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verStory

서찰의 비밀, 일곱 개의 밤

7화

아침 햇살이 침방 문서 보관소의 창호지 너머로 퍼질 무렵, 윤소하는 물품 기록부를 펼쳤다.

날리상궁의 이름이 적힌 면을 손끝으로 짚었다. 중전전 밀실 관련 물품 이출 기록은 대부분 최상궁의 날인이 찍혀 있었다. 서찰이 실종된 당일의 항목에 손가락이 멈췄다.

'진시 초각, 중전전 밀실 청소용 등롱 교체 — 날리상궁 입회.'

시간이 적혀 있었다. 소혜가 마지막으로 밀실 주변에서 목격된 시각보다 반 시진 앞선 때였다. 그녀는 기록부를 덮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윤소하는 내금위 임시 조사실로 향하는 회랑에서 이겸을 만났다. 그가 먼저 걸음을 멈추었다.

“무언가 찾았소?”

“예. 날리상궁께서 서찰 실종 당일, 밀실에 단독 출입하신 기록이 있사옵니다.”

이겸의 눈빛이 차가워졌다.

“시간은.”

“진시 초각. 소혜가 밀실 근처에서 마지막으로 목격된 시각보다 앞섭니다.”

“확실하오.”

“기록부에 날인까지 찍혀 있사옵니다.”

윤소하는 소매 속에서 접은 종이를 꺼내 건넸다. 기록부 해당 면을 그대로 옮겨 적은 것이었다.

이겸이 종이를 받아 훑었다. 엄지가 검지 마디를 한 번 쳤다.

“이것이면 날리상궁이 서찰 실종 직후 밀실에 들어갔다는 정황이 성립되오.”

“그리고 서찰을 은닉할 시간도 있었사옵니다.”

“좋소. 이 기록은 내가 보관하겠소.”

이겸이 종이를 접어 철릭 안주머니에 넣었다.

“나는 이제 밖으로 나가야 하오. 차령 최상궁의 진술을 바탕으로, 십 년 전 우리 아버지 사건을 알고 있는 증인을 만날 예정이오.”

“증인이 아직 생존해 있사옵니까.”

“퇴궐한 내관 한 분이 계시오. 부친의 파직 당시 증거 서찰을 직접 본 인물이오.”

윤소하의 눈에 잠시 빛이 스쳤다.

“그 증거 서찰과 지금의 가짜 서찰이——”

“같은 필체라면, 배후가 동일하다는 뜻이오. 가짜 서찰의 종이도 확인할 생각이오.”

“삼합청명사 말씀이시옵니까.”

“예. 대비전 전용인 그 종이가 십 년 전에도 쓰였는지 확인하면——”

이겸의 목소리가 한 톤 낮아졌다.

“두 사건이 같은 손에서 나왔다는 증거가 되오.”

윤소하가 고개를 끄덕였다. 손이 소매 안으로 들어가 체크리스트 기록지를 만졌다. 세 번째 단계의 이름은 아직 멀었다. 그러나 문은 조금씩 열리고 있었다.

오후, 도성 동쪽 외곽의 낡은 기와집 앞. 이겸은 말에서 내려 대문을 두드렸다.

한참 뒤 문이 열렸다. 등 굽은 노인이 눈을 가늘게 떴다.

“누구시오.”

“내금위 종사관 이겸이옵니다. 십 년 전 이조 판서 이현우의 장남이기도 하옵니다.”

노인의 얼굴에 미세한 떨림이 스쳤다.

“대감마님의…… 아드님.”

“예. 들여보내 주시겠소.”

노인은 잠시 망설이다 문을 열어주었다.

방 안은 좁고 어두웠다. 이겸은 앉기를 권하는 손짓을 사양하고 허리춤에서 차령 최상궁의 진술서 사본을 꺼냈다.

“옛일을 묻고 싶소. 부친의 파직 당시, 증거로 제출된 서찰을 보셨다고 들었소.”

“보았소. 이 늙은이 눈으로 똑똑히 보았소.”

“종이가 기억나시오.”

노인의 눈이 가늘어졌다.

“삼합청명사였소. 하얗고 얇은, 대비전에서만 쓰는——”

“확실하오.”

“그 종일 궁 안에서 만지는 이는 대비전 사람들뿐이었으니, 틀릴 리가 있겠소.”

이겸의 손이 검지 마디를 찾았다. 노인은 벽장을 열어 오래된 나무 상자를 꺼냈다. 상자 안에는 누렇게 바랜 종이 한 장이 접혀 있었다.

“대감마님께서 파직되시기 전날 밤, 저에게 맡기셨소. ‘언젠가 이겸이가 오면 전하라’——”

이겸의 손이 멈췄다.

“부친께서…… 저에게.”

“예. 이것은 당시 증거 서찰의 사본이오. 대감마님께서 직접 베껴두신 것.”

이겸이 종이를 받아 폈다. 십 년 전 아버지의 손글씨가 아니었다. 증거 서찰의 원문을 그대로 옮겨 적은 필체. 대비전 불경 속 쪽지와 획의 방향이 같았다. 왼손잡이의 필체였다.

“필체를 확인하셨소.”

“그때나 지금이나…… 같은 사람의 손이 틀림없소. 이 늙은이도 서찰을 만져본 자라면 알 수 있소.”

이겸은 종이를 접어 철릭 안주머니에 넣었다.

“진술서를 받아도 되겠소.”

“쓰시오. 내가 아는 것은 이제 아드님께 돌려드리는 것이 마땅하오.”

노인이 붓을 들었다. 떨리는 손으로 진술서를 한 자 한 자 채워갔다. 대비전 전용 삼합청명사로 쓰인 점. 필체가 왼손잡이의 것인 점. 십 년 전과 지금의 서찰이 동일인의 손에서 나왔다는 점.

진술서를 건네받은 이겸이 허리를 굽혔다.

“감사드리옵니다.”

“대감마님의 억울함을 풀어주시오.”

“그리하겠소.”

노인은 상자째 이겸에게 밀었다.

“사본도 가져가시오. 더는 이 늙은이가 가지고 있을 물건이 아니오.”

이겸은 상자를 받아 들고 밖으로 나왔다. 해는 이미 서쪽으로 기울고 있었다. 손 안에는 십 년의 무게가 담겨 있었다.

그가 말고삐를 쥐었다.

내금위로 돌아가야 했다. 증거물을 확보하고 수사 기록을 갱신해야 했다. 대비전의 가짜 서찰이 단지 이번 사건만의 것이 아님을, 십 년 전부터 이어져 온 흐름임을 입증할 준비가 되었다.

내금위를 나선 뒤로 종일 말을 달려 한성에 닿은 것은 어둑발이 내린 뒤였다. 이겸은 곧장 관아로 돌아가지 않고 침방 후원 담장 바깥에서 말에서 내렸다. 안주머니 속 진술서와 사본이 갑옷처럼 가슴을 눌렀다.

저녁 바람이 침방 후원의 늙은 소나무 가지를 흔들었다. 윤소하가 정자 기둥 뒤에 서서 손안의 종이 쪽을 접었다 폈다 했다. 약속한 시각보다 반 시진 일찍 와 있었다.

발소리가 났다. 이겸이었다.

“늦었소.”

“아닙니다. 제가 일렀사옵니다.”

이겸이 정자 안으로 들어서며 주위를 살폈다. 침방 나인들의 처소에서 멀리 떨어진 이 후원은 낮에도 인적이 드물었다. 초저녁 어스름 속에 등불 하나 없는 정자는 그림자에 묻혀 있었다.

“먼저 당신 쪽부터 듣겠소.”

윤소하가 소매 안에서 종이를 꺼내 펼쳤다. 침방 물품 기록부의 사본이었다.

“날리상궁께서 사건 당일, 밀실 출입 기록을 두 번 남기셨사옵니다. 하나는 해 뜨기 전, 다른 하나는——”

숨을 한 번 들이쉬었다.

“소혜의 시신이 발견된 직후. 세 번째 시진 무렵이었사옵니다.”

이겸의 손가락이 기록부 위에 멈췄다.

“이 부분…… 한문이오.”

윤소하의 손끝이 살짝 떨렸다.

“예.”

“읽을 줄 아는 것이오.”

그 말은 질문이 아니었다. 윤소하가 고개를 들었다. 어둠 속에서 두 사람의 시선이 부딪혔다.

“침방 나인으로 기록된 이가, 언제 한문을——”

“종사관 나리.”

윤소하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그 질문은…… 지금 답할 수 없사옵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이겸이 품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접힌 종이 한 장이었다.

“이것을 보시오.”

종이를 펴자 바랜 먹자국이 드러났다. 십 년은 묵은 문서였다.

“이것은——”

“나의 부친이 역모죄로 몰렸을 때, 증거로 제출된 서찰이오.”

윤소하의 눈이 종이 위를 훑었다. 필체가 낯익었다. 왼쪽으로 살짝 기울어진 획. 가짜 서찰 조각에서 본 것과 똑같은 붓의 흐름이었다.

“이 필체……”

“당신도 알아보는군요.”

이겸이 종이를 접어 다시 품에 넣었다.

“십 년 전 부친을 죽인 서찰과, 오늘 대비전이 뿌린 가짜 서찰은 같은 자의 손에서 나온 것이오.”

“그러면 종사관 나리의 부친께서도——”

“누명이었소.”

짧은 대답이었다. 목소리는 낮았지만 끝이 갈라져 있었다.

“나는 그것을 쫓아 이 자리까지 왔소. 그리고 오늘——”

그가 윤소하를 똑바로 응시했다.

“당신이 한문을 읽는다는 사실을 알았소. 묻지 않겠소. 당신에게도 묻지 못할 사연이 있을 터이니.”

엄지가 검지 마디를 톡 쳤다.

“대신 이것으로 알겠소. 이제 당신과 나는 동등하오.”

바람이 다시 불어 소나무 가지를 흔들었다. 윤소하의 손이 치맛자락에서 떨어졌다.

“종사관 나리.”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렸다.

“제 출생에는…… 제가 아직 다 알지 못하는 부분이 있사옵니다.”

“날리상궁이 한 말 때문이오.”

“예. 생모의 존재를 아는 이는 한 분뿐이셨사옵니다. 그런데 그분은 이미——”

말을 마저 잇지 못했다. 이겸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의 부친 사건과 당신의 사건은 대비전에서 만나고 있소. 가짜 서찰의 종이는 대비전 삼합청면지, 필체는 동일인. 그리고——”

“날리상궁이 은닉한 진짜 서찰이 대비전이 원하는 것이라면, 최상궁께서는 대비전과 중전전 사이에서——”

“맞소. 어느 쪽 편인지 알 수 없는 상태.”

이겸이 팔짱을 풀며 정자 기둥에 등을 기댔다.

“날리상궁의 움직임을 감시해야 하오. 그가 누구에게, 언제, 무엇을 넘기는지.”

“침방 나인의 신분으로는 한계가 있사옵니다.”

“그래서 내가 움직이겠소. 차령 최상궁의 진술로 대비전 측근의 사건 당일 행적은 확보했소. 이제 날리상궁의 동선만——”

그때 돌계단 아래서 발소리가 났다. 두 사람이 동시에 숨을 죽였다.

소매를 잡아끄는 손길에 윤소하가 정자 기둥 뒤로 몸을 숨겼다. 이겸은 검 손잡이에 손을 얹은 채 소리 난 쪽을 응시했다.

계단 아래서 그림자가 멈췄다.

“종사관 나리.”

차령 최상궁 박씨의 목소리였다. 숨이 거칠었다.

이겸이 기둥에서 떨어져 나왔다.

“차령 최상궁. 무슨 일이오.”

“날리상궁께서…… 대비전 쪽으로 가셨사옵니다. 망토를 덮어쓰고, 아무도 없는 길로만……”

“언제.”

“막 떠나셨사옵니다. 무언가 급한 일인 듯 걸음이……”

차령 최상궁의 손이 떨렸다. 이겸이 윤소하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따라가겠소.”

“저도 함께——”

“아니오.”

한 박자 망설이다가 이겸이 덧붙였다.

“대비전 인근은 위험하오. 내금위 종사관인 나와 달리 당신은——”

“가면 안 된다면 오지 않으라 하셨어야 했사옵니다.”

윤소하의 눈이 곧았다.

“이미 저는 이 사건 안에 있사옵니다.”

이겸이 그 눈을 바라봤다. 입가가 살짝 움직이다가 이내 굳어졌다.

“그럼 내 뒤에서 다섯 걸음 떨어져 있으시오. 절대 앞서지 마시오.”

대비전 인근 후원은 칠흑 같았다. 구름이 달을 가린 밤, 가로등도 없는 산책로를 날리상궁의 실루엣이 빠르게 지나갔다. 이겸과 윤소하는 돌담을 따라 몸을 낮춰 따라붙었다.

고목 세 그루가 모인 빈터에서 날리상궁이 걸음을 멈췄다. 반대편에서 또 다른 망토가 나타났다.

“늦었소.”

낮고 굵은 목소리였다. 대비전 지밀 최상궁의 음성이었다.

“서찰은 어디 있소. 마마께서 기다리시오.”

날리상궁의 목소리가 떨렸다.

“아직…… 시간이 필요하옵니다.”

“핑계는 듣지 않겠소. 그 문서가 세상에 나오면 마마께서 위험해지시오. 최상궁께서 중전전에서 평생 모신 분은 중전 마마 한 분뿐이니, 그 문서를 지키려는 것쯤은 알고 있소.”

한 걸음 다가서는 소리.

“하지만 마지막으로 묻겠소. 진짜 서찰은 어디 있소.”

돌담 뒤에서 윤소하의 손이 흙을 움켜쥐었다. 이겸이 그녀의 소매를 살며시 붙잡았다. 움직이지 말라는 신호였다.

날리상궁의 대답은 길지 않았다.

“밀실에 있사옵니다.”

“중전전 밀실.”

대비전 최상궁이 낮게 웃었다.

“역시 그랬군요. 내일 밤까지 가져오시오. 그렇지 않으면——”

바람이 불어 뒤의 말을 삼켰다. 발소리가 멀어졌다. 대비전 최상궁이 먼저 자리를 떴다.

날리상궁이 잠시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달빛 한 줄기 구름 사이로 새어나와 그녀의 손을 비추었다. 금 간 호박 가락지가 희미하게 빛났다.

이내 그도 돌아섰다. 발소리가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이겸은 움직이지 않았다.

“밀실입니다.”

윤소하가 일어서며 흙 묻은 손을 닦았다.

“내일——”

“아니오.”

이겸이 고개를 저었다.

“지금은 아닙니다. 날리상궁이 내일까지 서찰을 옮길 가능성이 있소. 우리도 내일, 그가 밀실에 들어가기 전에 먼저 들어가야 하오.”

“내금위 권한으로 가능하옵니까.”

“밀실 수색 권한은 종사관에게 있소. 단——”

그가 윤소하를 향해 돌아섰다.

“그 문을 연 뒤의 일은 나도 장담할 수 없소. 중전의 비밀, 대비전의 개입, 당신 생모의 이름. 모든 것이 그 안에 있을 터이니.”

“알고 있사옵니다.”

윤소하의 목소리가 낮고 단단했다.

“내일 새벽, 중전전 밀실 문 앞에서 뵙겠사옵니다.”

이겸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조심해서 돌아가시오. 차령 최상궁에게는 오늘 일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겠사옵니다.”

윤소하가 어둠 속으로 걸어갔다. 소매 속에서 손가락이 체크리스트 기록지를 접었다.

세 번째 단계로 가는 문은, 밀실이었다.

다음 날 새벽, 안개가 채 가시지 않은 중전전 복도. 윤소하가 밀실 앞에 섰다. 잠시 뒤 이겸이 합류했다. 손에는 내금위 수색 허가 문건이 들려 있었다.

“준비되었소.”

“예.”

이겸이 밀실 문으로 손을 뻗었다.

그때 복도 기둥 뒤에서 그림자가 움직였다. 두 사람이 동시에 돌아섰다.

날리상궁이 안개 속을 걸어 나왔다. 호박 가락지가 희미하게 달그락거렸다.

“거기까지 하시오.”

평소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아니었다. 갈라지고 굳은, 무언가를 오래 삼킨 자의 음성이었다.

“그 문을 열면 내명부가 무너진다.”

한 걸음 다가섰다. 안개 사이로 얼굴이 드러났다. 그녀의 눈은 붉게 충혈되어 있었다.

“그리고 너희도 살아남지 못한다.”

서찰의 비밀, 일곱 개의 밤7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