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verStory

마탑의 실패한 천재는 정령의 말을 듣는다

11화

통로는 길지 않았다.

카이젤이 앞장섰고, 루안은 미르의 희미한 빛을 따라 걸었다. 어둠 속에서 돌계단이 위로 이어졌다. 열두 개의 계단을 오르자, 공기가 바뀌었다. 차갑고 건조한 바람이 얼굴을 스쳤다.

「여기다.」

카이젤이 멈췄다. 통로 끝에 문이 없었고, 대신 벽 전체가 얇은 마법진으로 덮여 있었다. 은빛 선들이 천천히 회전하다가, 카이젤이 앞발을 대자 일제히 꺼졌다.

벽이 열렸다.

시야가 밝아졌다. 루안은 눈을 가늘게 떴다.

방이었다. 넓고 텅 빈 방. 천장은 보이지 않을 정도로 높았다. 바닥은 검은 돌로 되어 있고, 벽에는 수백 개의 작은 마법진이 별처럼 박혀 있었다. 방 중앙에 원형으로 배열된 열두 개의 돌기둥이 서 있었다.

그리고 기둥들의 중심에 한 사람이 있었다.

시벨라 레온하르트.

백색 로브가 바닥에 흩어져 있었고, 은회색 머리카락이 발목까지 닿을 듯 길게 늘어져 있었다. 그녀는 루안 쪽을 보고 있었다. 오드아이의 금색 눈동자와 은색 눈동자가 동시에 그를 포착했다.

발이 땅에 닿지 않았다. 1센티미터도 안 되는 간격이었다. 살아 있는 사람이 땅에서 떠 있을 수 있는 이유는 없었다.

「꽤 오래 걸렸구나.」

시벨라가 말했다.

루안은 대꾸하지 않았다. 대신 방 안을 둘러봤다. 출구는 없었다. 그들이 들어온 입구도 벽이 닫히며 사라졌다.

「이 방의 이름을 아느냐.」

“……모른다.”

「심판의 방이다. 마탑에서 가장 오래된 방. 300년 전, 이곳에서 나는 한 정령을 심판했고, 그 정령도 나를 심판했다.」

시벨라가 한 걸음 내디뎠다. 걸음이 아니라, 공중을 미끄러지는 듯한 움직임이었다. 루안은 그 움직임을 보면서 이해했다. 발이 닿지 않는 것이 아니라, 땅이 그녀를 밀어내는 것이었다.

「오래전 이야기를 해야겠다. 너와 네 정령에게.」

미르가 루안의 오른쪽 어깨 위로 올라왔다. 빛이 평소보다 진했다. 푸른색에 가까운 백색이었다.

「이야기라면 짧게 해.」

미르가 퉁명스럽게 말했다.

「나는 네가 누군지 알 것 같아.」

시벨라의 오드아이가 미르를 향했다.

「그래. 너는 아마 알 것이다. 네 안의 파편이 나를 기억할 테니까.」

미르가 대답하지 않았다. 머리카락 색이 한 단계 옅어졌다.

시벨라는 천천히 방 중앙으로 걸어갔다. 열두 기둥의 한가운데. 그곳에는 검은 돌로 만든 원반이 바닥에 박혀 있었다. 그녀가 원반 위에 멈추자, 기둥들이 희미하게 빛나기 시작했다.

「300년 전. 나는 마탑에서 가장 어린 마법사였다. 열여섯 살이었고, 정령 계약을 앞두고 있었다.」

시벨라의 목소리가 방 안에 울렸다. 기둥들이 그녀의 목소리를 증폭시켰다.

「나는 두려웠다. 계약에 실패하면 무영자가 될 것이었다. 그건 죽음보다 못한 삶이었다. 그래서 나는 계약식을 며칠 앞두고…… 금지된 의식을 시도했다.」

「강제 계약.」

미르가 낮게 말했다. 비꼬는 기색이 없었다.

「그렇다. 나는 한 상급 정령을 속박했다. 그 정령의 이름을 강제로 알아내서, 동의 없는 계약을 맺었다.」

시벨라의 발밑에서 검은 돌 원반이 빛나기 시작했다. 그 빛은 붉은색이었다. 루안은 그 색을 알았다. 케인의 목에 있던 문신, 카이젤의 목을 조르던 붉은 띠. 똑같은 색이었다.

「그게 최초의 강제 계약이다. 네 놈이 시작한 거냐.」

루안이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목소리는 건조했다.

시벨라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그 정령의 힘으로 마탑에서 가장 강한 마법사가 되었다. 그리고 다른 마법사들도 나의 방식을 따랐다. 계약은 정령과의 교감이 아니라, 정령을 사냥하고 길들이는 기술이 되었다.」

「300년간 그 짓을 계속했단 말이지.」

「그래. 마탑은 강제 계약 위에 세워졌다. 그리고 나는 그걸 알고도 멈추지 않았다.」

시벨라가 고개를 들었다. 오드아이 두 개가 동시에 빛났다.

「10년 전. 정령들이 집단으로 계약을 거부했다. 이유를 아느냐.」

루안은 대답하지 않았다. 미르의 손이 그의 어깨를 살짝 눌렀다. 아직 실체가 없는 손이었지만, 루안은 그 감촉을 알 수 있었다.

「정령들은 강제 계약의 진실을 서로에게 전파했다. 그리고 결의했다. 더 이상 인간에게 이용당하지 않겠다고.」

카이젤이 낮게 으르렁거렸다.

「내가 그 결의를 주도했다.」

시벨라가 카이젤 쪽을 돌아보지 않고 말했다.

「알고 있다. 카이젤. 그리고 동시에 나는 진짜 이유를 숨겼다. 마탑의 공식 기록에는 실종으로 남긴 채.」

미르의 머리카락이 다시 색을 바꿨다. 옅은 청색에서 짙은 푸른색으로. 루안은 그걸 처음 봤다. 분노의 색이었다.

「네놈은 그걸 숨겼을 뿐이지. 계속 똑같은 짓을 한 거잖아.」

「그렇다. 계약식은 계속 열렸다. 강제 계약의 마법진은 그대로 유지되었다.」

시벨라가 검은 돌 원반에서 손을 뻗었다. 그녀의 손바닥 위에 작은 마법진이 떠올랐다. 계약식에서 보던 것과 비슷한 형태였다. 하지만 색이 달랐다. 보라색이 아니라, 시커먼 붉은색이었다.

「이게 진짜 계약식의 마법진이다. 마탑이 감춰온 실체.」

루안의 왼쪽 가슴에서 통증이 일었다. 낙인이 있던 자리. 금이 간 자리. 그 아래에서 백금색 빛이 반짝였다.

「현재 마탑의 계약 성공률은 17%다. 왜 그 숫자인지 아느냐.」

루안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미르가 입을 열었다.

「300년 전, 네가 처음으로 묶은 정령. 그 정령을 따르던 정령들의 숫자지.」

시벨라가 눈을 감았다.

「그래. 300년 전, 내가 처음 강제 계약으로 묶은 정령의 이름은 에르다리온. 상급 정령들의 우두머리였다. 에르다리온을 잃은 상급 정령들은 인간에게 복종하지 않았다. 그 대신, 그들의 혈통은 17%의 확률로 후대의 하급 정령들에게 남았다.」

「그 17%만 강제 계약이 통하지 않는 거냐.」

루안이 물었다.

「거꾸로다. 나머지 83%는 강제 계약에 걸려든다. 계약식에 참가하는 정령들 중 83%가 인간의 속박에 순응하고, 17%만이 저항할 수 있다. 그게 300년간의 진짜 통계다.」

카이젤이 고개를 들었다. 진홍색 눈이 시벨라를 향했다.

「나는 저항하는 17%에 속한다. 내가 10년 전 탈주할 수 있었던 것도 그래서다.」

시벨라가 마법진을 쥐었다. 붉은 빛이 손아귀에서 뿜어져 나왔다.

「그리고 나머지 83% 중 하나가, 바로 네가 카이젤을 길들일 때 사용한 정령이다. 케인.」

방 안에 침묵이 내렸다.

그 순간, 방 입구 쪽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미르가 고개를 돌렸다. 루안도 뒤를 돌아봤다.

열린 벽 너머로 한 사람이 걸어 들어왔다. 진청색 로브가 찢어져 있었고, 백금색 머리카락이 흐트러진 채였다. 목에는 붉은 문신이 깜박였다. 괴사한 듯 검게 변한 부위가 턱 밑까지 밀려왔다.

케인 아르겔.

그가 비틀거리며 방 안으로 들어왔다. 왼손으로 목을 움켜쥐고 있었다. 오른손에는 마력 억제 보조구가 아니라, 부러진 흰 장갑 한 짝이 들려 있었다.

「……카이젤.」

케인이 낮게 불렀다. 목소리가 갈라져 있었다.

카이젤이 뒤돌았다. 진홍색 눈이 케인을 바라봤다. 문신이 케인의 손가락 사이로 붉게 번쩍였다. 케인의 얼굴이 고통으로 일그러졌다.

「내 계약은. 처음부터 강제였다.」

케인이 이를 악물었다.

「알고 있었느냐.」

시벨라가 조용히 물었다.

「몰랐다. 방금 전까지는.」

케인이 손을 내렸다. 목의 문신이 완전히 드러났다. 붉은 선들이 피부 아래로 뿌리를 내린 듯 퍼져 있었다.

「나는 마탑의 천재로 자랐다. 16세에 상급 정령과 계약을 맺은 영광스러운 마법사로. 그게…… 거짓이었다.」

「거짓이 아니다.」

카이젤이 으르렁거렸다.

「강제였을 뿐이다.」

「그게 거짓이라는 뜻이다.」

케인의 목소리에 처음으로 격앙이 섞였다.

「카이젤. 너는 내 의지로 택한 적이 없었잖아. 단 한 번도.」

카이젤이 고개를 돌렸다. 진홍색 눈이 시벨라를 향했다.

「너. 이걸 알고도 나를 케인에게 붙였느냐.」

시벨라가 대답하지 않았다. 그 대신 검은 돌 원반 위에서 손을 내렸다. 붉은 마법진이 꺼졌다.

「케인 아르겔. 너는 아르겔 가문의 유일한 후계자다. 네 아버지는 이 마탑의 부탑주였고, 강제 계약의 마법진을 완성한 자다.」

케인의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졌다.

「네 계약은 네 아버지가 미리 정해둔 것이었다. 상급 정령 카이젤. 그를 포획하고 길들이는 데만 7년이 걸렸다.」

「그래서.」

케인이 짧게 숨을 들이쉬었다.

「그래서 나는 선택할 수 없었다는 거군요.」

그의 말투가 존대로 바뀌었다. 분노를 삼키는 방식이었다.

「마탑주님께서 아셨다면. 왜 멈추지 않으셨습니까.」

시벨라가 처음으로 질문에 질문으로 답하지 않았다.

「멈출 수 없었다. 300년간 쌓아온 시스템을 내가 무너뜨릴 수는 없었다. 나는 이미 죽었지만, 마탑은 살아남아야 했다.」

「죽었다고?」

아린의 목소리가 문가에서 들렸다.

루안이 고개를 돌렸다. 아린이 방 입구에 서 있었다. 회색 튜닉이 먼지로 얼룩져 있었다. 허리춤의 가죽 벨트에 공구가 흔들렸다.

「땅에 닿지도 않는 발로 뭘 살린다는 건지.」

아린이 시벨라를 올려다봤다. 목소리가 낮았다.

「선배. 이 아줌마가 지금 죽었다고 한 거 맞죠?」

“……그런 모양이다.”

「죽은 사람이 어떻게 300년을 살아요?」

「강제 계약의 대가다.」

시벨라가 천천히 말했다.

「나는 300년 전, 에르다리온과 계약을 강제하면서 그의 수명을 빼앗았다. 그 대가로 나는 죽지 못하는 존재가 되었다. 하지만 산 것도 아니었다. 내 발은 땅이 거부한다. 살아 있는 땅은 죽은 자를 받아들이지 않으니까.」

아린이 입을 다물었다. 그녀의 주먹이 꽉 쥐어졌다.

미르가 루안의 어깨에서 내려왔다. 반투명한 발이 땅에 닿지 않은 채로 떠 있었다.

「그럼 내 기억은 뭐냐.」

미르의 목소리가 낮았다. 비꼬는 기색은 없었다. 대신 날카로운 냉기가 실려 있었다.

「10년 전, 나는 계약식을 거부했다. 카이젤과 함께. 하지만 나는 그 후로 기억을 잃었다. 그건 네가 한 짓이지.」

시벨라가 미르를 바라봤다. 오드아이의 은색 눈동자에 미르의 빛이 비쳤다.

「네가 누군지 알고 있느냐. 세리니아.」

미르의 전신이 얼어붙었다. 빛이 깜박였다.

「에르다리온의 마지막 후계자. 300년 전, 내가 처음 죽인 정령. 그가 사라질 때 남긴 파편. 그게 너의 정체다.」

루안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방 안에 침묵이 무거웠다. 카이젤이 고개를 숙였다.

「나는 알고 있었다. 10년 전, 미르가 사라진 이유를.」

카이젤의 목소리가 낮았다.

「세리니아가 에르다리온의 혈통이라는 건, 우리 사이에서는 전설이었다. 그리고 그 전설이 사실임을 알았을 때, 나는 세리니아에게 부탁했다. 계약식을 거부하는 정령들을 이끌어 달라고.」

「하지만 실패했어.」

미르가 짧게 끊어 말했다.

「실패했다. 마탑이 네 기억을 지웠다. 네가 누군지 모르게 만들어서, 그냥 하급 정령으로 남겨둔 것이다.」

「그게 네 기억이 없던 이유야.」

루안이 입을 열었다. 목소리는 여전히 건조했다. 하지만 미르를 향한 시선은 달랐다.

미르가 돌아서서 루안을 올려다봤다. 눈동자 없는 청색 발광체에, 처음으로 흔들림이 비쳤다.

「그래서 나는 이름이 없었던 거냐. 내가 누군지도 모르도록.」

말투는 여전히 깔보는 듯했지만, 끝이 약간 떨렸다.

「강제 계약 시스템이 무너지면 안 되니까. 하급 정령들 중에서도 특별히 위험한 존재인 너를 지워버린 거지.」

미르가 시벨라를 향해 돌아섰다. 머리카락이 짙은 푸른색으로 타올랐다.

「네가 한 짓이다.」

「그래.」

시벨라가 질문에 대답했다. 처음으로 그녀가 질문에 질문으로 답하지 않았다.

「내가 네 진명을 부르지도 못하게 해놓고. 내가 아무것도 모르게 해놓고. 그걸로도 부족해서 하급 정령이라고 불렀지.」

미르가 한 걸음 앞으로 나왔다. 반투명한 신체에서 빛 입자들이 흩날렸다.

「세리니아라는 이름을 네가 뺏은 건 아니잖아. 그건 내가 직접 되찾은 거고.」

「세리니아.」

시벨라가 그 이름을 불렀다. 천천히, 무게를 실어서.

「네 선조 에르다리온은 내가 처음으로 죽인 정령이다. 그리고 너는 내가 지운 정령이다. 그 죄를 당신에게 묻겠다.」

미르의 몸 전체에서 백금색 빛이 뿜어져 나왔다. 어깨 위로, 등 뒤로 희미한 빛의 날개 형상이 스쳤다.

루안은 그걸 낯설어하지 않았다. 게이트 붕괴를 멈췄을 때, 그때 이미 본 빛이었다.

「켜지 마. 아직 의식은 시작하지 않았어.」

루안이 짧게 말했다.

미르가 고개를 돌렸다.

「응. 알아.」

빛이 가라앉았다.

그 순간, 심판의 방 밖에서 폭발음이 들렸다.

이어서 마법진이 충돌하는 날카로운 파열음. 복도 저쪽에서 여러 발자국이 울렸다. 마법진 하나가 벽에 부딪혀 산산조각 났다.

카이젤이 몸을 돌렸다.

「보수파다. 루안의 정체를 알아챈 모양이다.」

아린이 허리춤에서 작은 망치를 뽑았다.

「선배, 나 여기 남을게.」

“무슨 생각인지 안다.”

「말리지 마요.」

아린이 씩 웃었다. 주근깨가 올라간 볼에 웃음이 올라붙었다. 망치를 어깨에 걸친 모습이 어떻게 저렇게 태연한지.

「내 계약식 때. 정령이 내 앞에서 사라졌어요. 그땐 내가 부족해서라고 생각했죠.」

아린이 입구 쪽으로 걸었다.

「근데 아니었어요. 그 정령이 나를 보고 물러난 거였던 것 같아. 내가 무서워하는 걸 알고서.」

그녀가 돌아서서 루안을 봤다.

「강제 계약 말고 다른 방법이 있다는 걸 알았어요. 선배랑 미르를 보면서. 그걸 끝까지 지키고 싶어요.」

「아린.」

「선배야말로 필요하면 빨리 가요. 의식 준비해야 하잖아요.」

케인이 아린의 옆에 섰다.

「나도 남겠다.」

그의 목에서 붉은 문신이 다시 깜박였다. 케인이 인상을 찡그리며 문신을 손으로 눌렀다.

「카이젤. 내 계약을 깨고 싶다.」

카이젤이 케인을 내려다봤다.

「그 말. 네가 할 수 있는 거냐.」

「가능 여부를 묻는 게 아니다.」

케인이 카이젤의 눈을 정면으로 응시했다. 금색 세로동공이 진홍색 발광체와 마주쳤다.

「내가 그걸 원한다. 그래도 되는지 묻는 거다. 네게.」

길고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카이젤이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목의 문신이 희미하게 타올랐다.

「……나도. 원한다.」

복도에서 마법진이 또 한 번 충돌했다. 더 가까웠다.

「루안. 준비해라.」

시벨라가 말했다. 목소리가 처음으로 달라져 있었다. 반말이었다.

「마탑주의 명령은 이렇다. 심판의 방에 보관된 고대 정령의 잔재 의식을 개시할 것. 이 의식은 마탑 최상층 전체의 마력을 소모하며, 완료 시점에 모든 강제 계약이 해방된다.」

그녀가 손을 들어 열두 개의 기둥을 가리켰다.

「기둥 하나하나가 300년간 억눌린 정령들의 힘을 저장하고 있다. 미르. 네 힘으로 그 기둥들을 깨워라. 다만 이 의식에는 대가가 필요하다.」

「무슨 대가.」

미르가 짧게 물었다.

「의식을 여는 자의 전 생명력. 즉 나다.」

루안이 시벨라를 똑바로 바라봤다. 그녀의 눈은 평온했다.

「300년 동안 살았으면서, 이제 죽겠다는 뜻이냐.」

「누군가는 이 시스템을 대가 없이 끝낼 수 있다고 생각했느냐.」

시벨라가 처음으로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는 부드러웠다.

「루안 벨크로스. 너는 나에게 한 번도 절하지 않았다. 그래서 부른 것이다.」

심판의 방 입구에서 폭발이 일어났다. 아린이 망치를 휘둘러 첫 번째 마법진을 깨부쉈다. 케인이 부서진 벽 앞에 마력 장벽을 펼쳤다.

카이젤이 입구 상공으로 치솟았다. 검은 아우라가 복도 전체를 덮었다. 적대 정령들이 일제히 물러섰다.

「의식을 시작해라.」

카이젤이 으르렁거렸다.

루안은 미르를 봤다. 미르는 이미 방 중앙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반투명한 신체가 열두 기둥의 중심, 검은 돌 원반 위로 올라섰다.

「루안.」

“들어.”

「나, 이거 하고 나면. 이름이 생기는 거지. 진짜 이름.」

“이미 있잖아.”

미르가 돌아보며 웃었다. 비꼬는 미소가 아니라, 이제까지 한 번도 보여준 적 없는 담담한 미소.

「그래. 나는 세리니아야.」

루안은 원반 쪽으로 걸었다. 왼쪽 가슴의 낙인에서 백금색 빛이 새어 나왔다. 통증은 없었다.

그가 미르의 맞은편에 서자, 기둥들이 일제히 빛나기 시작했다. 흰색, 푸른색, 금색, 은색. 네 가지 색의 빛이 기둥을 타고 번졌다.

시벨라가 두 손을 올렸다. 그녀의 발밑에서 땅이 밀어내는 대신, 처음으로 발이 지면에 닿았다.

살아 있는 땅이 마침내 죽은 자를 받아들였다.

“당신의 죄를 끝내러 왔다.”

루안이 시벨라를 향해 말했다.

시벨라가 미소를 지었다. 300년 만에 처음으로, 누군가에게 반박당한 얼굴로.

마탑 최상층 전체가 한 번 크게 진동했다.

입구에서 아린이 망치를 들어 올렸다. 보수파 마법사 하나가 비명을 지르며 뒤로 물러섰다. 케인의 마력 장벽 너머에서 적대 정령들이 하나둘 숙연해졌다.

「세리니아. 의식을 연다.」

루안이 말했다. 그 순간 열두 기둥의 빛이 일제히 원반 위로 쏟아졌다.

마탑의 실패한 천재는 정령의 말을 듣는다11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