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T는 사랑을 싣고
6화
B-4 룸은 3층 복도 끝에 붙어 있었다. 통창 너머로 야간 조명이 리조트 산책로를 희끄무레하게 비추고 있었다. 나는 태블릿을 테이블 위에 올리며 차민혁의 손에 들린 안건 자료를 흘깃 봤다. 접힌 자국이 여러 겹이었다.
“자료는 많이 봤나 보네요.”
“필요한 부분만.”
차민혁이 맞은편에 앉으며 태블릿을 폈다. 화면에는 그가 정리한 크리에이티브 컨셉 초안이 떠 있었다. 나도 내 태블릿을 켜서 데이터 분석 슬라이드를 띄웠다. 방 안에 냉장고 돌아가는 소리만 잠시 흘렀다.
“먼저 보시죠.”
내가 태블릿을 돌리자 그가 화면을 훑었다. 눈동자가 표와 그래프 사이를 빠르게 오갔다. 20초쯤 지났을까.
“2535 여성 소비자, 구매 결정 요인 1순위가 ‘성분 안전성’이다. 이 부분.”
“네.”
“근데 이 표본은 자발적 패널 응답 기반이군요.”
“……네.”
“그럼 과대표집 가능성을 배제 못 합니다.”
이미 알고 있었다. 한소리푸드 PT 때 그가 지적했던 바로 그 지점이었다. 나는 침착하게 말했다.
“보완해서 2차 검증한 리샘플링 데이터가 다음 장에 있어요.”
손가락으로 슬라이드를 넘겼다. 차민혁이 잠시 들여다보더니 고개를 약간 기울였다.
“표본 크기는 보완했지만, 질문지 설계가 여전히 보수적입니다. 소비자가 ‘성분 안전성’이라고 답한 건, 다른 선택지에 감정적 구매 요인이 누락됐기 때문일 수 있다.”
“감정적 구매 요인은 크리에이티브에서 풀어야 할 영역 아닌가요.”
“데이터가 편향돼 있으면 크리에이티브도 왜곡됩니다.”
팔짱을 끼고 그를 똑바로 쳐다봤다.
“그럼 팀장님 크리에이티브 컨셉은요. 제일뷰티 리브랜딩을 ‘럭셔리 한방 화장품의 현대적 재해석’으로 잡으셨던데.”
“문제가 있습니까.”
“리브랜딩 목표가 2030 세대 유입인데, 모던 럭셔리 컨셉은 진입 장벽을 높여요. 기존 충성 고객은 유지되겠지만 신규 유입은 제한적이죠.”
내 목소리가 조금 빨라졌다. 차민혁은 태블릿을 내려놓고 내 데이터 시트를 다시 올려다봤다.
“윤 대리님의 전략은 신규 유입에는 안전하지만——”
“안전하다는 게 단점인가요.”
“브랜드 정체성을 희석시킬 위험이 있습니다. 대중 친화적으로 갈수록 제일뷰티가 가진 핵심 자산, 그러니까 ‘신뢰감’이 옅어진다.”
“신뢰감과 대중성은 양립할 수 있는 가치예요.”
“이론상으로는 그렇습니다.”
눈이 마주쳤다. 그가 먼저 시선을 거두고 태블릿을 탭으로 넘겼다. 나는 손가락으로 테이블 모서리를 한 번 톡 쳤다. 둘 다 할 말이 남았지만 입을 닫았다. 방 안의 정적이 벽에 붙은 플립차트 종이까지 무겁게 눌렀다.
시계를 보니 12시 40분이었다. 차민혁이 내 데이터 시트의 한 지표를 손가락으로 짚었다.
“여기. 2535 여성의 제품 충성도 전환 주기가 평균 8.2개월. 그런데 3040 여성은 14.5개월입니다.”
“네, 그게——”
“이 간극을 단순히 연령 효과로 처리했는데, 다른 변수가 보이지 않습니다. 2535가 충성도를 빨리 버리는 이유를 어떻게 설명할 건지.”
목소리가 평소보다 느렸다. 묻는 척하지 않고 진짜로 답을 기다리는 말투였다. 나는 태블릿을 내 쪽으로 돌리며 슬라이드 한 장을 더 넘겼다.
“이건 본 안에는 넣지 않은 가설인데요.”
스프레드시트 하단에 숨겨둔 탭을 열었다. 2535 여성의 구매 이탈 시점과 SNS 버즈량 변화를 교차한 그래프였다.
“이 연령대는 제품 자체에 충성하는 게 아니라, ‘믿을 만한 정보원’에 충성하는 경향이 있어요. 그 정보원이 바뀌면 제품도 같이 바꿉니다. 전환 주기가 짧은 건 불만족이 아니라 정보 갱신 주기가 빠르기 때문이에요.”
차민혁이 그래프를 들여다봤다. 눈가의 작은 주름이 살짝 접혔다.
“……정보원 충성도.”
“네. 이 가설을 공식 데이터에 넣지 않은 건, 아직 표본이 충분하지 않아서예요. 제일뷰티 프로젝트에 적용하려면——”
“검증된 근거가 더 필요하다.”
“맞아요.”
그가 긴 침묵 끝에 자신의 태블릿을 다시 집었다. 크리에이티브 컨셉 슬라이드를 손가락으로 두 번 쓸어넘기더니, ‘럭셔리’라는 단어를 지우고 그 자리에 ‘신뢰 기반’을 입력했다.
“모던 럭셔리에서 방향을 틀겠습니다. 정보원 역할을 할 수 있는 브랜드 톤으로.”
손가락이 멈췄다.
“……괜찮겠습니까.”
“나쁘지 않은 가설입니다.”
최대치의 칭찬이었다. 나는 그가 수정하는 화면을 보며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그러고는 내 데이터 시트로 손을 옮겨, 그가 앞서 지적한 감정적 구매 요인을 변수로 추가한 새 탭을 만들었다.
“내가 이걸 반영할 테니까——”
“정보원 충성도 가설은 내일 오전까지 보강 데이터를 붙여 주십시오.”
“알겠습니다.”
말이 끝나기도 전에 키보드를 치기 시작했다. 두 대의 태블릿 위로 그래프와 슬라이드가 번갈아 떠올랐다. 방 안 공기가 조금씩 풀렸다. 적대감이라기보다는, 서로가 예상보다 더 깊이 팔 수 있는 상대라는 걸 확인한 느낌이었다.
새벽 2시가 넘었을 때 목이 말랐다. 자리에서 일어나자 차민혁이 고개를 들었다.
“잠깐 바람 쐬러요.”
대답 대신 그가 태블릿을 덮었다. 나는 먼저 방을 나섰다. 복도는 텅 비어 있었고, 로비 층으로 내려가는 계단에 발소리만 두 번 울렸다.
리조트 1층 편의점은 형광등만 환하게 켜져 있었다. 나는 냉장고에서 생수를 꺼내다가 컵라면 두 개를 집었다. 계산대에서 봉지를 받아 드는데, 유리문이 열렸다.
“……여기도 오셨네요.”
차민혁이 서 있었다. 손에는 계산을 마친 캔커피가 들려 있었다. 나는 봉지를 살짝 들어 보였다.
“하나 드릴까요.”
“괜찮습니다.”
하지만 내가 편의점 앞 테이블에 앉아 컵라면 뚜껑을 열자, 그도 맞은편에 앉았다. 정수기 뜨거운 물을 따른 컵라면 두 개 사이로 김이 올라왔다. 밖은 완전히 어두웠고, 로비 쪽 불빛만 길게 늘어져 있었다.
“팀장님은 원래 이렇게 밤에 커피를 마셔요.”
“습관입니다.”
“야근의 습관이면 몸에 안 좋은데.”
차민혁이 캔을 내려놓았다. 갑자기 질문이 입 밖으로 나왔다.
“왜 저한테만 더 냉정하게 구는 거죠.”
내 목소리는 반쯤 농담조였지만, 끝음이 살짝 올라가지 않았다.
차민혁은 잠시 나를 보다가 캔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당신이 유일하기 때문입니다.”
“네?”
“이 회사에서 나를 긴장하게 만드는 AE는 당신뿐이다.”
나는 젓가락을 든 채 멈췄다. 그가 나를 똑바로 쳐다보고 있었다. 눈빛이 평소처럼 차갑지 않았다. 그렇다고 부드럽지도 않았다. 그냥 정직했다.
“……그게 칭찬인가요.”
“확인하게 한다는 뜻입니다. 내 판단을.”
대답하려는데, 그가 덧붙였다. 목소리 톤이 한 톤 내려갔다.
“작년엔 이 회사에서 퇴사자가 하나 있었습니다.”
“알아요. 디자인팀——”
“커플이었습니다.”
젓가락을 내려놨다. 그는 캔을 손바닥 안에서 천천히 돌렸다.
“인사위원회 소집 통보가 나고, 둘 중 하나가 먼저 사표를 냈습니다. 상대는 그걸 막지 못했고.”
“……어떻게 됐는데요.”
“둘 다 퇴사했습니다. 먼저 나간 사람은 다른 에이전시로 이직했고, 뒤따라 나간 사람은 업계를 떠났습니다.”
컵라면에서 김이 가늘게 올라오고 있었다. 차민혁이 캔을 테이블에 가만히 내려놓았다.
“규정은 규정입니다. 감정과 무관하게 작동합니다.”
나는 생수 뚜껑을 돌려 닫았다. 손끝이 살짝 시렸다.
“……왜 그 이야기를 지금.”
“모릅니다.”
정말 모른다는 얼굴이었다. 아니, 모른다기보다는 묻고 싶지 않은 걸 애써 삼키는 표정에 가까웠다. 나는 컵라면 면발을 한 번 저었다. 차민혁은 더 말하지 않았고, 나도 묻지 않았다. 다만 그의 ‘긴장하게 만든다’는 말이 작은 파문처럼 가슴께에 남아,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의자에서 몸을 일으키려다 그가 짧게 말했다.
“컵라면은 3분 뒤에 드십시오.”
“……네?”
“지금 먹으면 면이 딱딱합니다.”
나는 멈칫하다가 시계를 봤다. 물을 부은 지 1분 30초쯤이었다. 피식 웃음이 났다. 이 남자가 컵라면 조리 시간을 재고 있었다는 사실이, 오늘 밤 들은 어떤 말보다도 이상하게 무게가 실렸다.
“……알겠습니다.”
내가 대답하자 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손에 든 캔커피는 아직 반쯤 남아 있었다. 나는 혼자 남아 컵라면 뚜껑을 덮으며, 차민혁의 뒷모습이 계단으로 사라지는 걸 잠시 바라봤다.
컵라면을 다 먹고 텀블러까지 씻어둔 게 새벽 세 시였다. 차민혁은 복도 건너 B-4 룸으로 먼저 가 있겠다고 했고, 나는 남은 자료를 챙겨 그 뒤를 따랐다. 이후로는 서로 말이 많지 않았다. 노트북 화면을 사이에 두고 수치와 논리를 주고받는 동안 어느새 블라인드 틈으로 희뿌연 햇살이 새어들었다.
워크숍 둘째 날 오후, 더 포레스트 빌리지 메인 컨퍼런스 홀로 향하는 복도에서 차민혁이 내 어깨 바로 뒤에서 걸었다.
더 포레스트 빌리지 메인 컨퍼런스 홀은 워크숍 둘째 날 오후, 예상보다 더 많은 인원이 채우고 있었다. 클라이언트 정세연 대표가 첫 줄 중앙에 앉았고, 양쪽 테이블에는 양대 에이전시 실무진이 길게 늘어섰다.
나는 발표 자료의 마지막 슬라이드를 띄운 채 호흡을 가다듬었다. 차민혁이 내 옆에서 노트북을 조작하다 고개를 살짝 들었다. 그 눈빛은 지금까지와 달랐다. 긴장이 아니라, 확인이었다.
“이상입니다.”
내 목소리가 마이크를 타고 홀 구석까지 닿았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정세연 대표가 손끝으로 테이블을 한 번 두드렸다.
그리고 누군가가 첫 박수를 쳤다. 백실장이었다. 곧이어 전체가 따라붙었다. 기립하는 사람들이 하나둘 늘어났다. 소파에 앉아 있던 입회 진행관까지 일어섰다.
나는 마이크를 내려놓았다. 손가락 끝이 살짝 저렸다.
차민혁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넥타이 없는 네이비 니트 차림으로 발표대 옆에 섰다. 그의 시선이 청중을 훑고 나서 내게로 돌아왔다.
“지금 이 논리는, 내가 목표로 삼던 것과 정확히 같습니다.”
홀이 다시 조용해졌다.
“이 자리에서 인정합니다. 윤가람 대리님이 설계하고 제가 다듬은 이 전략은, 납품용 기획이 아니라 시장을 바꾸는 기획입니다.”
나는 그 옆얼굴을 보고 있었다. 평소의 무표정이 아니었다. 입가가 살짝 당겨져 있었고, 목소리는 느렸다. 진짜 감정이 담겼을 때 말이 느려지는 남자였다.
“나쁘지 않다”가 아니라 “인정합니다”였다.
청중 사이에서 작은 웅성임이 일었다. 정세연 대표가 뒤를 돌아 실무진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누군가 “공동 PT 맞아?”라는 농담을 던졌고, 웃음이 퍼졌다.
나는 손을 내려 태블릿을 가방에 넣었다. 축하 리셉션으로 이어지는 뒷정리 속에서도 그 목소리가 귀에 남았다.
호숫가 산책로에는 나무 데크가 깔려 있었고, 저녁 일곱 시 사십 분쯤의 공기는 제법 쌀쌀했다. 리셉션장의 와인 향이 채 가시지 않은 셔츠 소매를 한 번 당겼다.
차민혁은 내 앞서 걷다가 천천히 멈춰 섰다. 호수 위로 마지막 햇빛이 얇게 깔려 있었다.
“차 팀장님.”
내가 불렀다. 그가 돌아보았다.
“아까 그 발언, 진심입니까.”
“어느 부분 말입니까.”
“인정한다는 부분이요.”
차민혁은 내 얼굴을 한 호흡 정도 바라보았다. 그리곤 데크 난간 쪽으로 반 걸음 옮겼다.
“진심이 아니면 그런 말 하지 않습니다.”
“……알고 있습니다.”
“그럼 질문이 따로 있다는 뜻이군요.”
나는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호수에서 불어온 바람이 내 앞머리를 밀었다.
“왜 저와 같은 방향이라고 생각했는지, 그걸 묻고 싶었어요.”
그의 시선이 내 이마에서 눈으로 내려왔다. 빛이 빠르게 옅어지고 있었다.
“햇수로 6년 전. 윤 대리님의 첫 입사 카피를 봤습니다.”
내 손목이 굳었다.
“사내 인트라넷에 잠시 올라왔던 텍스트였죠.”
“……그걸 기억하세요.”
“텍스트가 좋았으니까요.”
그 말이 앞선 사건에서 엘리베이터 안에서와 똑같은 음절로 떨어졌다. 나는 눈을 깜빡였다.
차민혁은 난간을 짚지도 않고 그 자리에 섰다.
“그 카피를 본 순간부터, 당신이 이 업계에서 내가 마주한 유일한 같은 방향성이었습니다.”
가슴속에서 작은 돌덩이가 한 번 더 떨어졌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 돌이 바닥에 닿지 않았다. 대신 여섯 해 전 공모전 심사장 복도가 떠올랐다.
누군가의 아이디어 보드가 복도 벽에 붙어 있었고, 나는 그걸 보면서 생각했다. 이 사람 앞에서는 내가 안 된다고. 그가 떨어지자 안도했던 순간. 입술 안쪽을 씹었던 그 버릇.
눈앞에 있는 남자는 그걸 모른다. 지금도 내 카피를 말하며 눈빛을 조금 풀고 있다.
내 표정이 무너지는 것을 스스로 느꼈다. 입가의 긴장이 풀리면서 오히려 얼굴이 굳어졌다. 눈꺼풀이 살짝 떨렸다.
“……네.”
겨우 그 한 마디가 나왔다. 그의 시선이 내 얼굴에 멈췄다. 뭔가를 읽으려는 듯, 그러나 묻지 않았다.
“윤 대리님.”
내가 고개를 들자 그가 말을 멈췄다. 무표정이 돌아와 있었지만, 눈가의 주름은 달랐다. 의아함이 거기 있었다.
나는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데크가 미세하게 삐걱댔다.
“잠시…… 바람 좀 쐬고 들어갈게요.”
차민혁은 대답하지 않았다. 다만 내 어깨 너머의 어둑해진 호수를 보고 있었다. 내가 돌아서자, 산책로 데크가 남은 햇빛을 완전히 놓았다. 뒤에서 발소리가 따라붙지 않았다.
그는 거기 서 있을 것이다. 내 표정에서 무엇을 보았는지, 아직 묻지 않은 채. 그리고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