빡였다. 방송 화면에서 길드 비상 관제 센터의 붉은 점멸등이 보였다. 자막이 올라왔다.

[서울 북부 게이트 낙하 패턴 불안정 · 기존 S급 데이터와 불일치]

이어서 음성 안내가 흘러나왔다.

“관측 데이터 센터 긴급 통보. S급 전조 신호 포착. 현재 등급 재검증 절차를 진행 중이며, 각 팀은 대기 바랍니다.”

로비에 있던 사람들이 모니터를 올려다봤다. 접수대 직원이 전화기를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누군가 작게 중얼거렸다. “S급 전조라고?”

정도윤은 벤치에서 일어나 기둥 뒤로 물러섰다. 왼손으로 휴대폰을 쥐고 메시지를 다시 읽었다. 오른손은 주머니 속 칩을 만지작거렸다.

칩 데이터를 확인할 단말이 필요했다. 로비 구석의 공용 태블릿이 눈에 들어왔다. 보안 로그가 남지만, 지금은 상관없었다. 걸음을 옮겼다.

태블릿을 켜고 칩을 연결 포트에 꽂았다. 암호화된 폴더가 하나 떴다. 파일명은 『G1-사후처리원본로그미삭제분』과 『실종자교차검증3인』. 한세아가 청문회에서 읽지 못한 자료였다.

열었다.

첫 번째 파일. 게이트 1호점 작전 이후 박성렬이 결재한 보고서 원본. 하단에 ‘사망 처리자: 14명’이라 적힌 줄 옆으로 붉은 태그가 붙어 있었다.

한세아가 추가한 메모였다. 『공식 보고서에는 11명. 3명 누락 — KR-E-2239, KR-E-2240, KR-E-2241.』

정도윤이 손목시계를 내려다봤다. G1-Λ-7.

두 번째 파일을 열었다. 실종자 교차 검증 데이터. 세 명의 E급 각성자 이름 옆에 이중 파형 로그가 첨부되어 있었다. 측정 데이터의 출처는 서울 북부 비공인 연구소. 마나 증폭 실험의 피험자 코드가 붙어 있었다.

연구소 코드는 6자리 영숫자. 앞 세 자리는 게시판에 올라온 강민준의 재검증 요청서에 찍힌 검증 기관 코드와 일치했다. 뒤 세 자리는 박성렬의 결재 문서 하단에 찍힌 승인 일련번호와 동일했다.

정도윤이 숨을 들이켰다.

대숙청. 실종자. 마나 증폭 실험.

강민준의 불안정 파형. 박성렬의 조작 보고서. 모든 선이 하나의 코드로 수렴하고 있었다.

로비 모니터에서 붉은 자막이 점멸했다. 경보음이 길게 한 번 울렸다. 사이렌은 아니었다. 그러나 로비 전체를 멈추기엔 충분한 소리였다.

정도윤은 태블릿에서 칩을 뽑아 주머니에 넣었다. 휴대폰 화면에 한세아의 연락처가 떠 있었다. 통화 불가. 길드 인트라넷 계정도 정지 상태였다. 더 이상 그녀에게 접근할 수 없었다.

모니터 아래 자막이 갱신되었다.

[경보: 나락 관측 구역 마나 파형 급변 · 2단계 대기 전환 공지 임박]

정도윤이 주먹을 쥐었다. 칩이 손바닥 안에서 눌렸다. 전생의 기억 속 어둠이 포개졌다. 이번에는 달랐다.

아직 시작도 하지 않았다.

게이트: 리셋8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