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찰의 비밀, 일곱 개의 밤
10화
내금위 청사 이겸의 집무실. 밤이 깊어 복도에 인기척이 끊긴 시각이었다.
촛불 하나가 두 사람의 얼굴을 갈랐다. 이겸은 아직 탁자에 손을 짚은 채였다. 윤소하가 읊은 편지 구절의 여운이 방 안에 남아 있었다.
“그대가…… 어떻게 그 문장을 알았는지.”
이겸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더 묻지 않겠소.”
그 말은 반신반의가 아니었다. 그의 눈빛이 곧고 조용했다.
“내가 믿겠소. 당신이 지금 말할 수 있는 것보다 더 큰 무언가를 짊어지고 있다는 것도.”
윤소하의 손끝이 치맛자락에서 떨어졌다. 자신도 모르게 비비고 있었던 것이다.
“종사관 나리.”
“이 사건만이 아니오.”
이겸이 말을 이었다. 탁자 위의 서류 더미를 향해 손을 뻗지도 않고 시선만 두었다.
“십 년 전, 나의 부친 이현우는 역모죄로 파직되었소. 증거는 한 통의 서찰이었고, 필체가 조작된 것임을 나는 알고 있소.”
윤소하의 눈동자가 미세하게 흔들렸다.
“그 서찰을 쓴 자가 누구인지도.”
이겸의 목소리가 반 톤 낮아졌다.
“대비전의 왼손잡이.”
바로 그 말이 두 사람의 침묵을 메웠다. 윤소하가 숨을 천천히 들이켰다.
“나리께서 이 사건에 집착하신 이유가…… 바로 그것이었사옵니까.”
“처음에는 그랬소. 십 년 전, 나는 아무것도 하지 못한 열일곱 살이었소.”
이겸이 탁자에서 손을 떼며 자리에서 물러났다. 그의 등 뒤로 촛불이 길게 그림자를 늘였다.
“내금위 종사관이 되어 이 사건을 맡은 것은 우연이 아니오. 대비전에서 가짜 서찰이 유통될 때마다, 나는 그 필체를 찾고 있었소.”
윤소하가 그를 올려다보았다. 손끝이 멈췄다.
“아버님의 편지 구절을 제가 알았던 것은……”
“더 말하지 마시오.”
이겸이 그녀를 막았다. 처음으로 그의 눈가에 미세한 주름이 잡혔다.
“당신이 내게 그 증명을 보여준 것은, 당신이 이미 이 모든 일을 겪었기 때문이오. 그것만으로 나는 충분하오.”
침묵. 윤소하가 그 침묵을 깼다.
“저에게도 목적이 있사옵니다.”
이겸이 시선을 돌렸다.
“일곱 개의 이름.”
윤소하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어미는 흔들리지 않았다.
“제가 이 일을 시작한 것은, 한때 저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자들을 찾아내기 위함이었사옵니다.”
촛농이 식기 전 마지막으로 한 방울 떨어졌다. 이겸은 그 소리를 듣고도 눈을 깜빡이지 않았다.
“그 명단에 누가 있소.”
“중간자는 이미 밝혀졌사옵니다. 날리상궁께서 인정하셨지요.”
“나머지도 마찬가지오. 이 편지가, 그리고 십 년 전 서찰이 모두 같은 손에서 나왔소. 대비전에서.”
이겸이 집무실 벽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지금 대비전 별당 불당에서 나의 부하가 목격한 바로는, 대비의 측근이 밤중에 불경에 쪽지를 끼워 넣었다고 하오.”
윤소하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그 쪽지가 가짜 서찰의 지령문입니까.”
“아직 손에 넣지는 못했소. 부하가 끼워 넣는 모습만 포착했을 뿐이오. 쪽지 자체를 회수하려면 불경을 전부 열람할 권한이 필요하오.”
이겸이 몸을 돌렸다.
“그것이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오. 당신이 가진 체크리스트의 마지막을 완수할 증거를, 대비전 안에서 찾아야 하오.”
윤소하가 고개를 끄덕였다. 말 대신 행동으로 답했다. 품에서 침방 기록부 사본을 꺼내 탁자 위에 펼쳤다.
“그렇다면, 지금 밝혀야 할 것이 한 가지 더 있사옵니다.”
--- 침방 문서고. 밤은 더 깊어 호롱불이 꺼질 듯 흔들리고 있었다. 윤소하가 이겸의 뒤를 따라 문서고 안으로 들어섰다.
선반에는 침방의 물목과 인원 변동, 의복 출납 기록들이 십 년 단위로 정리되어 있었다. 윤소하가 손끝으로 먼지 낀 서가를 한 칸씩 짚어가며 기록부를 펼칠 자리를 찾았다.
“종사관 나리, 이것을 보시옵소서.”
윤소하가 침방 기록부의 페이지를 넘겨 멈췄다. 손가락이 가리킨 곳은 봉함실 물목 정리 기록이었다.
“중전전 봉함실, 세 번째 단. 여기에는 본래 비단 보자기 한 장이 보관되어야 했사옵니다.”
이겸이 기록을 내려다보았다. 숫자와 서명이 빼곡한 칸 사이에, 한 줄이 잉크를 쏟은 듯 번져 있었다.
“이 얼룩은……”
“대비전 지밀 최상궁의 필체와 흡사하옵니다. 번진 흔적을 보면 왼손으로 쥔 붓이 미끄러진 자국.”
윤소하가 기록부의 다른 페이지를 넘겨 비교 지점을 보여주었다. 앞서 날리상궁의 출입 기록을 찾았던 페이지였다.
“그리고 바로 다음 날, 날리상궁께서 이 물목을 ‘옮김’으로 기록하셨사옵니다. 행선지는 대비전 별당 불당.”
이겸이 고개를 들었다.
“불경 보관소.”
“그 불경 속에 대비의 측근이 오늘 밤 쪽지를 끼워 넣었다면……”
윤소하의 손가락이 기록부에서 떨어졌다.
“서찰은 아직 그곳에 있사옵니다. 불당의 어느 불경 안에.”
이겸이 팔짱을 풀며 숨을 길게 내쉬었다. 호롱불이 두 사람의 어깨 너머로 긴 그림자를 드리웠다.
“씨앗이 그곳에 뿌려졌다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명확하오.”
“내일 아침, 불경을 열람할 권한을 확보하겠소.”
그 말에 윤소하가 고개를 들었다. 이겸의 옆얼굴에 호롱불이 깃들었다.
“이번에는 내가 당신을 믿소.”
말이 짧았다. 열 걸음 밖 복도에서는 순라 도는 내금위 병사들의 단독대 소리가 들려왔다. 두 사람은 서로의 시선을 놓지 않았다.
회랑의 촛불은 이미 반쯤 꺼져 있었다. 남은 불빛이 기둥 그림자를 세 겹으로 늘여 바닥에 눕혔다. 날리상궁의 발소리는 없었다. 옥색 당의 자락이 돌바닥을 스치며 그림자 속으로 빨려 들어갈 뿐이었다.
소매 안에서 호박 가락지가 손가락 마디에 걸렸다. 숨을 들이쉬었다. 대비전 지밀 최상궁의 전갈은 단 한 줄이었다. 해 뜨기 전에 불당으로 옮기지 않으면, 네 가락지의 사연을 중전 마마께서 알게 될 것이다.
회랑 모서리를 돌 무렵, 날리상궁의 걸음이 멈췄다.
회랑 모서리를 돌 무렵, 날리상궁의 걸음이 멈췄다.
기둥 뒤에서 차령 최상궁이 걸어 나왔다. 떨리는 손끝을 치마 주름에 문지르며.
“……상궁님.”
날리상궁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눈가의 잔주름이 호롱불 아래서 움직이지 않았다.
“차령아. 이 밤에 여긴 무슨 일이냐.”
차령 최상궁의 목울대가 위아래로 움직였다. 손이 소매 안으로 들어갔다 나왔다를 반복했다. 한 걸음 다가서며 그녀가 말했다.
“상궁님, 그 서찰은 중전마마의 것입니다.”
회랑의 공기가 멎었다. 날리상궁의 왼손 검지가 천천히 올라와 호박 가락지의 금 간 표면을 쓸었다. 그녀는 대답하지 않았다.
차령 최상궁이 한 걸음 더 다가섰다. 귀 뒤의 사마귀에 짧은 털이 촛불에 반짝였다.
“상궁님께서 지금 품에…… 서찰을 갖고 계실 것 같사옵니다. 그것을 대비전 불당으로 가져가시면, 상궁님 자신을 구할 수 없을 것 같사옵니다.”
“네가 무얼 안다고 나서느냐.”
날리상궁의 목소리는 여전히 낮고 부드러웠다. 그러나 그 끝이 바늘처럼 찔렀다.
차령 최상궁의 숨이 한 번에 가빠졌다. 손톱이 옆구리를 긁었다. 신경성 버릇이었다.
“제가…… 제가 알기 때문이옵니다.”
날리상궁의 눈이 가늘어졌다. 호박 가락지에 얹은 손가락이 멈췄다.
차령 최상궁이 숨을 세 번 들이쉰 뒤, 떨리는 목소리를 눌렀다.
“소혜가 숨지기 전, 태워 없애야 했던 편지를…… 제가 읽었사옵니다.”
날리상궁의 표정이 처음으로 굳어졌다. 눈 밑의 주름이 파르르 떨렸다.
“그 편지를 네가 읽었다고?”
차령 최상궁의 손이 자신의 치마 앞섶을 움켜쥐었다. 손가락 마디가 하얗게 질렸다. 눈이 좌우로 흔들렸지만, 발은 물러서지 않았다.
“대비마마의 측근이…… 지밀 최상궁께서 중전마마의 아들을 찾아내라고 명령한 내용이었사옵니다. 그것이…… 제가 그날 태운 편지 속에 적혀 있었사옵니다.”
회랑 저편에서 바람 한 점이 지나갔다. 마지막 남은 촛불 하나가 꺼졌다.
어둠 속에서 날리상궁의 숨소리만 들렸다. 평소보다 한 박자 빠르고, 한 꺼풀 얇았다.
“네가 그걸 왜 지금 말하는 게냐.”
“상궁님께서…… 중전마마를 진심으로 지키고자 하셨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옵니다.”
차령 최상궁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손끝이 떨렸지만, 시선은 더 이상 피하지 않았다.
“그러니 이 서찰을 불당으로 가져가시면, 상궁님의 진심마저 대비마마께서 써버릴 것 같사옵니다. 그 편지가 증명하옵니다. 이 모든 일의 시작이 대비전이었음을.”
날리상궁이 천천히 눈을 감았다 떴다. 손이 소매 속으로 들어갔다. 서찰의 모서리가 손바닥에 닿았다.
차령 최상궁이 그 손목을 보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중전마마께서 마지막으로 대비마마의 아드님을 만나신 곳.”
날리상궁의 눈이 번쩍 뜨였다.
“그것도 적혀 있었느냐.”
“자선당 후원이었사옵니다. 대비마마의 아드님이 돌아가시기 전날 밤, 중전마마께서 그곳에 계셨다고…….”
날리상궁의 호흡이 멈췄다. 가락지 낀 손이 옅게 떨렸다. 그녀의 입술이 열렸다가 닫혔다.
차령 최상궁은 더 이상 떨지 않았다. 눈가에 맺힌 눈물만이 촛농처럼 반짝였다.
날리상궁이 소매 속에서 서찰을 꺼내지 않은 채, 낮고 무거운 목소리로 물었다.
“네가 이걸 종사관 나리께 진술할 셈이냐.”
차령 최상궁이 고개를 끄덕였다. 작고 단단한 움직임이었다.
“이미…… 그러할 결심이 섰사옵니다.”
밤바람이 불당 쪽에서 불어왔다. 날리상궁은 한참을 서 있었다. 회랑의 어둠 속에서도 그녀의 손이 서찰을 꽉 쥔 채 움직이지 않았다는 것을, 차령 최상궁은 보았다.
대비전 별당 불당 앞은 뜰 한가운데보다 어두웠다. 처마 그림자가 바닥의 박석을 절반쯤 삼킨 시각이었다.
차령 최상궁 박씨의 진술이 끝난 뒤 침묵이 길어졌다. 날리상궁 한씨는 불당 쪽을 등진 채 서 있었고, 차령 최상궁은 두 발짝 물러나 숨을 고르고 있었다. 윤소하는 이겸과 나란히 회랑 모퉁이를 돌아 그 앞에 멈춰 섰다.
“최상궁 마마.”
이겸의 목소리가 낮았다. 날리상궁이 천천히 몸을 돌렸다. 불당 안에서 새어 나온 촛불이 그녀의 얼굴 절반을 비추었다. 평소의 부드러운 미소는 없었다.
“내금위 종사관께서 이 밤중에 별당까지 오실 일이옵니까.”
“대비전 지밀 최상궁이 오늘 밤 이 불당에서 무언가를 주고받았다는 보고를 받았사옵니다.”
이겸이 불당의 닫힌 문 쪽으로 턱을 가리켰다.
“그리고 최상궁 마마께서 그 직후 이 자리에 계시다는 것도.”
날리상궁의 손이 소매 안으로 들어갔다. 윤소하는 그 손끝이 호박 가락지를 만지는 모양을 놓치지 않았다.
“최상궁 마마.”
윤소하가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목소리는 작고 정중했으나 속도는 빨랐다.
“차령 최상궁께서 말씀하신 자선당 후원…… 대비 마마의 아드님이 숨진 그날 밤, 중전 마마께서는 누구와 함께 계셨사옵니까.”
날리상궁의 눈가가 미세하게 떨렸다.
“네가…… 감히 그날을 묻느냐.”
“가락지가 말씀드리기 어려운 사연이라면, 묻지 않겠사옵니다.”
윤소하의 시선이 날리상궁의 소매 쪽으로 내려갔다.
“다만 중전 마마를 진심으로 지키고자 하셨다면, 그날 최상궁 마마께서 무엇을 목격하셨는지…… 지금 이 자리에서 밝히셔야 하옵니다.”
날리상궁이 길게 숨을 들이마셨다. 손을 소매 밖으로 꺼냈다. 호박 가락지의 금 간 면이 촛불을 받아 희미하게 빛났다.
“그날 밤 내가 자선당 후원으로 간 것은…… 대비 마마의 부름을 받았기 때문이다.”
차령 최상궁이 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대비 마마께서 이 가락지를 보시고 말씀하셨지. ‘네가 중전을 살리려면 증거를 없애라’고.”
날리상궁의 시선이 윤소하에게 고정되었다. 목소리는 더 느려졌으나 냉기는 사라지지 않았다.
“대비 마마의 아드님은 그날 밤 자선당 후원에서 혼자가 아니었다. 중전 마마와…… 그리고 갓 태어난 아이가 함께 있었다.”
이겸의 손이 허리춤 운검 쪽으로 내려갔다.
“그 갓난아이가 누굽니까.”
“내가 알기로 그 아이는 죽었다. 그러나 중전 마마께서는 달리 믿으셨다.”
날리상궁이 소매 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접힌 종이였다. 중전전 밀실에서 보았던 것과 같은 재질의 삼합청명사. 진짜 서찰이었다.
“이것은 그날 밤 중전 마마께서 강빛나에게 직접 건네신 것이다.”
날리상궁이 윤소하 앞으로 종이를 내밀었다.
“네가 이 서찰을 찾아 헤맨 이유를 나는 이제 알겠구나.”
윤소하가 손을 내밀었다. 손끝이 떨리지 않았다. 종이를 받아 쥐는 순간, 그녀의 손목에 날리상궁의 손이 포개어졌다. 가락지의 차가운 촉감이 맥박 위로 스몄다.
“이 아이가 바로……”
날리상궁의 말이 허공에서 멈추었다.
불당 안에서 발소리가 울렸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아니라, 안쪽 깊은 곳에서 여럿의 발이 동시에 움직이는 굉음이었다.
“누구냐!”
회랑 반대편에서 대비전의 측근들이 쏟아져 나왔다. 어둠 속에서 최소 다섯 명의 그림자가 횃불을 들고 달려왔다.
이겸이 재빨리 윤소하의 앞을 막아섰다. 날리상궁이 물러서며 손을 거두었고, 차령 최상궁은 벽 쪽으로 붙었다.
윤소하는 그 짧은 틈에 서찰을 폈다.
첫 줄이 시야 안으로 들어왔다. 중전의 필체였다. 붓끝의 굵기와 기울기가 기록부의 약호와 정확히 일치했다.
‘네 이름은 원래 윤소하가 아니었다.’
가슴 깊은 곳에서 무언가가 무너지는 소리가 났다.
윤소하는 서찰을 접어 품 안에 밀어 넣었다. 횃불이 바로 앞까지 다가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