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verStory

마탑의 실패한 천재는 정령의 말을 듣는다

2화

공동 숙소의 촛불이 새벽 공기에 흔들렸다. 루안은 침상 가장자리에 걸터앉아 낡은 외투의 깃을 여미고 있었다. 손끝이 굳었다. 구 도서관에서 돌아온 지 두 시간도 채 안 됐다.

「자, 안 잤네.」

머릿속을 긁는 소리. 귀를 통하지 않고 직접 울렸다. 루안의 마디 굵은 손가락이 멈췄다. 이건 현장에서 들은 것과 완전히 같았다.

「밤새 뒤척이더니 결국 한숨도 못 잤구나? 실패자 주제에 잠자리도 깐깐하네.」

루안은 주위를 둘러봤다. 이층 침상에서는 코 고는 소리, 맞은편에서는 누군가 이불을 머리까지 덮어쓰고 돌아누웠다. 아무도 듣지 못했다.

입술을 움직이지 않고 속으로 말했다. 또 너야.

「그럼 누구겠어. 다른 정령이 너한테 말 걸 거 같아?」

정령. 루안의 짙은 회색 눈이 가늘어졌다. 스스로 입증한 셈이었다.

구 도서관에서 본 형체, 머리에 직접 울리는 목소리, 타인에게 들리지 않는 음성. 이 모든 게 계약 의식 없이, 낙인을 찍은 무영자에게 일어나고 있었다.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말했잖아. 10년 걸렸다고. 너 혼자 이 고생길 돌고 도는 거 오래 봤어.」

루안은 일어나 세면대로 걸어갔다. 녹슨 수도꼭지를 틀자 쇳소리가 끽 울렸다. 찬물을 두 번 얼굴에 끼얹었다. 물방울이 턱을 타고 흘렀다.

“이게 뭐지.” 입술 사이로 새어나간 목소리는 바람 빠진 탄식에 가까웠다.

「대화야, 멍청아. 귀신이 아니라 정령이라니까.」

루안이 손을 멈췄다. 거울 너머로 자신의 얼굴을 봤다. 다크서클이 더 짙어졌다. 왼쪽 가슴, 낙인을 가린 천 조각이 비뚤어져 있었다.

“계약식 때도 네 목소리였나.”

「……알아들었구나.」

잠시 정적. 수도꼭지에서 물방울이 한 방울 떨어졌다.

「네가 그걸 기억하는 줄은 몰랐네. 대부분은 못 들은 걸로 덮어버리던데.」

“기억이 안 나는 게 아니라 이해를 못 한 거다.”

「그럼 이제 이해했어? 1년 늦었지만.」

루안은 수건으로 얼굴을 닦았다. 왼손 손톱 옆 잉크 얼룩이 물에 번져 옅어졌다. 이해?

그럴 리 없었다. 정령과의 계약은 동짓날 자정, 마탑 주관 계약식에서만 가능하다. 이미 끝난 계약식, 찍힌 낙인. 모든 규칙이 그를 실패자로 규정했다.

“규정상 불가능한 일이다.”

「규정?」 미르의 목소리에 처음으로 날이 섰다. 「너희 마탑 규정이 우리한테 무슨 상관이야. 나는 거기 신경 안 써.」

“…….”

「네가 들을 수 있다는 것, 그게 전부야. 규정은 네가 혼자 끌어안고 뒹굴어.」

루안은 천천히 외투를 걸쳤다. 회색 튜닉 위로 무거운 천이 내려앉았다. 왼쪽 가슴 핀을 다시 꽂으며 말했다.

“대체 왜 하필 지금이지.”

「글쎄. 때가 된 거 아냐? 아니면……」 미르가 짧게 멈췄다가, 말끝을 비틀었다. 「네가 너무 불쌍해서?」

“입 다물어.”

「싫어.」

루안은 입을 다물었다. 공동 숙소 복도 저쪽에서 감독관의 종이 울렸다. 잡역 배정 30분 전이었다. 다른 침상에서 움직임이 일기 시작했다. 그는 손가락으로 관자놀이를 눌렀다.

정령이 들린다. 증명할 수도, 신고할 수도 없다. 신고한다면 구 도서관에서 미르가 말한 대로, 미친 게 확실해질 뿐이었다.

「오늘 어디 가? 그 지루한 잔해 치우기?」

“……네 알 바 아니다.”

「또 철골 밑에 깔릴 뻔하면 불러. 재미는 있더라.」

루안이 천천히 숨을 들이쉬었다. 그의 시야 구석에서 옅은 청백색 빛 알갱이가 순간 반짝였다 사라졌다. 다른 무영자 하나가 하품을 하며 지나갔지만,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다.

구 도서관 입구에 서자 차가운 먼지 내음이 코를 찔렀다. 계단을 오르자 아침 햇살이 어둠을 밀어내며 루안의 손등 위로 떨어졌다.

루안은 기둥에 머리를 기댄 채 눈을 떴다. 빛의 잔상은 아직 사라지지 않았다. 달빛이 비스듬히 책장 사이로 흘러내리고 있었고, 반투명한 형체는 두 걸음 거리에서 팔짱을 끼고 있었다.

“아직 있었군.”

“당연하지.” 미르의 머리카락이 연한 푸른색으로 느리게 물들었다. “네가 증명할 방법이 없다는 걸 확인시켜 줬으니까.”

루안은 천천히 기둥에서 등을 뗐다. “이름 없는 하급 정령이라더군.”

“그래서? 친구라도 되어 달라고?”

“계약하러 온 줄 알았나.”

미르가 팔짱을 풀었다. 빛 입자들이 갑자기 흩어졌다가 다시 모였다. “계약? 내가 왜 너 같은 실패자랑 계약해야 하는데?”

루안의 오른손이 외투 주머니 속에서 멈췄다. 미르가 그것을 놓치지 않았다.

“주먹 쥐는 게 버릇이냐. 사고 현장에서도 그랬고, 조금 전에도 그랬고.”

“관찰력은 좋군.”

“네 인생을 관찰하는 게 취미라니까.”

루안은 미르를 똑바로 바라봤다. 눈동자가 없는 청색 발광체가 깜빡이지도 않고 그를 마주 봤다. “하급 정령이 인간의 말을 한다. 그것도 계약도 없이.”

“원래 안 돼, 그런 건.” 미르의 목소리가 약간 낮아졌다. “하지만 너는 들리잖아.”

“들린다.”

“그게 이상한 거야.”

둘 사이로 먼지가 춤추듯 느리게 내려앉았다. 루안은 천천히 숨을 들이쉬었다. 1년 전 계약식. 차가운 돌바닥 위에서 무릎이 저리도록 기다렸던 밤. ‘아직 때가 아니다.’ 그 목소리는 분명히 지금 이 공간에 있는 목소리와 같았다.

“계약식 날 들었던 목소리.”

미르의 투명도가 순간적으로 짙어졌다.

“네 거였군. 그때부터.”

“뭘 착각하는 눈치인데.” 미르가 한 걸음 물러났다. 발이 책 더미 위로 통과했다. “아무것도 아니다, 그건.”

“거짓말.”

“기억력은 좋네, 실패한 천재.”

루안의 입술이 바싹 다물렸다. “왜 지금이야.”

“지금이라서.”

“1년이나 걸려서?”

미르의 머리카락이 백색으로 급격히 바뀌었다. 가장자리의 빛 입자가 가시처럼 날카로워졌다.

“뭐야 그 말투. 따지자는 거야?”

“따지자는 거다.”

“하.” 미르가 책장을 통과해 반대편으로 이동했다. 책등 사이로 반투명한 몸이 희미하게 반짝였다. “네가 날 찾은 적 없잖아.”

루안의 눈썹이 미세하게 움직였다. “찾을 수 있다고 생각도 못 했다.”

“당연하지. 너는 실패했으니까. 마탑은 너를 실패자라고 낙인찍었고, 너는 그걸 그대로 믿었고.”

“틀린 말은 아니다.”

“그치?” 미르가 책장 너머에서 루안을 돌아봤다. “네가 실패한 건 사실이야.”

루안은 대답하지 않았다. 외투 주머니 속에서 손가락 마디가 다시 하얘졌다.

“화났냐.”

“아니.”

“역시 화났네.” 미르가 만족스럽다는 듯 빛을 한 차례 깜빡였다. “근데 궁금한 건 하나도 안 물어보네. 내가 왜 여기 있는지, 왜 너한테만 들리는지, 왜—”

“물어도 대답 안 할 거잖아.”

미르가 멈췄다. “……그건 그렇지.”

침묵이 책 더미 사이를 채웠다. 루안은 무너진 책장에 등을 기대고 서서 미르의 흐릿한 형체를 바라봤다. 신고할 이유는 충분했다. 무영자 구역에 미계약 정령이 출몰한다는 사실은 마탑 보안부에게 중요한 보고가 될 거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루안의 발은 움직이지 않았다.

“아직 때가 아니다.” 루안이 입을 열었다. “그건 무슨 뜻이었나.”

“아까도 대답 안 했는데.” 미르가 책장을 다시 통과해 원래 자리로 왔다. “계속 물어볼 셈이야?”

“계속 물을 거다.”

“끈질기네.”

“1년 동안 잊은 적 없어.”

미르의 머리카락이 느리게 청색으로 돌아왔다. 발광체 눈동자가 깜빡이지 않고 루안을 빤히 응시했다. 그 시선 안에 조롱보다 옅은 당혹감이 스며 있었다.

“네가 알 바 아니다.” 미르의 어미가 짧게 잘렸다. “그냥, 그날 계약식에서 실패한 것도 모자라 아직도 집착하는 꼴이 재밌어서.”

루안의 눈가가 미세하게 떨렸다. 분노가 목까지 치밀어 올랐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한 가지가 뚜렷해졌다. 이 정령은 알고 있다. 1년 전 그 밤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고 있군.”

“뭘.”

“내가 왜 실패했는지.”

미르가 대답하지 않았다. 반투명한 손가락으로 허공에 무언가를 그리는 시늉만 했다. 빛 입자들이 느리게 이동하는 궤적만 남았다.

“말 못 할 이유라도 있나.”

“있어.”

“말해.”

“싫어.”

루안은 짧게 숨을 내쉬었다. 이 정령과의 대화는 벽을 향해 주먹질하는 것과 비슷했다. 맞는 순간도 없고, 부서지는 소리도 없고, 멍만 남는.

“신고는… 안 하겠다.”

미르가 동작을 멈췄다. 빛이 일제히 정지했다.

“뭐?”

“신고 안 한다고 했다.”

“왜.”

루안은 기둥에 기대고 있던 어깨를 뗐다. “너를 증명할 방법이 없으니까. 그것도 네 말이 맞았으니까.”

미르는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조용함이 조롱보다 더 낯설게 다가왔다.

“좋아.” 미르의 목소리가 약간 흐트러졌다가 곧 원래대로 돌아왔다. “어차피 신고해 봐야 네가 미친놈 되는 거니까.”

그때 구 도서관 입구 쪽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낡은 경첩이 끼익 소리를 냈다.

“선배? 여기 있는 거 알아요!”

아린 베스티의 목소리였다. 루안이 고개를 돌렸다. 미르의 형체가 순식간에 흩어졌다. 빛 입자들이 먼지 속으로 스며들듯 사라졌다.

“혼잣말하고 있었어요?”

아린이 반쯤 열린 문틈으로 얼굴을 들이밀었다. 밤색 숏컷에서 몇 가닥이 삐져나와 있었고, 허리춤의 공구 벨트가 찰칵 소리를 냈다.

“아니.”

“역시 있었네. 아침 잡역 배정표에 선배 이름이 없길래.” 아린이 문을 좀 더 밀고 안으로 들어왔다. “감독관이 막 찾았어요. 루안 어디 갔냐고.”

“잠깐 생각할 일이 있었다.”

“무너진 책장 사이에서?” 아린이 주위를 둘러봤다. 발끝으로 먼지 쌓인 책등을 살짝 건드렸다. “여기 온 지 꽤 됐죠. 먼지 앉은 게 균일한 걸 보면.”

루안은 대답 대신 천천히 아린에게로 걸어갔다. “잡역은?”

“아직 시작 안 했어요. 근데 책임자가 열 받아서.” 아린은 말을 끊고 루안의 얼굴을 자세히 들여다봤다. “눈이 좀 이상해요.”

“잠을 못 자서.”

“평소에도 못 자는 사람이 무슨.” 아린의 목소리가 한 톤 낮아졌다. “무슨 일이에요?”

루안은 잠시 아린을 내려다봤다. 밝은 갈색 눈동자가 빤히 그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웃을 때 잡히는 눈가의 잔주름이 아직 남아 있었지만, 지금 웃고 있지는 않았다. 미르의 존재를 말할까. 말한다면 뭐라고.

“구 도서관이 생각나서.”

“거짓말이네.”

루안이 눈을 깜빡였다. 아린이 한숨을 쉬듯 말을 이었다.

“선배가 거짓말할 때는 오른손을 주머니에 넣어요. 지금 넣고 있고.”

루안은 주머니 속 주먹을 천천히 풀었다. 손가락 마디가 뻣뻣하게 굳어 있었다. 그 손을 주머니에서 꺼내자 아린이 고개를 갸웃했다. “말하기 싫으면 안 해도 돼요. 근데 잡역은 해야죠.”

“그렇군.”

“선배 몫은 내가 끝내 놓을게요.” 아린이 허리춤의 공구 벨트를 엄지로 툭 쳤다. “오전 작업은 마력 잔류물 분류니까 두 명 몫도 혼자 금방 해요. 대신 점심 밥값은 선배가 사는 걸로.”

“협상인가.”

“협상이요.”

루안의 입꼬리가 미세하게 올라갔다가 내려갔다. “고맙다.”

“고맙긴 뭘.” 아린이 등을 돌리며 손을 흔들었다. “나중에 말해 줘요. 아니면 말고.”

아린이 구 도서관을 빠져나가는 동안 루안은 움직이지 않았다. 그녀의 발소리가 습한 복도에 울리다 멀어졌다. 미르가 말한 대로라면, 자신은 증명할 수 없는 것을 붙잡고 있는 셈이었다. 아린에게조차.

루안은 혼자 복도를 따라 공동 숙소로 향했다.

공동 숙소는 길게 늘어선 침상들이 어둠 속에 잠겨 있었다. 대부분의 무영자들은 아직 잡역 중이었다. 루안은 구석에 있는 자신의 침상으로 가 앉았다. 낡은 매트리스가 익숙한 소리를 냈다.

“혼자 왔네.”

미르의 목소리가 머리맡에서 울렸다. 루안은 놀라지 않았다. 익숙해지고 있었다.

“따라왔군.”

“당연하지. 재밌는 전개였어.”

“재미?”

“네가 신고 안 한다고 했을 때.” 미르의 목소리에 비웃음이 섞였다. “그게 무슨 뜻인지 네가 아직 모르니까 재밌다는 거야.”

루안은 천장을 바라봤다. 어둠 속에서 습기로 얼룩진 돌 천장이 희미하게 보였다. “네가 여기 붙어 있는 이유라도 있나.”

잠시 멈칫하는 기색이 있었다.

“잘 물었네, 실패한 천재.” 미르의 목소리가 평소보다 느리게 흘렀다. “내가 왜 네게 붙어 있는지. 궁금하지 않냐.”

마탑의 실패한 천재는 정령의 말을 듣는다2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