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verStory

서찰의 비밀, 일곱 개의 밤

5화

해 뜨고 한 시진도 되지 않은 이른 아침, 내금위 청사 앞 마당에는 옅은 안개가 채 가시지 않았다.

윤소하가 청사 문턱을 넘자 이겸이 뒤따라 나왔다.

“침방 합숙처로 바로 돌아가라. 통행 허가증은 약조한 대로——”

회랑 쪽에서 들려오는 다급한 발소리에 두 사람의 시선이 동시에 그쪽으로 향했다. 날리상궁이었다. 평소의 느린 걸음이 아니었다. 치마폭이 바닥에 끌리는 것도 아랑곳않고 허둥지둥 다가왔다.

“종사관 나리.”

숨을 가다듬는 날리상궁의 목소리가 평소보다 반 박자 빨랐다.

“대비전에서 발송된 서찰이 지금 내명부 전역에 회람되고 있사옵니다.”

이겸의 눈썹이 좁혀졌다.

“대비전에서?”

“중전 마마의 사사로운 언문 서신이라 주장하며, 내명부 각 처소에 돌리고 있사옵니다.”

윤소하의 손끝이 치맛자락을 스쳤다. 대비전 발신 서찰에 중전의 사사로운 언문이라니. 회귀 전에는 없던 변수였다.

“회람이 시작된 지 얼마나 되었느냐.”

“아침 일찍부터입니다. 정전 앞뜰에서 공개 열람 중이옵니다.”

이겸이 윤소하를 돌아봤다. 그녀가 먼저 고개를 끄덕였다.

“내명부로 가겠습니다. 날리상궁께서는 우리보다 먼저 돌아가 서찰이 유출되지 않도록 관리하십시오.”

날리상궁은 대답 대신 몸을 돌려 급히 사라졌다. 이겸이 걷기 시작했고 윤소하가 반 걸음 뒤에서 따랐다.

“대비전에서 중전의 언문 서신이라고 주장한다.”

이겸의 말에 윤소하가 낮게 답했다.

“중전 마마께서 언문 교서를 쓸 때 반드시 한문 어휘를 혼용하시는 습관이 계셨습니다. 대비전에서 회람 중이라는 서찰이 정말 마마의 친필인지 확인해 봐야 하옵니다.”

이겸이 걸음을 멈추지 않은 채 그녀를 곁눈질했다.

“네가 중전의 필체 습관을 안다는 말이냐.”

“침방 나인은 중전의 침구와 의복을 정리하며 마마의 흔적을 가장 가까이서 접하는 자리이옵니다.” 거짓이 아니었다. 다만 진실의 전부는 아니었다.

내명부 정전 앞뜰에 도착했을 때, 그곳은 이미 수십 명의 나인과 상궁들로 소란스러웠다. 중앙의 작은 탁자 위에 서찰 한 장이 펼쳐져 있었고, 차령 최상궁 박씨가 탁자 옆에서 손을 비비며 서성이고 있었다. 손가락 끝이 가늘게 떨리는 것이 멀리서도 보였다. 날리상궁은 이미 도착해 탁자 맞은편에서 회람 절차를 감시하고 있었다.

이겸이 무리 속으로 걸어들어가자 나인들이 길을 터주었다. 윤소하는 그의 뒤를 따라 탁자 앞까지 가 시선을 펼쳐진 서찰에 꽂았다.

필압이 달랐다. 중전의 글씨는 붓을 내리누를 때 기운이 오른쪽 어깨로 쏠려 획 끝이 약간 휘어지는 버릇이 있었으나, 이 서찰의 글씨는 종이 위를 미끄러지듯 가볍게 흐르고 있었다. 그리고 한문이 단 한 글자도 없었다.

윤소하가 이겸의 소매를 아주 가볍게 잡아당겼다. 그가 몸을 약간 낮추자 입김에 가까운 소리로 속삭였다.

“이 서찰은 중전 마마의 필체가 아닙니다.”

이겸의 눈동자가 미세하게 흔들렸다. 그가 질문하려는 입술을 열기 전에 날리상궁의 시선이 그들에게 꽂혔다.

“윤 나인. 네가 지금 무어라 했느냐.”

날리상궁의 조용한 목소리가 주변의 모든 소음을 삼켰다. 차령 최상궁이 손가락 떨림을 멈추려 손을 치마 속에 감추었고, 다른 나인들도 일제히 윤소하를 쳐다봤다.

윤소하는 허리를 펴고 날리상궁을 정면으로 마주했다.

“중전 마마께서 쓰신 언문 교서마다 반드시 포함되는 필획의 버릇이, 이 서찰에는 없사옵니다.”

“그 버릇이 무엇인지 말해 보아라.”

날리상궁의 눈이 가늘어졌다. 윤소하는 그녀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으나 대답 대신 이겸을 향해 살짝 몸을 돌렸다.

“종사관 나리께서는 제보를 수집하시는 중이십니다. 제 의견은 따로——”

“아니, 지금 여기서 듣고 싶구나.”

날리상궁의 목소리에 칼끝 같은 냉기가 실렸다. 지팡이를 짚은 손가락이 하얗게 변해 있었다. 차령 최상궁이 입술을 떨며 끼어들었다.

“저, 저 나인은 워낙 눈썰미가 예민한 아이라…… 최상궁 마마께서 너무 마음에 두실 것은……”

“박 최상궁은 입을 다무시오.”

날리상궁의 한 마디에 차령 최상궁이 입을 막았다. 손가락 떨림이 치마 밖으로도 보였다.

이겸이 윤소하와 날리상궁 사이로 반 걸음 비집고 들어서며 어깨로 윤소하를 자연스럽게 가렸다.

“날리상궁께서는 제보의 세부 사항을 공개석상에서 듣기를 원하시는 모양이나, 내금위 수사 절차상 제보 내용은 비공개가 원칙입니다.”

“종사관 나리께서는 이 나인의 의견을 이미 알고 계신 듯 보이옵니다만.”

“알고 있습니다.”

이겸의 대답이 너무 빨랐다. 나인들 사이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번지며 중전의 필체가 아니라는 의혹이 공공연히 피어올랐다.

그때 대비전 소속 하급 나인 하나가 날리상궁의 곁으로 다가와 작은 목소리로 무언가를 귀에 전했다. 날리상궁의 표정이 미세하게 굳어졌다.

“……대비 마마께서 오늘 오전 중으로 이 서찰에 대한 내명부 전체의 답신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탁자 주변이 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다. 이겸이 윤소하에게 다가서며 누구에게도 들리지 않을 만큼 낮게 물었다.

“무슨 근거인가.”

“필압의 방향. 한문 부재. 두 가지만으로도 중전 마마의 친필이 아니라는 판단은 서옵니다.”

“확신하느냐.”

“목숨을 걸 만큼이옵니다.”

두 사람의 시선이 부딪혔다. 이겸의 엄지가 검지 마디를 한 번 스쳤다. 더 묻지 않았다.

날리상궁이 지팡이를 한 번 굴렸다. 회람 중이던 나인들에게 서찰을 원래 자리로 되돌리라는 지시가 떨어졌고, 웅성거리던 무리가 삼삼오오 흩어지기 시작했다. 내명부 정전 앞뜰에 동요가 서리처럼 깔렸다.

이겸은 상궁들의 눈길을 피해 뒷문 쪽으로 턱짓했다. 윤소하가 고개를 숙이고 그의 뒤를 따랐다. 복도로 나서자 마지막 의녀 한 명이 약합을 들고 급히 지나갔고, 두 사람의 발소리는 그 뒤로 자연스레 묻혔다. 내명부 정전을 벗어나 침방 곁방으로 향하는 골목길 회랑엔 아직 오전 햇살이 닿지 않아 석벽이 차갑게 젖어 있었다.

침방 곁방은 아직 램프 기름 냄새가 채 가시지 않은 시간이었다. 이겸이 윤소하를 데리고 들어선 곳은 바느질 도구들이 벽을 따라 정렬된 좁은 방이었다. 그가 가짜 서찰 한 통을 탁자 위에 펼쳤다.

“이것을 보아라.”

윤소하의 손끝이 종이 모서리에 닿았다.

“종이의 결이 다릅니다. 중전 마마의 침구에 놓이던 쪽지들은 늘 백릉지였사옵니다. 그러나 이 종이는 만졌을 때 미끄러짐이 적고, 빛에 비추면 푸른 기운이 도는—— 대비전에서만 사용하는 삼합청면사이옵니다.”

“종이만 아는가.”

“아니옵니다.”

윤소하가 가짜 서찰을 들어 창가로 가져갔다. 아침 햇살이 종이를 뚫고 붓글씨의 획을 드러냈다.

“이 글씨를 보시옵소서. 붓을 쥔 방향이 오른손이 아니옵니다. 획의 끝마다 왼쪽으로 힘이 실려 있고, 삐침이 오른쪽으로 기울어 있습니다. 왼손잡이의 필체입니다.”

이겸이 다가서 그늘진 획들을 내려다보았다.

“중전의 필체와 다른 점을 네가 아는 이유는 무엇이냐.”

“침방 나인은 중전 마마의 침구와 의복을 만집니다. 마마께서 침전에서 읽으시던 책갈피, 침구 밑에 놓인 쪽지들—— 수년간 그 글씨를 눈에 익혔사옵니다. 매일 아침 침구를 정리하며, 몇 번이나.”

“읽을 줄 아는가.”

“언문은 읽을 수 있사옵니다. 한문은—— 글자를 하나하나 짚어가며 겨우 뜻을 짐작할 뿐, 제대로 읽지는 못하옵니다.”

절반의 진실이었다. 이겸의 손이 탁자 위의 또 다른 서류로 향했다. 가짜 서찰과 소혜의 유품에서 나온 봉투 조각을 나란히 놓았다.

“그렇다면 이 조각들에 대해서는 할 말이 있느냐.”

윤소하의 손가락이 봉투 조각의 바늘땀을 가리켰다.

“이 봉합실은 봉함실의 방식이 맞사옵니다. 바늘 간격이 일정하고, 접힌 모서리에 한 번 더 박음질—— 그러나 이것은 다릅니다. 간격이 고르지 않고, 실의 꼬임도 봉함실과 무관합니다.”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종사관 나리께서는 이미 아실 것이옵니다. 이 가짜 서찰은 대비전의 종이에, 대비전 측 인물의 손으로 쓰였고, 봉함실을 거치지 않은 물건이라는 것을.”

이겸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가 읽지 못하는 한문 서찰의 필체까지 왜 그토록 확신하는지, 아직 의문이 남는다.”

“의문을 품으시는 것이 종사관 나리의 직분이옵니다. 그러나 지금 추궁하셔야 할 것은 제가 아니옵니다.”

이겸이 가짜 서찰을 접어 품에 넣었다.

“알겠다. 더 묻지 않겠다. 네가 용의자라는 생각은 접었다. 가짜 서찰 제작자가 누구인지—— 그것이 지금 내 질문이다.”

그가 먼저 방을 나갔다. 윤소하는 치마 안쪽에 숨긴 서찰 조각들의 위치를 무의식중에 확인했다.

아침이 지나고 해가 중천을 향할 무렵, 내명부 후원 석축 뒤 동백나무 그늘에 차령 최상궁이 서 있었다. 이겸을 보자마자 손톱으로 왼쪽 손바닥을 긁기 시작했다.

“종사관 나리…… 소혜가 죽던 밤의 일이옵니다. 제가…… 보았사옵니다. 대비전 쪽 나인 한 명이 밤중에 어떤 서찰을 건네받는 것을.”

“누구에게서 받았소.”

“그것은…… 알 수 없었사옵니다. 어둡고, 그림자에 가려……”

차령 최상궁의 손톱이 손바닥을 더 깊이 긁었다.

“그 서찰을, 제가—— 태웠사옵니다.”

이겸의 눈빛이 차가워졌다.

“왜 태웠소.”

“무서웠사옵니다. 내용을 훔쳐보았는데…… 거기에—— ‘밀실의 아이’라는 말이 있었사옵니다. 그리고 중전 마마의 밀실로 향하는 대비전 지밀 최상궁을 보았다는 증언도 적혀 있었사옵니다. 소혜가 죽기 바로 전날 밤의 일이라고……”

이겸이 한 걸음 다가섰다. 그녀가 움찔 물러났지만 석축이 등을 막았다.

“밀실의 아이. 그 구절을 또렷이 기억하시오.”

“예…… 더는 읽지 못했사옵니다. 무서워서 바로 불을 붙였기에……”

“그 서찰을 건넨 나인은 중전전 소속이었소. 대비전 소속이었소.”

“……중전전이었사옵니다.”

이겸의 눈빛이 복잡해졌다.

“오늘 이 말, 다른 누구에게도 하지 마시오.”

“하지만…… 대비전에서 가짜 서찰이 돌고 있고, 윤소하 나인이——”

“그것은 내가 압니다. 지금 당신이 한 진술은 이 사건의 방향을 바꿀 수 있는 증언이오. 나는 기록할 것이고, 당신은 잊으시오. 적어도 겉으로는.”

차령 최상궁의 손바닥에는 이미 여러 겹의 붉은 선이 그어져 있었다.

“저는…… 저는 어떻게……”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행동하시오. 대비전 사람들 앞에서 떨지 마시오. 그것이 지금 당신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생존이다.”

이겸이 돌아섰다. 석축을 빠져나오며 그의 손이 검지 마디를 찾았다.

점심 무렵, 내금위 임시 조사실. 이겸이 돌아왔을 때 윤소하는 이미 그곳에 있었다.

“……종사관 나리. 아까 침방 곁방에서 말씀드리지 못한 것이 있사옵니다. 가짜 서찰을 만든 자를 추적하려면, 대비전에서 침방으로 이출된 물품의 목록이 필요하옵니다. 침방 나인만이 열람할 수 있는 기록부이옵니다. 제가 접근할 수 있사옵니다.”

“그 기록부에서 무엇을 찾으려는 것이오.”

“삼합청면사입니다. 대비전 전용 종이가 침방으로 유출된 적이 있다면, 그 기록이 남아 있을 것이옵니다.”

이겸이 탁자 모서리를 짚었다.

“차령 최상궁을 만나고 왔소. 소혜가 죽던 밤, 어떤 서찰이 오간 정황을 진술했소. 그 서찰에는—— ‘밀실의 아이’라는 구절이 있었다고 하오.”

윤소하의 숨이 한 박자 멎었다.

“그 서찰을, 진짜 중전 마마의 서찰이라고 생각하시옵니까.”

“아직 확신할 수 없소. 다만—— 당신이 침방 곁방에서 보여준 눈, 그 눈이 내게 필요하오.”

“저를…… 더 이상 용의자로 보지 않으시는 것이옵니까.”

“내 수사의 방향은 이미 당신에게서 멀어졌소.”

이겸이 탁자 건너편으로 걸어와 섰다.

“대비전에서 유포된 가짜 서찰. 왼손잡이 제작자. 삼합청면사. 그리고 ‘밀실의 아이’. 이 퍼즐을 맞추려면 침방 안쪽에서 움직일 사람이 필요하오. 당신이라면——”

“하겠사옵니다.”

윤소하의 눈빛이 곧았다.

“침방 물품 기록부를 확보하고, 대비전에서 이출된 모든 물목을 추적하겠사옵니다.”

이겸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짧은 동작 속에 더 이상의 의심은 없었다. 윤소하는 치마 안쪽에 손을 넣어 무명 행주에 싸둔 체크리스트 기록지를 만졌다. 두 번째 단계의 실마리들이 비로소 한 줄로 이어지고 있었다.

이겸은 윤소하가 조사실을 나간 뒤에도 한동안 탁자 앞에 서 있었다. 차령 최상궁의 진술을 기록한 종이를 펼쳐 ‘밀실의 아이’라는 구절을 다시 읽었다.

검지 마디를 치던 손이 허공에서 멈췄다.

익숙한 표현이었다. 그가 급히 품속을 더듬었다. 허리춤에 걸린 필갑과 함께 작은 주머니에서 오래된 종이 뭉치가 나왔다. 접힌 자국이 누렇게 바랜 수기.

손가락으로 접힌 종이를 펼치는 이겸의 손끝이, 처음으로 미세하게 떨렸다.

서찰의 비밀, 일곱 개의 밤5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