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외의 온도
1화
회의실 유리창 너머로 오후 두 시 햇살이 길게 누워 있었다. 서지오는 태블릿에 띄운 제안서를 점검하며 대기 중이었다. 모멘토의 AI 감성 분석 솔루션을 출판 마케팅에 접목하는 첫 실무 미팅. 편집장이 사활을 걸라던 그 프로젝트였다.
문이 열리고 한다윤이 들어섰다. 베이지 셔츠 소매를 팔꿈치까지 걷어올린 차림이었다.
“안녕하세요, 서지오 편집자님. 모멘토 한다윤입니다.”
인사가 끝나기도 전에 그의 시선이 내 왼쪽 손목으로 번졌다. 시계 페이스에 반사된 빛이 테이블을 스치듯 지나갔다. 이내 시선이 피부 쪽으로 옮겨붙는 감각 — 흉터 자리다.
서지오는 태블릿을 내려놓으며 손목을 안쪽으로 돌렸다. 와이셔츠 소매를 자연스럽게 내려 손등까지 가렸다.
한다윤은 곧바로 시선을 거두고 의자를 당겨 앉았다. 미세한 지연도 없이 태블릿을 꺼내며 “오늘 제안서 기대해도 될까요? 모멘토 쪽에서도 준비한 데이터가 좀 있거든요” 하고 밝게 웃었다. 로즈골드 메쉬 밴드가 그의 손목에서 살짝 빛났다.
서지오는 시선을 인상에 두지 않고 제안서 브리핑을 시작했다.
“감성 태그 기반 도서 추천 알고리즘. 독자 리뷰에서 추출한 감정 키워드를 장르 분류보다 우선 배치하는 방식입니다.”
“그러니까, 이 책을 읽은 사람들이 '슬픔'보다 '쓸쓸함'을 선택했다면, 그 쓸쓸함을 원하는 독자에게 먼저 연결해주는 거군요.”
한다윤의 말에 서지오는 손끝을 멈췄다. 내 기획 의도를 정확히 짚었다. 보통은 '슬픔'에서 멈췄을 텐데.
“네.”
짧게 답하고 넘기려던 그때, 그가 태블릿을 돌리며 물었다.
“근데 서지오 편집자님은 왜 기쁨 카테고리에 '안도'를 포함시켰어요? 이건 보통 긍정 감정으로 분류되는데.”
“안도는 기쁨의 결과물에 가깝다고 생각합니다. 긴장이 풀린 후에 오는 거니까.”
“누군가가 오고 있다는 걸 아는 순간, 같은 맥락일까요.”
한다윤이 고개를 갸웃하며 덧붙였다. 전문적인 톤이었지만, 그 말은 필요 이상으로 구체적이었다. 서지오는 손가락으로 태블릿 모서리를 살짝 눌렀다.
“데이터 관점에서 말씀하시는 건가요.”
“물론이죠. 그런데 편집자님 목소리 톤이 좀—”
“회의 진행하겠습니다.”
서지오가 말을 끊었다. 한다윤은 곧바로 손바닥을 들어 보이며 “알겠습니다. 사과드려요” 하고 의자에 등을 기댔다. 그의 시계 밴드가 팔목 안쪽에 닿아 움직이는 게 보였다.
남은 미팅은 업무 범위 안에서 정리됐다. 감성 태그의 계층 구조를 세분화하고, 테스트를 위한 도서 샘플을 정하는 일. 한다윤은 제안서의 빈틈을 수치로 메우며 구체적인 질문을 이어갔다. 그의 말투는 깔끔했고 전문적이었다.
“이 태그 리스트는 누가 작성했어요?”
계약 조건과 기술 스펙을 넘나들던 중이었다.
“제가 했습니다.”
“역시.”
한다윤은 태블릿을 덮으며 “오늘 미팅은 여기까지가 좋겠네요. 더 하면 과해질 것 같아서” 하고 웃어 보였다. 서지오는 노트북을 닫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수고하셨습니다.”
“잠깐만요.”
그가 의자를 뒤로 밀며 따라 일어섰다.
“커피라도 한잔 어때요? 바로 옆에 괜찮은 곳 알아요.”
“일정이 남아 있습니다.”
“10분이면 돼요.”
“어렵겠네요.”
한다윤은 그래도 표정을 무너뜨리지 않고 “담엔 꼭이요” 하고 어깨를 으쓱였다. 묘한 여운이 남았지만 서지오는 노트북 가방을 챙겨 회의실 문을 열었다.
복도로 나서자 한다윤이 옆에 바짝 붙어 걸었다. 두세 걸음에 한 번씩 팔꿈치가 스칠 듯 말 듯했다.
“아메리카노 좋아하세요? 저도 그래요. 근데 오늘 같은 날은 라떼도 괜찮고—”
“한다윤 대표님.”
서지오는 걸음을 멈추지 않고 복도 끝 엘리베이터 버튼을 향해 손을 뻗었다.
“네에?”
“커피는 사양하겠습니다.”
“그럼 차라도.”
거절해도 말꼬리를 놓지 않는 방식이 마치 기대하는 눈빛으로 쫓아오는 대형견 같았다. 서지오가 엘리베이터 앞에 멈춰 서자 그도 나란히 섰다.
“제가 불편하게 해드렸나 봐요.”
한다윤이 목소리를 한 톤 낮췄다. 손가락으로 자기 관자놀이를 톡톡 두드리며 “아까 회의에서 좀 지나쳤죠? 습관이라” 하고 말끝을 흐렸다.
“괜찮습니다.”
“에이, 표정이 완전 괜찮지 않은 표정인데.”
서지오는 입술을 닫았다. 무심히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는 손끝이 조금 굳어 있었다.
한다윤이 문득 몸을 돌리며 그 특유의 해맑은 미소를 지었다. 눈이 반달 모양으로 접히고 왼쪽 송곳니가 살짝 드러났다.
“서지오 편집자님, 나쁜 사람 아니에요. 걱정 마요.”
그 말에 서지오는 눈을 깜빡였다. '걱정 마요'라는 표현이 인사치레 이상으로 부드러웠기 때문이다. 그때— 한다윤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빠졌다.
“편집자님이 쓴 글 같은 느낌이 들어요. 만난 적 없는데.”
숨이 한 템포 멎었다. 서지오는 손가락 끝의 힘이 빠져 노트북 가방 끈이 어깨에서 살짝 밀리는 것도 몰랐다.
무슨 뜻으로 한 말인가. 그냥 던진 걸까, 아니면.
서지오의 표정이 굳어지는 찰나, 한다윤은 예의 그 해맑은 미소를 복원하며 뒷걸음쳤다.
“분위기 왜 이렇게 됐지~ 제가 또 말을 이상하게 했네요!”
엘리베이터가 도착했다. 서지오는 안으로 들어서며 돌아섰다. 문이 닫히기 직전, 한다윤이 복도에서 손을 흔들고 있었다. 온 얼굴으로 웃으면서.
문이 닫혔다. 단독 공간이 되자 서지오는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거울에 비친 자신의 왼쪽 손목을 내려다보았다. 시계 아래로 흉터가 반쯤 가려져 있었다.
'만난 적 없는데.'
한다윤의 그 말이 엘리베이터 진동보다 오래 귀에 남았다. 서지오는 입술을 살짝 깨물고는, 닫힌 문을 향해 고개를 들었다.
그 말의 온도를 재보려는 듯이.
현관 도어락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손에서 가방을 내려놓았다. 거실 불을 켜지 않은 채 소파에 앉아 스마트폰을 켰다. 화면 빛이 어둠 속에서 얼굴을 비춘다.
모먼트 앱을 열자 타임라인에 낮의 긴장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모멘토와의 첫 미팅. 한다윤이라는 남자의 집요할 만큼 밝은 눈빛.
익명 계정 '빈_서가'로 전환했다. 프로필 사진은 빈 책상 위 커피잔 한 개. 팔로워는 열두 명.
오늘 밤을 위한 이미지를 고르는 손끝이 느렸다. 창밖의 가로등 불빛이 비스듬히 깔린 골목길 사진. 아무도 걷지 않는 좁은 길이었다.
타이핑을 시작했다. 높은 벽과 좁은 문 사이에서, 온기만은 놓치지 않으려 애쓴다.
한다윤이 미팅 내내 보여준 반응들이 떠올랐다. 기획안을 설명할 때 고개를 갸웃하며 메모하던 모습. 끝나고 커피를 건네며 “편집자님은 자기 얘기를 잘 안 하시네요”라고 웃던 얼굴.
적당히 무시하면 될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도 손끝은 이미 그가 커피잔을 건넬 때 스친 손가락의 온도를 더듬고 있었다.
업로드 버튼을 누르기 직전 멈칫했다. 이런 글을 올리는 게 낯간지러워서가 아니다. 누군가 읽는다는 사실을 의식하기 시작한 순간부터 문장은 더 이상 완전히 내 것이 아니었다.
그래도 올렸다. 완료 알림이 화면 상단에 떴다. 밤 9시 3분.
밤 10시, 모멘토 사무실.
한다윤은 모니터 두 개가 켜진 책상 앞에 앉아 있었다. 사무실은 텅 비었고 복도의 센서등만 깜빡였다.
모먼트 푸시 알림이 스마트폰 상단에 떴다. 빈_서가님이 새 포스트를 올렸습니다.
그는 의자를 뒤로 젖히고 스마트폰을 집었다. 골목길 사진 위에 얹힌 문장을 천천히 읽어 내려갔다. 벽은 높고 문은 좁지만, 온기만은 놓치지 않으려 애쓴다.
캡처 버튼을 누르는 손가락에 망설임이 없었다. 갤러리에 저장된 '빈_서가' 폴더 안에는 업로드 날짜별로 정리된 스크린샷이 수십 장 쌓여 있었다. 그는 늘 그랬다. 그녀의 시가 올라올 때마다 저장하고, 단어 선택의 변화를 기록하고, 계절마다 달라지는 감정선을 표로 만들었다.
오늘의 문장은 언제나보다 직설적이었다. '온기만은 놓치지 않으려 애쓴다'라는 마지막 행을 손가락으로 한 번 더 톡 건드렸다.
“아직도 넌 네가 쓴 글자를 몰라서 다행이야.”
목소리는 낮고 온도가 없었다. 그녀가 모먼트에서 익명으로 흘리는 시의 행간을 사무실 밤마다 읽어온 시간이 두껍게 쌓여 있었다.
메인 모니터로 시선을 옮겼다. AI 감성 분석 대시보드가 떠 있었다. 방금 업로드된 시의 텍스트가 이미 입력되어 있었고, 상단에는 '오늘의 따뜻함 지수'라 적힌 그래프가 초록색 선으로 올라가고 있었다. 지난 세 달간 가장 높은 수치였다.
한다윤은 미소 지었다. 낮에 그녀가 기획안을 설명할 때, 목소리에 숨은 긴장을 읽어내는 순간과 똑같은 느낌이었다.
그는 대시보드를 종료하고 전화 앱을 열었다. 연락처에서 '서지오 편집자'를 찾는 데는 1초도 걸리지 않았다. 발신 버튼을 누르며 의자에서 일어나 창가로 걸어갔다.
밤 10시 15분. 시그널음이 길게 이어졌다.
서지오의 집, 소파에 기대어 읽던 책을 덮으려는 순간 스마트폰이 울렸다. 화면에 뜬 이름을 확인하고 손이 멈칫했다. '한다윤 대표'. 낮에 교환한 연락처가 이 시간에 빛나고 있었다.
한숨을 삼키고 통화 버튼을 눌렀다.
“네, 서지오입니다.”
“아, 편집자님!” 한다윤의 목소리는 수화기 너머에서도 과일 향이 날 것처럼 밝았다. “이 시간에 전화해서 죄송해요. 아직 안 주무시는 것 같아서.”
“곧 자려던 참이었어요.”
“아, 그럼 진짜 딱 3분만요.” 그가 웃었다. “아까 회의 때 말한 감성 태그 분류표 있잖아요. 그거 파일명이 뭐였는지 못 적어서.”
서지오는 눈썹을 좁혔다. “파일 공유 드라이브에 이미 올려뒀습니다. 오후 4시에 공유 알림도 발송했고요.”
“어…… 진짜요? 확인 안 했나 봐요.” 한다윤의 웃음이 한 박자 느리게 이어졌다. “그럼 이왕 늦은 김에 하나만 더요.”
“말씀하세요.”
“낮에 커피 마시면서 제가 했던 말, 기억나세요?”
서지오의 손가락이 책 모서리를 꾹 눌렀다. 낮의 탕비실. 그가 커피잔을 건네며 했던 말이 떠올랐다. 편집자님 손 끝, 많이 차가우시네요. 아무 의미 없는 한마디였을 텐데.
“커피가 맛있었다는 말씀?”
“아니, 그건 아니고…….” 한다윤의 목소리가 살짝 가라앉았다. “편집자님, 혹시 요즘 뭔가 쓰고 계시는 거 있어요?”
서지오의 숨이 한 번 멎었다. “그게 무슨 뜻이죠.”
“아, 그냥요. 말투에서 글 쓰는 사람 특유의 리듬이 느껴져서.” 곧바로 밝은 톤으로 돌아왔다. “편집자도 원고 쓰기도 하잖아요. 어쩌면 블로그 같은 걸 수도 있고.”
“업무용 블로그를 관리하긴 합니다.” 서지오의 대답은 칼같이 건조했다. “출판사 홍보 목적이에요. 다른 특별한 글은 쓰지 않아요.”
“그렇군요.” 한다윤이 짧게 인정했다. “그럼 괜한 얘기였네요. 늦은 밤에 방해했어요, 편집자님.”
“파일 확인하시고 내일 회의 준비 부탁드려요.”
“네. 잘 주무세요.” 그의 마지막 인사에는 아까보다 깊이 있는 여운이 한 겹 덧대어 있었다.
통화가 종료됐다.
서지오는 스마트폰을 손에 쥔 채로 몇 초간 움직이지 않았다. 그가 물었다. 뭔가 쓰고 계시냐고. 단순한 잡담일까. 아니면 낮에 내가 내보인 어떤 빈틈을 물고 늘어지는 걸까.
모먼트 앱으로 손이 갔다. 방금 올린 시에 붙은 알림이 세 개 쌓여 있었다. 좋아요 두 개, 댓글 하나.
조회 기록 탭을 열었다. 시를 본 계정 목록이 시간순으로 떴다. 팔로워들 사이로 익숙한 아이디들이 스크롤됐다. 달빛_문장가, 책읽는밤, *봄의——”
손가락이 멈췄다.
목록 중간에 낯선 아이디가 박혀 있었다. momento_user.
프로필 사진은 없었다. 게시물도 없었다. 팔로워도 팔로잉도 0. 계정 생성일은 표시되지 않았다. 오직 그녀의 시 하나를 읽었다는 기록만 남아 있었다.
'모멘토'. 오늘 낮에 만난 스타트업 이름이었다.
가슴께가 차갑게 조여들었다. 우연일 리 없다. 누군가 내 익명 계정을 알고 있다. 아니, 적어도 이 시가 내 것임을 알고 찾아왔다.
스마트폰을 엎어 화면을 가렸다. 거실의 어둠이 갑자기 낯선 시선으로 채워진 느낌이었다. 벽은 높고 문은 좁지만이라고 방금 내가 써올린 문장이, 이미 누군가의 손을 거쳐 읽히고 있었다.
불길한 기시감이 목덜미를 따라 올라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