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verStory

PT는 사랑을 싣고

11화

아침 7시 50분. 사무실은 아직 에어컨 바람만 돌고 있었다.

내 자리에는 커피 한 잔과 포스트잇이 붙어 있었다.

'8시, 3번 회의실. 차민혁.'

손글씨였다. 볼펜 끝이 살짝 눌린 획 끝을 보니 꽤 오래 쥐고 있다 쓴 모양이었다.

3번 회의실 유리문 너머로 차민혁이 서 있는 게 보였다. 노트북 화면을 켜놓고 창밖을 보고 있었다. 넥타이 핀은 이미 채워져 있었고, 재킷은 걸려 있었다.

문을 열자 그가 돌아섰다.

“시간 맞췄군.”

“아침 8시에 회의 잡는 팀장님은 처음 봅니다.”

“커피는.”

“아직 안 마셨어요.”

그가 탁자 위로 노트북을 돌렸다. 화면에는 공유 폴더가 열려 있었다. 그 안에 우리 팀 PT 파일이 아니라, 폴더 하나.

'yoonearlycareer'.

숨이 멎었다.

“이게 뭡니까.”

“네가 생각하는 그게 맞다.”

차민혁이 폴더를 더블클릭했다. 리스트가 펼쳐졌다.

2018리포트제일제당소비자분석윤가람.pdf 2019기획안한소리푸드1차피드백_반영본.pdf 2020프로젝트정리본메모윤가람.docx 2021Q1전환율시뮬레이션윤가람_검토의견.xlsx

파일 수가 수십 개였다. 첫 해부터 작년까지, 내가 제출한 거의 모든 주요 문서였다.

“왜.”

내 목소리가 평소보다 한 옥타브 올라갔다.

“왜 이걸.”

“6년 전 네 첫 카피를 읽었을 때.”

차민혁의 말이 느려졌다. 평소의 보고서 말투가 아니었다.

“같은 방향을 보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 후로 네가 제출하는 모든 전략지와 리포트를 읽고, 별도로 보관했다. 내 판단 기준을 세우는 참조점으로 삼았다. 네 문서는 항상 데이터를 마지막 한 줄까지 추적했고, 논리가 깔끔했다.”

그가 숨을 한 번 들이쉬었다.

“어제 네 새 PT 제목을 봤다. '리버스 컬처: 당신의 내일을 위한 약속.' 거기에 '빠르게 사라지는 것들에 대하여'의 메아리가 있다는 걸, 네가 넣었을 리 없다는 것도 안다. 본능적인 거겠지.”

나는 입을 열려다 말았다. 화면 속 내 파일들. 6년.

차민혁이던, 그 폴더를 만들고 매번 업데이트하던 사람은. 그가 아니다. 달리 누군지 생각할 겨를은 없었다. 아직. 지금은 이 기록과, 이 남자의 얼굴만.

“미친 짓이네.”

반말이었다. 말부터 나왔다.

“그걸 알면서도.”

“안다.”

“협박입니까. 경쟁에서 유리해지려고.”

“아니.”

차민혁이 정면으로 나를 쳐다봤다. 눈빛이 냉정하다기보다 무언가를 감당하는 얼굴이었다.

“존경했다. 네 일에. 그 이상이다.”

손가락이 트랙패드 위로 올라갔다.

“지금부터 이 폴더를 삭제한다. 네가 보는 앞에서.”

“……왜.”

아까와 똑같은 단어가 나왔다. 이번엔 떨리지 않았다.

“이 기록은 더 이상 내 비공식 참조점이 아니라, PT에서 정면으로 맞서야 할 상대의 전력이다. 앞으로도 네 전략을 볼 테지만, 이 방식은 아니다.”

커서가 폴더 위에서 멈췄다.

“내가 지킬 수 있는 유일한 건 공정함이라 믿었다. 그런데 너한테만은 그걸 지키지 못했다.”

화면에서 폴더가 사라졌다. 삭제 확인 창. 그가 엔터를 눌렀다.

“끝이다.”

탁자 위에 놓인 내 커피가 식어가고 있었다. 나는 화면을 뚫어져라 보다가, 차민혁을 올려다봤다.

“그걸 내 앞에서 지우다니. 정말 무서운 사람이네요.”

목소리가 낮아졌다가 다시 올라왔다. 거의 웃음에 가까운 숨소리.

“존경한다는 말, 그걸 여섯 해 동안 기록으로 증명한 셈이잖아.”

“증명이라고 생각한다면.”

“네.”

내가 끊었다. 감정이 터지면 말이 빨라진다. 그걸 알면서도.

“증명이에요. 무시당하는 게 아니라, 이렇게까지 봤다는 거. 그런 집요함이면…… 차라리 다행이죠.”

차민혁이 대답 없이 고개를 살짝 숙였다. 고맙다는 말도, 미안하다는 말도 하지 않았다.

“오늘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내가 팔짱을 풀며 말했다.

“데이터로, 전략으로, 질 거라고는 생각 안 해요.”

“나도다.”

그가 노트북을 덮었다.

“네 전략을 확인했으니 말할 수 있다. 이번 PT, 우리 팀이 이기기 위해 모든 것을 쏟을 거다. 그 상대가 너라서, 더.”

시계는 8시 12분. PT까지 48분 남았다.

차민혁이 내 커피를 힐끗 보더니, 한 마디를 덧붙였다.

“식었겠군. 새로 뽑아와라. 시작하기 전에.”

“……네.”

나는 회의실 문을 열고 걸어나왔다. 복도로 나오자마자 두 번 숨을 들이쉬었다. 가슴속 무언가가 풀어지고 있었다. 죄책감이 아니었다. 그보다 더 묵직한, 상대방이 나를 그만큼 무게로 두고 있었다는 확인.

내 자리로 돌아와 텀블러를 집어 들었다.

강수아가 아직 출근하지 않은 빈 책상이 유난히 넓어 보였다. 네가 옆에 있어서 버틴 거라고 했던 내 말이, 오늘은 다른 의미로 다가왔다.

이제 버티는 게 아니라, 나가서 이겨야 하는 날이었다.

PT홀 정면 스크린에는 ‘리버스 컬처: 당신의 내일을 위한 약속’이 띄워져 있었다.

나는 첫 슬라이드를 넘기며 숨을 가다듬었다. 객석 맨 앞줄에 트리니티 글로벌 아시아태평양 전략 총괄 최태호가 앉아 있었다. 그 옆으로 유나이티드애드 경영진과 백실장이 자리 잡았다. 세 번째 줄 끝, 차민혁이 팔짱을 끼고 있었고 시선이 스크린에 고정되어 있었다.

“유나이티드애드 윤가람입니다. 제일뷰티 리브랜딩 전략, ‘리버스 컬처’를 발표하겠습니다.”

목소리는 평소보다 반 박자 느렸다. 마우스를 눌러 첫 번째 데이터 슬라이드를 띄웠다. 지역별 소비자 인식 조사 결과. 자발적 패널 편향을 보정한 교차 분석 그래프.

“기존 뷰티 광고는 제품 효능을 앞세워 소비자의 불안을 자극해 왔습니다. 저희는 그 반대 지점에서 출발합니다.”

두 번째 슬라이드. 퍼스트파티 데이터 기반 전환율 시뮬레이션.

“소비자가 이미 가진 신뢰를 데이터로 증명하고, 제품이 아닌 경험을 약속하는 전략——”

최태호가 펜을 내려놓았다. 딸깍, 소리가 정적을 가르며 났다.

“잠시만요.”

나는 슬라이드를 멈췄다. 최태호는 손가락으로 그래프 하단의 숫자를 가리켰다.

“이 전환율 예측치, 근거가 뭡니까.”

“자사 DMP에서 추출한 최근 3개년 구매 이력과, 트리니티 측이 제공한 아태지역 7개국 설문 교차 데이터입니다.”

이미 예상한 질문이었다. 강수아와 밤새 검증한 수치였다. 덧붙이려던 순간.

“근거를 보충하겠습니다.”

객석 세 번째 줄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차민혁이었다.

그가 일어났다. 넥타이 핀을 만지작거리지도 않고, 손끝을 책상에 대지도 않았다. 그냥 똑바로 서서 최태호를 향해 말했다.

“윤가람 대리님 팀의 퍼스트파티 데이터 접근법은, 동일한 데이터 세트를 두고 저희 팀이 수행한 예측 모델과도 오차 범위 0.3퍼센트 이내로 일치합니다. 별도 검증이 완료된 수치입니다.”

PT홀이 조용해졌다.

1초, 2초. 옆자리에 앉아 있던 경영진 중 한 명이 백실장을 돌아봤다. 최태호의 눈썹이 살짝 올라갔다.

“두 팀이 별도로 검증을…?”

“네.”

차민혁의 대답은 짧았다. 그는 나를 보지 않았다. 스크린의 데이터만 응시하고 있었다.

내 손이 마우스 위에서 멈췄다. 가슴속에서 무언가 치밀어 올랐다. 너 지금 무슨 짓을 하는 거냐고 묻고 싶었다.

네 원칙은 어쨌냐고 따지고 싶었다. 하지만 청중 앞이었다. 나는 숨을 천천히 내쉬고 다음 슬라이드를 넘겼다.

“방금 차민혁 팀장님이 말씀하신 교차 검증 기반으로, 저희는 전략 일관성을 세 가지 축으로——”

발표를 이어갔다. 목소리가 약간 빨라졌지만 손은 정확했다. 마지막 슬라이드. ‘당신의 내일을 위한 약속’이란 문구가 화면에 가득 찼을 때, 최태호가 먼저 박수를 쳤다. 이내 PT홀 전체로 박수가 번졌다.

나는 인사하고 스크린을 끄려다 시야 구석을 확인했다.

차민혁은 여전히 서 있었다. 내가 보는 방향을 향해 고개를 살짝 숙였다. 1초도 안 되는 동작.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을 거다. 그가 앉았을 때, 옆자리 오지혁의 얼굴이 굳어 있었다.

PT홀 밖 복도.

문이 닫히자마자 발소리가 뒤에서 따라붙었다.

“윤가람 대리님.”

차민혁이었다. 나는 걸음을 멈추지 않고 복도 중간쯤에서 돌아섰다. 그가 세 걸음 거리에서 멈췄다.

“왜 그랬어요.”

내 목소리가 평소보다 낮았다.

“데이터 신뢰도에 대한 합리적——”

“묻는 말에 답이나 해요. 왜 거기서 일어났냐고.”

차민혁의 눈이 살짝 좁아졌다. 1초쯤 침묵이 흘렀다.

“그게 가장 정확한 방식이었다.”

“……그걸 믿으라고요.”

“데이터가 그렇게 말했다.”

나는 웃음이 나올 뻔했다. 진짜 웃음이 아니라, 터져 나오려는 무언가를 삼키는 반응이었다.

“6년간 내 일을 기록한 사람이. 경쟁에서 이기려고 데이터 선점한 사람이. 그 입으로 그 말을——”

“가람아.”

그가 반말로 내 이름을 불렀다. 복도 조명이 그의 얼굴 반을 비추고 반은 그림자로 남겼다. 손가락이 허공에서 살짝 떨렸다가, 넥타이 핀을 만지지도 않고 멈췄다.

나는 숨을 들이켰다.

“……왜.”

“너를 이기고 싶었다. 이전까지는.”

차민혁의 말이 느려졌다. 한 글자 한 글자 떼어 놓듯.

“오늘은, 네 전략이 더 나았으니까.”

복도 저편에서 구두 소리가 났다. 우리는 동시에 소리 난 쪽을 돌아봤다. 백실장이었다. 평소와 달리 재킷 단추를 잠근 채, 태블릿도 커피잔도 들지 않은 맨손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둘 다, 잠깐.”

백실장이 우리 앞에 섰다. 눈꼬리가 올라간 평소 인상과 달리, 입술이 일자로 굳어 있었다.

“뭐… 일단 PT는 잘됐어. 클라이언트 반응도 좋았고.”

“무슨 일이십니까.”

차민혁이 물었다.

백실장은 한숨을 짧게 쉬었다. 그리고 내 눈을 똑바로 보았다.

“차 팀장이 PT 중에 한 발언. 경쟁 팀 전략을 공개적으로 옹호한 거.”

“그게——”

“인사팀에 보고 들어갔어.”

복도 공기가 달라졌다.

“경영진이 사내 연애 규정 위반 가능성으로 보고 조사 열겠대. 지금.”

내 손끝이 차가워졌다. 무의식적으로 손목 보호대를 만지작거렸다.

“인사규정, 개정된 조항 말이죠.”

목소리는 평소 톤을 유지했다. 하지만 말이 평소보다 빨랐다.

“그렇지. 그리고 너희도 알다시피——”

백실장이 잠시 멈췄다. 복도 천장 형광등이 미세하게 깜빡였다.

“둘 중 한 명은 팀을 옮기거나, 이직해야 할 거야.”

차민혁이 입을 열었다.

“그 규정은——”

“차 팀장.”

백실장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돌직구처럼 짧은 문장.

“네가 오늘 한 행동은, 내가 지금까지 본 네 원칙 중에서 유일하게 원칙 없는 거였어. 그러니까 이 결과는 네가 선택한 거야.”

차민혁의 턱 선이 굳어졌다. 손이 허리께에서 멈췄다.

“인정한다.”

그 말은 나를 향한 듯도, 백실장을 향한 듯도 아니었다. 그냥 허공에 떨어뜨린 문장처럼 들렸다.

나는 그 옆얼굴을 바라봤다. 6년 전 복도에서 그의 아이디어 보드를 훔쳐본 순간이 겹쳐졌다가 흩어졌다.

백실장의 태블릿이 진동했다. 그녀가 화면을 확인하고 표정이 한 번 더 굳었다.

“조사실로 올라가래. 32층 인사팀 회의실.”

차민혁이 고개를 돌려 나를 보았다.

“윤가람 대리님.”

“말해요.”

“……당신은 오늘 PT, 끝까지 밀고 가라.”

그 말을 끝으로 그가 먼저 발걸음을 돌렸다. 복도 끝 엘리베이터 방향으로.

나는 한 박자 늦게 따라섰다. 두 사람의 구두 소리가 복도에 겹쳐 울렸다.

어깨 사이 거리가 팔뚝 하나 남짓.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기 직전, 그가 발을 멈췄다.

“무서우냐.”

반말이었다. 목소리는 거칠지 않고, 조용했다.

“……딱히.”

나는 대답하며 엘리베이터 문을 향해 시선을 던졌다. 실제로 무서움과는 다른 감정이 가슴을 눌렀다. 뭐라 이름 붙이기 어려운, 하지만 분명히 단단한 무엇이었다.

“당신이 무서울 거면 내가 여기서 그런 짓 안 했어요.”

내 목소리가 마지막 글자에서 살짝 올라갔다. 차민혁의 입꼬리가 거의 보이지 않을 만큼 움직였다. 그가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 32층. 문이 닫히기 직전, 그의 손이 내 손목 보호대 위를 스쳤다.

둘 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PT는 사랑을 싣고11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