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이트: 리셋
9화
새벽 3시. 오피스텔 창밖은 가로등 불빛만 깜빡였다.
정도윤은 노트북 화면 세 개를 띄워놨다. 길드 관측망 실시간 데이터. 나락 게이트 북쪽 섹터에서 마력 밀도가 완만히 요동쳤다. 전조 신호가 2단계로 격상되자마자 파형이 가팔라졌다.
탁자 위에 한세아의 데이터 칩. 휴대폰을 집으려던 순간, 암호화 통신 알림이 떴다. 김하사다. 이어폰을 꽂았다.
“늦었네.”
김하사의 목소리엔 피로가 배어 있었다. 특유의 비꼬는 톤은 반쯤 죽었다.
“관측 데이터 봤나.”
“보는 중입니다.”
“로비에서 확인한 칩 말이다. 그거 안전한 곳에 있나.”
“손 닿는 곳에.”
정도윤이 칩을 집어 노트북 옆으로 옮겼다.
“한세아 팀장이 넘긴 겁니다. 내부 감사 파일엔 없는 원본 로그, 박성렬 국장 결재 보고서, 실종자 교차 검증 데이터까지.”
잠시 침묵. 김하사가 낮게 숨을 들이켰다.
“세 명짜리 그거.”
“예. 공식 보고서에서 사망 처리에서 누락된 E급 세 명.”
“KR-E-2239. 2240. 2241.”
김하사가 식별 번호를 정확히 짚었다. 정도윤은 마우스 쥔 손가락을 멈췄다.
“알고 있습니까.”
“내가 해독한 대숙청 파일에도 같은 번호가 떴다. 네 칩이 그 조작 보고서 원본이면, 내 데이터와 교차 검증이 가능해진다.”
“전체 기밀 파일. 보내십시오. 대숙청 건 전체 원본과 생존자 명단까지.”
“생존자?”
“박성렬이 죽었다고 기록한 사람 중에 살아남은 인원이 있을 가능성.”
김하사가 짧게 숨을 뱉었다.
“네가 거기까지 알다니.”
“추측입니다.”
“추측 치곤 너무 정확하네.”
대꾸하지 않았다. 키보드 소리. 김하사가 파일을 전송 중이다.
“암호화돼 있다. 복호 키는 네 시계랑 같은 방식.”
정도윤이 왼쪽 손목을 내려다봤다. 낡은 아날로그 시계. 선배의 유품. 뒷면에 G1-Λ-7.
“알겠습니다.”
“한세아는. 연락 안 되지.”
“인트라넷 정지 상태. 외부 통신도 차단된 것 같습니다.”
“강민준이 길드 전권 잡은 마당에 당분간 접근은 불가능하다. 살아남으려면 그 칩, 절대 길드 서버에 물리지 마라.”
“이미 그럴 생각입니다.”
전송 완료 알림. 암호화된 파일 하나. 용량은 작았다.
“명단 확인되면 연락 주십시오.”
“기다려라.”
통화가 끊겼다.
정도윤은 칩을 노트북에 연결했다. 복호 키 입력. 폴더가 열렸다.
김하사가 보낸 기밀 파일은 『G1-대숙청원본문서전문』. 열자 첫 페이지, 사망 처리자 명단. 14명.
박성렬의 조작 보고서에서 사라진 세 식별 번호가 거기 멈춰 있었다. KR-E-2239. KR-E-2240.
KR-E-2241. 생존자 컬럼이 따로 있었다. 세 이름 옆에 작은 별표.
‘실험 이관’이라는 짧은 주석과 함께 비공인 연구소 코드가 적혔다. 한세아의 칩 데이터와 같은 코드.
정도윤이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마우스 커서가 흔들렸다.
노트북 다른 창. 나락 게이트 관측 데이터. 마력 밀도 그래프가 서서히 진폭을 키웠다. 전생에서 본 패턴과 닮았다. 게이트 개방 직전, 내부 압력이 외부로 새어 나오는 예비 개방 단계.
눈을 감았다. 전생의 나락. 어둠 속에서 게이트가 열렸다.
첫 희생자는 항상 E급. 벽이 닫히고 바닥이 갈라졌다. 스무 명 가까이 쓸려 들어갔다.
생환자는 다섯. 그때는 몰랐다. 희생자 수에 규칙이 있다는 걸.
눈을 떴다. 다시 명단을 보았다. 전생에서 죽은 사람들 얼굴이 떠올랐다. 이름은 기억나지 않는다. 하지만 그들 중 상당수가 사전에 ‘실험’ 명목으로 분류된 E급이었다는 건, 지금은 알 수 있었다.
박성렬의 조작은 단순한 숫자 세탁이 아니었다. 게이트 규칙을 은폐하기 위한 사전 작업. 희생자 조건을 만족시키는 키 역할을 할 E급을 미리 분류해 두고, 사라져도 추적할 수 없게 기록을 지웠다.
정도윤이 시계를 만지작거렸다. G1-Λ-7. 람다 섹터. 일곱 번째 구역. 전원 미귀환.
하지만 김하사의 명단에는 생존자가 있었다. KR-E-2241. 이관 기록이 남은 마지막 번호.
시계 각인과 같은 패턴. 수치를 확인할 순 없었다. G1은 게이트 1호점.
Λ는 구역 코드. 7은 배치 순번이나 구획 번호. 생존자 명단의 마지막 번호와 시계 각인은 같은 분류 체계를 따랐다. 선배는 그 구역에서 죽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주먹을 쥐었다. 식은땀이 손바닥에 배었다.
모니터에 펼쳐진 데이터. 대숙청 명단. 나락 전조 파형.
박성렬의 조작 보고서. 셋이 한 선으로 이어졌다. 박성렬이 은폐하려 했던 건 12년 전 사고의 진실만이 아니었다.
게이트가 요구하는 규칙. 희생자 수와 등급. 알면서도 숨겼다.
나락 게이트에 같은 패턴을 적용할 수 있다면, 그 규칙을 함정으로 뒤집을 수 있었다.
정도윤은 노트북을 닫지 않았다. 빈 문서 하나를 열었다. 제목 없음. 커서가 깜빡였다.
명단 입력 시작. 전생의 기억 속 나락 희생자들. 확실하지 않은 이름은 비워 뒀다.
식별 번호를 추정할 수 있는 건 적었다. 김하사의 생존자 명단과 겹치는 패턴만 추렸다. 한 시간 가까이 자판을 두드렸다. 완성된 건 완전한 명단이 아니었다.
하지만 가설은 섰다. 박성렬이 삭제한 세 명은 나락 게이트의 첫 희생 조건을 충족시키기 위해 미리 지정된 키. 게이트는 특정 수의 희생자를 요구한다.
등급이 낮을수록 먼저 희생된다. 그 규칙을 알면, 누가 먼저 죽을지 예측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예측을 뒤집을 수도 있다.
저장 버튼은 누르지 않았다. 문서를 암호화된 외장 메모리에 담았다. 한세아의 칩은 노트북에서 분리해 따로 주머니에 넣었다.
휴대폰을 들어 김하사에게 짧은 메시지를 보냈다. 「명단 확인. 생존자 중 2241이 람다 섹터 7구역 배치 기록 보유. 당신 쪽 데이터와 교차 검증 요청.」 답장은 없었다.
새벽 4시가 다가왔다. 창밖 가로등이 한 번 깜빡이고 다시 켜졌다. 노트북 화면에서 나락 게이트의 마력 밀도 곡선이 급등했다가 진정됐다.
예비 개방의 전형적 패턴. 전생에선 이 신호를 무시했다. 아무도 몰랐다. 이번엔 다르다.
정도윤은 시계를 풀어 탁자 위에 올렸다. 유리판 너머로 초침이 움직였다. 뒷면 각인이 천장 조명에 반사됐다. G1-Λ-7. 죽은 줄 알았던 선배의 코드가 이제 게이트의 규칙과 같은 언어로 읽혔다.
그리고 그 규칙을 알면, S급도 함정에 빠뜨릴 수 있다.
새벽 4시 15분. 상암동 하늘에 금이 갔다.
균열은 빛나는 틈새로 번졌다. 너비 12미터. 검푸른 빛이 소용돌이쳤다. 바람 한 점 없는데 가로등이 일제히 깜빡였다.
아르고 길드 선발대 열두 명이 균열 앞 30미터 지점에 섰다.
강민준이 앞장섰다. 검은색 맞춤 전투복에 금색 라인이 들어갔다. 어깨에서 희미한 금빛 아우라가 번졌다. 균열을 올려다보며 입꼬리를 올렸다.
“예비 개방이 이 정도라면, 본판은 볼만하겠군.”
오른손을 뻗어 신성력을 분출. 금빛 광선이 균열 중앙을 직격했다.
균열이 광선을 빨아들였다. 찰나의 정적. 0.5초.
균열이 역류했다.
검푸른 파동이 터져 나와 선발대 전원을 쓸었다. 강민준의 금빛 아우라가 점멸하더니 70퍼센트가량 소멸.
“뭐야——”
외침이 끊겼다.
전방 10미터 지점의 하급 각성사 셋이 동시에 쓰러졌다. 마나 역류가 폐부를 관통했다. 전투복 섬유가 안쪽에서 탔다. 현장 측정기에서 세 사람의 마나 파형이 일제히 평탄선을 그렸다.
11분 뒤.
강민준은 왼쪽 갈비뼈를 감싸 쥔 채 무릎을 꿇었다. 금빛 마나가 새어 나왔다 흩어지길 반복. 네 명이 바닥에 누워 있었다. 중상. 호흡은 있지만 마나 핵이 불안정하게 떨렸다.
“길드장님!”
후방 대기하던 관측 요원이 달려왔다. 휴대용 측정기 화면을 들이밀었다.
“게이트 입구가 닫히지 않습니다! 완전 개방까지 72시간 카운트다운 돌입. 퇴로가——”
관측 요원의 말이 멈췄다.
균열 뒤편에서 푸른 빛의 격벽이 솟아올랐다. 너비 50미터, 높이 30미터. 선발대의 후방을 완전히 차단했다. 경계면이 닫혔다.
강민준이 이를 악물었다. 금빛 동공이 불규칙하게 깜빡였다. 주먹을 바닥에 내리꽂자 아스팔트가 반경 3미터 패였다.
“박성렬. 정보 미비다. 이딴 예비 규칙 하나 못 빼오고.”
생존자 여덟 명이 어둠 속에서 서로를 바라봤다. 넷은 일어서지 못했다. 게이트 내부에서 낮은 진동음이 울리기 시작했다.
새벽 4시 30분.
김하사의 차량이 한강로를 달렸다.
정도윤이 조수석에서 태블릿을 내려다봤다. 상암동 마나 파형 그래프. 4시 15분, 급격한 스파이크. 몇 초 뒤 두 번째 스파이크. 세 번째는 더 컸다.
“세 명. 선발대 첫 마나 역류에 날아갔다. 생존은 여덟.”
태블릿을 김하사 쪽으로 기울였다.
“강민준 마나 파형 70퍼센트 봉쇄. 72시간 후 게이트 완전 개방. 그 전에 퇴로는 없다.”
김하사가 핸들을 틀어 올림픽대로 쪽으로 빠졌다.
“열두 명이면…… 이제 여덟.”
정도윤이 창밖을 바라봤다. 전생의 기억이 올라왔다. 나락 게이트.
입구가 열리자마자 1차 희생자 열셋. 그다음, 게이트가 더 많은 인원을 끌어들이기 위해 구조 신호를 흩뿌렸다. 살아서 사냥하는 것처럼.
“나락은 문턱이 있다. 희생자 수가 일정 기준을 넘어야 방어 규칙이 해제된다. 지금 여덟. 모자라다. 그러니까 게이트가——”
“더 불러 모은다?”
김하사가 백미러로 그를 봤다. 눈이 좁아졌다.
“미끼다. 지금쯤 상암동 반경 2킬로 안 각성자는 전부 구조 가능 신호를 받고 있을 거다. 마나 유인파. 그걸 듣는 놈들은 현장으로 몰려든다.”
“그 안에 강민준이 있다.”
“박성렬도 따라간다. 길드장이 갇혔는데 가만있을 수 없으니까. 길드 전 병력이 거기 집결한다. 그 자리에서 둘을 동시에 묻는다. 게이트 규칙을 이용해서.”
김하사가 잠시 침묵했다. 대시보드 단말기에서 상암동 마나 파형이 다시 급등했다. 그래프가 붉은 영역으로 넘어갔다.
“네놈, 그게 어디서 굴러먹던 작전이냐.”
정도윤이 손목시계를 내려다봤다. G1-Λ-7.
“이번이 처음이다.”
김하사가 핸들을 꺾어 유턴했다. 방향은 아르고 길드 본사.
“네 말대로 비상 이사회실이면, 지금쯤 박성렬이 간부들을 긁어모으고 있을 거다.”
“회의에는 안 들어간다. 로비까지만.”
정도윤이 태블릿을 주머니에 밀어 넣었다.
“박성렬이 어떤 명령을 내리는지 들어야 한다. 그 명령이 나오는 순간, 우리도 움직인다.”
김하사가 낮게 웃었다.
“죽을 판에 뛰어드는 놈 따라가는 것도 익숙하다.”
차량이 속도를 높였다.
새벽 5시.
아르고 길드 비상 이사회실.
스물일곱 좌석 중 열여덟이 찼다. 나머지는 홀로그램 원격 참석자들. 박성렬이 상석에서 일어섰다. 손에 쥔 아이스 아메리카노에 빨대는 꽂지 않았다.
“여러분. 상암동에서 S급 게이트 나락의 예비 개방이 포착되었습니다. 길드장님께서 선제 진입을 지시하셨고, 현재 1차 마나 역류로 인한 피해가 보고되었습니다.”
좌석 사이로 웅성거림이 번졌다.
박성렬이 리모컨을 들자 중앙 홀로그램에 상암동 전술 지도가 떠올랐다. 게이트 입구 주변으로 붉은 원이 그려졌다.
“게이트 규칙에 대한 사전 정보가 불충분했습니다. 이는 전략팀의—— 전임 전략팀장의 정보 관리 소홀로 인한 것입니다. 그러나 현재 위기 수습이 급선무. 길드 전 병력을 상암동으로——”
“잠시만요.”
홀로그램 오른쪽 하단에서 목소리가 났다. 각성자 관리청 수사관 좌석. 이름표는 ‘수사1팀 김정환’. 중년 남성, 짧은 흰머리와 무채색 눈동자.
“길드의 현장 통제권에 이의를 제기합니다.”
박성렬의 손이 리모컨 위에서 멈췄다.
“무슨 말씀이신지.”
“관리청은 오늘부로 게이트 1호점 대숙청 사건에 대한 공식 재조사를 개시합니다. 사건 번호 G1-Λ-12-가. 12년 전, 아르고 길드 주관 게이트 작전에서 사망한 열네 명의 각성자에 대한 은폐 의혹입니다.”
김정환이 태블릿을 들어 올렸다. 화면에 붉은 글씨로 ‘재조사 개시 통보서’.
“해당 사건 결재 서류에는 당시 전략국장 박성렬 님의 승인 일련번호가——”
“그건 과거에 종결된 건입니다!”
박성렬이 손을 내저었다. 평소보다 반 박자 빨랐다.
“지금 상암동에서는 길드장님을 포함한 선발대 여덟 명이 고립되어——”
“종결 여부는 이번 재조사에서 판단할 사안입니다. 그리고 길드장님의 고립 상황이 오히려 대숙청 사건과 동일한 마나 파동 패턴을 보이는 게이트에서 반복된 피해라면, 길드의 현장 통제권을 인정하기 어렵습니다.”
회의실이 조용해졌다.
박성렬이 안경을 벗었다. 천천히 닦는 동작이 평소보다 세 배 빨랐다.
“……알겠습니다. 관리청 입장은 확인했습니다. 그러나 현장 지휘권은 길드에 있습니다.”
“법으로 보장된 현장 지휘권은 사고 은폐가 확인되지 않았을 때 유효합니다. 재조사 결과가 나올 때까지 아르고 길드는 모든 게이트 작전에 대해 관리청의 실시간 감독을 받게 됩니다.”
박성렬이 안경을 다시 썼다. 손가락이 미세하게 떨렸다.
“회의를 종료하겠습니다.”
리모컨을 내려놓자 홀로그램이 꺼졌다. 간부들이 서로를 바라봤다.
박성렬은 이미 회의실 밖으로 나갔다. 왼손에 개인 태블릿을 쥐었다. 화면에 강민준과의 암호화 통신 채널이 활성화됐다.
‘상암동 진입을 서둘러 마무리하라.’
채팅창에 입력했다.
‘길드 전 병력 집결 중. 관리청 움직임 있음. 빨리.’
태블릿을 접고 로비로 이어지는 복도를 향해 빠르게 걸었다.
비상 이사회실에서 15미터 떨어진 복도.
정도윤이 귀를 떼고 벽에서 물러섰다. 김하사가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뭐라 했냐.”
“관리청이 대숙청 재조사 공식 통보. 박성렬 회의 강제 종료. 지금 강민준한테 상암동 마무리하라고 압박 중이다.”
“회의 끝났는데 우린 어쩌지.”
“기다린다. 박성렬이 로비로 내려온다. 전 병력 집결 명령 떨어지면 그때 움직인다.”
김하사가 벽에 기대 서서 단말기를 꺼냈다. 상암동 데이터를 갱신하자 붉은 경고창이 떠올랐다. ‘마나 역류 재발. 유인파 방사 반경 2km 확장.’
정도윤이 화면을 바라봤다.
“시작됐다.”
미끼가 뿌려진 것이다. 게이트가 더 많은 피를 부르고 있었다. 복도 저편에서 박성렬의 구두 소리가 울렸다. 긴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