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탑의 실패한 천재는 정령의 말을 듣는다
9화
마탑 하층 중앙 광장은 새벽 직전의 푸른 어둠에 잠겨 있었다. 야간 작업을 마친 무영자들이 긴 의자에 걸터앉아 정수를 분류하고 있었고, 감시병 세 명이 광장 서쪽 통로 입구에서 잡담을 나누고 있었다. 루안이 광장으로 들어섰을 때, 가장 먼저 알아챈 것은 아린이었다.
“……선배?”
아린이 들고 있던 정수 케이스를 내려놓았다. 유리병이 철제 테이블 위에서 달그락거렸다.
루안의 왼쪽 손등에서 빛이 새어나오고 있었다. 금이 간 무영자 낙인 사이로 백금색 실 같은 마력이 흘러나와 손가락 마디를 타고 번졌다. 루안은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광장 중앙으로 천천히 걸어 들어갔다.
「사람들이 보고 있어.」
미르의 목소리가 낮게 깔렸다. 루안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오른손으로 왼쪽 손등을 감쌌다.
손바닥 아래서 낙인이 뜨거워지고 있었다. 금이 벌어지는 소리가 났다. 돌이 갈라지는 것 같은 마른 파열음이었다.
낙인이 무너졌다.
회색 가루가 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렸다. 루안은 손바닥을 폈다. 가루가 바닥에 떨어져 작은 원을 그렸다.
그 위로 마력이 피어올랐다. 백금색 빛이었다. 마탑의 등급 분류 체계 어디에도 없는 색.
“저게…… 무영자 낙인이야?”
분류 작업을 하던 무영자 한 명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작업복 소매를 팔꿈치까지 걷어 올린 중년 남자였다. 그는 자신의 가슴에 붙은 천 조각을 만지작거리며 한 걸음 다가왔다. 광장 구석에서 빗자루를 들고 있던 젊은 무영자도 멈춰 섰다.
“낙인이…… 사라졌어.”
누군가 중얼거렸다. 그 한 마디가 광장을 흔들었다.
일어서는 사람들. 내려놓는 도구들. 의자가 넘어지는 소리와 함께 무영자들이 하나둘 루안 주변으로 몰려들었다.
십여 명. 이십여 명. 모두 가슴에 같은 천 조각을 달고 있었다. 루안의 빈 손등과 바닥에 쌓인 회색 가루를 번갈아 쳐다보는 눈빛이 뜨거웠다.
“계약이…… 된 거야?”
“저 빛 좀 봐. 정령의 마력이야.”
“무영자 낙인이 부서졌다고?”
웅성거림이 커졌다. 광장 서쪽 통로에 있던 감시병 중 한 명이 빠르게 다가왔다. 어깨에 검은 견장을 두른 중급 감시병이었다. 그는 루안의 손등을 확인하고 숨을 들이켰다.
“저건……”
말을 끝까지 잇지 못했다. 감시병은 허리춤에서 작은 수정판을 꺼내 바닥에 내려놓았다. 마법진이 수정판 위로 번지며 푸른 빛의 통신 회로가 그려졌다. 긴급 보고용 중계 마법진이었다.
“중앙 통제실. 코드 7. 무영자 낙인 소멸 사례 발생. 당사자는 현장에 있으며——”
감시병이 루안을 흘끗 보며 말을 이었다.
“계약 정령의 마력 흔적 확인. 색상은…… 백금입니다.”
마법진 너머에서 짧은 침묵이 흘렀다. 이어서 긴박한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대기하라. 중층에서 곧 응답이 있을 것이다.”
아린이 군중을 뚫고 루안 앞으로 걸어왔다. 정수 케이스는 이미 저만치 탁자 위에 방치된 상태였다. 그녀의 눈이 루안의 손등과 광장 바닥을 오갔다. 가슴팍 천 조각 아래서 낙인이 욱신거리는 것을 느끼며 아린은 입을 열었다.
“선배, 그거…….”
루안이 고개를 들었다. 광장을 둘러싼 무영자들의 얼굴을 하나씩 훑었다. 처음으로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응.”
짧은 대답이었다. 루안은 왼손을 들어 빈 손등을 모두에게 보였다. 낙인은 없었다.
마탑 중층, 케인의 집무실은 차가운 마법등 빛으로 가득했다. 집무실 중앙 탁자 위에 놓인 수정판이 붉게 점멸했고, 케인 아르겔은 손가락을 가볍게 휘저어 통신을 열었다.
“코드 7?”
수정판 너머의 감시병이 빠르게 상황을 보고했다. 광장. 백금색 마력. 낙인 소멸. 루안.
케인의 금색 눈이 가늘어졌다. 로브의 깃을 한 번 매만지고는 의자에서 일어났다. 방 구석의 어둠 속에서 검은 형체가 움직였다.
카이젤이었다. 상급 정령은 처음부터 소환된 상태로 그곳에 있었다. 네 발이 바닥에 닿는 소리도 없이 케인의 등 뒤로 걸어 나왔다.
“고작 무영자 하나가 낙인을 깼다고 코드 7이라.”
케인이 중얼거렸다. 수정판을 닫으며 통신을 끊었다. 다른 손으로 집무실 벽에 걸린 출동 마법진을 건드렸다. 붉은 선이 벽면을 따라 번지며 경비대 소집 신호를 보냈다.
“미확인 고위 정령의 불법 계약.”
마법진의 빛이 케인의 얼굴에 짙은 그림자를 드리웠다. 루안의 정령은 이미 측정 불능 판정을 받은 존재였다. 하급이라면 설명되지 않는 마력 패턴. 계측 범위를 벗어난 미지의 등급. 그리고 지금 백금색 마력.
“구속해.”
카이젤이 움직이지 않았다. 거대한 검은 늑대의 형체가 케인의 옆에서 멈춰 섰다. 진홍색 눈이 깜박였다.
“……그 정령은 건드리지 마라.”
케이젤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한 옥타브 낮았다. 으르렁거림과 발화 사이 어딘가의 소리였다. 목의 붉은 문신이 불규칙하게 수축했다.
케인이 어깨 너머로 카이젤을 돌아봤다.
“뭐?”
“백금색을 모르는가.”
카이젤이 앞발을 한 번 구르듯 바닥을 내리찍었다. 발톱이 돌바닥에 짧은 마찰음을 냈다.
“저건 네가 다룰 게 아니다.”
이마에 패인 주름을 손끝으로 눌렀다. 그리고 곧 고개를 저었다.
“경비대 편성은 내가 결정한다. 너는 따라와. 그것이 계약이다.”
카이젤은 더 말하지 않았다. 진홍색 눈에 무언가 스쳤지만 케인은 이미 등을 돌린 뒤였다. 출동 마법진이 완성된 벽면에서는 경비대원들의 마력 응답 신호가 연이어 들어오고 있었다.
카이젤은 잠시 고개를 낮췄다. 미르가 있는 방향——광장 쪽을 향한 시선에는 경계와 오래된 죄책감이 함께 어려 있었다. 입을 열지는 않았다. 대신 목의 붉은 문신이 한 번 길게 빛났다가 잦아들었다. 자유를 말할 수 없는 정령의 침묵이었다.
케인이 집무실 문을 열었다. 복도 끝에서 경비대의 발소리가 울려오고 있었다.
광장으로 통하는 마지막 회랑에서 케인은 걸음을 늦추지 않았다. 경비대 여섯 명의 장화 소리가 뒤에서 일정한 간격으로 따라붙었다. 공명석을 품은 복도 벽이 지나간 자리마다 푸르게 잔광을 남겼다. 광장 입구에 다다르자 어둠 속에서 횃불 여섯 개만 타고 있었다. 케인은 숨을 한 번 고르고 광장 안으로 발을 내디뎠다.
중앙 광장은 횃불 여섯 개만 남아 있었다. 게이트 붕괴 여파로 마력 공급선 세 군데가 끊겨 있었다. 나머지 불빛이 돌바닥에 긴 그림자를 드리웠다.
루안은 왼손을 들어 손등의 낙인을 확인했다. 금이 더 벌어졌다. 새어나오는 빛이 튜닉 소매 아래로 번졌다.
「온다.」
미르의 목소리가 평소보다 낮았다. 루안의 오른쪽 어깨 위에서 반투명한 형태가 살짝 떨렸다.
광장 북쪽 통로에서 장화 소리가 들렸다. 케인 아르겔이 먼저 모습을 드러냈다. 검은 코트가 횃불 아래서 무겁게 흔들렸다.
등 뒤로 진홍색 눈의 늑대가 그림자처럼 따라붙었다. 경비대 여섯 명이 양옆으로 펼쳐졌다. 모두 마력 제압용 결계석을 손목에 착용하고 있었다.
케인이 걸음을 멈췄다. 루안과의 거리는 열 걸음 남짓. 시선이 루안의 왼손등에 닿았다. 케인의 눈꺼풀이 미세하게 경련했다.
“루안. 미등록 정령 계약 혐의로 구속한다.”
경비대가 반원형으로 좁혀왔다. 루안은 반 걸음 물러섰다.
그때였다.
카이젤이 케인의 오른편에서 한 걸음 앞으로 나왔다. 검은 아우라가 등에서 한 번 크게 일렁였다. 진홍색 눈이 미르를 정면으로 응시했다.
「10년 전의 파편…… 아직 살아 있었나.」
낮은 으르렁거림이 광장 돌바닥을 타고 흘렀다. 경비대원들이 동시에 움찔했다. 케인의 표정이 처음으로 굳어졌다.
“카이젤. 무슨——”
「이제는 더 이상 널 따를 수 없다.」
카이젤의 목에서 붉은 계약 문신이 검게 변하기 시작했다. 케인이 숨을 들이켰다. 왼쪽 무릎이 먼저 꺾였다. 오른손이 목을 쥐었다. 문신의 색이 괴사한 살점처럼 퍼져나갔다.
“계약을…… 거부한다고?”
케인의 목소리에서 반말이 튀어나왔다. 경비대장이 검을 빼들었다.
“아르겔 님!”
“움직이지 마.”
루안의 목소리였다. 경비대원들이 일제히 그를 돌아봤다. 루안은 여전히 왼손을 올린 채였다. 손등의 금에서는 빛이 멈추지 않고 새어나오고 있었다.
“지금 내게서 정령의 힘이 나오고 있어. 측정 불능 등급의.”
대원들의 결계석이 동시에 파르르 떨렸다. 바늘이 끝까지 치솟았다.
「잘했어, 루안.」
미르가 루안의 귀에만 들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떨림은 여전했다. 그래도 빛 입자는 더 이상 흩어지지 않았다.
케인이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검은 문신은 목에서 쇄골까지 번졌다. 숨소리가 거칠었다. 두 손으로 목을 감싼 채 미동도 하지 않았다.
“선배!”
아린의 목소리가 광장 동쪽에서 들렸다. 무영자 셋이 그녀 뒤에 붙어 있었다. 모두 가슴에 낡은 천 조각을 달고 있었다. 회색, 푸른색, 바랜 붉은색.
“여기다, 지금.”
아린이 루안의 소매를 잡아당겼다. 무영자들이 케인과 경비대 사이를 가로막는 위치로 움직였다.
“너희——”
경비대장의 말이 끝나기 전에 카이젤이 고개를 돌렸다. 진홍색 눈이 경비대원 한 명 한 명을 훑었다. 검은 아우라가 광장 바닥을 핥듯 번졌다. 대원들의 발이 바닥에 붙은 듯 멈췄다.
「기다려라.」
카이젤의 목소리는 명령이 아니었다. 사실의 통보에 가까웠다. 경비대장의 검 끝이 천천히 내려갔다.
아린이 광장 서쪽 구석으로 루안을 끌었다. 버려진 정수 보관함 뒤. 돌바닥의 이음새 하나가 손가락 두 마디 너비로 들려 있었다.
무영자들은 미리 준비한 지렛대 하나를 틈에 밀어넣었다. 돌판이 소리 없이 미끄러졌다. 아래로 계단이 이어졌다.
「루안.」
미르가 어깨 위에서 뒤를 돌아봤다. 카이젤이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늑대의 거대한 머리가 바닥을 향해 깊이 숙여졌다. 미르의 빛 입자가 한 번 가라앉았다.
“알고 있어.”
루안은 계단으로 한 발 내디뎠다. 아린이 마지막으로 남아 경비대를 한 번 확인했다. 케인은 여전히 무릎을 꿇은 채였다. 한 대원이 그를 부축하려 다가갔다.
“중층 의무실로 옮겨. 지금.”
경비대장의 목소리는 명령이라기보다 동료를 깨우는 톤이었다. 대원 둘이 케인의 양팔을 잡아 일으켰다. 케인이 고개를 들었다. 입술이 파랬다.
“……카이젤.”
카이젤은 대답하지 않았다. 검은 형체가 천천히 이송 행렬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열 걸음 뒤에서 따랐다. 미르에게 한 번 더 고개를 숙인 채로.
“들어가요, 선배. 아랫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어.”
아린이 루안의 등을 떠밀었다. 계단 아래에서 희미한 습기 냄새가 올라왔다. 돌판이 닫히는 소리. 광장의 횃불 여섯 개가 깜빡였다. 바닥에는 케인이 꿇었던 자리에 핏기 없는 검은 얼룩만 남았다.
계단은 곧 완만한 내리막 통로로 이어졌다. 지하의 공기는 차고 오래된 먼지 냄새가 섞여 있었다. 아린의 랜턴 불빛이 벽면을 스칠 때마다 습기에 반쯤 지워진 부조들이 드러났다.
루안은 손끝으로 벽을 한 번 쓸었다가 떼었다. 돌은 생각보다 매끄러웠다. 오래전 누군가 이 길을 정성껏 다듬었다는 증거였다.
미르의 빛은 여전히 옅은 채였지만 더 흐려지지는 않았다. 무영자들의 발소리가 일정한 간격으로 뒤를 따랐다.
통로는 생각보다 깊었다. 아린이 앞장서서 벽면을 더듬으며 내려갔다. 손에 쥔 랜턴이 흔들릴 때마다 천장에 박힌 습기 머금은 돌들이 번쩍였다. 무영자 세 명이 뒤를 따랐다.
루안은 어깨 너머로 미르의 빛을 확인했다. 반투명한 소녀의 형태가 평소보다 옅었다. 게이트에서 소모한 기력이 아직 돌아오지 않은 모양이었다.
「저 문양.」
미르의 목소리가 평소보다 낮았다.
「본 적 있어.」
루안은 걸음을 늦추지 않고 물었다. “어디서.”
「모르겠어. 기억하기 전에 가슴이 먼저 울려.」
그 순간이었다. 미르의 발광체 눈이 벽면 한 곳에 고정됐다. 통로 오른쪽 벽. 다른 곳보다 거칠게 깎인 돌 틈새로 오래된 정령 문양이 희미하게 새겨져 있었다. 나선형으로 꼬인 선들이 중앙에서 원을 그리며 뻗어 있었다.
루안도 걸음을 멈췄다.
「……뭐야 이거.」
미르의 머리카락이 백색에서 짙은 청색으로 물들었다. 주변에 흩날리던 빛 입자가 갑자기 멎었다. 마치 시간이 얼어붙은 것처럼.
아린이 돌아봤다. “선배?”
루안은 오른손을 들어 대답을 막았다. 미르의 시선이 허공에 박혀 움직이지 않았다. 눈동자 없는 눈에서 푸른 빛이 흘러넘쳤다.
미르는 보고 있었다. 자신도 이해할 수 없는 무언가를. 통로 벽면이 사라지고 거대한 홀로 바뀌었다.
수백 개의 촛불. 돌바닥에 그려진 계약진. 그리고 그 위에 서 있던 무수한 빛의 형태들.
『우리는 더 이상 강제되지 않겠다.』
목소리가 아니었다. 존재의 진동이 언어로 번역된 형태였다. 수백의 정령들이 동시에 같은 결의를 울렸다.
촛불들이 일제히 꺼졌다. 인간 마법사들의 비명. 깨지는 마력석. 흔들리는 마탑의 첨탑.
그리고 그 한가운데. 검은 늑대가 서 있었다. 목에 붉은 문신을 두른 채.
『기억하라. 이름 없는 것들도 선택할 자유가 있다는 것을.』
「……카이젤.」
미르의 입에서 새어나온 이름이었다.
그 한 마디에 빛이 터졌다. 벽면의 문양이 수십 년 만에 처음으로 반응한 듯 나선이 풀리고 원이 회전했다. 통로 전체가 낮은 진동으로 울렸다. 무영자들이 뒷걸음질 쳤다.
루안은 미르의 손을 잡았다. 반투명한 손가락이 차가웠다.
“미르.”
「나는…….」
미르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그날 거기에 있었어. 저 안에.」
눈동자 없는 눈이 천천히 루안을 향했다.
「기억이 봉인돼 있었어. 10년 전. 내가…… 내가 저걸 같이 했어.」
루안은 손에 힘을 줬다. 대답 대신 그렇게 했다. 미르의 어깨에서 빛 입자가 다시 흩날리기 시작했다. 파란색에서 다시 흰색으로. 천천히.
“봉인을 건 쪽은.”
「……몰라. 기억의 시작이 거기서 멈춰 있어. 그 전은 안 보여.」
아린이 조심스럽게 다가왔다. “……무슨 일입니까. 정령이.”
“조금 전의 기억이 돌아왔다.”
루안은 짧게 답하고 미르를 똑바로 봤다. “지금 확인할 수 있는 건.”
미르가 잠시 망설이다 입을 열었다.
「카이젤이 그걸 주도했어. 강제 계약 거부. 그리고 나는 거기 섞여 있었고.」
「그 이상은…… 아직 모르겠어.」
목소리 끝이 살짝 떨렸다. 평소의 무례한 말투가 아닌, 무언가를 더듬는 듯한 어조였다.
루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상관없다. 알 만큼 알았어.”
아린이 숨을 들이쉬고 무영자들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도착 직후 입구 봉쇄한다. 오늘 본 건 전부 함구.”
무영자들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통로 끝에서 철문이 보였다. 녹슨 경첩에 새겨진 낡은 봉인 문양. 아린이 문을 두드리는 특정 리듬을 두드리자 안쪽에서 빗장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철문 너머로 낮은 천장의 넓은 공간이 펼쳐졌다. 무영자 은거지였다.
아린이 루안을 돌아봤다. “제일 안쪽 방을 비울 겁니다. 거기서 일단 몸을 추스르십시오.”
「……저기.」
미르가 갑자기 고개를 들었다. 은거지 안쪽 깊은 곳을 향해.
「무슨 소리…… 안 들려?」
루안은 고개를 저었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미르의 머리카락이 다시 옅은 청색으로 물들었다. 발걸음이 허공을 가로질러 은거지 안쪽으로 향했다. 루안이 뒤따랐다. 아린과 무영자들도 움직였다.
안쪽 벽이 눈앞에 다가왔을 때였다.
『파편이여.』
벽에 새겨진 고대 정령 문양이 스스로 빛을 발했다. 낡은 금속성의 목소리가 공기를 울렸다.
『잊혀진 이름의 방으로 오라.』
미르가 손을 뻗었다. 반투명한 손가락이 벽면에 닿는 순간, 돌이 갈라졌다. 수백 년 묵은 먼지가 바닥에 쏟아졌다. 벽이 좌우로 밀려나고 아래로 이어지는 계단이 드러났다.
차갑고 오래된 바람이 얼굴을 스쳤다.
아린이 숨을 삼켰다. “여기…… 이런 게 있었나요.”
무영자들은 아무도 대답하지 못했다. 그들도 몰랐다.
계단 아래에서 빛이 새어나오고 있었다. 미르와 똑같은 색의, 옅은 청백색 빛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