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탑의 실패한 천재는 정령의 말을 듣는다
8화
공기의 흐름이 멈췄다. 모든 공기가 게이트를 향해 한 방향으로만 움직이고 있었다. 루안은 발이 바닥에서 뜨는 감각을 온몸으로 느꼈다. 미르의 손이 오른쪽 손목을 잡은 채였다. 반투명한 손가락이 루안의 살갗에 파고들 듯 떨렸다.
「루안! 안 돼——」
미르의 목소리가 찢어질 듯 높아졌다. 그녀의 몸에서 빛 입자가 폭포처럼 쏟아져나왔다. 하급 정령의 형태 유지 한계는 이미 한참 전에 넘었다. 그래도 미르는 손을 놓지 않았다.
세 번째 수축. 게이트 중심부에서 검은 균열이 방사형으로 번졌다. 균열 하나가 루안의 왼쪽 허리를 스쳤다. 튜닉이 찢기고 피가 공기 중으로 흩어졌다. 손끝부터 감각이 사라지고 있었다.
「버티라고 했잖아, 멍청아!」
미르가 루안의 손목을 한 번 더 쥐었다. 손가락 마디마다 금이 가는 듯 빛이 갈라졌다. 빛의 파편이 떨어져나가 허공에서 소멸했다. 정령의 존재 자체를 깎아내는 대가였다.
루안은 흐릿해지는 시야로 그 광경을 봤다. 미르의 머리카락 색이 변하고 있었다. 평소의 옅은 푸른빛이 아니라, 처음 보는 짙은 청색. 눈동자 없는 눈에서 쏟아지는 빛이 주변을 뒤덮었다.
“……놔.”
「싫어.」
루안의 등 뒤로 공간 균열이 입을 벌렸다. 직경 2미터가 넘는 검은 틈. 균열 안쪽에서는 아무 빛도, 아무 소리도 새어나오지 않았다.
「……바보.」
미르가 중얼거렸다. 다음 순간 그녀의 빛이 폭발적으로 번졌다. 하급 정령의 한계를 완전히 벗어난 출력이었다. 미르의 전신이 빛으로 분해되기 직전까지 밝아졌다가, 다시 소녀의 형체로 응집됐다. 반투명했던 실루엣이 한순간 완전한 불투명으로 바뀌었다.
미르가 양손으로 루안의 오른팔을 붙잡았다. 두 손 모두 단단했다. 진짜 살아 있는 손. 손바닥 온도가 루안의 피부로 전해졌다. 차가우면서도 뜨거운, 빛을 만지는 듯한 온도.
그리고 미르가 허공을 박찼다. 발끝에서 푸른 빛이 터지며 두 사람의 몸이 균열 반대 방향으로 밀려났다. 겨우 1미터. 균열의 입구에서 벗어나는 데 필요한 최소한의 거리였다.
「듣고 있어, 루안.」
미르의 머리카락이 완전히 짙은 청색으로 물들었다. 그녀의 등 뒤로 희미한 빛의 날개 같은 형상이 스쳤다. 형태를 알아보기 전에 사라졌다. 고대 정령의 편린. 불완전하고 일시적인 잔상.
「너는 실패한 게 아니야.」
루안의 숨이 멎었다. 미르의 눈에서 뿜어져 나오는 빛이 점점 더 강해졌다. 그 빛 속에서 공간 균열들이 일시적으로 움직임을 멈췄다.
「너는 나를 가진 유일한 인간이야.」
미르가 루안의 이마에 자신의 이마를 맞댔다. 차가운 빛의 감촉이 루안의 의식을 붙잡았다. 손끝으로 사라지던 감각이 되돌아왔다. 대신 심장이 멈출 것 같은 압력이 가슴을 짓눌렀다.
「내 이름은——」
모든 소리가 사라진 고요 속에서 미르의 목소리만 울렸다.
「세리니아.」
이름이 선언된 순간 미르의 전신에서 빛이 폭발했다. 색을 가진 빛. 루안의 회색 눈동자에 비친 푸른빛이 온 세상을 덮었다. 진법도, 서약도, 증인도 없는, 단지 두 존재의 동의만으로 이루어진 진명 등록의 순간.
「그리고 너의 이름은——」
세리니아가 루안의 이마에서 이마를 떼고 그의 눈을 들여다봤다. 빛이 가득 찬 눈동자에 루안의 얼굴이 비쳤다. 피투성이에, 왼팔 붕대는 풀리고, 다크서클이 짙은 얼굴. 그래도 그녀는 웃고 있었다. 이제껏 한 번도 보여준 적 없는, 비꼼 없는 미소.
「루안 벨크로스.」
이름이 울렸다. 루안의 온몸에 전류가 흐르는 듯한 감각이 일었다. 왼쪽 가슴에서 뜨거운 통증이 치솟았다.
무영자 낙인이 있는 자리. 천 조각 아래에서 무언가 갈라지는 소리가 들렸다. 루안은 비명을 삼키며 손으로 가슴을 움켜쥐었다.
「……이게, 뭐——」
낙인에서 뿜어져 나오는 마력이 루안의 전신을 휘감았다. 1년 동안 막혀 있던 마력 통로가 한꺼번에 열리는 감각. 손가락 끝에서부터 발끝까지, 혈관을 타고 빛이 흘렀다. 낙인 전체를 가로지르는 한 줄기 금. 그 틈에서 고대 정령의 기운이 새어나왔다.
세리니아의 등 뒤에서 여섯 개의 빛깃이 다시 한 번 형태를 드러냈다. 이번에는 더 선명했다. 동시에 붕괴하던 공간이 경련을 멈췄다. 균열들이 확장을 멈추고 제자리에 얼어붙었다. 게이트의 검은 중심부에서 뻗어나오던 진동도 잦아들었다.
세리니아가 무릎을 꿇었다. 빛의 날개가 흩어지고 형태가 다시 반투명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목소리는 여전히 또렷했다.
「……됐다. 이제 살았어, 멍청아.」
루안은 대답하지 못했다. 손바닥을 펴자 푸른 빛이 감돌았다. 1년 동안 단 한 번도 발현된 적 없는 마력.
“……세리니아.”
혀에 닿는 감촉이 낯설지 않았다. 미르가 아닌 세리니아. 하급 정령에게는 없는, 진명을 가진 존재만이 가질 수 있는 이름.
「부르지 마, 창피하니까.」
세리니아가 고개를 돌렸다. 머리카락 색이 다시 옅은 푸른빛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하지만 눈동자 없는 눈의 빛은 여전히 짙은 청색.
「……세리니아.」
루안이 다시 불렀다. 목소리가 갈라졌다. 가슴의 낙인에서 흘러나오는 빛이 손끝으로 옮겨갔다. 마력이 안정되기 시작했다. 불안정하지만 분명한 흐름.
「두 번 부르지 말랬지!」
세리니아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목소리 끝이 떨렸다. 그녀의 손이 아직 루안의 손목을 잡고 있었다. 단단했던 손이 다시 반투명으로 돌아가고, 온도가 희미해지고 있었다.
「……고맙다, 같은 소리는 하지 마.」
루안의 말에 세리니아가 입을 열려다 말았다. 그녀의 눈에서 빛 입자가 한 방울 떨어졌다. 눈물의 형태를 한 빛. 허공에서 소멸하기 전에 루안의 손등에 닿았다. 차갑지도 뜨겁지도 않은, 그냥 빛.
게이트가 다시 울기 시작했다. 멈춰 있던 균열들이 천천히 움직임을 재개했다. 붕괴가 완전히 멈춘 건 아니었지만, 최소한의 시간은 벌어졌다.
루안이 상체를 일으켰다. 왼팔 붕대가 완전히 풀려 바닥에 떨어졌다. 드러난 팔뚝의 피가 아직 마르지 않았다. 마력이 부상 부위를 임시로 보호하고 있었다.
「일어날 수 있냐?」
세리니아의 형태가 점점 얇아지고 있었다. 그래도 목소리만은 여전히 무례한 말투.
「……아직이요.」
무의식적으로 존댓말이 섞여 나왔다. 루안은 곧바로 입을 다물었다가 다시 열었다.
「아니. 아직.」
「뭐야, 그 애매한 말투.」
세리니아가 작게 웃었다. 그녀의 손이 루안의 손목에서 떨어졌다. 대신 루안이 손을 뻗었다.
마력이 깃든 손가락이 세리니아의 반투명한 손목을 감쌌다. 닿을 리 없었다. 하지만 빛의 입자들은 루안의 손을 피하지 않았다.
광장 외곽. 케인 아르겔이 손에 쥔 마법진을 천천히 접었다. 방어계의 빛이 소멸했다. 카이젤이 낮게 진동했다. 「……저 빛.」
케인은 대답하지 않았다. 광장 전체에 전개 가능한 방어계를 가진 마탑의 감시관이, 단 한 명의 무영자와 한 마리의 정령 앞에서 개입하지 않았다. 개입하지 못한 건지, 하지 않은 건지, 스스로도 알 수 없는 표정이었다.
붕괴가 느려진 게이트 앞에서 루안이 두 다리로 버티고 섰다. 그의 가슴에서, 천 조각 아래 낙인의 금이 푸르게 빛나고 있었다.
붕괴 게이트 외곽 통제 구역에 설치된 장벽 마법진이 일제히 균열을 일으켰다. 마력 공급선 열두 개 중 일곱이 동시에 끊어지며 푸른 빛이 소멸했다. 통제석에 앉아 있던 하급 마법사 셋이 동시에 몸을 일으켰다.
“아르겔 님, 게이트 내부에서——”
“보고하지 마라. 보인다.”
케인 아르겔은 이미 서 있었다. 공중에 떠 있던 카이젤이 진홍색 눈을 가늘게 떴다. 붕괴하던 게이트 중앙에서 백금색 빛이 뿜어져 나왔다. 마탑의 어떤 등급 분류에도 없는 색이었다.
「측정 범위 밖이다.」
카이젤의 목에 있는 붉은 문신 띠가 평소보다 선명하게 빛나고 있었다. 통제 구역의 다른 마법사들은 게이트 쪽만 바라보느라 그 빛을 알아채지 못했다. 케인의 손가락이 보고용 마법진 가장자리를 긁었다.
“저건 예고된 계약식으론 나올 수 없는 마력 파장이다.”
손바닥에 마법진을 전개했다. 실시간 기록 모드. 수신자는 마탑 상층 심의회. 카이젤이 케인의 손목 쪽으로 시선을 내렸다.
「보고한다면——」
“방해하지 마라.”
「개입하지 않은 네가 보고는 할 수 있겠나.」
케인의 손이 멈췄다. 처음으로 카이젤을 정면으로 바라봤다. 카이젤의 진홍색 눈빛은 여전히 게이트 중앙의 백금색 빛에 고정되어 있었다. 눈동자의 빛이 평소보다 약했다.
“네가 저 정령을 안 이유를 묻지 않았다.”
「질문하지 않았으니 대답도 없다.」
“지금 묻는 거다.”
카이젤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입가의 근육이 당겨졌다. 「보고하든 말든.」
그 말을 끝으로 카이젤은 케인의 어깨 너머로 물러나 눈을 감았다. 케인은 잠시 그 정령을 응시하다가 마법진을 다시 전개했다. 손가락이 공중을 스치며 문자를 새겼다.
『통제 불가능한 위험 요소 발생. 등급 측정 외. 현장 관찰자: 케인 아르겔.』
전송 버튼을 누르기 직전, 한 문장을 더 추가했다.
『계약 정령의 정체 미상. 카이젤의 간섭 반응 확인됨.』
마법진이 푸른 빛을 내며 수신 완료를 알렸다. 케인은 팔짱을 끼고 다시 게이트를 바라봤다. 붕괴가 멈춰 있었다. 균열 열여섯 개 전부. 마탑 방재 매뉴얼에 없는 현상이었다.
게이트 입구의 돌바닥이 식어가고 있었다. 균열이 닫힌 자리마다 하얀 서리가 내려앉았다. 미르의 빛이 수축하며 반투명한 소녀 형태로 가라앉았다. 루안은 한쪽 무릎을 바닥에 대고 숨을 골랐다.
「루안. 손등.」
루안은 왼손을 들어 올렸다. 무영자 낙인에 가느다란 금이 가 있었다. 금 사이로 옅은 청색 빛이 새어나오고 있었다.
「계약의 흔적이다.」
미르가 낙인 위로 손가락을 가져갔다. 반투명한 손끝이 닿자 금이 미세하게 벌어졌다.
“계약. 나는 네 진명을——”
「부르지 마. 여긴 아직 너무 많은 귀가 있어.」
대피했던 마탑 요원들이 하나둘 돌아오고 있었다. 그들은 루안에게서 10미터쯤 떨어진 지점에서 발을 멈췄다. 공중에 파란 마법진 하나가 나타났다. 수정 가루가 흩날리는 형태의 높은 등급 전송이었다.
“루안. 마탑주님의 전언이다. 마탑주 시벨라 레온하르트께서 최상층으로 오라 하신다. 지금. 혼자서.”
주변의 마탑 요원들이 웅성거렸다. 하급 조제사 하나가 들고 있던 붕대 다발을 바닥에 떨어뜨렸다.
“……진실을 마주할 준비가 되셨다는 말씀을 덧붙이셨다.”
마법진이 닫혔다. 루안은 손등의 낙인을 내려다봤다. 금은 아직도 조금씩 벌어지고 있었다.
「거절할 수도 있다.」
미르가 루안의 오른쪽 어깨 위에 걸터앉았다. 끝 어미가 짧게 끊겼다.
“이유가 있나.”
「내가 어떤 건지. 왜 그날 네가 날 선택했는지. 다 시벨라가 알고 있을 가능성이 있다.」
“직접 물어볼 기회다.”
루안이 일어섰다. 오른손으로 낙인을 감싸 쥐었다. 금 사이로 새는 빛이 손가락 사이로 흘러나왔다.
「너, 가는 거냐.」
“그래.”
「그럼 나도 갈게.」
미르가 루안의 왼쪽 어깨에 비물질 형태로 깃들었다. 차가운 온도와 평소보다 강한 빛의 떨림.
「하지만 이번엔 숨지 않아. 내가 어떤 존재였는지, 왜 그날 네 곁을 떠나야 했는지——」
잠깐의 침묵. 깃든 빛이 한 번 깜빡였다.
「모두 밝힐 거야. 네 앞에서.」
루안은 오른손을 어깨 쪽으로 올려 미르의 빛이 머무는 자리를 한 번 스쳤다. 손끝에 찌릿한 감각이 남았다. 그는 발걸음을 옮겼다.
부상자 구역은 게이트 입구에서 서쪽으로 50미터 떨어진 임시 천막이었다. 아린 베스티는 마지막 부상자의 붕대를 마무리하고 천막 밖으로 나왔다. 게이트 방향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루안이 걸어가고 있었다.
“선배——”
부르려던 목소리가 목구멍에서 멎었다. 아린은 루안의 왼쪽 손등을 보았다. 무영자 낙인에 금이 가 있었다.
빛이 새어나왔다. 낙인이 부서지고 있었다. 1년 전 자신의 가슴에 찍혔던 것과 같은 낙인이.
“예정된 실패는…… 없었다.”
아린은 오른손을 가슴께로 올렸다. 튜닉 아래 천 조각으로 가린 낙인이 조용히 숨 쉬고 있었다. 그날. 계약식. 촛불이 줄어들던 자정 무렵.
빛이 다가왔다.
손끝에 닿을 듯이. 따뜻했다. 아린은 눈을 감고 기다렸다.
빛이 물러났다.
이유도 없이. 설명도 없이. 그냥——거절당했다.
실패한 건 자신이라 생각했다. 자격이 부족했다고. 하지만 지금 저기 걸어가는 선배의 손등에서 빛이 새고 있었다.
낙인이 깨지고 있었다. 계약이 완성됐다는 증거였다. 정령이 스스로 이름을 주었다는 뜻이었다.
아린은 천천히 손을 내렸다. 루안의 뒷모습은 이미 마탑 중앙 통로로 접어들고 있었다. 그 어깨 위에 희미한 빛이 얹혀 있었다. 반투명한 소녀의 형태. 정령.
“……그 빛, 아직 거기 있었구나.”
아린의 입가에 희미한 실 같은 미소가 걸렸다. 가슴팍에서 낙인이 욱신거렸다. 아니——울렸다. 먼 곳의 종소리가 몸 안에서 메아리치는 것처럼. 천막 기둥에 등을 기대고 잠시 눈을 감았다.
만약 우리 모두가 실패한 게 아니라면. 만약 정령들이 스스로 물러난 거라면.
그 다음 생각은 하지 않았다. 아직은 말로 만들 수 없었다. 눈을 뜨고 천막 안으로 돌아간 아린은 손에 쥔 붕대를 정리하며 중얼거렸다.
“선배. 그쪽 세상이 어떤지…….”
말끝을 삼켰다. 붕대를 접었다. 그녀의 손은 더 이상 떨리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