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T는 사랑을 싣고
8화
복도는 조용했다. 아레나 3 유리문 너머로 형광등 불빛만 희부옇게 새어나왔다. 강수아는 노트북 가방을 한쪽 어깨에 멘 채 걸음을 멈췄다.
오지혁이 복도 끝 탕비실 앞에 서 있었다. 한 손에 회사 공용 탁상 캘린더 두 부를 들고, 다른 손으로는 자신의 가방 지퍼를 여는 중이었다.
“오지혁.”
그가 고개를 들었다. 손에 든 캘린더를 가방 안으로 밀어 넣는 동작이 멈추지 않았다.
“심야 근무 준비 철저하네.”
강수아가 먼저 입을 열었다. 목소리는 평소보다 반 톤 높았다.
오지혁이 가방을 닫았다. 지퍼 소리가 복도에 짧게 울렸다.
“사진 촬영 일정, 거짓말이지.”
“……뭐?”
“캘린더 확인했다. 지난주 수요일 오후, 야외 촬영 잡혀 있었던 적 없어.”
강수아의 손목이 노트북 가방 끈을 다시 쥐었다. 손끝에 힘이 들어갔다.
“그걸 왜 네가 확인하는데.”
“물을 거면 똑바로 물어.”
오지혁의 말투는 건조했다. 그는 캘린더가 든 가방을 한 번 더 눌러 닫고는 어깨에 걸었다.
“아니면 대답하지 마.”
“오지혁, 지금——”
“자료 먼저 넣어둔다.”
그가 강수아의 말을 잘랐다. 그리고는 아레나 3 유리문을 열었다. 문이 닫히기 전, 그가 잠시 멈춰 섰다. 고개를 돌리지 않은 채였다.
“캘린더 하나는 원래 우리 팀 거다. 확인해.”
문이 닫혔다.
강수아는 복도에 멈춰 섰다. 형광등이 머리 위에서 윙윙거렸다. 손목에 힘을 뺐다가 다시 쥐었다. 가방 끈이 손바닥 안으로 파고들었다.
그녀는 유리문 너머로 오지혁이 노트북을 펼치는 뒷모습을 잠시 바라봤다. 그는 이미 이어폰을 꽂고 있었다.
여섯 호흡쯤 지나서야 강수아도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아레나 3 내부. 오후 9시 반 무렵.
테이블 위에는 노트북 네 대와 태블릿, 출력된 데이터 시트가 흩어져 있었다. 컵라면 용기 둘이 한쪽 구석에 쌓여 있고, 커피 냄새가 환기구를 타고 천천히 돌고 있었다.
윤가람은 소비자 segmentation 데이터의 세 번째 열을 훑고 있었다. 마우스 휠을 두 번 굴렸다 멈추고, 셀 하나를 더블클릭했다.
“여기, 연령대 가중치 재검토 필요해요. 강수아 씨, panel bias 보정값 확인해줄 수 있어요?”
“네, 바로 뽑을게.”
강수아가 옆자리 노트북을 당겼다. 목소리는 평소보다 가라앉아 있었지만 손은 빨랐다.
오지혁은 맞은편에서 묵묵히 그래프 축 단위를 수정하고 있었다. 강수아와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 그가 키보드를 두드릴 때마다 탁자 위 태블릿이 미세하게 진동했다.
차민혁은 테이블 끝에 앉아 있었다. 태블릿 화면 위로 펜을 대고 메모를 적다가, 화면을 끄고 뒤집어 내려놓았다.
“경쟁사 벤치마킹 슬라이드는 내일 오전까지 검토 끝냅니다.”
그가 말했다. 청자를 특정하지 않은 목소리였다. 윤가람은 고개를 들지 않았다.
“저도 내일 중으로 트리니티 케이스 스터디 파트 정리할게요.”
두 사람의 대화 사이에 오가는 시선은 없었다.
그때 문이 열리고 백실장이 들어왔다. 양복 재킷을 이미 벗어 팔에 걸친 차림이었다. 그녀는 테이블 위 자료를 한 번 둘러보고는 낮게 숨을 내쉬었다.
“뭐… 열심들 하네.”
백실장이 벽면 화이트보드 앞으로 걸어가 마커를 집었다. 결재 라인이라고 크게 쓰고, 그 아래에 ‘22:00’이라고 적었다.
“밤 열 시 넘으면 이거 올릴 거니까.”
마커를 내려놓으며 덧붙였다.
“두 사람 남는 건, 뭐… 오늘은 내가 못 본 거다.”
그녀의 눈이 차민혁과 윤가람을 차례로 스치고 지나갔다. 추가 설명은 없었다.
강수아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파일을 USB에 저장하고, 노트북을 접었다.
“저 먼저 들어갈게요. 데이터는 공유 폴더에 올렸습니다.”
오지혁도 노트북을 가방에 밀어 넣었다. 캘린더가 든 가방을 다시 한 번 확인하듯 손바닥으로 눌렀다.
“그래프 축 수정본, 내일 아침 회람 돌릴게요.”
그가 강수아보다 반 발짝 먼저 문으로 향했다. 강수아는 잠시 멈춰 서 있다가, 결국 따라 나갔다. 문이 닫힐 때 두 사람의 뒷모습 사이 간격은 어깨 하나 너비만큼이었다.
백실장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고는 재킷을 다시 어깨에 걸쳤다.
“퇴근.”
말 한 마디만 남기고 그녀도 나갔다.
아레나 3에 침묵이 내려앉았다. 윤가람은 노트북 화면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차민혁은 뒤집어둔 태블릿 위에 손을 얹은 채였다. 두 사람 사이 거리는 테이블 하나, 그리고 여섯 시간 전 언어의 잔해뿐이었다.
복도 너머 사무실이 완전히 비워진 뒤, 프로젝트 룸의 공기는 한결 가라앉았다. 형광등 하나가 나간 자리마다 그림자가 길게 늘어져 책상 모서리를 덮었다. 윤가람은 오후 내내 목을 조르던 타이의 매듭을 느슨하게 풀었고, 차민혁은 뒤집어둔 태블릿을 밀어 두고 대신 인쇄물 묶음으로 손을 뻗었다. 두 사람 사이 거리는 여전히 테이블 하나였지만, 침묵의 무게는 퇴근 인파가 빠져나간 만큼 가벼워져 있었다.
아레나 3의 형광등은 두 개 중 하나만 켜져 있었다. 나머지 하나는 형광등 깜빡임이 사나흘째 이어지다 오늘 오후 완전히 나갔다. 누가 신고했는지 몰라도 총무과는 오지 않았다.
복도 너머 사무실은 이미 텅 비었다. 백실장이 퇴근 전 두 사람을 번갈아 보며 한숨을 쉰 게 두 시간 전, 오지혁과 강수아가 데이터 정리를 마치고 연이어 자리를 뜬 게 한 시간 전이었다.
탁자 위에는 메가 프로젝트 중간 발표 자료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노트북 두 대가 나란히 켜져 있고, 화이트보드에는 어제 누군가 그린 소비자 페르소나 도식이 반쯤 지워진 채 남아 있었다. 방음 유리 너머로 복도는 희부옇고 고요했다.
차민혁이 내 쪽 자료 더미에서 한 장을 뽑아 들었다. 중간 발표용 타깃 분석 요약본이었다.
“이 부분.”
그가 종이를 탁자에 내려놓으며 손가락으로 한 문장을 짚었다.
“2535 여성 소비자의 구매 결정 요인을 ‘가격 민감도’로 단순화한 근거가 빈약합니다.”
나는 노트북 화면에서 시선을 뗐다.
“워크숍에서 같이 검증한 2차 데이터에서도 가격 요인이 1순위였어요.”
“그 데이터의 표본은 자발적 참여 패널입니다. 제품 관여도가 높은 응답자가 과대표집됐을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았고.”
차민혁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더 건조했다. 보고서를 읽는 톤이 아니라, 문장마다 마침표를 찍는 톤.
“가격 외 변수, 특히 브랜드 신뢰도와 구매 경험의 상관관계를 배제한 해석은 중간 발표에서 클라이언트에게 공격당할 빌미를 줍니다.”
“그럼 팀장님은 어떤 근거로 브랜드 신뢰도를 넣으려는 거죠.”
나는 의자에서 일어나지 않고 그를 올려다봤다.
“그것도 워크숍 데이터 안에 있었나요. 우리가 같이 본 것 말고, 팀장님이 정세연 대표님께 먼저 보낸 메일 안에.”
정적이 방 안을 메웠다. 형광등이 미세하게 윙윙거렸다.
“……그 메일은 공유 폴더 업로드 이후에 발송했습니다. 규정 위반이 아닙니다.”
“규정 얘기하는 거 아니에요.”
내 목소리가 빨라지기 시작했다.
“선점한 데이터로 유리한 프레임만 짜는 게, 팀장님이 말하는 공정인지 묻는 거예요.”
차민혁의 손가락이 종이 위에서 멈췄다.
“데이터 선점이 아니라 전략적 판단입니다.”
그가 똑바로 나를 바라봤다. 눈동자가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
“공유 폴더는 누구에게나 열려 있었고, 누가 먼저 클라이언트에게 제안하느냐는——”
“그 판단이 워크숍에서 밤새 같이 만든 가설을, 나랑 상의도 없이, 그냥.”
나는 말을 끊었다. 내 입술이 바짝 말라 있었다. 손목 보호대를 한 손으로 탁자 모서리를 꽉 쥐었다.
“팀장님은 그게 전략이라고 생각하겠죠. 나는——”
숨이 턱 막혔다. 목소리가 갈라졌다.
“나는 그런 식으로 이긴 적 없어요.”
차민혁의 미간이 좁아졌다.
“……무슨 말입니까.”
그의 목소리가 조금 느려졌다. 처음으로, 그날 밤 아레나 3에서 내 뒷모습을 향해 던졌던 질문의 속도와 비슷해졌다.
나는 손을 탁자에서 뗐다. 손가락 끝이 떨리고 있었다. 보호대를 다시 당겼다가, 그냥 풀었다. 밴크로가 찢어지는 소리가 났다.
“6년 전이요.”
내 입에서 말이 새어나왔다.
“2019년 대한민국 광고 공모전 신인부문. 팀장님 출품작.”
차민혁의 손이 멈췄다. 그가 들고 있던 자료가 천천히 탁자 위로 내려갔다. 손가락 마디가 하얗게 질렸다.
“내가 그날 심사장 복도에서 우연히…… 팀장님 아이디어 보드를 봤어요.”
나는 그의 눈을 똑바로 보지 못했다. 유리문 너머 희부연 복도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타깃 설정 오류였어요. 핵심 소비자군을 3040 남성으로 잡았는데, 제품의 실제 구매 데이터는 2030 여성이 주도하고 있었고.”
“……뭐라고.”
차민혁의 첫 음절은 무너지지 않았다. 하지만 두 번째 음절에서 미세한 균열이 생겼다.
“자네가…… 그걸 어떻게.”
“그게 끝이 아니에요.”
내가 말했다. 내 목소리는 이미 반말이었고, 내 손은 보호대를 둘둘 말고 있었다.
“나는 그걸 발견했어요. 알아챘어요. 그런데.”
숨을 들이쉬었다.
“아무 말도 안 했어요.”
정적이 길게 늘어졌다. 형광등이 꺼질 듯 깜빡였다가 다시 켜졌다.
차민혁은 움직이지 않았다. 손가락이 탁자 위에 그대로 멈춰 있었고,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그게 무슨.”
그가 말했다. 그의 목소리는 더 이상 냉정하지 않았다. 처음으로 차민혁이 문장을 완성하지 못했다.
“왜.”
한 글자였다.
“경쟁심이었어요.”
내 대답은 빨랐다. 너무 오래 묵혀둔 말이 쏟아져 나왔다.
“같은 신인부문에 출품한 다른 참가자였고, 그 사람 아이디어에서 치명적인 약점을 찾았는데——”
나는 간신히 숨을 골랐다.
“그걸 알려주면 내가 질 수도 있다고 생각했어요.”
차민혁의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졌다. 그가 무표정일 때조차 유지되던 침착함마저 사라지고, 그 자리에 무언가 단단하게 굳어졌다.
“……그걸 알면서도.”
그가 말했다. 한 글자 한 글자가 탁자에 떨어지는 유리구슬 같았다.
“아무 말 안 한 거냐.”
“네.”
내 입술이 떨렸다. 나는 눈을 감지 않았다.
“6년 동안…… 한 번도, 말하지 않았어요.”
차민혁이 천천히 일어섰다. 의자가 바닥을 밀며 끼익 소리를 냈다. 그의 손이 탁자 위에 흩어진 자료 위로 떨어졌다. 손가락이 천천히 주먹을 쥐었다.
“그러니까.”
그의 목소리가 처음으로 완전한 반말로 전환됐다. 짧고 느리고 거칠었다.
“네가 워크숍에서 내 칭찬에 죄책감을 보였던 것도.”
“……”
“아까, ‘내가 왜 그러는지 알아요’라고 반말로 쏘아붙인 것도.”
“……”
“다.”
그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차민혁의 손이 탁자를 짚었다. 손가락 마디가 하얗게 변했다.
“그동안 네가 나한테 보여준 모든 게…… 죄책감 때문에 꾸며낸 위선이었냐.”
나는 오른손으로 탁자 모서리를 움켜쥐었다. 손목 보호대는 이미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눈물이 차오르는 걸 참았다. 참아서 눈알이 뜨거워졌다. 목젖이 떨리며 말이 나오는 걸 방해했다.
“……그래요.”
내 대답은 한 단어였다.
차민혁은 한 걸음 물러섰다.
자료 더미 가장자리가 그의 팔꿈치에 스치며 바닥으로 흘러내렸다. A4 용지 몇 장이 공중에서 천천히 뒤집히며 흩어졌다. 한 장이 내 발등에 떨어졌다. 내가 쓴 데이터 분석 노트였다.
“그래.”
차민혁이 말했다.
“이해했다.”
그는 더 이상 질문하지 않았다. 원망도 분노도 아닌, 마치 사무용 서류를 정리하는 듯한 무채색이 그의 얼굴을 덮었다.
“그렇다면.”
그는 태블릿을 집었다. 넥타이 핀을 만진 것처럼 보였지만, 손가락은 그냥 지나쳤다.
“업무만 남습니다.”
그가 가방을 들어 어깨에 걸었다.
“내일부터 개인적인 대화는 하지 않겠습니다. 중간 발표는 이틀 뒤. 각자 준비하고, 발표장에서 봅시다.”
그가 돌아서서 문으로 걸어갔다. 유리문 손잡이를 잡았다. 낮은 마찰음이 공기를 긁었다. 문이 열렸다. 복도의 찬 공기가 살짝 밀려들어왔다.
그리고 문이 닫혔다.
나는 탁자 앞에 서 있었다. 다리에서 힘이 빠졌다.
흩어진 자료 사이로 내 손목 보호대가 보였다. 구겨진 A4 용지들. 화이트보드에 반쯤 남은 소비자 페르소나. 노트북 화면은 절전 모드로 어두워져 있었다.
나는 천천히 무릎을 굽혔다. 자료를 줍겠다는 생각이 아니었다. 그냥 몸이 접혔다.
바닥에 주저앉았다. 양손을 무릎 위에 올렸다. 손가락이 아직 떨리고 있었다.
눈물이 왼쪽 손등에 떨어졌다. 소리 없이.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울음이 터져 나오지 않게.
형광등만이 희미하게 공명했다.
복도는 길고 텅 비어 있었다. 차민혁은 걸었다. 구두 굽이 카펫이 없는 복도 바닥에 규칙적인 소리를 냈다. 사무실을 지나쳤다. 엘리베이터 앞을 지나 계단으로 방향을 틀었다.
그는 계단을 내려가지 않았다. 10층과 9층 사이의 층계참에서 멈춰 섰다.
오른손에 들린 태블릿을 켰다. 화면이 밝아졌다. 잠금 해제. 폴더 목록이 떴다.
그는 폴더 하나를 열었다. 이름은 'yoonearlycareer'였다.
안에는 6년치 스크린샷과 캡처 이미지, 사내 인트라넷 아카이브에서 긁어모은 텍스트 파일, 그리고 그녀가 각 프로젝트에서 처음 썼던 문장들. 첫 카피 원문. '빠르게 사라지는 것들에 대하여.' 그 옆에는 붉은색 작은 글씨로 그가 써넣은 메모가 있었다.
그의 손가락이 폴더 닫기 버튼 위에 멈췄다.
오래 멈춰 있었다.
계단 아래에서 보일러 배관의 낮은 진동 소리만 들렸다. 태블릿 화면의 빛이 그의 무표정한 얼굴을 희게 물들였다.
“……이것만은.”
그의 입술이 움직였다. 혼잣말은 계단통에 퍼지지 않고 콘크리트에 흡수됐다.
차민혁은 폴더를 닫았다.
태블릿을 가방에 밀어 넣고, 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구두 소리가 규칙적으로 9층, 8층, 7층을 지나 사라졌다.
아레나 3에는 흩어진 A4 용지와 꺼진 노트북 한 대, 그리고 바닥에 주저앉아 입술을 깨문 채 오열을 삼키는 한 사람만이 남아 있었다. 형광등이 깜빡이고는 다시 침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