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verStory

서찰의 비밀, 일곱 개의 밤

8화

동틀 무렵, 중전전 복도.

날리상궁의 말이 채 가시기 전에 윤소하가 반 걸음 나섰다.

“이미 늦었사옵니다. 저희는 오늘 이 문을 열 것이옵니다. 최상궁 마마께서 막으시려면 내금위 정식 수사 방해로 기록되어야 하옵니다.”

날리상궁이 고개를 들었다. 충혈된 눈이 윤소하를 뚫어져라 보았다. 손가락이 호박 가락지의 갈라진 틈을 더듬었다.

이겸이 호패에 닿았던 왼손을 풀어 수색 허가 문건을 들어 올렸다.

“내금위 종사관 이겸입니다. 중전전 밀실에 대한 공식 수색을 개시하겠습니다. 최상궁께서 원하신다면 지금 이 자리에서 그 사유를 청취하겠습니다.”

긴 침묵. 등불이 바람 없이 가물거렸다.

“따라오너라.”

날리상궁이 열쇠를 꺼내 밀실 문을 열었다. 손이 지나치게 정확했다.

밀실 안으로 들어서자 먼지와 오래된 비단 냄새가 뒤섞였다. 날리상궁은 세 번째 함 아래에서 비단에 싸인 작은 호박색 나무 상자를 꺼내 탁자 위에 올렸다. 중전의 봉인은 인주가 바래 있었다.

이겸이 봉인을 확인하며 물었다.

“최상궁께서 이것을 이곳에 숨기신 이유를 묻겠습니다.”

날리상궁이 탁자 모서리를 짚었다. 가락지 낀 손가락에 힘이 들어갔다.

“중전 마마를 지키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나를 지키기 위해서이기도 하였다.”

이겸이 상자를 열었다. 평범한 저지에 가까운 종이가 나왔다. 필체는 가짜 서찰과 달리 단정한 해서체였다. 이겸이 서찰을 펼쳐 첫 줄을 훑고는 표정을 굳혔다.

“이것을 읽을 수 있겠소.”

물음이 아니었다. 윤소하가 서찰을 받아 두 손으로 펼쳤다.

“‘남궁에 숨긴 아이는 무사하다.’”

날리상궁의 어깨가 떨렸다.

“‘그러나 이 사실이 알려지는 날, 대비전은 아이를 핑계로 중전을 폐할 것이다. 내가 감히 너에게 이 편지를 쓰는 것은 네가 내 아들을 받아들인 유일한 이이기 때문이다.’”

윤소하의 목소리가 미세하게 갈라졌다.

“‘수신자는 침방 나인——’”

입술이 멈췄다.

“‘침방 나인 강빛나.’”

낯선 이름이 밀실에 떨어졌다. 이겸이 윤소하를 주시했다. 그녀의 손은 떨리지 않았다.

“강빛나. 저의 생모이옵니다.”

날리상궁이 눈을 감았다.

“중전 마마께서 남궁에서 낳으신 아들을…… 생모께서 받아 길렀다는 뜻이옵니까.”

“그렇다.” 날리상궁이 눈을 떴다. “그 아이가 살아 있다는 증거가 이 서찰이다. 대비전은 이것을 찾기 위해 십 년을 기다렸다. 소혜는 그걸 건드렸고 죽었다.”

이겸이 몸을 돌렸다. “최상궁께서는 이 서찰의 존재를 처음부터 알고 계셨소.”

“알고 있었다. 중전 마마께서 몸져누우시기 전, 마지막으로 내게 이 상자를 맡기셨다. 대비전의 눈을 피해 보관해 달라고. 대비전이 내게 가까이 온 것도 그때부터였다.”

윤소하가 두 번째 문단으로 눈을 옮겼다.

“‘아이가 열 살이 되면…… 그 아이를 데려와야 한다. 대비 마마께서 곧 남궁을 정리하실 것이다.’”

이겸의 눈썹이 좁혀졌다.

“‘그 전에 네가…… 그 아이를 다른 곳으로 옮겨라. 그리고 이 서찰은 아무에게도 보이지 마라.’”

날리상궁이 탁자에서 손을 떼며 말했다. “강빛나는 그 서찰을 받고 사라졌다. 그리고 너는 침방 나인 최씨의 손에 맡겨졌다. 윤소하라는 이름으로.”

이겸이 서찰을 받아 소매에 넣으며 물었다. “중전 마마의 아들은 지금 어디 있소.”

날리상궁은 깨진 가락지를 엄지로 문지르며 대답했다. “모른다. 강빛나가 그 아이를 데리고 간 뒤로 내게 전해진 소식은 없다. 살았는지 죽었는지도.”

윤소하의 눈빛이 금 간 가락지에 꽂혔다. 서찰의 감촉이 손끝에 남아 있었다.

복도 바깥에서 새벽 첫 종소리가 들렸다.

이겸이 상자를 닫았다. “최상궁께서 이 모든 것을 숨기신 것은 중전을 위한 일이 아니었소. 최상궁은 권력을 계산하셨소. 중전의 비밀을 쥐고 대비전과의 거래를 모색했습니다. 그 대가로 얻으려 했던 것은——”

“내명부 지밀 최고 최상궁의 자리.” 날리상궁이 스스로 말을 끊었다. “그래. 나는 이 비밀을 이용해 한 자리 오르려 했다. 중전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내가 가장 높은 자리에 있어야 한다고 믿었다. 그게 나의 오만이었다.”

이겸이 그녀를 응시했다. “소혜를 죽인 것은 누구였소.”

“그건 나도 모른다. 그러나 대비전 지밀 최상궁은 소혜가 편지를 건드렸다는 걸 알고 있었다. 직접 명령한 자는 알 수 없다.”

윤소하가 밀실 입구로 몸을 돌렸다. “최상궁 마마. 이 서찰에 생모의 흔적이 있사옵니까. 다른 물건이라도.”

날리상궁이 침묵했다. “강빛나는 한 가지 물건을 남겼다. 너를 맡기며 최씨에게 건넨 것인데…… 대비전 지밀 최상궁이 가져갔다. 네가 침방 나인이 된 후, 그 물건을 빌미로 네 주변을 정리하겠다고 했다.”

이겸이 다가섰다. “무슨 물건이었소.”

“은비녀 하나. 중전 마마께서 강빛나에게 하사하신 것이라고 들었다. 나는 직접 보지 못했다.”

윤소하의 오른손이 움직였다. 쪽머리에 꽂힌 은비녀를 만지지 않았다. 손끝에 힘이 들어갔다. 이겸의 시선이 그 손을 따라갔다. 그녀가 항상 꽂고 다니는 단 하나뿐인 장신구.

“대비전이 그것을 가져갔다면…… 저의 손에 들어온 것은 가짜였사옵니다.”

이겸이 소매 속 서찰을 훑으며 날리상궁을 똑바로 보았다. “오늘 아침, 이 서찰의 내용은 내금위 공식 조서에 기록되지 않습니다. 다만 최상궁께서 이 문 밖으로 나가시는 순간, 대비전은 최상궁이 이곳을 열었다는 사실을 곧 알게 될 것입니다.”

“이미 각오했다.”

윤소하가 문 쪽으로 걸어가다 멈추었다. “최상궁 마마. 생모께서는…… 저를 버리신 것이 아니었사옵니다.”

질문이 아닌 확인이었다. 날리상궁은 대답하지 못했다.

이겸이 윤소하의 어깨 너머로 말했다. “해 뜨기 전에 이곳을 떠나시오. 최상궁을 보호할 수 있는 시간은 그때까지입니다.”

문이 닫혔다. 밀실은 다시 어둠에 잠겼다.

복도를 걸으며 이겸이 물었다. “강빛나라는 이름을 아시오.”

“오늘 처음 들었사옵니다.”

“그런데 한문을 읽었소.”

발소리가 복도에 맞물렸다. 윤소하는 대답하지 않았다. 이겸도 더 묻지 않았다. 그의 오른손이 소매 속 서찰을 확인했다.

중전전 회랑 끝에서 첫 햇살이 기와를 스쳤다.

햇살이 회랑 기와를 넘어 복도 바닥으로 쏟아져 내렸다. 이겸의 검 손잡이를 쥔 손가락이 열기에 데인 듯 움찔거렸다. 그가 중전전 후원으로 몸을 틀 때, 서까래 그림자가 그의 얼굴을 반으로 갈랐다.

안개가 채 걷히지 않은 복도, 날리상궁의 마지막 경고가 공기 중에 매달려 있었다. 이겸이 수색 문건을 든 손을 내리지 않은 채 그녀를 향해 반 걸음 나아갔다.

“최상궁 마마께서 막을 수 있는 일이 아니옵니다.”

“모르는 소리.”

날리상궁의 갈라진 목소리가 복도 벽에 부딪혀 흩어졌다. 그때, 복도 저편에서 여러 겹의 발소리가 울렸다. 질서정연하지만 빠른, 무언가를 포위하듯 좁혀오는 걸음이었다.

이겸의 손이 검 손잡이로 내려갔다.

발소리가 안개를 뚫고 모습을 드러냈다. 대비전 지밀 최상궁이 선두에 서 있었다. 뒤로 대비전 나인 넷이 복도 폭을 막듯 늘어섰다.

그리고 그 중심을 가르며 대비가 걸어나왔다. 자색 당의의 금실 봉황이 안개 속에서도 또렷했다. 손에는 언제나처럼 불경을 쥐고 있었으나, 오늘은 그 불경을 가슴께로 끌어안고 있었다.

“이른 아침부터 수고가 많구나. 날리상궁. 네가 여기 있을 줄 알았다.”

날리상궁의 호박 가락지 낀 손이 소매 안으로 들어갔다.

“대비 마마…….”

“가엾구나. 중전을 향한 네 정성을 나는 잘 알지만—— 네 가락지의 진짜 사연이 중전 폐위보다도 더 큰 죄가 될 수 있다는 걸, 잊은 것은 아니겠지.”

날리상궁의 얼굴에서 핏기가 빠져나갔다. 손가락이 호박 가락지의 금 간 표면을 더듬었다.

이겸이 대비 앞으로 한 걸음 들어섰다.

“중전전 밀실 수색은 내금위의 정당한 권한이옵니다. 대비 마마께서 막으실——”

“종사관. 네 부친의 일도, 네 손으로 바로잡을 수 있을 것 같으냐.”

이겸의 턱선 근육이 굳어졌다. 허리춤 검 손잡이를 잡은 손가락 마디가 하얗게 질렸다.

윤소하가 그 순간 이겸의 옆으로 걸어 나왔다. 등은 곧았고 손은 치마 앞에 모은 채였다. 시선은 대비의 눈을 정면으로 향했다.

“마마께서 중전전 밀실에 이처럼 관심을 두실 줄은, 미처 생각지 못하였사옵니다.”

대비의 눈이 가늘어졌다.

“침방 나인 하나가 감히——”

“대비전에서 제작하신 가짜 서찰은 이미 필체와 종이가 밝혀졌사옵니다. 하지만 진짜 서찰의 내용을 아직 모르신다면…… 마마께서도 지금 이 자리에서 물러나시는 편이 나으실까 하옵니다.”

대비의 손에서 불경을 감싼 손가락이 경련하듯 움찔였다. 그 침묵을 윤소하가 놓치지 않았다.

“중전 마마의 서찰에는—— 중전의 아들에 관한 기록이 적혀 있사옵니다. 그 아비가 누구인지, 그리고 그 아이가 왜 궁에서 사라져야 했는지까지.”

대비의 얼굴에서 표정이 지워졌다.

“무례하군. 네 입으로 그런 말을 꺼낼 자격이——”

“그 자격이 없다고 말씀하신다면, 서찰의 내용을 내일 아침 내명부 전역에 공표하는 것도, 이 나인의 자격 밖 일이겠사옵니다.”

복도에 정적이 내려앉았다. 최상궁이 입술을 깨물었다. 대비전 나인들 사이에서 발소리가 한 번 어긋났다.

대비가 천천히 숨을 들이쉬었다.

“……네가 무슨 말을 꾸며내는지는 모르나, 그 서찰이 진짜인지는 아무도 증명할 수 없을 게다.”

“증명은 필요 없사옵니다. 궁 안에 퍼지는 소문은, 증명이 필요 없는 법이옵니다.”

대비의 등이 잠시 멈췄다. 그러나 그뿐이었다. 발소리가 다시 울렸고, 자색 당의가 안개 속으로 사라졌다. 나인들의 발소리가 그 뒤를 따랐다.

날리상궁이 허리춤을 짚은 손을 벽에 짚었다. 손가락 사이로 호박 가락지의 금 간 표면이 스쳤다. 그녀는 아무 말 없이 벽을 따라 주저앉았다.

“최상궁 마마.”

윤소하가 허리를 굽혀 날리상궁의 손을 잡았다. 손가락이 떨리고 있었다. 윤소하는 다른 손으로 밀실 문 손잡이를 돌렸다. 날리상궁이 눈을 감았다.

“들어가시오. 이미 막을 수 없는 일이었소.”

밀실 안은 촛불 하나 없이 어두웠다. 이겸이 품에서 부싯돌을 꺼내 벽 촛대에 불을 붙였다. 떨리는 불빛이 벽을 훑자, 장롱 깊숙한 곳에 놓인 자개함이 드러났다.

윤소하가 함을 열었다. 그 안에는 포갠 비단 사이에 평평하게 접힌 종이 한 장이 놓여 있었다. 중전의 화압이 찍힌 언문 서찰이었다.

이겸이 다가섰다. 윤소하는 잠시 접힌 종이를 바라보다가, 일으켜 세워 이겸에게 건넸다.

“읽으셨사옵니까.”

이겸의 질문은 아니었다. 확신에 가까웠다.

“예.”

“모두.”

“예.”

이겸이 서찰을 접어 품 안 깊숙이 밀어넣었다.

“이것은 내가 보관하겠소.”

윤소하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침 해가 중전전 처마 위로 떠오르고 있었다. 중전전 후원, 이른 봄의 잔설이 돌계단 틈에 남아 있었다. 윤소하와 이겸은 나란히 걸었다. 누가 먼저도 아니었다. 둘 다 입을 열지 않은 채, 서찰의 내용이 무겁게 발걸음을 끌었다.

“……한 가지 묻겠소.”

이겸이 발을 멈추었다. 윤소하도 걸음을 멈추었다.

“당신은 어떻게 대비 마마 앞에서 그토록 확신할 수 있었소. 서찰을 읽지도 않았을 때부터, 이미 읽은 것처럼.”

윤소하의 시선이 이겸의 품 쪽으로 향했다. 진짜 서찰이 들어 있는 곳이었다.

“읽었으니까요.”

“언제.”

잠시 침묵이 흘렀다. 윤소하의 손가락이 소매 안에서 체크리스트 기록지의 가장자리를 더듬었다.

“죽기 전에.”

이겸의 눈썹이 좁혀졌다. 입을 열려다가 닫았다. 대신 상대의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윤소하는 그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제 기억 속에서는, 이 모든 일이 이미 한 번 일어난 일이옵니다. 지금 내금위 나리가 밟고 계신 발걸음도, 대비 마마가 내뱉으신 그 위협도—— 전에도 겪은 일이옵니다.”

이겸의 엄지가 검지 마디를 찾았다. 한 번, 톡 쳤다. 멈췄다.

그녀의 한문 해독 능력. 소혜의 시신을 처음 발견했을 때 보인 반응. 서찰의 내용을 미리 아는 듯한 추리들.

그리고 십 년 전 아버지의 사건. 지금과 똑같은 필체와 종이. 마치 누군가 처음부터 알고 있었던 것처럼 반복되는 패턴.

“당신의 말을—— 내가 다 이해할 수는 없소. 그러나 거짓은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거짓이 아니옵니다. 다만 아직은 더 말씀드릴 수 없사옵니다.”

이겸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더 묻지 않았다. 그것이 지금 그가 줄 수 있는 전부였다.

윤소하가 문득 고개를 돌렸다. 침방 정원 쪽이었다. 잔설이 녹은 땅에서 겨우내 묻혀 있던 낙엽이 드러나고 있었다. 그녀의 눈빛이 어딘가 먼 데를 붙잡았다.

“……그가 궁 안에 살아 있사옵니다. 중전 마마의 아들이, 아직.”

목소리는 속삭임에 가까웠다.

이겸이 다가섰다. 그녀의 어깨를 감쌌다. 손은 무인의 손답게 굳은살이 박혀 있었으나, 닿는 힘은 조심스러웠다.

“당신은 누구십니까.”

이겸의 물음은 반말이 아니었다. 존대의 끝에 실린, 수사관이 범인에게 던지는 마지막 질문과도 같았다.

윤소하는 대답 대신 고개를 약간 기울였다. 입술이 열리고 닫히는 사이, 매화 가지에서 마지막 잔설이 떨어졌다.

“이제 나리도 알게 되실 거예요.”

그렇게만 속삭였다.

서찰의 비밀, 일곱 개의 밤8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