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verStory

PT는 사랑을 싣고

7화

월요일. 오전 아홉 시 십 분.

탕비실 유리문이 열리고 강수아가 얼굴만 들이밀었다.

“언니, 여기 있었네.”

손에 뭔가를 쥐고 있었다. DVD 대여점 전단지였다. 워크숌 갔던 양평 읍내 편의점 봉투에 들어 있던 거라고 했다.

나는 정수기 버튼에서 손을 뗐다.

“아침부터 무슨 전단이야.”

“이거 뒷면.”

강수아가 전단을 뒤집었다. 연필로 쓴 손글씨가 반듯하게 박혀 있었다.

‘다음에는 안 늦을게. ― 2016. 5. 12.’

강수아는 전단지를 테이블 위에 밀어 놓고, 내 컵을 자기 쪽으로 살짝 당겼다.

“오지혁이 쓴 거야. 우리 스무 살 때.”

입술을 한 번 깨물었다가 말을 이었다.

“동아리 MT 갔는데, 내가 막차 놓쳐서 울고 있었어. 그때 쪽지 대신 이걸 줬어. DVD 전단지 뒷면. 원래 그런 애야.”

“……그런 애였구나.”

내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강수아는 웃었지만 눈빛이 웃지 않았다.

“근데 이걸 내가 왜 갖고 있었냐면.”

전단지 끝을 손가락으로 톡톡 쳤다.

“편의점 갔다가 똑같은 DVD 전단 딱 나오는데, 그 순간 오지혁 얼굴이 딱 스쳐 지나갔어. 말도 안 되는 우연이잖아. 그런데 내 손은 이미 전단을 집고 뒷면을 확인하고 있었어.”

그녀가 컵을 다시 내 쪽으로 밀었다. 물은 한 모금도 안 마셨다.

“사귀었던 건 아니고.”

강수아가 손을 내저었다.

“고백 비슷한 걸 받은 적은 있어. 근데 내가 얼버무렸어. 그 뒤로 좀 어색해지고, 졸업하고 연락 끊겼고.”

“……워크숍에서 다시 만날 때까지.”

“응. 그런데 그 인간, 내 얼굴 보자마자 표정이 하나도 안 변하는 거야.”

나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강수아는 내 눈치를 보지 않았다. 다만 전단지를 반으로 접으며 목소리를 낮췄다.

“이런 거, 회사에서 알면 안 되잖아요. 그쵸?”

“……그렇지.”

“그러니까 언니만 알고 있어요.”

전단지를 주머니에 넣는 손이 빨랐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사내 연애. 발각되면 한 명은 팀을 옮기거나 퇴사하는 게 이 회사의 룰이었다.

“강수아.”

“네.”

“비밀로 할게.”

“고마워요, 언니.”

그녀가 환하게 웃었다. 그 미소는 이미 평소의 강수아였다. 내 가슴속에만 작은 돌이 하나 더 앉았다.

탕비실 문을 나서자 오픈 오피스 공간이 평소보다 조용했다.

열 시 직후다.

전 직원의 모니터에 인사팀 메일 알림이 동시에 떴다. 제목은 ‘인사 발령 사항 공지’였다. 형식적인 사내 메일인데, 이번엔 클릭하는 손가락들이 평소보다 더뎠다.

나도 클릭했다.

‘AE 송유진 대리, AE 이태호 대리 — 2020년 11월 2일부로 퇴사하였음을 알려드립니다.’

사유는 안 써 있었다. 하지만 다 알고 있었다. 수군거림은 한 마디도 없었다. 그게 더 무서웠다.

자리에서 일어난 건 백실장이었다.

“뭐, 다들 확인했겠지.”

탁자 모서리에 기대서서 두 팔짱을 꼈다. 강렬한 오렌지 컬러 재킷이 오늘따라 눈에 거슬렸다. 백실장의 시선이 내 옆자리 빈 책상 두 개를 훑었다.

송유진 책상. 이태호 책상.

어제까지만 해도 포스트잇과 텀블러가 올려져 있었다.

“어쩌겠어.”

백실장이 혼잣말처럼 말했다. 그러고는 내 쪽을 봤다. 그 시선이 반 박자 더 길었다.

“윤가람 씨.”

“네.”

“아까 그 메일, 다 읽었어?”

“네.”

“그래… 뭐.”

그녀의 말꼬리가 흐려졌다. 손가락으로 탁자를 한 번 두드린 뒤, 아무 말 없이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나는 모니터를 다시 내렸다. 송유진은 내가 신입 때 같은 팀이었다. 나는 손목 보호대를 손가락으로 한 번 당겼다.

그때 차민혁이 자기 팀 구역에서 일어서는 소리가 들렸다.

“오지혁. 공유 폴더.”

짧았다.

“지금 업로드합니다.”

오지혁이 노트북을 열었다. 나는 습관적으로 전사 공유 폴더의 메가 프로젝트 섹션을 클릭했다. 아직 빈 폴더였다. 뭐지.

“차민혁 팀장님.”

오지혁이 마우스를 멈추고 그를 올려다봤다.

“분석 자료, 워크숍에서 공유하기로 한 그 거…… 올리면 되는 겁니까.”

“수정 없이. 날짜만 오늘 날짜로.”

“알겠습니다.”

오지혁의 손가락이 빠르게 움직였다. 탭이 몇 개 열리고, 엑셀 파일이 드래그됐다. 내 모니터에서 공유 폴더가 새로고침됐다.

파일명: ‘메가프로젝트소비자데이터분석_차민혁팀.xlsx’

파일 옆에 작은 글씨로 업로드 시각이 찍혔다. 오전 10시 28분.

내 손이 멈췄다. 그 파일을 열자 첫 번째 시트는 인구통계 분할표였다. 두 번째 시트는 구매 동기 키워드 클러스터링. 세 번째 시트에 그래프 다섯 개가 박혀 있었다.

워크숍에서 우리가 밤새 검증했던 가설들.

그걸 누가 더 빨리 클라이언트에게 전하는지가 중요했다.

차민혁의 목소리가 들렸다.

“정세연 대표님께 메일 보냈습니다. 오지혁, 참조 넣었고.”

“네.”

나는 천천히 마우스에서 손을 뗐다. 손끝이 차가웠다. 손목 보호대를 다시 당겼다. 입술 안쪽을 물었다.

그가 약속을 어긴 건 아니다. 데이터는 공유 폴더에 올라와 있다. 누구나 볼 수 있다.

하지만 클라이언트가 먼저 보는 사람. 그게 누구냐가 관건이었다.

장소를 옮겼다.

오후 두 시.

아레나 3는 사무실에서 복도 하나 건넌, 통유리로 된 방음 회의실이었다. 보통 막바지 프레젠테이션 전날 팀장급들이 틀어박혀 자는 곳. 현재는 비어 있었다. 프로젝터 전원도 꺼져 있고, 화이트보드에는 어제 퇴근한 누군가의 낙서가 지워지지 않았다.

나는 회의실 한쪽 구석에 앉아 있었다.

개인 태블릿을 열어 차민혁의 파일을 다시 읽었다. 구매 동기 클러스터링 시트. 소비자 심층 인터뷰에서 자발적으로 언급된 키워드 순위.

6위에 ‘낭비 없는 소비’라는 표제어가 떠 있었다.

우리가 워크숍 새벽에 동시에 발견했던 그 키워드였다. 그 키워드가 왜 중요한지, 나는 알고 있었다. 차민혁도 알고 있었다.

나는 태블릿을 닫았다.

눈앞의 화이트보드가 흐릿하게 번졌다.

대학교 4학년 가을.

2019 대한민국 광고 공모전 신인부문.

나는 심사장 복도에서 우연히 차민혁의 아이디어 보드를 봤다. A2 사이즈 보드에 붙은 슬로건과 이미지. 깔끔한 레이아웃.

그런데 한눈에 알 수 있었다. 캠페인의 핵심 타깃 설정이 빗나갔다.

25~35세 남성 소비자를 공략해야 하는데, 그는 20대 여성 소비자로 설정했다. 광고주 브리프를 잘못 읽은 거였다. 데이터 해석은 날카로웠지만, 단 한 개의 숫자가 틀렸다.

심사위원 누구도 그걸 지적하지 않았다. 아니면 지적할 시간이 없었거나. 나는 그 보드 앞에서 오 분을 서 있었다. 누군가 내 어깨를 스치고 지나갔다. 그가 저쪽 복도에서 친구들과 웃고 있었다.

나는 입술을 물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 공모전에서 내가 본선에 오르고, 차민혁은 탈락했다.

나는 그 후로 여섯 해 동안 그 복도를 떠올리지 않으려 애썼다. 하지만 내 손은 기억하고 있었다. 그때도 지금과 똑같이 무언가를 쥐지 않고, 입술을 물었다.

“결국 사람은 안 변하나 봐.”

혼잣말이 공기 중에 흩어졌다. 내가 오늘 차민혁에게 화낼 자격은 없었다. 그건 나도 알고 있었다.

문 열리는 소리.

고개를 들자 차민혁이었다. 손에 태블릿을 들고, 넥타이 핀만 단정하다. 그의 시선이 나를 찾아 멈췄다.

“여기 있었군요.”

문이 닫혔다. 그의 발소리가 테이블을 한 바퀴 돌아 내 앞에 멈췄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아까 올리신 데이터.”

내 목소리는 생각보다 평온했다.

“클라이언트한테 먼저 메일 보내셨더라고요.”

“공유 폴더에 올렸습니다. 규정 위반은 아닙니다.”

“규정 얘기하는 거 아니에요.”

내가 일어섰다.

“워크숍에서 같이 밤새웠잖아요. 그 키워드도, 인사이트도…… 저랑 같이 찾은 것들이 대부분이에요. 그걸 왜 혼자 올렸냐고요.”

차민혁은 잠시 말이 없었다. 태블릿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는 손이 느렸다.

“……윤 대리님. 제가 원칙을 어겼습니까.”

“말 돌리지 마세요.”

“원칙을 묻는 겁니다.”

그의 눈빛이 평소보다 차가웠다가, 다시 뭔가를 눌러 담는 느낌으로 변했다.

“공유 폴더는 전 직원 열람입니다. 업로드 순서에 대한 규칙은 없습니다.”

“상식의 문제잖아요.”

“상식은 주관적입니다. 저는 공정한 경쟁을 한 것뿐입니다.”

그 한 마디에 나는 숨을 들이켰다.

‘공정함이야말로 내가 지킬 수 있는 유일한 것.’

그가 언젠가 오지혁에게 했던 말이었다. 엘리베이터 로비에서, 내가 우연히 엿들었던.

지금 그 말이 내 앞에서 다시 나왔다.

“……공정함요.”

내가 작게 말했다.

“그게 팀장님한테 그렇게 중요한 거예요.”

“이 회사에서 제가 지킬 수 있는 유일한 것입니다.”

그가 천장을 바라보지도, 나를 똑바로 보지도 않았다.

“누군가에게는 유일한 무기고, 누군가에게는 유일한 방패죠. 저는 전자입니다.”

입술을 열었지만, 목소리가 안 나왔다. 그가 내 무표정 속에서 무언가를 찾으려는 듯 시선을 가만히 두었다.

“왜 그렇게 화가 나는 겁니까.”

“……뭐라고요.”

“윤 대리님은 지금, 제가 데이터를 먼저 올린 것 때문에 화가 난 게 아닙니다.”

차민혁의 목소리가 느려졌다. 진짜 감정이 드러날 때 나오는 속도였다.

“마치 제가…… 당신에게 무슨 잘못을 저지른 사람처럼 보고 있습니다.”

정적.

내 손끝이 떨렸다. 손목 보호대가 아니었다.

“그쪽이 뭘 알아요.”

내 대사는 이미 반말이었다.

“제가 왜 그러는지, 팀장님이 어떻게 알아요.”

“모릅니다.”

그가 대답했다. 빠르고 단호하게. 그러고는 태블릿을 집었다. 손가락이 넥타이 핀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러니까 묻는 겁니다.”

그가 반 박자 멈췄다.

“왜 그런 얼굴로 나를 보는지.”

나는 한 걸음 물러섰다.

“……됐어요.”

“윤 대리님.”

나는 태블릿을 챙겨 가방에 밀어 넣었다. 내 손이 가방 지퍼를 찾지 못해 두 번 만에 잡았다.

“아까 데이터 건, 사과할 생각 없으시죠.”

“……없습니다.”

“저도 더 할 말 없어요.”

나는 그를 스치고 문으로 걸어갔다. 유리문 손잡이에 손이 닿았다. 차가웠다.

하지만 손잡이를 돌리지 못했다. 손끝이 그대로 멈췄다. 문 너머 복도가 희부옇게 보일 뿐, 열리지 않았다. 내 뒤에서 차민혁의 발소리는 없었다.

시간이 길게 늘어지는 느낌이었다.

아레나 3.

차민혁은 그대로 서 있었다. 등을 보이고 멈춰 선 그녀의 뒷모습을 향해 그의 시선이 닿았다. 그는 천천히 태블릿을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손가락 마디가 하얗게 질릴 만큼 주먹을 쥐었다. 유리문에 희미하게 비친 두 사람의 실루엣만이 방음된 공간 속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자신이 왜 그녀의 프로젝트를 계속 기록해왔는지.

첫 카피부터, 엘리베이터에서, 워크숍에서, PT에서.

그것들을 태블릿에 저장하고 확인하고, 또 저장하고.

“……모르겠군.”

그의 혼잣말은 방음 유리에 흡수됐다. 차민혁은 주먹을 풀지 않았다.

PT는 사랑을 싣고7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