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T는 사랑을 싣고
1화
오후 네 시, 유나이티드애드 대회의실.
프로젝터 불빛이 스크린을 때렸다. 첫 번째 슬라이드가 떴다. ‘제일뷰티 리브랜딩 전략’. 내 이름 석 자가 좌측 하단에 작게 박혀 있었다.
강수아가 옆에서 자료 파일을 넘겼다.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긴장돼?”
내가 낮게 물었다. 수아가 어깨를 으쓱이며 받았다.
“언니는 안 그래요?”
“……들키지만 마.”
사실 내 손도 다를 바 없었다. 노트북 터치패드 위에 올린 검지가 미세하게 저렸다. 회의실 반대편, 차민혁 팀은 이미 자료를 세팅해둔 상태였다. 차민혁은 태블릿을 보며 무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넥타이 핀 하나만 반짝였다.
제일뷰티 측 실무진 세 명이 입장했다.
발표 순서는 우리 팀이 먼저였다.
내가 일어나 스크린 앞으로 섰다.
“제일뷰티의 25~34세 여성 타깃을 분석한 결과입니다. 기존 충성 고객층은 유지율이 높지만, 신규 유입은 경쟁사 로드샵으로 이탈하는 추세입니다. 원인은——”
숨을 들이쉬고 첫 페이지를 넘기려던 순간이었다.
“잠시만요.”
차민혁이 손을 들었다. 회의실 전체가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제일뷰티 담당자가 눈썹을 올렸다.
“질문이신가요?”
“데이터 출처를 확인하고 싶습니다. 표본 구성이 궁금하군요.”
차민혁은 태블릿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나는 슬라이드를 넘겼다. 설문 개요 페이지가 떴다.
“수도권 거주 여성 800명 대상 온라인 패널 조사입니다. 연령 비율은——”
“표본의 87%가 자사 몰 구매 이력이 있는 응답자로군요.”
차민혁이 나를 똑바로 보며 말했다.
“이 경우 기존 충성 고객에 편향된 결과 아닙니까? 경쟁사로 이탈한 소비자의 실제 니즈를 측정하기에는——”
그가 태블릿을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통계적 유의성을 논하기 어렵다고 봅니다.”
회의실이 조용해졌다. 제일뷰티 담당자가 끄덕였다.
“그 부분에 대해서는 차 팀장님 말씀이 일리가 있네요. 윤 대리님, 혹시 보완 데이터가 있으신가요?”
심장이 두 번 뛰었다.
나는 슬라이드를 한 장 더 넘겼다.
“보고 계신 페이지는 인구통계학적 분포입니다. 다음 장에 구매 채널별 교차 분석을——”
커서를 움직이며 포인터를 해당 그래프에 올렸다.
“로드샵 이용자 패널 220명의 응답을 분리해 교차 검증했습니다. N값이 작더라도 신뢰구간 95%에서 유의미한 차이를 확인했고요.”
차민혁의 눈이 그래프를 훑었다. 짧은 침묵.
“……납득했습니다.”
그가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제일뷰티 담당자가 입가를 살짝 올렸다.
나는 발표를 이어갔다. 차민혁은 더 이상 질문하지 않았다. 그가 마지막으로 내 자료에서 시선을 거둔 건 내가 경쟁사 벤치마킹 슬라이드를 넘겼을 때였다.
내 팀 발표 종료. 이어서 차민혁 팀의 발표.
차민혁이 스크린 앞에 섰다. 그는 도입 없이 첫 페이지부터 전략을 깔았다. 군더더기가 없었다.
데이터 밀도가 달랐다. 한 페이지에 세 개 이상의 인용 출처를 박았다. 설득보다 증명에 가까운 구성이었다.
“——따라서 기존 브랜드 자산을 유지하면서도, 신규 타깃에게는 서브 브랜드 형태로 접근하는 이중 전략을 제안합니다.”
발표가 끝날 무렵이었다. 마지막 페이지에 발표자 경력이 떴다.
‘2019 대한민국 광고 공모전 신인부문 우수상’
그 줄을 읽는 순간, 손이 멎었다.
2019년.
같은 공모전. 신인부문. 그때 나는 본선에서 탈락했다.
차민혁의 이름은 시상식 명단에서 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우수상? 기억에 없었다. 그때 그는——
“윤 대리님?”
강수아가 내 팔꿈치를 살짝 건드렸다. 나는 시선을 거뒀다. 제일뷰티 담당자가 일어나 마무리 멘트를 건네는 중이었다.
“두 분 다 훌륭한 전략입니다. 결과는 내부 검토 후 금주 중 공유드리겠습니다.”
회의실 불이 켜졌다. 나는 자료 파일을 닫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차민혁은 이미 태블릿을 챙겨 문 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내 표정이 어땠는지 모른다. 다만 강수아가 한 번 나를 쳐다봤다. 나는 웃어 보였다.
“수고했어.”
“……언니 괜찮아요?”
“어, 괜찮.”
그렇지 않았지만.
밤 9시 반.
사무실은 텅 비었다. 모니터 앞에 앉아 오늘 발표 녹취를 훑었다. 차민혁이 지적한 데이터 편향 부분을 두 번 돌려 들었다.
옳은 지적이었다. 내가 그걸 몰랐던 건 아니다. 단지 PT용으로 보완할 시간이 부족했다. 그리고 그 부족을 정확히 찔렸다.
노트북을 닫고 가방을 챙겼다. 책상 위 보호대를 손목에 감았다.
복도 끝 엘리베이터 앞. 버튼을 누르자 바로 문이 열렸다.
안에는 차민혁이 서 있었다.
“……늦었군요.”
그가 짧게 말했다. 나는 그 옆에 섰다. 문이 닫혔다.
1층 버튼은 눌려 있었다. 서류 봉투를 든 그의 손이 시야에 들어왔다. 손목시계.
넥타이 핀. 특별한 건 없었다. 그냥 회사 엘리베이터였다.
10층에서 다른 직원 둘이 탔다. 5층에서 내렸다.
문이 닫히고, 엘리베이터가 3층을 지날 무렵이었다.
쿵.
정적.
불이 꺼졌다가 비상등이 켜졌다.
“……어.”
내 입에서 새어나온 소리였다. 엘리베이터가 멈췄다.
“기계 오류인가.”
차민혁이 벽면의 층수 표시판을 올려다봤다. 디스플레이는 3층에서 깜빡이다 멈춰 있었다. 그가 인터폰 버튼을 눌렀다.
“관리실입니까. 3호기 멈췄습니다.”
잠시 후 스피커에서 답이 왔다.
“네, 확인했습니다. 전원 계통 문제라서요. 조치 중인데…… 30분에서 40분 정도 소요 예상됩니다.”
차민혁이 눈을 감았다 떴다.
“알겠습니다.”
비상등이 천장에서 노랗게 번졌다. 공간이 반쯤 어두워졌다. 나는 벽에 기대 섰다. 차민혁은 반대편 벽에 섰다. 둘 사이 거리는 한 걸음 반.
15초쯤 흘렀을까.
“오늘 PT 말인데요.”
차민혁이 불쑥 말했다. 나는 고개를 들었다.
“질문 의도가 따로 있었나요.”
“아뇨. 그냥 지적할 부분이 있어서.”
“……네.”
“표본 편향 인지하고도 밀어붙인 겁니까.”
“누구보다 잘 알면서요.”
내가 받았다. 차민혁이 고개를 갸웃했다.
“다음 장에 교차 분석을 준비했다는 건 예상하고 있었다는 뜻으로 들렸는데.”
“짧게 답하면요. 시간이 부족했어요. 길게 답하면——”
그를 똑바로 봤다.
“차 팀장님한테 그 지적이 나올 거란 걸 알고 있었고, 그다음 페이지를 노리고 배치한 거예요.”
차민혁의 눈썹이 미세하게 올라갔다. 입꼬리는 움직이지 않았다.
“……교묘하군요.”
“효과는 있었잖아요.”
“인정합니다.”
그가 짧게 말했다.
그리고 다시 침묵. 엘리베이터 안이 너무 조용해서 비상등 전류 소리가 다 들렸다.
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
“회의실에서 표정 안 변하는 게 특기신가 봐요.”
“……무슨 말이죠.”
“아니, 뭐. 신기해서요. 남 발표 데이터에서 통계 편향을 찾아내고도 심박수 안 올라갈 것처럼 생겨서.”
차민혁이 잠시 멈칫했다.
“……심박수는 오릅니다. 안 보일 뿐이죠.”
그 말투가 평소보다 느렸다. 진짜 감정이 드러날 때 느려진다는 걸, 나는 그때 처음 알았다.
“그렇군요.”
내가 중얼거렸다. 비상등이 깜빡였다. 차민혁이 벽에서 등을 떼며 나를 봤다.
“윤 대리님은.”
“……네?”
“집요함의 출처가 뭡니까.”
질문이 칼날 같았다. 나는 팔짱을 풀었다.
“질문이 철학적이네요.”
“늦은 밤 갇혀 있으니까, 뭐.”
그가 어깨를 한 번 으쓱했다. 차민혁에게서 그런 몸짓을 본 건 처음이었다. 순간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났다.
작게 터진 웃음소리에 차민혁의 눈이 살짝 좁혀졌다.
“웃기다고요?”
“네. 그렇게 말하니까 좀…… 웃겨서요.”
나는 벽에 기댄 채로 천장을 올려다봤다.
“……내 일에서 실수하고 싶지 않아서요. 남들보다 오래 걸려도, 빠르게 가는 사람들 앞에서 내 근거를 포기하고 싶지 않고.”
시선을 그에게로 돌렸다.
“그게 집요함의 출처예요.”
차민혁이 팔짱을 낀 채 나를 내려다봤다. 잠시 그의 눈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들어본 적 있습니다. 그런 말투.”
“……네?”
“몇 년 전, 윤 대리님 첫 프로젝트였을 겁니다. 리포트 말미에 써놓은 주석이 인상적이었어요.”
내가 눈을 깜빡였다.
“……그걸 기억하세요?”
“텍스트가 좋았으니까요.”
그 말을 마치고 차민혁은 시선을 정면으로 돌렸다. 인터폰에서 다시 소리가 났다.
“곧 복구됩니다.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공기가 바뀌었다. 나는 그 옆얼굴을 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더 묻지 않았다.
다만 가슴속 어딘가에 작은 돌멩이 하나가 들어앉은 것 같았다. 몇 년 전 내 주석을 기억하는 남자. 공모전 우수상을 받고도 어디서도 그걸 드러내지 않은 남자. 오늘 PT에서 내 데이터를 무자비하게 찔렀던 남자.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로비의 형광등이 쏟아져 들어왔다. 밖에는 경비원이 서 있었다.
“불편하셨죠. 죄송합니다.”
차민혁은 짧게 목례하고 로비로 나섰다. 나도 따라 나왔다. 두 사람 사이에 다시 한 걸음 반 거리가 생겼다.
“조심히 가십시오.”
차민혁이 뒤돌아보며 말했다. 나는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네, 수고하셨어요.”
그가 다시 엘리베이터 쪽으로 몸을 돌렸다. 올라가려는 듯했다. 서류 봉투를 고쳐 쥐는 그의 손이 잠시 멈췄다.
“윤 대리님.”
“……네?”
“오늘 데이터 배치 전략. 나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는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문이 닫혔다.
로비에 나 혼자 남았다.
나는 그 문을 한동안 바라봤다. 그의 뒷모습이 보이지 않게 된 뒤에도 서 있었다. 오늘 그가 보여준 모든 것들이 머릿속을 스쳤다.
회의실의 무자비한 논리. 엘리베이터 안의 느려진 말투. 내 몇 년 전 주석을 인상적이라고 말한 그 목소리.
도대체 어느 쪽이 진짜인지 알 수 없었다.
차민혁은 유나이티드애드 팀장실 문을 열었다. 어둠 속에 책상만 보였다. 서류 봉투를 내려놓고 의자에 앉았다.
잠시 멈춰 앉아 있다가 태블릿을 켰다. 오늘 PT 폴더였다. 손가락이 파일을 스크롤하다 한 페이지에서 멈췄다.
몇 년 전 윤가람의 첫 프로젝트 리포트. 지금은 아카이브에나 있는 자료였다. 그는 그 페이지를 열지 않았다. 그냥 파일명을 한 번 확인하고 태블릿을 덮었다.
서류 봉투를 서랍에 넣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타이를 풀며 다시 문을 나섰다. 사무실이 다시 어둠에 잠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