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verStory

마탑의 실패한 천재는 정령의 말을 듣는다

10화

차갑고 오래된 바람이 계단 아래에서 불어올랐다.

루안은 미르의 반투명한 등을 바라봤다. 머리카락 끝이 옅은 청색으로 흔들리고 있었다.

「……올 거야, 안 와?」

미르가 뒤돌아보지도 않고 말했다. 목소리가 살짝 울렸다.

「네가 보고 싶어서 벽이 열린 건 아니잖아.」

“맞아.”

루안은 발을 내디뎠다. 계단은 생각보다 길었다. 돌벽에 새겨진 문양들이 한 걸음마다 희미하게 빛났다.

아린이 뒤에서 긴 숨을 들이쉬었다. “선배, 진짜 저 아래로 갈 거죠?”

“응.”

“내가 안 말릴 거라는 건 알죠.”

“알아.”

아린이 작게 웃었다. 무영자들 쪽에서 누군가 횃불을 챙기는 소리가 들렸다.

계단이 끝나고 둥근 방이 나타났다.

천장은 낮고 공기는 건조했다. 방 중앙에는 검은 돌로 만든 제단 같은 것이 있었고, 그 위에 지름이 한 뼘쯤 되는 문양 하나가 깊게 파여 있었다. 미르가 멈춰 섰다.

「이거…… 낡은 게 아니라, 원래 형태야.」

“원래 형태?”

「수백 년 전에 만들어졌어. 고대 정령의 기록 저장소.」

미르의 손끝이 제단 위를 스치듯 지나갔다. 문양이 반응하며 방 전체에 청백색 빛이 퍼졌다.

「기록은 거의 지워졌고…… 파편만 남았어.」

바로 그때였다.

방 입구에 어둠이 스며들었다.

연기 같은 검은 아우라가 계단을 타고 내려왔다. 아린이 숨을 삼키고 무영자들이 일제히 물러섰다. 형체가 모습을 드러냈다.

카이젤.

검은 늑대가 방 안으로 조용히 걸어 들어왔다. 진홍색 눈이 미르를 똑바로 응시했다. 목의 붉은 문신은 여전했지만, 빛이 희미하게 깜박이고 있었다.

「늑대.」

미르가 낮게 말했다. 카이젤이 한 걸음 다가서더니 고개를 숙였다. 정확히 미르의 눈높이까지. 그리고 낮고 굵은 목소리가 방 안에 울렸다.

「그대를 다시 만나러 왔다. 파편.」

아린이 루안의 팔을 붙잡았다. 루안은 팔을 빼지 않았다.

카이젤의 진홍색 눈이 깜박였다.

「10년 전. 그 밤에 그대는 집단 거부의 심장부에 있었다.」

미르의 몸이 살짝 굳었다. 빛 입자들이 긴장한 듯 흩어졌다.

「내가 주도했다. 강제 계약에 묶인 정령들의 탈주. 그날 밤 나는 인간의 의식을 깨고 모든 계약을 거부했다.」

등에서 검은 아우라가 파도처럼 일었다.

「그리고 그대는…… 그 밤의 한가운데서 사라졌다.」

미르가 대답하지 않았다. 카이젤이 계속했다.

「그대가 사라진 후 거부는 성공했다. 마탑의 계약식은 붕괴했고, 나는 붙잡혀 케인에게 묶였다.」

잠시 멈추고, 카이젤이 덧붙였다.

「지금의 그대는 그날의 그대가 아니다. 안다. 그런데도 왜 여기 있는가.」

미르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눈동자 없는 눈이 푸르게 빛났다.

「……네가 말한 걸 전부 안다면 믿을래?」

「묻지 않았다. 이유를 물었다.」

미르가 작게 숨을 들이쉬는 소리가 들렸다. 루안에게만 들리는 소리였다.

「나는…… 자유롭고 싶어.」

카이젤의 눈이 가늘어졌다.

「이름 없는 것도, 하급 정령도 아닌. 나 자신으로 있고 싶어. 네가 그걸 몰라서 묻는 거라면, 지금 대답한 거야.」

방 안이 조용해졌다.

루안은 미르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반투명한 어깨선이 평소보다 가늘어 보였다. 손을 뻗고 싶었지만, 지금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카이젤이 천천히 앞발을 옮겼다. 바닥의 돌이 낮게 울렸다.

「그대의 말에는…… 위엄이 있다.」

「위엄?」

「고대 정령의 파편만이 가질 수 있는 것. 그대는 자신이 무엇인지 모르지만, 나는 기억한다.」

목의 붉은 문신이 다시 한 번 깜박였다.

「강제 계약 시스템을 끝내려면 그대의 위엄이 필요하다. 나 혼자서는 할 수 없는 일이다.」

미르의 머리카락이 짙은 청색으로 물들었다. 루안은 그 색을 안다. 무언가 깨닫거나 결심할 때 나오는 색이었다.

「늑대.」

미르가 앞으로 다가섰다. 작은 체구가 거대한 그림자 앞에서도 물러서지 않았다.

「네가 원하는 게 자유라면. 그 자유는 뭘로 살 거야.」

카이젤이 잠시 침묵했다. 진홍색 눈빛이 흔들렸다.

「……자유를 말한 적 없다.」

「말하지 않아도 알아. 네 문신. 그게 지금 죽어가고 있어. 케인이 널 부정했으니까.」

미르의 손끝이 카이젤의 목 근처 허공을 가리켰다.

「그리고 너는 그걸 원했어. 강제 계약에 묶여 있으면서도 계속 원했어.」

카이젤의 눈이 크게 열렸다.

「……어떻게 알았지.」

「나도 이름 없는 존재라서.」

미르가 손을 내렸다. 빛 입자들이 천천히 가라앉았다.

「자유를 알려면 이름이 있어야 해. 나는 그걸 루안에게 배웠어.」

루안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주머니 속 오른손을 살짝 쥐었을 뿐이다.

카이젤이 긴 시간을 들여 고개를 숙였다. 거대한 머리가 바닥에 닿을 듯이 낮아졌다.

「……그대에게 진심을 보이겠다.」

검은 아우라가 한순간 사라졌다. 완전히 투명한 빛이 목의 문신에서 흘러나왔다.

「나는 자유를 원한다. 그리고 그 자유는 강제 계약의 끝에서만 온다. 그 끝에 그대가 필요하다. 파편.」

미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동작은 평소의 비꼬는 태도와는 전혀 달랐다.

「좋아, 늑대. 네 부탁을 들어줄게.」

그 순간, 카이젤의 목에 있는 붉은 문신이 희미하게 빛났다. 빛은 두어 번 깜박이더니, 색이 한 톤 옅어졌다. 카이젤의 몸이 작게 떨렸다.

루안은 그걸 보며 입을 열었다.

“끝나면 어떻게 되는 거지.”

카이젤의 눈이 루안에게로 향했다. 진홍색 시선이 잠시 머물렀다.

「……모른다. 자유가 무엇인지 알게 된다면, 그걸로 충분하다.」

루안은 대답하지 않았다. 미르가 그를 돌아봤다.

「너, 표정이 이상해.」

“아무렇지 않아.”

「거짓말 잘한다.」

“네가 가르친 거야.”

미르가 말없이 그를 바라봤다. 루안은 고개를 돌려 아린에게 말했다.

“올라가서 부상자들 상태 좀 보고 와.”

“네. 근데 선배, 잠깐만.”

아린이 계단으로 올라가려다 멈췄다.

“저 늑대…… 같이 둬도 괜찮은 거예요?”

「늑대는 지금 내 편이야.」

미르가 대신 답했다. 아린이 한 번 더 카이젤을 힐끗 보곤 계단을 올라갔다.

【마탑 중층 — 케인의 개인 실험실】

문이 잠겼다.

케인 아르겔은 손잡이를 놓지 않고 그대로 서 있었다. 벽면의 마법 램프가 낮은 광량으로 켜졌다. 실험대 위의 수정 비커들이 빛을 받아 반짝였다.

왼손이 떨리고 있었다.

천천히 장갑을 벗었다. 손가락 끝에서 검붉은 마력이 스며나오고 있었다. 평소의 금빛이 아니라, 응고된 피 같은 색이었다.

“……카이젤.”

목소리가 갈라졌다. 그의 어깨 너머로 항상 있던 검은 형체가 없었다.

케인은 실험대를 짚고 마력 억제 보조구를 서랍에서 꺼냈다. 은색 팔찌 모양, 안쪽에 복잡한 제어 마법진이 새겨져 있다. 그는 거침없이 왼쪽 손목에 채웠다.

순간.

뜨거운 고통이 목에서 터졌다.

케인은 신음을 삼키며 실험대 모서리를 붙잡았다. 손가락이 나무를 파고들었다. 거울 너머로 보이는 자기 목에는 붉은 문신이 있었다. 카이젤의 계약 증표.

지금 그 문신이 타고 있었다.

붉은 선들이 살아 있는 혈관처럼 꿈틀거리며 검게 변해가고 있었다. 타는 듯한 고통이 어깨와 쇄골을 타고 심장 쪽으로 내려갔다.

“이건…… 강제 계약의…….”

말을 끝맺지 못했다. 무릎이 바닥에 닿았다.

차가운 돌바닥. 식은땀이 이마에서 떨어졌다. 거울 속 자신의 얼굴이 보였다. 백금색 머리카락이 흐트러져 있고, 금색 눈동자에 충격이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거짓이었나. 전부.”

16세 계약식. 마탑 역사상 최연소 상급 정령 계약 성공. 모두의 축하 속에서 증표가 찍히던 순간. 자신은 선택했다고 믿었다. 카이젤을.

그러나 아니었다.

카이젤은 강제로 묶인 것이었고, 이 문신은 증표가 아니라 족쇄였다.

“날…… 예정된 천재로 만든 게 이거였나.”

목소리가 낮았다. 분노도 절망도 아닌, 깨달음에 가까운 톤이었다.

붉은 문신의 빛이 한 번 더 깜박이고, 괴사된 부분에서 가느다란 연기가 올라왔다. 마력이 폭주 직전이라는 신호였다.

케인은 팔찌 보조구를 한 번 더 조이며 눈을 감았다.

“시스템…… 전부 잘못됐다.”

눈을 떴을 때 거울 속 눈빛은 또렷했다.

“처음부터.”

【무영자 은거지 입구 — 새벽】

루안이 계단을 올라왔을 때 아린이 입구 쪽에서 뛰어왔다.

“선배. 부상자들 상태는 다 괜찮아요. 그런데 바깥에…….”

말이 끝나기 전에 루안의 시야에 낯선 인영이 들어왔다.

회색 망토를 쓴 사내가 입구 철문 앞에 서 있었다. 무영자도, 경비대도 아닌 복장이었다. 마탑의 문양이 옷깃에 은색 실로 수놓아져 있었다.

“루안 님이십니까.”

목소리는 낮고 무감정했다. 루안은 손을 주머니에 넣지 않았다.

“그런데.”

“마탑주께서 모시라는 분부입니다.”

주의가 술렁였다. 아린이 날카롭게 물었다.

“지금 여길 어떻게 알았죠.”

“마탑주께서는 아침 내내 당신 분의 위치를 알고 계셨습니다. 단지 공개하지 않으셨을 뿐.”

사내가 망토 주름에서 작은 봉투를 꺼냈다. 은색 봉인, 시벨라의 문장이 찍혀 있었다.

“마탑 최상층. 심판의 방. 지금 바로 오시면 됩니다. 정령과 함께.”

루안은 봉투를 받지 않았다.

“거절하면.”

“마탑주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당신의 정령이 상급 이상이라는 사실은 처음부터 알고 계셨다고.”

사내의 눈이 루안의 어깨 너머를 똑바로 응시했다. 미르가 있는 쪽이었다. 보이지는 않더라도, 거기 있다는 걸 알고 있다는 시선.

“결정하십시오. 시간이 많지 않습니다.”

루안은 잠시 생각했다. 미르의 목소리가 들렸다.

「시벨라…… 그날 아침에도 느꼈지만, 저 인간 뭔가 이상해. 발걸음이 땅에 닿지 않는 느낌이었어.」

“간다.”

루안이 짧게 답했다. 전령이 고개를 숙이고 물러났다.

아린이 다급하게 다가왔다.

“선배, 지금 그냥 가면…….”

“돌아오는 게 아냐.”

루안이 말을 끊었다. 아린의 눈이 커졌다.

“마탑에 돌아가는 게 아니야. 마탑의 거짓을 끝내러 가는 거다.”

아린이 입을 열려다 닫았다. 주근깨 낀 얼굴이 어두운 조명 아래에서도 붉어졌다. 그리고 이내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그 말투는 평소의 밝은 아린이 아니었다. 낮고, 단단한 목소리였다.

“무영자들, 제가 지킬게요. 선배가 끝내는 걸 기다릴게요.”

「……저 인간, 가끔은 제법인데.」

미르의 중얼거림이 들렸다. 루안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오른손을 주머니에서 꺼내 아린의 어깨를 한 번 쳤다.

“고마워.”

짧은 말이었다. 아린의 눈에 물기가 번졌지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카이젤이 입구로 걸어 나왔다. 검은 형체가 좁은 통로를 가득 채웠다.

「함께 가겠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직 남아 있다.」

목의 문신은 완전히 꺼지지 않았다. 붉은 빛이 마지막 저항처럼 깜박이고 있었다.

미르가 카이젤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늑대. 네 문신, 죽는 거 아니지.」

「……죽는 것이 아니라, 끊어지는 것이다. 다만 그 고통은 내가 지는 것이 아니라 케인이 진다.」

미르가 잠시 침묵했다. 루안은 그 짧은 침묵의 의미를 알았다. 미르는 지금 그걸 신경 쓰고 있다고. 강제 계약이라는 폭력에 묶여 있던 상대를.

「……가자.」

미르가 몸을 돌렸다.

아린이 철문을 열었다. 밖은 아직 어두웠다. 동트기 전의 마지막 어둠이 마탑의 첨탑들을 감추고 있었다.

루안은 걸음을 옮겼다. 미르가 그의 오른쪽에 섰고, 카이젤은 뒷걸음으로 은밀한 통로 쪽을 향했다.

「마탑 최상층 입구는 내가 안다. 따라와라.」

카이젤이 낮게 말했다. 어둠 속으로 이어지는 좁은 길이 은거지 뒷벽 너머에 입을 벌리고 있었다. 마탑의 공식 경로가 아닌, 상급 정령만이 아는 비밀 통로.

「시벨라의 기척이 저 끝에서 느껴진다.」

계속해서 카이젤이 말했다. 진홍색 눈이 어둠 너머를 주시했다.

루안은 멈추지 않았다.

통로 안으로 발을 들이자, 오래된 공기와 함께 낮은 떨림이 발바닥으로 전해졌다. 미르의 머리카락이 어둠 속에서 푸르게 빛났다.

「루안.」

“응.”

「끝내러 가는 거지.」

“그래.”

「그럼. 나도 갈게.」

미르의 반투명한 손이 루안의 오른손 옆 허공에 떠 있었다. 닿지 않았지만, 닿은 것처럼 따뜻했다.

통로가 그들 뒤로 어둠과 함께 닫혔다. 그 너머, 마탑 최상층의 은밀한 입구가 열리는 소리가 낮게 울렸다. 차가운 공기 속에 시벨라의 기척이 실려 있었다.

아린은 철문 앞에 서서 그것들을 배웅했다. 주먹을 꽉 쥔 채.

마탑의 실패한 천재는 정령의 말을 듣는다10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