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verStory

PT는 사랑을 싣고

9화

로비의 공기가 평소보다 무거웠다.

유리문을 밀고 들어서자 중앙 안내 데스크 옆에서 차민혁이 보안 게이트를 통과하고 있었다. 짙은 차콜 수트. 왼손엔 태블릿 케이스. 그는 내 쪽을 보지 않았다. 그런데 걸음이 한 템포 느려졌다.

나도 멈추지 않았다. 그냥 걸었다.

“좋은 아침입니다, 팀장님.”

목소리가 평소보다 반 톤 낮았다. 차민혁은 고개를 반쯤 숙였다. 눈이 마주치지 않는 각도였다.

“네.”

그게 전부였다.

그가 엘리베이터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나는 계단으로 걸음을 옮겼다. 계단 문을 연 손에 힘이 느슨했다. 손금에 밴 밤새 마르지 않은 땀 같은 것.

두 개 층을 올라 사무실로 들어서자 강수아가 이미 자리에 앉아 있었다. 모니터 두 개가 켜져 있었고, 왼쪽 화면에는 전사 공유 폴더가 열려 있었다.

“언니, 메일 봤어요?”

나는 가방을 의자에 걸었다.

“아직.”

“트리니티 글로벌이에요.”

강수아가 모니터를 내 쪽으로 살짝 돌렸다. 제목: [경쟁 PT 공고_트리니티 글로벌 아시아태평양 리브랜딩]. 발신은 전략기획실. 수신은 윤가람 팀, 차민혁 팀 전체.

“이번엔 규모가 장난 아니네요. 작년 한소리푸드의 세 배예산이래요.”

“자료는 떴어?”

“방금 전에. 클라이언트 요약만 먼저.”

나는 노트북을 열었다. 공유 폴더 최상단에 ‘TrinityGlobalRFP202011’ 폴더가 생성되어 있었다. 그 안에 PDF 세 개.

나는 첫 번째 파일을 열었다. 아시아태평양 7개국 동시 리브랜딩. 현지화 전략. 데이터 기반 의사결정 필수.

강수아가 내 표정을 살폈다.

“벌써부터 눈빛이 바뀌었네요.”

“일단 타깃 시장별 소비자 데이터부터 모을게요. 오전 중으로 공유 폴더에 업로드할 테니까, 강수아 씨는 경쟁사 캠페인 동향 먼저 정리해줘요.”

“알겠습니다.”

강수아가 자판에 손을 올리며 말을 덧붙였다.

“참, 오늘 아침에 차민혁 팀장님 먼저 출근하셨더라고요. 제가 여덟 시 십오 분에 왔는데 이미 자리에——”

“됐어요.”

말을 자르고 말았다. 강수아의 손가락이 멈췄다. 나는 덧붙였다.

“일 시작할게요.”

한 시간 뒤쯤, 전사 공지가 한 번 더 떴다. 오전 열 시 합동 브리핑. 클라이언트 대표 직접 참석. 장소는 대회의실.

나는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식었다. 머그잔을 내려놓고 태블릿을 챙겼다.

대회의실 문 앞에서 그와 다시 마주쳤다.

손잡이를 잡으려다 동시에 손을 뗐다. 한 박자 어긋난 호흡. 차민혁은 아무 말 없이 문을 열었고, 안쪽에서 먼저 자리를 잡았다. 나는 반대편에 앉았다.

오지혁과 강수아, 그리고 양 팀원들이 차례로 착석했다. 긴 타원형 테이블의 유리면 아래로 전원 버튼이 푸르게 깜빡였다.

정확히 열 시.

대회의실 앞문이 열렸다.

사십 대 중반쯤으로 보이는 남성이 들어왔다. 짙은 회색 정장. 타이는 매지 않았고, 왼쪽 소매 단추 하나가 다른 색이었다. 트리니티 글로벌 아시아태평양 전략 총괄. 최태호.

뒤따라 전략기획실장이 자리를 잡았다.

최태호는 앉자마자 노트북을 열지 않았다. 대신 양손을 탁자 위에 얹고 천천히 테이블을 둘러봤다.

“자료는 봤을 테니 설명은 생략하겠습니다.”

목소리가 낮고 느렸다. 서두르는 구석이 없었다.

“트리니티는 7개국에서 동시에 브랜드 체질을 바꾸는 작업입니다. 각 시장의 소비자 데이터를 기반으로 하되, 글로벌 일관성을 무너뜨리지 않는 선에서 전략을 짜야 합니다.”

그가 잠시 멈췄다. 시선이 나와 차민혁 사이를 천천히 가로질렀다.

“두 팀이 경쟁한다고 들었습니다.”

“네, 맞습니다.”

차민혁의 대답이 빨랐다.

“저희는 클라이언트 요구사항에 따라 별도 전략으로——”

“경쟁 방식에는 관심 없습니다.”

최태호가 그의 말을 잘랐다.

“오직 데이터와 설득력만 보겠습니다. 누구의 안이든, 근거가 약하면 통과되지 않습니다.”

회의실이 조용해졌다. 누군가 볼펜 노크를 누르는 소리가 났다. 내 오른손이 태블릿 모서리를 잡았다.

“궁금한 점은.”

최태호가 손바닥을 펼쳐 보였다.

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

“아시아태평양 공통 소비자 데이터는 어디까지 제공됩니까.”

“작년까지의 구매 데이터와 올해 상반기 서베이 결과까지입니다. 단, 한국 시장은 3분기 데이터까지 포함됩니다.”

“현지화 전략의 허용 범위는요.”

이번엔 차민혁이 물었다. 내 질문과 그의 질문 사이, 고작 1초 남짓한 간격이었다.

“각국 언어와 문화적 코드를 반영하는 수준까지입니다. 브랜드 코어 자산을 훼손하는 현지화는——”

“배제하신다는 거군요.”

차민혁이 말을 마무리했다. 최태호가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나는 질문을 이었다.

“평가 기준 중 데이터 근거의 비중은 어느 정도입니까.”

“70퍼센트입니다.”

숫자가 또렷했다.

“나머지 30은 발표 구성과 설득력입니다. 하지만 30점만으로 70을 뒤집는 일은 없을 겁니다.”

차민혁이 태블릿 화면을 한 번 훑어보더니 입을 열었다.

“일정은.”

“오늘부터 2주. 발표는 이곳 유나이티드애드 대회의실입니다. 시간과 세부 진행은 추후——”

“데이터를 요청할 수 있는 경로는 제한됩니까.”

내 목소리가 약간 빨라졌다. 최태호의 눈이 내 쪽으로 정확히 옮겨졌다.

“공식 이메일과 공유 폴더를 통해서만. 녹취 없는 단독 미팅은 트리니티도 허용하지 않습니다.”

차민혁의 손가락이 탁자 위에서 한 번 움직였다. 나는 시선을 그 쪽으로 옮기지 않았다.

“중간 피드백은.”

차민혁의 질문이 또 내 문장을 베어 먹었다. 나는 입술을 닫았다. 그의 질문을 방해하지 않았다.

“없습니다. 최종 PT 한 번으로 결정합니다.”

최태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추가 자료는 오늘 오후 세 시까지 공유 폴더에 올리겠습니다. 양측 모두 확인하십시오.”

그가 회의실 문을 향해 걸어갔다. 문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뒤돌아보지 않은 채.

“한 가지 덧붙이자면.”

그가 어깨 너머로 말했다.

“전략의 일관성이 없으면 아무리 데이터가 많아도 점수를 주지 않습니다.”

문이 닫혔다.

회의실에는 침묵이 남았다.

차민혁이 먼저 일어났다. 구두 굽이 바닥에 닿는 소리가 침묵을 찢었다. 그는 내 쪽을 보지 않고 오지혁에게 짧게 말했다.

“공유 폴더 확인하고 분석 초안 오후까지.”

“알겠습니다.”

오지혁의 대답이 평소보다 한 박자 늦었다.

나도 일어났다. 강수아와 눈이 마주쳤다. 그녀가 작게 고개를 저었다. 무슨 뜻인지 알았다. 저 인간, 아직도 냉전이네요.

나는 대답 대신 태블릿을 접었다.

두 팀이 대회의실을 나갔다. 복도에서 각자 반대 방향으로 흩어졌다. 내 구두 소리와 그의 구두 소리가 점점 멀어졌다.

사무실로 돌아와 강수아에게 말했다.

“클라이언트 요약 한 번 더 정독하고, 7개국 데이터 중 한국과 일본 시장 먼저 교차 분석해요.”

“알겠습니다. 언니는——”

“나는 데이터 출처 검증.”

이미 차민혁 팀의 공유 폴더에는 ‘Trinityinitialmemo_v1’ 파일이 업로드되어 있었다. 업로드 시각: 오전 아홉 시 오십이 분. 합동 브리핑 시작하기 십 분 전이었다.

나는 그 파일을 열지 않았다. 대신 내 폴더를 생성했다. 제목은 ‘YoonteamTrinityDataVerification’.

키보드를 두드리는 손끝이 차가웠다. 어젯밤 바닥에 주저앉아 떨던 바로 그 손이었다. 지금은 떨리지 않았다. 타이핑 속도가 점점 빨라졌다.

모니터 위로 강수아가 포스트잇 한 장을 붙였다.

「점심은요?」

나는 고개를 저었다. 강수아가 포스트잇을 떼고 새로 썼다.

「알겠습니다. 제가 사 올게요.」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엑셀 시트의 필터를 걸었다. 7개국 데이터의 첫 행이 화면에 정렬됐다.

점심을 대충 때우고 돌아온 팀 프로젝트룸은 비어 있었다. 강수아가 커피 두 잔을 들고 들어와 내 앞에 하나를 내려놓았다. 얼음이 희미하게 부딪히는 소리.

“언니, 브리핑 때——”

“잠깐만.”

노트북을 열었다. 공유 폴더에 최태호가 방금 올린 공식 PT 일정표가 떠 있었다. 2주 뒤. 장소는 클라이언트 본사 대회의실. 나는 화면을 강수아 쪽으로 돌렸다.

“데이터 먼저 정리할게. 제일뷰티가 원한 건 리브랜딩이 아니라 매출 반등이야. 최태호가 ‘설득력’이라는 말을 네 번이나 썼어.”

강수아가 의자를 끌어당겨 앉았다. 표정은 언제나보다 진지했다.

“나쁘지 않은 방향인데. 그런데 언니——”

“응. 알아.”

입술을 깨물었다. 강수아가 묻고 싶은 건 따로 있다는 걸 모를 리 없었다. 브리핑 내내 내 얼굴이 굳어 있었다는 걸, 이 아이는 눈치챘을 것이다.

“어젯밤에도 아레나 3에서 팀장님이랑 있었잖아요. 무슨 일 있었죠.”

나는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차가웠다.

“내가 털어놓을 만한 일이긴 한데.”

강수아가 눈을 깜빡였다. 말을 잇지 않고 기다리는 태도였다.

“2019년. 차민혁 팀장이 공모전에서 탈락했을 때야.”

“그때 우수상 받은 게——”

“알고 있었어. 약점을. 타깃 설정 오류. 3040 남성을 잡겠다고 한 전략이 실제 데이터는 2030 여성이었던 거.”

강수아의 손이 커피 컵에서 떨어졌다.

“그걸… 아셨어요? 그때?”

“심사장 복도에서 그의 보드를 봤어. 우연히.”

침묵이 방 안에 가라앉았다. 형광등이 가늘게 울렸다. 나는 노트북 화면을 다시 나에게로 돌렸다.

“말하지 않았어. 끝까지.”

“왜요.”

짧은 질문이었다. 평소의 강수아답지 않게, 농담도 없고 어미도 낮았다.

“무서웠어. 갓 입사한 신입이, 벌써 주목받는 동기의 실수를 지적한다는 게.”

나는 텅 빈 커피 컵을 손가락으로 한 번 돌렸다.

“내가 지금 그걸 이기려고 하는 방식도 결국 같은 거야. 상대의 약점을 찾아서 찌르는 거. 그때랑 뭐가 다른지 모르겠어.”

강수아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달라요. 그때는 숨기고 넘어갔지만, 이번엔 상대 팀이 공개한 데이터로 정면 승부하는 거잖아요.”

“……그거 꽤 괜찮은 변호인인데.”

내 목소리가 조금 올라갔다. 강수아가 작게 웃었다. 하지만 웃음은 금방 사라졌다.

“언니가 왜 그걸 팀장님한테 말했는지, 대충 짐작은 돼요.”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노트북 키보드에 손가락을 올렸다.

“차민혁 팀이 자발적 참여 패널을 쓴 건 우리도 확인했어. 과대표집 리스크는 그대로야. 그걸 반대 논거로 삼고, 우리는 퍼스트파티 데이터를 제안하는 전략으로 간다.”

“좋아요. 그런데——”

“수아야.”

모니터에서 눈을 떼고 그녀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나 이번 PT, 정공법으로 이길 거야. 실수 덮어주거나, 약점 숨기거나 하지 않고.”

강수아는 잠시 나를 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요. 그런데 표정이 너무 살벌하다. PT 상대지 원수는 아니잖아요.”

“……그 사람한테 인정받고 싶었나 봐.”

혼잣말처럼 흘러나온 말이었다. 손가락이 키보드 위에서 잠시 멈췄다.

“경쟁자로 말고. 같은 방향성을 가진 사람으로.”

강수아가 조용히 내 손목을 한 번 토닥였다. 그녀는 더 묻지 않았다. 대신 노트북을 자기 쪽으로 당기며 말했다.

“자, 그럼 퍼스트파티 데이터 설득력 보강부터 할게요. 제일뷰티가 아무래도 올해 3분기 손실 폭이 커서——”

“숫자는 내가 뽑을 테니까 너는 내러티브 구조 먼저 잡아줘.”

오후가 깊어질수록 화이트보드는 빠르게 채워졌다. 차민혁 팀의 자발적 패널 데이터가 어떤 왜곡을 만들 수 있는지, 우리가 제안할 퍼스트파티 데이터가 왜 클라이언트의 실제 매출로 직결되는지. 나는 표를 그리고 지우고, 다시 그렸다.

그러다 문득 손목 보호대를 고쳐 매며 생각했다. 이번에는 숨지 않겠다. 차민혁에게 이기고 싶은 마음과, 그에게 인정받고 싶은 마음이 같은 무게로 내 안에서 회전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이중의 무게가 나를 더 침착하게 만들었다.

“컨셉.”

강수아가 화이트보드 앞에서 마커를 멈췄다.

“데이터의 투명성 자체가 브랜드의 투명함을 증명하는 구조.”

“좋아. 그걸로 가자.”

시계를 보니 오후 여섯 시가 넘어 있었다.

밤 열 시.

복도는 조용했다. 내 프로젝트룸 문을 닫고 나오자, 복도 저 끝 다른 방에서 새어나오는 희미한 빛이 보였다. 차민혁 팀의 프로젝트룸이었다.

나는 잠시 서서 그 빛을 바라보았다. 움직이는 그림자 하나. 아마 그의 실루엣일 터였다. 가슴께가 한 번 조여들었다가, 곧 가라앉았다.

발길을 돌려 내 방으로 돌아왔다.

백실장이 아홉 시 무렵 들러 “열 시 넘으면 결재 라인에 올린다. 알아서 해”라고 말하고 간 뒤였다. 나는 노트북 앞에 다시 앉아 초안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퍼스트파티 데이터 전환 시뮬레이션. 예상 매출 반등률 15%에서 22% 사이. 보수적인 숫자로만 채웠다.

마지막 슬라이드에 컨셉 문구를 넣었다. “보이는 데이터만이 살아남는다.”

저장. 서버 업로드 완료.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강수아와의 메시지 창이 열려 있었다. 오후에 강수아가 먼저 퇴근하며 보낸 메시지가 밑에 남아 있었다.

“언니, 너무 밤 새지 마요. 얼굴이 살벌해도 건강은 챙겨야——”

나는 답장을 입력했다.

“이번엔 절대 물러서지 않겠다. 고마워.”

전송. 휴대폰을 뒤집어 탁자에 내려놓았다.

노트북 화면에는 방금 전 서버에 저장된 PT 초안 파일 아이콘이 떠 있었다. 파일명은 ‘제일뷰티리브랜딩최종PT_v1’.

나는 그 파일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이번 PT로, 나는 과거의 나와 다른 사람임을 보여줄 거야. 공모전 복도에서 침묵했던 그 사람이 아니라, 데이터로 당당히 맞서는 AE로.

얼굴 근육이 저절로 굳어졌다. 웃음도 아니고 울음도 아니었다. 그냥 결의였다. 입술 사이로 짧은 숨이 한 번 새어나왔다.

나는 덮개를 내리지 않은 노트북을 그대로 두고, 책상 위 자료를 가지런히 모아 서류철에 꽂았다. 의자 등받이에 걸려 있던 재킷을 집어 들었다.

불을 껐다.

PT는 사랑을 싣고9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