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verStory

PT는 사랑을 싣고

4화

프레젠테이션은 예정대로 오전 열 시에 시작됐다.

메가 프로젝트 클라이언트, 일렉트로모빌리티의 마케팅 임원 세 명이 대회의실 앞줄에 앉았다. 1인당 3장짜리 초기 전략 요약본을 양 팀에 나눠줬다.

차민혁 팀이 먼저 발표했다.

“전기 모빌리티의 가장 큰 진입 장벽은 충전 인프라가 아니라 소비자의 감정적 저항입니다.”

차민혁은 레이저 포인터도 쓰지 않았다. 손가락 하나로 슬라이드를 넘겼다.

“기존 충성 고객의 불안을 덜어내는 브랜드 경험부터 설계해야 합니다. 기술적 우위는 그 다음 단계입니다.”

왼쪽 두 번째 임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발표는 열두 분 만에 끝났다. 질문은 없었다. 오지혁이 노트북을 접으며 차민혁과 눈을 마주쳤다.

내 차례였다.

일어서면서 템플릿 파일을 열었다. 첫 슬라이드는 타깃 분석. 괜찮았다. 두 번째 슬라이드는 시장 데이터. 괜찮았다.

차민혁의 손을 봤다.

그는 종이 자료를 넘기고 있었다. 그 손이 한 시간 전 내가 마지막으로 검토했던 소비자 인터뷰 원문을 적고 있던 손이라는 걸, 나는 알고 있었다. 그가 인용한 카피는 삼일 밤을 앓을 만큼 나를 흔들었고—— 지금 그 손이 뭘 적든 나는 한참 보게 됐다.

목소리가 한 템포 늦었다.

“……25세에서 34세까지의 조기 수용자 층을 세분화하면, 충전 시간보다 디자인과 브랜드 신뢰도가——”

입이 말랐다.

손을 봤다.

입을 열었다.

“——전환율에 더 큰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강수아가 내 쪽을 돌아봤다. 눈썹이 살짝 올라가 있었다. 뒤늦게 나는 네 번째 슬라이드가 이미 지나갔다는 걸 알았다.

마무리로 넘겼다.

“결론적으로, 우리 전략의 핵심은 감성적 접근보다 환경 데이터 기반의 신뢰 구축입니다.”

일렉트로모빌리티의 수석 임원이 펜을 내려놓으며 입을 열었다.

“흥미롭네요. 두 팀이 같은 타깃을 두고 정반대 방향을 제안했어요. 윤 대리님은 데이터로, 차 팀장님은 감성으로 접근했죠.”

차민혁이 내 쪽을 보지 않았다.

“두 안 다 유효합니다. 다만 저희가 판단하려면, 각 팀이 제시한 가설을 뒷받침하는 소비자 심층 조사 자료가 추가로 필요하겠네요. 형식은 동일하게 요청드리겠습니다. 기한은 2주 후 금요일까지.”

양 팀에 똑같은 숙제였다. 순서만 다를 뿐.

임원들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노트북을 덮으며 숨을 들이켰다.

“저, 휴게실 다녀올게요.”

강수아에게 중얼거리듯 말하고 회의실을 나왔다.

복도에서 손목 보호대를 만지작거렸다.

발표 전날까지 보강한 데이터였다. 타깃 분석도 재검토했고, 리샘플링 결과도 나쁘지 않았다. 그런데 정작 발표 중 내가 통제하지 못한 건 콘텐츠가 아니었다.

차민혁이 어떤 표정으로 내 슬라이드를 보고 있는지 확인하느라, 내 발표 순서를 두 번이나 놓쳤다.

화장실 세면대 앞에서 손목에 찬물을 묻혔다.

이건 실수도 아니다. 태도가 문제다.

심호흡.

수도꼭지를 잠갔다.

사무실로 돌아가지 않고 1층으로 내려왔다. 로비 자판기에서 캔커피를 뽑으려는데, 들렸다.

“공정함이야말로 제가 지킬 수 있는 유일한 겁니다.”

차민혁의 목소리였다.

로비 기둥 너머 소파 쪽이었다. 나는 멈춰 섰다. 자판기 모서리에 몸을 붙인 채 캔을 뽑지 않았다.

오지혁의 낮은 대꾸가 이어졌다.

“그 원칙, 오늘도 지키신 겁니까.”

“의심할 여지가 있습니까.”

“아닙니다. 다만——”

오지혁의 어조가 건조하게 끊겼다.

“——경쟁자 발표 중에 손 움직임을 세 번 멈추셨죠. 저는 그게 동요로 보였습니다만.”

침묵. 그 다음 들린 차민혁의 대답은 평소보다 느렸다.

“발표의 기술적 완성도를 재고 있었을 뿐이다.”

“기술적 완성도라면, 첫 번째 카피만으로도 충분하지 않습니까.”

“……무슨 뜻이지.”

“말 그대로입니다. 제가 알기로 그쪽 대리님 발표에서 당신이 기록한 건 슬라이드 전환 타이밍 같은 게 아니었습니다.”

차민혁의 대답이 없었다.

오지혁이 덧붙였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저는 이 프로젝트에서 확실히 이기고 싶습니다. 그런데 당신이 공정함을 지키는 방식이 승부를 더디게 만든다면——”

“오지혁.”

차민혁의 목소리가 딱 잘랐다.

“승부를 더디게 만드는 건 지름길에 대한 유혹이다. 네가 이기고 싶다면, 그 유혹부터 통제해라.”

한 박자 뒤 오지혁이 낮게 답했다.

“……알겠습니다.”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차민혁이 먼저 일어난 것 같았다.

“조사 자료, 기한보다 하루 먼저 초안을 검토할 겁니다.”

“네. 그렇게 하죠.”

소파 쪽이 조용해졌다.

나는 이미 지난 캔커피 대신 엘리베이터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아무 캔도 뽑지 않은 채로.

차민혁이 내 발표를 어떻게 봤는지는 알 수 없었다. 오지혁이 말한 ‘첫 번째 카피’가 정확히 뭘 뜻하는 건지도.

다만 한 가지—— ‘기술적 완성도를 재고 있었다’는 말은 분명 거짓일 거다.

내 슬라이드엔 기술적인 집중할 구석이 부족했다. 오늘 나는 평소만 못했고, 차민혁은 그걸 알 만한 사람이다.

그걸 ‘기술 검토’로 포장할 수밖에 없는 원칙.

그게 공정함이야말로 지킬 수 있는 유일한 것이라는 그 말.

엘리베이터 앞에서 버튼을 누르고, 손목 보호대를 다시 조였다.

닫히는 문 너머로 로비 불빛이 줄어들었다.

다음 날 오후, 나는 내 자리에 앉아 있었다. 손목 보호대를 풀었다 다시 조이는 사이, 창밖 빛이 벌써 길어져 책상 모서리에 걸려 있었다. 차민혁의 원칙이 머릿속에서 맴돌았고, 그가 오지혁에게 했던 말들이 자꾸만 들렸다.

모니터 화면은 켜져 있었지만, 나는 한동안 키보드에 손을 올리지 못했다. 오전 내내 아무 캔도 뽑지 않은 채였고, 그게 이제는 버릇처럼 굳어졌다. 복도 너머로 누군가 엘리베이터 앞에서 대기하는 발소리가 들렸다.

오후 세 시. 모니터 구석에 메일 알림이 떴다.

[전사 뉴스레터 Vol.47] 3분기 경쟁 PT 결과 및 4분기 주요 프로젝트 공지

클릭했다.

내 이름이 나왔다. 차민혁도 같은 문단에 있었다. 루트원 모빌리티 프로젝트의 공식 발주처 선정 결과를 공지하는 섹션이었다. 두 팀의 PT 전략 요약이 나란히 실려 있었다. 내 데이터 재해석 접근법과 차민혁의 리스크 예측 모델을 비교하는 표까지 들어가 있었다.

마치 우리 둘이 같은 무게의 팀장이라는 걸 증명하려는 것처럼.

스크롤을 내렸다. 4분기 메가 프로젝트 예고. 위원회는 두 팀의 동등한 예선 통과를 명시했다. ‘유나이티드애드 내 최고 경쟁 구도’라는 표현까지 써가며.

차민혁이 이걸 읽었을지 생각했다. 아마 이미 읽었을 거다. 이런 메일에 반응이 가장 빠른 사람이니까.

그런데.

지난주 한소리푸드에서 졌을 때 그는 말했다. 승패보다 데이터가 남는 게 중요하다고. 어젯밤 그는 오지혁에게 똑같은 어조로 말했다. 감사 자료의 오차까지 수정하라고. 공정함이라는 단어를 입에 올리면서.

그 사람은 정말로 그 말을 믿는 걸까.

내 첫 카피를 6년째 기억하는 사람이. 내 옛 리포트 파일을 개인 태블릿에 저장해둔 사람이. 그 모든 걸 알고도, 우리 사이를 그저 ‘데이터 비교 대상’으로만 정리할 수 있는 걸까.

메일을 닫았다. 손목이 묵직했다.

오후 일곱 시. 사무실 불이 하나둘 꺼지고 있었다.

강수아가 먼저 퇴근했다. 오늘은 체력 단련의 날이라며 웃었다. 백실장도 회의실에서 나오며 외투를 챙겼다.

모니터를 끄고 가방을 챙겼다. 복도 끝 자판기 쪽에서 누군가 컵을 버리는 소리가 났다.

엘리베이터 앞으로 걸어갔다.

그가 먼저 서 있었다.

차민혁. 짙은 네이비 수트에 평소와 같은 무채색 타이. 손에는 태블릿이 없었다. 그냥 서류 가방 하나만 왼손에 들고 있었다. 엘리베이터 버튼이 이미 눌려 있었다.

내 발소리에 그가 고개를 살짝 돌렸다. 나를 보는 데 반 박자쯤 걸렸다.

“늦었군.”

“팀장님도요.”

나란히 섰다. 엘리베이터 층수 표시가 7층에서 멈춰 있었다.

그가 말했다.

“루트원은 잘 따냈다.”

“……네.”

“전략이 좋았다. 한소리푸드에서 드러난 편향을 의도적으로 통제 변수화한 접근은 나쁘지 않았어.”

그의 입에서 최대치의 칭찬이었다. 그런데 나는 그 말을 듣는 순간 불쾌해졌다.

왜인지 알았다. 이 사람은 내 모든 걸 추적하고 있다. 내 실수도, 내 개선도, 내 첫 카피도.

엘리베이터가 3층을 지나고 있었다.

차민혁이 다시 입을 열었다.

“빠르게 사라지는 것들에 대하여.”

숨이 멎었다.

“당신 카피였다. 6년 전 인트라넷에 올렸던.”

“……어떻게.”

“읽었다.”

짧았다. 그 이상의 설명은 없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당신의 방향성은 일관적이군.”

내 손이 가방 끈을 움켜쥐었다.

이 남자는 나를 관찰해왔다. 경쟁자로서, 혹은 다른 무언가로. 그리고 지금 그걸 내 앞에서 태연하게 말하고 있다. 공정한 경쟁자로서의 얼굴을 유지하면서.

엘리베이터가 도착했다. 문이 열렸다.

차민혁이 먼저 올랐다. 발걸음에 망설임이 없었다. 그는 돌아서서 나를 봤다. 문이 닫히기 전까지 타라는 신호였다.

나는 발을 들이지 않았다.

그의 눈썹이 미세하게 움직였다. 질문은 하지 않았다. 그 대신 문이 닫히는 2초 동안 나를 똑바로 응시했다.

문이 닫혔다. 층수 표시가 깜빡이며 내려가기 시작했다.

나는 돌아섰다. 계단 쪽으로 걸었다. 구두 소리가 빈 복도에 세 번 울리고 이내 조용해졌다.

계단 입구 손잡이를 잡았을 때, 엘리베이터가 1층에 도착하는 소리가 멀리서 들렸다.

차민혁은 지금쯤 로비를 가로지르고 있을 것이다. 그가 나를 기록해온 이유를, 나는 아직 모른다. 경쟁 감시일 수도 있고, 다른 무엇일 수도 있다. 어쨌든 그는 내 모든 데이터를 가진 채, 여전히 공정함을 말할 수 있는 사람이다.

계단을 한 칸 내려갔다. 불이 꺼진 층계참에 잠시 멈춰 섰다.

내 첫 카피를 입에 올린 그 목소리가 귀에 남았다.

‘빠르게 사라지는 것들에 대하여.’

나는 계속 내려갔다.

PT는 사랑을 싣고4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