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verStory

마탑의 실패한 천재는 정령의 말을 듣는다

5화

계단을 다 내려왔을 때 아린이 루안의 팔을 붙잡았다.

“선배. 케인 아르겔이 왜 너를……”

“몰라.”

루안은 팔을 빼지 않았다. 대신 주머니 속 오른손을 꽉 쥐었다.

「저 늑대 녀석, 분명히 날 알아봤어.」

미르의 목소리가 귀에 박혔다. 평소의 비꼬는 톤이 아니었다. 끝이 약간 갈라져 있었다.

「아니면…… 내가 알았어야 할 걸 저 늑대가 대신 기억하는 걸 수도 있고.」

“무슨 뜻이야.”

「나도 몰라. 그냥…… 그런 기분이 들었다고.」

미르의 목소리가 작아졌다.

「카이젤 말이야. 그 늑대. 강제 계약에 묶여 있으면서도 어딘가…… 자유로웠어.」

“카이젤이 말한 ‘오래 못 갈 거다’. 그게 무슨 뜻인지.”

「……모른다면 믿을래? 진짜 몰라. 그냥 그 말을 들었을 때 여기가…… 뜨거웠어. 무서울 정도로.」

루안은 왼쪽 가슴의 낙인 위 천 조각을 눌렀다.

다음 날 이른 아침, 정규 던전 탐사 배치 통보가 내려왔다. 목적지는 마탑에서 동쪽으로 한 시간 거리의 하위 던전 ‘울부짖는 동굴’. 현장에 도착했을 때 안개가 동굴 입구를 반쯤 삼키고 있었다. 마력 잔류 냄새가 코를 찔렀다.

견습생이 마력 측정기를 갖다 댔다. “마력 농도 D급 상한. 예상 마수는 울음박쥐, 최대 20개체.”

대장 역할의 견습생이 고개를 끄덕였다. “4열 종대. 무영자는 뒤쪽.”

루안은 대열 맨 뒤에 섰다. 미르가 동굴 천장 근처를 맴돌며 속삭였다.

「습도 높아. 안쪽에 물웅덩이 있을 거야.」

동굴 안으로 열 걸음쯤 들어갔을 때 천장에서 날갯짓 소리가 났다. 검은 형체들이 쏟아져 내려왔다. 울음박쥐 떼였다.

“진형 유지! 마법진 전개——”

루안은 단검을 뽑았다.

「왼쪽!」

미르의 목소리에 몸을 틀었다. 박쥐 한 마리가 귀 옆을 스쳤다. 단검이 날개막을 베었다.

「두 마리 더! 머리 숙여!」

루안이 상체를 숙이자 박쥐 두 마리가 머리 위로 지나갔다. 싸움은 3분 만에 끝났다. 박쥐 여섯 마리가 바닥에 떨어졌고 나머지는 동굴 깊숙이 달아났다.

미르가 머리맡에서 중얼거렸다. 「저것들, 도망친 게 아니야. 누군가 부르는 소리를 들었어.」

루안은 귀를 열었다. 희미한 진동이 동굴 안쪽에서 전해져왔다. 울음박쥐들이 내는 파동보다 더 낮고 길었다.

「모여들고 있어. 동굴 안쪽. 큰 게 있을 거야.」

루안이 대장에게 말하려는 순간, 동굴 입구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진청색 로브가 안개를 뚫고 나타났다. 케인 아르겔이었다. 뒤에는 병사 두 명, 그리고 그림자처럼 검은 연기가 흘러나오는 발치.

“점검이다.”

케인의 금색 눈이 대열을 훑다가 루안에게서 멈췄다. “대열이 흐트러졌군. 무슨 일이지.”

대장 견습생이 경직된 목소리로 보고했다. “울음박쥐와 조우했습니다. 현재는 격퇴 완료. 경상 한 명.”

케인의 시선이 여전히 루안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느리게 다가왔다.

“혼자서 한 거냐. 그라울러를 잡은 것. 그리고 방금 이 전투에서도 자네만 멀쩡하군.”

“운이 좋았습니다.”

“운.” 케인이 입꼬리를 올렸다. “어제 던전에서도 운. 오늘도 운. 자네는 운이 지나치게 많은 무영자로군.”

아린이 한 걸음 나서려 했다. 루안이 손을 들어 막았다.

“고위 마법사님께서 하위 던전 점검까지 오실 일은 아닐 텐데요.”

“마탑의 자산을 관리하는 것도 내 임무다. 네 정령. 이번에는 숨기지 말고 증명해 보는 게 어떻겠나.”

소탕대원들 사이에 침묵이 흘렀다. 견습생 하나가 눈을 크게 떴다. “……정령이 있다고요? 무영자가?”

루안은 3초간 침묵했다. 왼쪽 가슴의 낙인이 욱신거렸다. 미르의 목소리가 들렸다.

「루안, 저 인간에게 들키면 나는……」

“그런 정령 없습니다.”

루안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더 건조했다. 아린이 입술을 깨물었다.

케인은 대답 대신 손을 들었다. 검은 연기가 바닥에서 솟아올라 거대한 늑대의 형상을 만들었다. 카이젤이었다. 진홍색 눈이 동굴 안쪽을 응시했다.

「안에 있다. 이름 없는 자가 아니었군…… 그대, 안에 있는 걸 알고 있나.」

미르가 움찔했다. 「저 늑대, 안쪽에 있는 걸 감지했어. 나랑 같은…… 아니, 비슷한 파동.」

케인이 카이젤의 등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탐사를 계속해라. 나는 뒤에서 지켜보겠다.”

대열이 재정비되었다. 동굴은 100미터쯤 들어가자 갈림길이 나왔다. 대장이 마력 잔류 농도가 더 높은 오른쪽을 선택했다.

15분쯤 지났을 때 대열이 둘로 갈렸다. 루안과 아린, 그리고 다른 무영자 하나가 오른쪽 심층부로 향했다. 케인은 심층부 쪽 대열 뒤에 섰다.

「위험해. 돌아가. 지금 당장.」

미르의 목소리가 날카로워졌다.

「커. 엄청 커. 저건……」

그때 천장이 무너졌다. 아니, 바위 사이로 길이 3미터는 넘어 보이는 회색 팔이 뻗어 나왔다. 손가락 네 개에 발톱이 달려 있었다. 울부짖는 거수. C급 마수였다.

“산개!”

루안은 아린의 등을 밀쳐 옆 통로로 굴렸다. 거수의 팔이 허공을 갈랐다. 바닥에 1미터 깊이의 구덩이가 파였다. 카이젤이 으르렁거리며 앞으로 나서려 했으나 케인이 제지했다.

“아직이다. 저 무영자의 움직임을 봐.”

거수의 두 번째 팔이 루안을 향해 휘둘러졌다.

「왼쪽 바위 뒤!」

미르의 고함이 귀를 때렸다. 루안은 반사적으로 몸을 던졌다. 팔이 바위를 갈랐다. 파편이 허공에 흩어졌다.

「뛰어! 지금!」

거수가 울부짖었다. 진동이 동굴 전체를 흔들었다. 천장에서 돌들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케인이 병사들을 데리고 뒤로 물러났다. 아린이 루안을 향해 손을 뻗었지만, 낙석이 두 사람 사이를 가로막았다.

카이젤이 움찔했다. 진홍색 눈이 루안의 허공을 정확히 응시했다. 미르가 있는 자리였다. 목의 붉은 문신이 꿈틀거렸다.

「역시…… 그대였군.」

거수의 세 번째 공격이 루안과 대열 사이의 바닥을 내리찍었다. 지반이 갈라지며 루안이 선 쪽이 심층부 아래로 미끄러졌다. 마지막으로 보인 것은 아린의 외마디였다.

“선배!”

그리고 어둠.

루안은 축축한 돌바닥에 떨어졌다. 등이 먼저 닿았고, 오른쪽 어깨에 격통이 번졌다. 마력 램프가 손에서 굴러떨어져 깜빡이다 꺼졌다.

“미르.”

「살아 있어. 근데 문제가 하나 있어. 저것…… 우리만 따라왔어.」

어둠 속에서 느린 호흡 소리가 들렸다. 발톱이 돌바닥을 긁었다. 하나, 둘, 셋, 넷. 네 개의 발톱이었다.

거수가 어둠 속에서 루안을 향해 고개를 돌리고 있었다.

뒤늦게 치솟은 비명은 동굴 벽에 부딪혀 산산이 깨졌다. 어깨에 배인 상처에서 흘러내린 피가 식어가는 돌바닥의 먼지를 반죽하고 있었다.

거수의 앞발이 허공을 갈랐다. 루안은 왼쪽으로 굴렀지만 오른쪽 어깨를 스치며 돌가루가 튀었다.

「가만히 있어, 내가 신호 줄게.」

미르의 목소리가 평소보다 낮았다. 루안은 숨을 들이켰다. 왼팔 골절 부위가 욱신거렸다. 거수의 등에서 촉수 세 개가 솟아나 끝이 갈라지며 날카로운 골질로 변했다.

「지금!」

미르의 외침과 함께 루안의 시야 오른편에서 푸른 섬광이 번쩍였다. 거수의 머리가 그쪽으로 돌아가고 촉수들이 동시에 뻗어나갔다. 루안은 거수의 옆구리 아래로 파고들며 단검을 역수로 고쳐 잡았다.

미르가 빛의 일부를 허공에 드러내고 있었다. 반투명한 손끝만 보였다. 떨리고 있었다. 하급 정령이 형태를 보이는 건 자살행위에 가깝다.

거수의 촉수가 미르의 빛을 내리찍었다. 빛이 흩어지며 미르의 비명이 루안의 머릿속을 찔렀다.

「……지금!」

목소리가 절반쯤 지워진 채 날아왔다. 루안은 거수의 겨드랑이 아래로 칼을 밀어넣었다. 이론대로라면 여기에 핵이 있다. 손끝에 딱딱한 감촉이 걸렸다. 비틀었다.

거수가 울부짖었다. 동굴 전체가 흔들렸다. 루안은 칼을 뽑지 않고 몸을 던져 뒤로 굴렀다.

거수의 몸이 천천히 무너지며 피부가 금 가고 안에서 푸른 빛이 새어나왔다. 마지막 경련 후 형태가 와해되며 성인 주먹만 한 핵만 남았다. 짙은 푸른색이 맥박 치듯 깜빡였다.

루안은 핵을 집어 들었다. 차가웠다. C급 정수 하나. 무영자 신분으로 입수 가능한 물건이 아니었다.

「미르.」

대답이 없었다.

「……미르.」

「……들려.」 바람 새는 소리 같았다. 「좀…… 조용히 해. 기력이…….」

말끝이 흐려졌다. 루안은 허공에 손을 내밀었다. 닿는 건 없었지만 손끝이 살짝 저렸다.

「살았어.」

「……당연하지. 네가 죽으면 내 이름도 같이 사라져, 멍청아.」

말투는 여전했지만 힘이 없었다. 그때 갱도 저편에서 발소리가 울렸다.

진청색 로브가 먼저 보였다. 케인이 최선두였다. 뒤로 무장한 마법사 넷이 따랐다. 케인이 걸음을 멈추고 거수의 잔해와 루안을 번갈아 바라봤다. 금색 눈이 가늘어졌다.

“……혼자 잡은 건가.”

“보면 몰라.”

루안은 단검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왼팔 붕대에 피가 번져 있었다. 마법사 하나가 측정구를 꺼내 잔류 마력을 스캔했다.

“C급 확정입니다. 사망 시각은 약 5분 전. 핵은 제거된 상태입니다.”

“핵을 꺼내 봐.”

루안은 꺼내지 않았다. “마탑 규정 제12조. 던전에서 획득한 정수는 소속 마법사의 개인 전리품으로 인정된다. 맞나.”

“무영자가 규정을 잘도 꿰고 있군.”

“땡땡이 치면서 외웠어.”

케인이 한 걸음 다가왔다. 그림자가 루안을 덮었다.

“C급 마수를 혼자 잡는다. 하급 정령 하나 없는 무영자가. 말이 된다고 생각하나.”

“너는 안 된다고 생각하는 거지.”

“네 정령이 개입했다.”

루안은 오른손을 주머니에 넣었다.

“개입한 증거가 있나.”

“카이젤이 감지했다.”

케인의 발치에서 그림자가 꿈틀거렸다. 카이젤이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채 낮은 진동만 보냈다. 미르는 반응하지 않았다.

“정령의 감지는 증거가 될 수 없어. 증명은 마탑이 정한 절차로 하겠다. 네 방식 말고.”

케인의 금색 동공이 순간적으로 세로로 찢어졌다. 진청색 로브의 깃을 바로 세우며 숨을 들이쉬었다.

“좋다. 오늘부로 너를 공식 감시 대상으로 격상한다. 근거는 C급 마수 단독 제압이라는 비정상적 성과. 규정 제34조 1항. 이의 있나.”

“없어.”

“그리고.” 케인이 루안의 눈높이까지 몸을 숙였다. “내일 오전 9시. 마탑 중앙 실험장으로 와라. 재계약 실험의 피험자로 네가 지목되었다.”

루안의 손이 주머니 속에서 핵을 꽉 쥐었다.

“내가 무영잔데.”

“무영자가 정령을 가졌다는 가설을 검증하는 거니까. 거절할 수 있어. 대신 그 핵은 미확인 경로로 획득한 불법 정수로 분류된다.”

루안은 침묵했다. 미르의 목소리는 여전히 들리지 않았지만, 미르가 한 말을 기억했다. 저 상급 녀석, 뭔가 숨기고 있어.

“알겠다. 증명할 테니까.”

“뭘.”

“내가 계약에 실패하지 않았다는 걸.”

케인이 허리를 폈다. 처음으로 표정이 흔들렸다. “……흥미롭군.” 돌아서며 마지막으로 말했다. “내일 실험장에서 보자.”

진청색 로브가 갱도 저편으로 사라졌다. 구조대의 호위를 받으며 던전을 빠져나왔다. 입구 대기실에 아린이 서 있었다. 루안을 보자마자 달려왔다.

“선배! 왼팔 그거——”

“금방 붙인 거야.”

의무실 복도까지 따라왔다. 루안은 침상에 걸터앉았다. 간호사가 붕대를 풀고 상태를 확인하며 혀를 찼다.

“골절이 경미하게 진행됐네. 던전 안에서 뭘 한 거예요.”

“조금 뛰었어.”

아린이 침상 옆 의자에 앉았다.

“……진짜 C급을 혼자 잡았다고요?”

“들었어.”

“어떻게. 아니, 뭐가 어떻게.”

루안은 왼팔에 새 붕대가 감기는 걸 보며 말했다. “아린. 내일 중앙 실험장 가.”

“네? 왜 선배가——”

“재계약 실험 피험자.”

아린의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졌다.

“……미친 거 아니에요. 그 실험, 지난번 피험자는 정령이 폭주해서——”

“괜찮아.”

의무실 불이 한 번 깜빡였다. 아린은 입을 다물고 고개를 끄덕였다. 밖으로 나갔지만 대기실 의자에 앉아 떠나지 않았다.

루안은 혼자였다.

「……들을 수 있어.」

미르의 목소리. 여전히 희미했지만 더듬을 수 있을 정도는 됐다.

“몸은.”

「별로. 근데 지금 그 얘기할 때가 아니지.」

루안은 천천히 숨을 들이쉬었다. 왼쪽 가슴의 낙인 너머로 묵직한 통증이 느껴졌다.

“그날 계약식에서 넌 왜 사라졌어.”

침묵.

“이번엔 도망가지 마.”

긴 침묵이 흘렀다. 촛불이 한 번 흔들렸다.

「……그건 내가 정하는 거야.」

같은 말이었다. 하지만 처음으로 회피하는 기색이 없었다. 한참 뒤, 더 작은 목소리가 덧붙였다.

「근데…… 생각은 해볼게.」

마탑의 실패한 천재는 정령의 말을 듣는다5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