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verStory

PT는 사랑을 싣고

3화

사흘 뒤.

오전 아홉 시. 차민혁이 팀 구역으로 돌아왔다. 유리문이 닫히는 소리가 평소보다 날카로웠다.

오지혁이 노트북에서 고개를 들었다.

“이사진 면담은요.”

“예산 50% 삭감.”

“……네?”

“추가로 내부 감사 일정이 잡혔다. 다음 주 금요일까지 전 프로젝트 자료 정리해 둬.”

오지혁의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졌다. 다른 팀원들도 키보드 치던 손을 멈췄다.

차민혁은 침착했다. 넥타이 핀을 손끝으로 한 번 만졌다.

“모빌리티 PT 자료는 기존 안에서 재구성한다. 삭감된 예산으로 운영 가능한 범위로.”

“팀장님, 그걸 지금——”

“가능하다.”

오지혁이 입술을 깨물었다. 뭔가 더 말하려다 시계를 확인했다.

“PT장 출발 시간입니다.”

“알고 있다.”

차민혁은 자기 자리로 가며 서류 봉투 하나를 집었다. 그 사이 이미 노트북 가방을 어깨에 걸쳤다. 팀원들에게 짧게 던졌다.

“움직인다.”

같은 시각, 한소리푸드 본사 중역 회의실.

탁자에는 ‘모빌리티 브랜드 경쟁 PT’라고 적힌 명패가 놓여 있었다. 지난번과 같은 방. 같은 창문. 다른 점이 있다면 이번 프로젝터 앞에 내가 먼저 서 있다는 것.

강수아가 내 옆에서 USB를 건넸다. 손끝이 약간 차가웠다.

“언니, 할 수 있어.”

“……말해 줘서 고맙다.”

“진짜야. 이번엔 달라.”

나는 짧게 숨을 들이쉬었다.

지난주 한소리푸드 PT에서 차민혁이 지적한 표본 편향. 자발적 참여 패널의 과대표집 문제. 그날 밤부터 다시 돌렸다. 교차 분석에 교차 분석을 겹쳐, 편향을 통제한 리샘플링 데이터를 새로 구축했다.

어깨를 펴고 첫 슬라이드를 띄웠다.

“유나이티드애드, 윤가람입니다. 모빌리티 브랜드 ‘루트원’의 신규 전기차 라인 타깃 전략을 발표하겠습니다.”

차민혁 팀은 오른쪽에 앉아 있었다.

차민혁은 내 쪽을 보고 있었다. 특유의 무표정으로, 눈만 깜빡이지 않고.

나는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

2장을 넘겼다.

“기존 소비자 조사는 자발적 응답 패널 기반이었습니다. 이 경우 제품에 대한 사전 관여도가 높은 응답자가 과대표집되기 때문에, 실제 시장의 수요를 왜곡할 위험이 있습니다.”

지난주 그가 내게 했던 말이었다.

“그래서 저희는 비자발적 응답 표본을 재구성했습니다. 구매 이력과 상관없이 할당 표집한 데이터입니다.”

똑같은 단어를, 내가 먼저 썼다.

강수아의 숨소리가 들렸다. 긴장했지만 기대감이 섞인 소리.

루트원 담당자가 상체를 앞으로 기울였다. 중년 남성 임원 한 명이 안경을 고쳐 썼다.

나는 다음 슬라이드로 넘어갔다.

“이 데이터로 재분석한 결과, 2535 여성 소비자의 전기차 관심도는 기존 조사 대비 12.7% 높았습니다. 특히 첫차 구매 예정자의 경우, 가격 민감도보다 충전 접근성과 디자인을 우선 고려하는 패턴이 명확했습니다.”

“그걸 어떻게 검증했죠?”

차민혁의 팀원이었다.

내가 대답하기 전에 강수아가 보충 슬라이드 두 장을 동시에 띄웠다.

“전국 충전소 지도 앱 사용자 데이터와 교차 검증했습니다. 실제 행동 데이터에서도 같은 경향이 나타나요.”

임원 한 명이 끄덕였다.

“흥미롭네요.”

그리고 발표는 계속됐다.

나는 더듬지 않았다. 손목 보호대 밑으로 땀이 배었지만 손가락은 정확했다. 슬라이드를 넘길 때마다 방 안의 공기가 조금씩 움직이는 게 느껴졌다.

차민혁 팀의 PT 순서가 돌아왔다.

차민혁이 발표대에 섰다. 그는 여전했다. 데이터 구조는 흠잡을 데가 없었다. 신뢰구간, 구매 전환율, 브랜드 충성도 상관계수. 하지만 뭔가 달랐다.

루트원 담당자가 질문을 던졌다.

“차 팀장님 안은 기존 내연기관 소비자 데이터 기반이죠? 전기차 전환층에 대한 가정이 보수적인데.”

차민혁이 잠시 멈췄다.

“……맞습니다.”

“윤 대리님 쪽은 전환층을 좀 더 공격적으로 봤는데, 그 차이에 대한 의견이 있으신가요?”

나는 차민혁을 봤다.

그는 내 쪽을 한 번 쳐다봤다. 시선이 1초도 안 머물렀지만, 나는 그 안에서 뭔가를 읽었다. 인정. 아니면 경계.

“윤 대리님의 접근은 타당합니다. 다만 저희는 리스크 관리 관점에서——”

발표는 이어졌다. 하지만 루트원 측의 반응은 이미 갈렸다.

20분 뒤.

루트원 담당자가 발표했다. 두 팀 다 수고했다는 인사말 뒤에 덧붙였다.

“이번 프로젝트는 윤가람 대리님 팀의 안으로 진행하겠습니다. 차민혁 팀장님 안은 보완 후 다음 분기 재논의로——”

나는 눈을 감았다.

강수아가 내 팔을 살짝 쥐었다.

“언니.”

“……들었어.”

“이겼어. 우리.”

목소리가 떨렸지만 나는 웃지 않았다. 웃을 수가 없었다. 차민혁이 자리에서 일어나는 모습이 보였다. 그는 자신의 팀원들에게 뭔가 짧게 지시한 뒤, 내 쪽으로 걸어왔다.

회의실 공기가 잠시 멎었다.

그가 내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한 수 배웠다.”

나는 고개를 들었다. 차민혁이 나를 똑바로 보고 있었다.

“데이터 편향을 역이용할 줄은 몰랐다.”

“……그건 지난주에 팀장님이——”

“알고 있다.”

그의 입술이 살짝 움직였다. 미소라고 하기엔 너무 작고, 무표정이라고 하기엔 너무 의미심장한 각도.

“네가 쓴 카피 중에 이런 게 있었지. ‘빠르게 사라지는 것들에 대하여.’ ”

내 숨이 멎었다.

“신입 때 첫 광고 카피다. 맞나.”

“……어떻게.”

“궁금하면.”

그는 말을 끊고 뒤돌았다.

“다음 PT 때 또 물어봐.”

어깨 너머로 던진 말이었다.

나는 그 자리에 멈춰 섰다. 손목 보호대를 쥔 손가락이 하얘졌다.

강수아가 다가왔다. 노트북을 챙기며 내 표정을 살폈다.

“언니? 무슨 말 한 거예요?”

“……아냐.”

“근데 언니, 표정이——”

“괜찮다.”

입술이 바싹 말랐다.

그 카피는 햇수로 6년 전이었다. 신입 공채 관문을 통과한 직후, 팀 내에서 돌린 사내 공모전용으로 썼던 문구. 외부에 나간 적도, 상을 받은 적도 없다. 사내 인트라넷에 2주쯤 올라왔다가 내려간 글.

그걸 저 남자가 어떻게.

강수아가 내 옆에서 자료 봉투를 챙기며 혼잣말처럼 말했다.

“나 진짜 놀랐다…… 차 팀장이 칭찬 비슷한 걸 하다니.”

“……칭찬인지 도발인지 모르겠다.”

“둘 다겠죠? 원래 그런 사람이잖아.”

“……그렇지.”

나는 입을 다물었다.

오후 한 시. 유나이티드애드 본사.

강수아가 자기 자리에 앉아 택배 상자를 열었다. 신년 회사 캘린더였다.

“우와, 이번 해 디자인 괜찮다. 언니 것도 갖다줄까?”

나는 내 자리에서 손을 들었다. 이미 손목 보호대를 풀어 서랍에 넣은 뒤였다.

“나중에.”

강수아가 캘린더 한 부를 책상 위에 펼쳤다. 사내 임직원 사진이 실린 달력. 그녀의 사진이 5월 칸에 있었다. 낮은 포니테일에 밝은 미소. 강수아는 그걸 보고 피식 웃었다.

“작년 사진보다 낫다. 이건 버리지 말아야지.”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나 휴게실 쪽으로 갔다.

잠시 후, 오지혁이 복도를 지나갔다.

그는 강수아의 책상 앞에서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다만 손만 움직였다. 펼쳐진 캘린더 위로 또 한 부의 캘린더를 집어 들었다. 본인 몫일 터였다.

강수아 자리의 캘린더가 5월 페이지로 펼쳐져 있다는 걸, 그는 분명 봤다.

손가락이 5월 사진에 살짝 닿았다가 떨어졌다.

그리고 아무 일 없다는 듯 제자리로 걸어갔다. 서랍을 열고, 캘린더를 그 안에 밀어 넣었다.

강수아가 커피를 들고 돌아왔을 때, 그녀의 캘린더는 여전히 5월에 펼쳐져 있었다.

밤.

사무실 복도 불이 절반쯤 꺼졌다.

나는 내 자리에서 사내 인트라넷 데이터베이스를 열었다. 검색창에 커서가 깜빡였다.

‘빠르게 사라지는 것들에 대하여.’

그 문구를 그대로 입력했다.

검색 결과. 0건.

원본이 삭제된 지 오래였다. 내가 직접 올렸다가 내린 글이다. 사본도 없을 것이다.

그런데 저 사람은, 여섯 해 전 그 문장을 정확히 외우고 있었다.

마우스를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내가 전에 딱 한 번, 그와 닿은 적이 있었다.

대학생 때다. 광고 공모전. 나는 본선 진출자였다. 심사장 복도에서 우연히 한 남자의 아이디어 보드를 봤다. 그 안에는 지금의 차민혁이라면 절대 쓰지 않았을 비논리적인, 하지만 엄청나게 위험한 도발적 발상이 담겨 있었다.

그걸 기억하는 사람은 나뿐일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내 첫 카피를 외우고 있는 그 사람이라면.

복도 건너 회의실에 불이 켜져 있었다. 차민혁과 오지혁이 야근 중이었다. 유리 너머로 차민혁의 실루엣이 보였다. 그는 오지혁에게 서류를 건네며 무언가 지시하고 있었다. 오지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모니터로 시선을 돌렸다.

검색창이 계속 깜빡이고 있었다. 아무것도 입력되지 않은 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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