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T는 사랑을 싣고
5화
복도로 나왔다. 형광등이 눈부셨다. 휴대폰을 꺼내자 백실장이 보낸 공식 브리핑 요약 메일이 와 있었다. ‘참석 대상: 윤가람 대리팀·차민혁 팀장팀 전원. 일정: 사흘 뒤 1박 2일 공동 워크숍.’
강수아가 내 옆에 섰다.
“언니, 이거—— 잠깐만.”
그녀의 시선이 복도 저 끝에 고정됐다.
오지혁이 서 있었다. 차민혁과 함께 복도를 걸어가다 누군가의 부름에 멈춰 섰다. 백실장이 짧게 전하고 지나갔다. 차민혁은 이미 저만치 앞서 걸어가고 있었다.
강수아가 발을 뗐다. 망설임은 두 걸음. 세 걸음째는 속도가 붙었다.
“오지혁.”
내 앞에서 오 년간 들어본 적 없는 굵기의 목소리였다.
오지혁이 돌아봤다. 눈썹이 올라가기까지 반 박자 걸렸다. 1초 뒤, 올라간 눈썹이 천천히 내려왔다.
“……강수아.”
강수아가 평소보다 한 템포 느리게, 거의 확인하듯 말했다.
“나야. 맞네, 진짜 오지혁이네.”
오지혁은 대답 대신 태블릿을 다른 손으로 옮겨 쥐었다.
“알고 있었냐.”
“이름은 봤다. 같은 회사인 건 오늘 처음 안 거고.”
“나도야. 명단에서 보고——”
강수아가 허공에 동그라미를 그렸다. 할 말이 많은데 정리 중일 때 나오는 손짓이었다.
“뭐, 대학 동기. 광고학과 11학번. 맞지?”
오지혁이 한 번 더 고개를 끄덙였다. 태블릿을 든 손을 내려 팔짱을 꼈다.
“워크숍 조 편성. 내가 정한다.”
강수아가 눈을 깜빡였다.
“야——”
“같은 조 해주면 좋은 거고. 아니면 말고.”
그가 뒤를 돌아봤다. 복도 저편, 차민혁이 유리문 앞에서 잠시 멈춰 서 있었다. 내가 그의 시선을 따라가자, 차민혁은 이미 고개를 돌렸다. 발걸음을 옮겨 복도 모퉁이로 사라졌다.
세 사람의 거리는 3미터 남짓이었다. 차민혁은 아무 말도 꺼내지 않았다. 모르는 척, 혹은 알면서도 넘기는 척.
오지혁이 다시 강수아를 향해 섰다.
“사흘 뒤.”
그는 짧게 말하고 휴대폰을 흔들어 보였다. 번호는 묻지 않았다. 강수아가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고, 오지혁은 뒤돌아 차민혁이 사라진 모퉁이로 천천히 걸어갔다.
내 옆으로 돌아온 강수아의 얼굴에는 당혹감과, 그것을 덮으려는 억지 담담함이 반씩 섞여 있었다.
“11학번 동기래.”
“……들은 그대로야.”
“아, 진짜 오랜만이다. 내가 좀 놀라서.”
그녀가 손으로 뺨을 살짝 때렸다. 본인에게 하는 작은 제스처였다. 그러고는 평소의 톤을 되찾으려는 듯 말을 빨리 이었다.
“그것보다 언니, 워크숍이라니. 미쳤다. 같은 데서 자고, 아침에 제비뽑기로 발표 순서 정하고. 클라이언트가 직접 평가.”
나는 대답 없이 대회의실 쪽을 돌아봤다. 유리 너머로 정세연이 백실장과 나란히 서서 태블릿 화면을 빠르게 넘기고 있었다.
내 손목 보호대 아래로 맥박이 조금 빨리 뛰고 있었다.
사흘 뒤. 1박 2일. 같은 공간.
그리고 차민혁.
대회의실 유리문이 닫힌 지 채 15분도 안 돼서 백실장이 내 자리로 왔다.
“윤가람 씨, 그리고 차민혁 팀장님.”
탁자 모서리를 톡톡 두드리며.
“정세연 대표님이 소회의실로 따로 부르시네. 두 분만.”
차민혁이 노트북을 접었다. 나는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백실장의 눈빛은 평소보다 또렷했다. 무슨 말을 더 하고 싶은데 참는 얼굴이었다.
소회의실 문을 열자 정세연이 창가에 서 있었다. 오전 브리핑 때와 달리 재킷을 벗어 의자 등받이에 걸쳐 두고, 팔짱을 낀 채였다.
“앉으세요.”
내가 먼저 앉았다. 차민혁은 내 오른쪽 의자를 잡고 1초쯤 멈췄다가 앉았다. 정세연이 테이블에 손을 짚었다.
“브리핑 보고 확신이 들었어요. 두 분이 협업해야 이 프로젝트가 삽니다.”
차민혁이 고개를 약간 들었다. 나는 말하지 않았다.
“워크숍 첫날 모의 PT를 제가 직접 보겠습니다. 공동 전략으로 준비하세요.”
“……기한은요.”
내 목소리가 한 템포 늦었다.
“사흘 뒤. 양평 워크숍 당일.”
차민혁이 대답했다.
“가능합니다.”
그의 말투는 평소처럼 간결했다. 다만 테이블 위에 올린 손등에 힘이 들어가 있었다.
정세연이 나를 봤다. 나는 그의 옆얼굴을 보지 않고 정세연을 똑바로 응시했다.
“준비하겠습니다.”
목소리는 평소보다 낮았다. 정세연이 알았다는 듯 고개를 한 번 끄덕이고 재킷을 집어 들었다.
“자리 비울게요. 출발 전에 자료 공유해 주시고.”
문이 닫혔다. 방 안이 갑자기 조용해졌다. 차민혁이 나를 향해 몸을 반쯤 틀었다.
“공동 전략은 오늘 밤까지 방향을 잡아야 한다.”
“알고 있어요.”
“내일은 시뮬레이션 돌리고, 모레——”
“그건 팀장님이 더 잘 알 거고.”
말을 끊었다. 의도한 건 아니었지만 이미 입 밖으로 나왔다. 차민혁의 눈썹이 올라가지 않았다. 그런데 눈빛이 살짝 좁아졌다.
“……일단 각자 초안을 정리하죠.”
내가 덧붙였다. 그가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2초쯤 침묵. 그 사이로 복도 저편에서 복사기 돌아가는 소리만 들렸다.
“좋다.”
그가 일어나며 서류 봉투를 챙겼다.
“오늘 밤 파일 공유. 늦어도 아홉 시까지.”
“네.”
나도 일어났다. 그가 문을 먼저 열고 나갔다. 나는 의자 밀어 넣는 걸 잠시 잊고 창밖을 봤다. 사흘 뒤면 이 사람과 같은 테이블에서 발표를 한다.
두 시간쯤 지났을까. 사내 메신저로 워크숍 조 배정 안내가 떴다. 나는 A조, 차민혁은 B조. 같은 숙소 다른 층. 작은 안도감.
오후 두 시 무렵이었다. 복도로 나가던 중 차민혁팀 사무실 앞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조 배정 나왔네. 워크숍 때 말이야, 2019년 공모전 때처럼 자료 정리 잘해야 한다.”
오지혁의 목소리였다. 건조하고 가벼웠다. 주변 팀원 몇 명이 고개를 끄덕이며 지나갔다.
내 발이 멎었다.
2019년 공모전.
심장이 먼저 반응했다.
“……아까 강수아 씨한테 들었는데, B조에——”
오지혁이 덧붙이던 말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손목이 차가워졌다. 나는 몸을 돌렸다.
발걸음이 조금 빨랐다. 복도 바닥에 깔린 회색 카펫 위로 구두 소리가 짧게 연속해서 났다. 그 소리가 내 귀에는 제 발소리 같지 않았다.
“대리님?”
오지혁이 뒤를 돌아보는 느낌이 들었다.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텀블러를 가지러 간다는 변명도 떠오르지 않아 그냥 걸었다.
차민혁이 사무실 유리문 안쪽에서 나오는 모서리 부분이 보였다. 그는 나를 보고 있었던 것 같다. 등을.
나는 멈추지 않았다.
그의 시선이 짧게 내 어깨 위를 스치고는 복도 저편으로 옮겨가는 것 같았다. 나는 모퉁이를 돌았다. 손 끝이 살짝 떨렸다. 여섯 해 전, 신입 시절 공모전의 어떤 순간이 한꺼번에 뇌리를 쳤다.
그걸 들켰을 거란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냥 그 단어 자체가 칼날 같았다. 오지혁은 지금쯤 여전히 아무것도 모르는 낯으로 강수아의 조 배정을 이야기하고 있겠지.
차민혁은 잠시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내가 사라진 모퉁이를 보고 있었던 것 같다. 손에 든 워크숍 안건 자료를 한 번 말아 쥐었다. 그리곤 아무 말 없이 자신의 팀 사무실로 다시 들어갔다.
사흘 뒤.
경기도 양평, 더 포레스트 빌리지 로비는 예상보다 한적했다. 통창으로 스며든 오후 햇살이 나무 향과 뒤섞여 바닥에 길게 누워 있었다. 나는 캐리어 손잡이를 접고 카운터를 찾으려다 걸음을 멈췄다.
로비 소파에서 차민혁이 일어났다.
짙은 네이비 니트에 면바지 차림. 일할 때와 달리 넥타이도, 수트도 아니었다. 손에는 워크숍 안건 자료가 말려 들려 있었다. 이미 체크인을 마친 모양이었다.
시선이 마주쳤다. 그는 자료를 접어 다른 손으로 옮겼다. 두 걸음만에 거리가 좁아졌다.
“클라이언트가 오늘 저녁부터 바로 모의 PT 준비를 보겠답니다.”
나는 캐리어 손잡이를 다시 쥐었다.
그의 목소리는 여전히 간결했지만, 사무실에서와 달리 끝음이 약간 내려앉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