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찰의 비밀, 일곱 개의 밤
1화
머릿속이 깨어나기 전, 몸이 먼저 죽음을 기억했다. 목을 조르던 삼베 끈의 따가운 감촉. 숨이 막혀가며 똑똑히 보았던 낯익은 자수 장식의 소매 끝. 그 비단 무늬는 침방 나인이 아니면 알 수 없을 바느질 솜씨였다.
윤소하는 바닥에 손을 짚은 채 눈을 떴다. 합숙처의 낮은 천장과 개똥벌레 기름 등잔의 희미한 불빛이 시야에 들어왔다. 숨이 가빴다. 손을 목으로 가져가 만져보았지만, 아무 상처도 없었다.
죽지 않았다.
방금 전까지 자신의 목을 조르던 손아귀의 압박이 아직도 살갗에 남아 있는 듯했다. 그러나 이곳은 분명, 사흘 전 밤과 똑같은 장면이었다.
잠에서 막 깬 듯 주변을 둘러보는 윤소하의 손끝이 바들거렸다. 오른쪽 이부자리는 비어 있었다. 소혜 나인의 자리.
그때 복도 저편에서 비명이 터져나왔다.
“소혜 나인이……!”
날카로운 목소리가 합숙처의 적막을 찢었다. 여러 발자국 소리가 한꺼번에 몰리는 기척. 윤소하는 본능적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소혜 나인은 이불 개는 시렁 옆, 실 타래와 바느질함 사이에 반쯤 기대앉은 자세로 숨져 있었다. 목에는 침방에서 쓰는 삼베 끈이 감겨 있었고, 얼굴은 핏기 하나 없이 창백했다. 입술이 푸르게 질려 있었고, 굳은 손가락 사이로 제 옷자락이 움켜잡혀 있었다.
자살로 보이기엔 정리된 자세.
윤소하는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 걸 느꼈다. 회귀하기 전에도 똑같은 광경을 보았다. 그리고 그때는 아무것도 몰랐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소혜의 삐져나온 소매 밑단을 윤소하의 시선이 스쳤다. 바느질감이 고르지 못한 부분이 시신의 팔을 감싼 옷감 한쪽에 남아 있었다. 누군가 옷깃을 고쳐 단 흔적이었지만, 침방 나인의 솜씨로 보기에는 성긴 땀 자국이었다.
더 자세히 보려던 순간, 문이 열렸다.
날리상궁 한씨가 먼저 들어왔다. 상궁 특유의 당의 자락이 등잔불에 비쳐 푸르게 일렁였다. 그 뒤로 차령 상궁 박씨가 바짝 붙어 들어오며 손을 소매 안으로 감췄다.
“모두 제자리에서 물러나 있으라.”
날리상궁의 목소리는 낮고 느렸으나, 그 온화함 속에 칼날처럼 서늘한 기운이 스며 있었다. 합숙처 안의 나인들이 일제히 숨을 죽였다.
“지금부터 이곳의 모든 물품은 내금위의 검시가 끝날 때까지 일체 손을 댈 수 없다.”
날리상궁은 시신 앞에 걸음을 멈추고, 시선을 소혜의 얼굴에 잠시 두었다가 거두었다. 그 표정엔 아무런 동요도 없었다. 다만 호박 금가락지 낀 손가락으로 허공을 한 번 가볍게 두드렸다.
“누가 먼저 발견했느냐.”
한 하급 조제사가 떨리는 목소리로 아뢰었다.
“소, 소인이 이부자리를 정리하러 들어왔다가…….”
“그만.”
날리상궁이 손을 들어 말을 잘랐다. 그리고 천천히 침방 나인들을 둘러보았다.
“중전 마마의 서찰 한 통이 사라졌다. 바로 오늘밤, 이 침방 안에서다.”
합숙처 안의 공기가 순간 얼어붙었다. 나인들 사이에서 작은 숨소리조차 사라졌다.
“소혜 나인의 죽음과 같은 밤에, 같은 장소에서 말이다.”
날리상궁의 말이 뚝뚝 끊어지며 공중에 박혔다. 그녀는 어느 누구 한 사람을 콕 집어 보지 않았지만, 방 전체를 용의자로 만드는 화법이었다. 나인들은 얼굴이 백짓장처럼 질렸다.
차령 상궁이 날리상궁의 뒤에서 한 걸음 물러서려다, 소혜의 시신을 힐끗 보았다가 이내 고개를 틀었다. 그 동작이 너무 빨랐다. 그리고 손을 소매 속에서 꺼내 옆구리를 긁는 손짓.
윤소하는 눈을 좁혔다.
저건 죄책감이다.
죄인의 두려움이라기보다, 보고도 말하지 못하는 비겁함. 소혜의 죽음을 막을 수 있었다고 생각하는 자의 동요.
“박 상궁.”
날리상궁이 어깨 너머로 부드럽게 불렀다.
“내금위에 사람을 보내시게. 침방 나인 전원, 소혜 나인과 같은 당직조의 동선을 기록할 것. 그리고……”
이어지는 말은 거의 속삭임에 가까웠다.
“대비전 최 상궁께도 이 사실을 알리거라. 은밀히.”
차령 상궁의 어깨가 움찔 올라갔다. 그녀는 고개를 조아렸다.
“예…… 알겠사옵니다, 날리상궁 마마. 다만, 그, 내금위에서 소혜 나인의 유품까지 전부 확인하고자 하면 어찌…….”
“그것은 내금위의 소관이지, 네가 걱정할 일이 아니야.”
날리상궁의 대답 한 마디에 차령 상궁은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물러서며 다시 한 번 시신을 돌아보다가, 이번에는 윤소하와 눈이 마주쳤다.
차령 상궁의 눈빛이 무언가 말하려는 듯했으나, 곧 외면했다.
윤소하는 고개를 숙인 채 그 광경을 시야에 담았다. 손끝으로 치마자락을 비비는 버릇이 도졌다. 심장은 죽기 직전의 기억으로 차가웠지만, 머릿속은 달아오르고 있었다.
소혜 연니는 자살이 아니다. 그리고 당신은 무언가를 알고 있다, 박 상궁.
날리상궁이 마지막으로 합숙처 안을 한 번 더 천천히 살폈다. 그 시선이 윤소하에게 닿는 순간, 날리상궁의 눈가에 얕은 주름이 생겼다가 사라졌다.
“오늘 밤 일은 어떤 경로로도 외부에 새어나가서는 안 된다. 내명부의 일은 내명부에서 다스린다. 지금부터 이곳의 일체 출입을 통제하노라.”
합숙처를 봉쇄한 지 한 시진 남짓, 날리상궁은 마침내 침방 전체의 출입을 완전히 통제하고 편전 곁 행각에 차려진 임시 수사 본부로 내금위 출동을 요청했다. 윤소하는 여전히 합숙처 안에 발이 묶인 채, 이제는 다용도실 쪽에서 들려오는 낯선 장화 소리에 귀를 곤두세우고 있었다.
다용도실 앞 초롱불이 바람에 흔들렸다. 이겸이 두 명의 내금위 부하를 대동하고 회랑을 돌아 들어섰을 때, 날리상궁 한씨는 이미 합숙처 쪽에서 걸어 나와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밤이 깊었습니다, 종사관.”
느리고 부드러운 목소리였다.
이겸이 허리를 굽혀 예를 표했다.
“내금위 초동 수사권에 근거하여, 소혜 나인의 사망 현장과 유품을 접수하러 왔습니다.”
“내명부의 일은 내명부에서 처리하는 법입니다.”
“사인이 불분명한 변사체가 발생하면 내금위 관할입니다. 상궁께서도 규례를 모르실 리 없지요.”
날리상궁의 눈가 주름이 얕게 움직였다. 초롱불에 비친 그녀의 얼굴은 미소를 머금은 듯했으나, 빛이 닿지 않은 입가의 근육은 굳어 있었다.
“내명부의 질서를 흐트러뜨리지 않는다는 조건이 필요하겠습니다.”
“당연히 그렇게 진행할 생각입니다.”
이겸이 손을 들자 부하 하나가 합숙처 쪽으로 걸어갔다. 다른 하나는 다용도실 문 앞에 서서 나인들이 드나들지 못하게 막아섰다.
회랑 옆에 일렬로 서 있던 침방 나인들이 숨을 죽였다. 대부분 시선을 바닥에 떨어뜨렸다. 윤소하만 고개를 들고 이겸을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눈빛이 지나치게 고요했다. 이제 막 동료가 죽은 자리에서 스무 살도 채 안 된 나인이 보일 법한 두려움은 어디에도 없었다.
이겸이 걸음을 멈췄다. 시선을 윤소하에게 고정한 채 날리상궁에게 물었다.
“저 나인의 이름은.”
날리상궁이 뒤를 돌아봤다. 표정 없이 윤소하를 훑었다.
“윤소하. 침방 삼년 차입니다.”
“먼저 심문하겠습니다.”
“윤소하는 저와 함께 소혜의 시신을 수습했습니다. 놀란 상태라——”
“놀란 상태로는 그 눈빛이 나오지 않습니다.”
이겸이 윤소하 쪽으로 걸어갔다.
“다용도실로 먼저 들어가 계십시오.”
부드럽지만 분명한 어조였다. 날리상궁의 왼손 검지가 허리춤을 살짝 두드리다 멈췄다.
“내금위의 수사에는 협조합니다. 다만 침방 나인의 신문에는 입회 나인이 필요합니다. 절차를 무시하지 마십시오.”
“입회 진행관이 대기 중입니다. 절차는 지킵니다.”
이겸이 이미 대령시켜 둔 모양이었다. 날리상궁의 입이 가늘게 다물렸다. 그녀는 더 이상 말하지 않고 물러서는 것으로 불만을 대신했다.
윤소하는 묵묵히 다용도실 안으로 들어갔다.
다용도실 탁자 위에는 소혜의 침구류와 바느질 도구 몇 점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윤소하는 문 옆에 선 채 방의 배치를 훑었다. 회귀 전 이 방에서 겪었던 일들이 스쳤다. 그날도 이렇게 등불이 흔들렸다. 단지 그때는 자신이 용의자가 아니라, 이미 죽은 뒤였다.
이겸이 문을 닫고 마주섰다.
“소혜 나인의 사망 당일, 당신의 동선을 말씀해 주십시오.”
“침방에서 침구를 정리하고, 오시에 빨래터로 내려갔습니다. 술시 무렵 합숙처로 돌아왔고, 그 뒤로는 소혜를 보지 못했습니다.”
“빨래터에서 누군가와 함께 있었습니까.”
“차령 상궁 박씨와 잠시 대화를 나눴습니다.”
이겸이 고개를 끄덕이며 기억했다.
“소혜 나인이 죽기 전, 마지막으로 본 모습은.”
윤소하가 잠시 침묵했다. 회귀 전 기억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그날 소혜는 목을 움켜쥔 자세로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하지만 사건 기록에는 ‘자살 의심’이라고 적혔었다. 자살이 아니다. 소혜의 검지손가락은 펴져 있었고, 쥔 흔적이 아닌 잡힌 흔적이 선명했다. 누군가 양손을 붙잡고 목을 졸랐다.
그러나 지금의 윤소하는 그 사실을 ‘알면 안 되는’ 사람이었다. 그녀는 호흡을 가다듬었다.
“마지막으로 본 것은 해질 무렵, 바느질감을 가지러 간다고 하던 모습입니다.”
“그런데.”
이겸이 한 걸음 다가왔다.
“당신은 시신을 처음 발견했을 때, 소혜 나인의 시신을 곧바로 뒤집지 않았습니까.”
윤소하의 눈빛이 미세하게 떨렸다. 회귀 전 기억이 순간 겹쳤다. 맞다. 그녀는 뒤집었다. 자살이라고 믿을 수 없어서.
“……손이 먼저 갔습니다.”
“일반적인 반응으로는 보기 어렵습니다.”
“침방 나인에게 익숙한 동작입니다. 침구를 정리할 때도, 자세를 고칠 때도 손이 먼저 나갑니다.”
이겸이 잠시 그녀를 응시했다. 말이 되긴 했다. 하지만 뭔가 달랐다. 이 나인의 입은 설명을 하고 있지만, 눈은 이미 답을 알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바느질함을 압수하겠습니다.”
윤소하의 손끝이 치맛자락을 살짝 비볐다.
“필요하시다면.”
그녀가 천천히 걸어가 합숙처 쪽 나무 선반 위에서 바느질함을 가져왔다. 뚜껑을 열어 탁자 위에 올릴 때, 윤소하의 시선이 함 속에 멈췄다.
바늘겨루 사이로 종잇조각 하나가 끼어 있었다.
없어야 한다. 회귀 전 이 함에는 실꾸리와 바늘 외엔 아무것도 없었다. 손가락이 움직이기 전에 생각이 앞섰다. 종이의 귀퉁이가 약간 구겨져 있었고, 찢긴 면을 따라 먹글씨 한 획이 보였다. ‘ㅇ’을 닮은 둥근 필획의 일부였다.
이겸이 다가오기 전, 윤소하는 함 뚜껑을 다시 닫는 척하며 왼손으로 종잇조각을 쥐었다. 손바닥 안으로 밀어넣고, 오른손으로 함을 탁자 한복판으로 밀었다.
“여기 있습니다.”
이겸이 함을 끌어당겼다. 뚜껑에 손을 얹으려는 순간이었다.
“종사관.”
윤소하의 목소리가 방 안을 조용히 가로질렀다. 이겸의 손이 멈췄다.
“소혜가 마지막으로 바느질한 옷감에는 누군가의 손톱자국이 있었습니다.”
“……어디서 그런 정보를.”
“침방 나인은 바느질감을 검수합니다. 자살로 위장하기에는 그 손톱자국이 너무 깊었습니다.”
이겸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의 눈동자가 어둠 속에서 날카롭게 빛났다.
“당신은 진작 알고 있었군요.”
윤소하는 대답하지 않았다. 오른손은 이미 치마 주름 아래로 내려가 종잇조각을 허리띠 안쪽으로 감추었다. 이겸의 시선이 그녀의 손끝에 닿았다가, 다시 얼굴로 올라왔다.
그가 미소 지었다. 의혹이 짙게 깔린 낮은 목소리로 덧붙였다.
“다음 심문에서는 그 손톱자국에 대해 더 자세히 듣겠습니다.”
바느질함을 집어 든 그가 등을 돌려 문 쪽으로 걸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