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verStory

예외의 온도

2화

잠에서 깬 직후에도 그 계정은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momento_user. 서지오는 세수를 하면서 거울 속 자기 얼굴을 봤다.

눈 밑이 얇게 부어 있었다. 밤새 잠을 설친 탓이다. 수건으로 얼굴을 누르며 생각을 정리했다.

두 가지 가능성뿐이었다. 누군가 우연히 내 시를 읽었거나, 의도적으로 나를 찾아왔거나.

출근 준비를 하면서 모먼트 앱을 다시 열었다. 그 계정은 여전히 아무 흔적도 없었다. 게시물도, 프로필도, 팔로워도 0. 그런데 어째서 내 시를 읽었을까. 그리고 왜 하필 '모멘토'라는 이름으로.

손목시계를 채우면서 한 가지를 더 떠올렸다. 어젯밤 한다윤의 전화. 뭔가 쓰고 계시는 거 있어요? 단순한 잡담이었을까. 아니면 이미 알고 물은 걸까.

서지오는 화장대 앞에 잠시 멈춰 섰다가, 이내 가방을 집어 들었다. 일단 오늘 회의부터다. 모멘토와의 협업 첫 주, 감성 태그 초안을 발표해야 한다. 일이 우선이었다.

대회의실은 이미 프레젠테이션 준비가 끝난 상태였다. 출판사 편집팀 세 명과 모멘토 측 실무진 두 명이 자리 잡았고, 한다윤은 긴 탁자 건너편에서 태블릿을 펼쳐 두었다. 미팅 시작 5분 전이었지만 그는 벌써 무언가를 메모 중이었다. 자리에 앉은 서지오와 눈이 마주치자 한다윤이 가볍게 손을 들었다.

“좋은 아침이에요, 편집자님. 어젯밤엔 주무셨어요?”

평소와 다름없는 밝은 톤이었다. 서지오는 짧게 고개만 끄덕이고 노트북을 열었다. 어젯밤 모먼트 계정 이야기를 꺼낼 기색은 없었다.

애초에 그가 그 계정일 리 없다고, 합리적인 부분은 이미 결론을 내렸다. 모멘토는 기술 회사고 한다윤은 대표다. 굳이 익명 계정으로 내 시를 읽을 이유가 없다.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서지오는 화면을 회의실 모니터로 전환하며 프레젠테이션을 열었다. 감성 태그 1차 분류안이었다. 도서 추천 시스템에 적용할 다섯 가지 감정 축을 제안하고, 각 축의 하위 태그를 계층화한 표였다.

“기존의 장르 기반 추천에서 벗어나 독자의 감정 반응을 기준으로 분류하는 방식입니다. 예를 들어 슬픔이라는 태그는 작품 전체의 정서가 아니라 특정 지점의 밀도로 측정합니다. 같은 결말이라도 얼마나 입체적인 슬픔을 쌓았는지를 구분하는 거죠.”

편집장이 고개를 끄덕이며 무언가 메모를 적었다. 모멘토의 데이터 엔지니어가 태블릿을 들고 분류표를 확대해 살폈다. 한다윤은 팔짱을 낀 채 화면을 보고 있었다. 그의 눈이 표의 특정 지점에 멈췄다.

“여기, ‘따뜻함’이요.”

그가 펜을 들어 화면을 가리켰다.

“온도 기반 분류는 감성 AI에서 꽤 까다로운 영역인데, 편집자님은 이걸 밀도와 거리로 나누셨네요.”

서지오가 태블릿을 내려다봤다. 그가 짚은 건 따뜻함 하위 태그 중 ‘근거리 온기’와 ‘원거리 복사열’이었다. 내부 검토를 할 때도 편집팀에서는 누구도 그 항목을 특별히 언급하지 않았다.

“기술적 분류라기보다 독서 경험에 가까운 구분이죠.” 시선을 화면에 고정한 채 답했다. “어떤 텍스트는 가까이서 손을 녹이는 느낌이고, 어떤 텍스트는 먼 곳에서 천천히 번지는 열에 가깝습니다.”

“맞아요. 그리고 이건 편집자님이 아니면 못 짚는 구분이에요.”

한다윤의 목소리가 한 톤 낮아졌다. 보고서를 읽는 듯한 무게가 실렸다.

“일반적인 자연어 처리에서는 ‘따뜻함=긍정’으로 이진 분류하는 게 보통이거든요. 근데 이 표는 긍정-부정 축을 따로 두고 온도를 독립 변수로 처리했어요. 그러니까 어떤 텍스트는 차가운데 긍정일 수 있고, 또 어떤 건 뜨거운데 부정일 수 있다는 거죠.”

정확했다. 서지오가 이 분류를 설계할 때 가장 신경 쓴 부분이었다. 손가락이 노트북 터치패드 위에서 미세하게 굳었다.

고마워해야 할 순간이었다. 자신의 의도를 이렇게 빨리 읽어주는 협력자는 흔치 않았다. 그런데, 불편했다.

“……유효한 지적이네요.”

“지적이라기보다 칭찬인데.” 그가 작게 웃었다. “이 리스트 보면서 시집 한 권 읽는 기분이었어요.”

시라는 단어가 날아와 서지오의 미간에 꽂혔다. 그녀는 얼굴을 들었다. 한다윤은 태블릿 화면으로 시선을 돌린 채였다. 그가 말을 이었다.

“수치로 환산 안 되는 감정을 데이터 구조로 옮기는 작업 자체가 편집이잖아요. 그걸 이만큼 정제한 거 보면, 편집자님 진짜 언어 감각이……”

“보완 의견 있으시면 이후에 메일로 주세요.”

서지오가 그의 말을 잘랐다. 목소리는 평소보다 반음 높았다. 회의실이 잠깐 조용해졌다. 편집장이 눈을 깜빡였고, 맞은편에 앉은 하급 조제사 한 명이 물컵을 만지작거리다 멈췄다.

한다윤은 1초 정도 그녀를 바라봤다. 해맑은 미소가 걷히고, 대신 조용한 인정이 스친 표정이었다.

“알겠습니다.”

순순히 물러났다. 그 순응이 오히려 서지오의 경계를 한 겹 더 올렸다. 보통 이런 상대는 더 붙거나 삐치거나 둘 중 하나였다. 그는 둘 다 아니었다. 그저 물러날 때가 언제인지 정확히 아는 사람처럼 보였다.

회의 자체는 이후 큰 마찰 없이 진행됐다. 감성 태그 분류의 범위를 협의하고, 파일럿 테스트에 사용할 도서 목록을 추렸다. 한다윤은 더 이상 개인적인 뉘앙스의 말을 꺼내지 않았다. 대신 구체적인 수치와 구현 가능성에 대한 조언에 집중했다. 그 태도는 지나칠 정도로 전문적이었다.

회의가 끝나고 참석자들이 하나둘 자리를 떴다. 서지오는 노트북을 접지 않고 자리에 남아 있었다. 화면 오른쪽 아래에 공유 드라이브 알림이 하나 떠 있었다.

파일명은 ‘감성태그온도축보완제안_v1’. 업로드 3분 전이었다. 미팅 직후 바로 올린 모양이었다.

서지오는 알림을 클릭하지 않고 노트북을 닫았다. 손끝에 스친 떨림을 무시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탕비실은 비어 있었다. 커피머신이 낮은 소리로 대기 중이었다. 서지오는 캡슐을 하나 꽂고 내려오는 에스프레소를 바라봤다.

진한 갈색 액체가 종이컵 바닥을 때리는 소리가 규칙적으로 반복됐다. 시집 한 권 읽는 기분이었어요. 그 한마디가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칭찬이었다면 그냥 듣고 넘겼을 것이다.

전문가로서 던질 수 있는 멘트였다면 그 또한 넘겼을 것이다. 하지만 한다윤의 말투에는, 단어를 선택하는 방식에는 다른 무언가가 묻어 있었다. 그가 알고 있다는 확신 같은 것.

뜨거운 물이 멈췄다.

“여기 계셨네요.”

문간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손이 멈칫했다. 종이컵을 든 손이 흔들리며 뜨거운 표면이 손가락 옆면을 살짝 스쳤다. 서지오는 천천히 컵을 내려놓고 돌아섰다.

한다윤이 탕비실 입구에 서 있었다. 미팅 때 입었던 재킷은 벗고 소매를 팔꿈치까지 접어 올린 상태였다. 그의 팔뚝 근육이 움직이는 게 눈에 들어왔다.

“커피예요? 좋네요, 저도 하나.”

자연스럽게 다가와 머신 옆에 서서 캡슐을 고르기 시작했다. 사이드 바이 사이드로 선 채 둘 사이의 거리는 반팔 하나 정도였다. 서지오는 반 걸음 물러서지 않았다. 대신 컵을 들고 한 모금 마셨다.

“드릴 말씀이 더 있으세요.”

질문형이 아니라 평서문이었다.

“아, 네.” 한다윤이 캡슐을 꽂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까 회의 때 그 리스트요. 진짜 인상적이었어요. 제가 감성 태그 관련해서 여러 출판사 자료 봤는데, 온도를 다섯 개 축에서 독립 변수로 뺀 건 편집자님이 처음이에요. 보통은 긍정-부정 하위 카테고리로 처리하거든요. 편집자님은 감정의 물리적 거리를 표현하려는 것 같았어요.”

“데이터 구조로서 말씀하시는 거죠.”

“데이터 구조로도 그렇고, 문장으로도요.”

한다윤이 몸을 돌렸다. 커피머신이 추출을 시작했지만 그의 시선은 서지오에게 고정돼 있었다. 그 연한 호박색 눈이 빛을 받아 금색에 가깝게 빛났다.

“특히 ‘예외의 온도’요. 다른 태그들은 전부 다 감정 명사 아니면 형용사에서 딴 단어인데, 그거 하나만 ‘예외’라는 조건을 붙였잖아요. 읽으면서 계속 생각했어요. 이거 시 같다고.”

에스프레소가 떨어지는 소리가 배경으로 깔렸다. 서지오는 종이컵을 내리누르는 손가락에 힘이 들어가는 걸 느꼈다.

“……그게 무슨 뜻이죠.” 목소리가 바짝 말라 있었다. 스스로 들어도 방어적으로 들렸다.

한다윤이 어깨를 으쓱였다. 단순한 제스처였다. 그런데 그 올림과 내림에, 모든 답변을 일부러 비껴가는 느낌이 담겨 있었다.

“그냥요. 표현이 예뻐서.”

머신이 마지막 추출음을 내고 멈췄다. 한다윤이 자신의 잔을 집어 들었다.

“그럼 전 이만.”

그는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손가락 두 개를 가볍게 들어 작별 인사를 대신했다. 그리고 복도로 걸어 나갔다. 발소리가 복도 끝에서 사라질 때까지, 서지오는 움직이지 않았다.

예외의 온도. 어젯밤 모먼트에 올린 시에 쓴 표현이었다. 두 번째 연, 셋째 줄. 회의 자료에는 그 단어가 없었다. 태그 리스트의 항목명을 보여준 것뿐, 각 항목의 뉘앙스를 설명하는 별도 텍스트는 배포하지 않았다. 그런데 한다윤은 정확히 그 표현을 입에 올렸다.

커피잔 바닥에 갈색 원액이 얇게 고여 있었다. 서지오는 손가락이 저릿하게 굳는 걸 천천히 들이마신 숨으로 눌렀다. 확신이 들었다.

우연이 아니다. 그는 알고 있다. momento_user. 그 계정, 그 사람일 가능성을 더 이상 합리적으로 지울 수 없었다.

탕비실의 형광등이 낮은 진동음과 함께 깜빡였다. 서지오는 거기 잠시 더 서 있었다.

사흘 뒤 오후 3시, 편집부 사무실은 조용했다.

서지오는 노트북 앞에서 원고 교정을 보고 있었다. 화면 속 문장을 세 번째 훑을 때, 메일 알림이 팝업됐다. 발신인은 편집장.

제목: [모먼트×출판사 AI 감성 큐레이션] 사진작가 선정 완료

손가락이 터치패드 위에서 멈췄다. 클릭. 메일 본문이 열렸다.

'본 프로젝트의 화보 촬영을 맡을 사진작가로 이재윤 스튜디오의 이재윤 작가님이 최종 확정되었습니다. 첫 오리엔테이션은 금일 오후 7시, 3층 대회의실에서 진행될 예정입니다.'

의자 등받이가 등 뒤에서 밀려난 것 같았다. 천장이 한순간 멀어졌다가 돌아왔다. 노트북 화면의 글자들은 그대로였고, 읽을 수 있었다. 다시 읽었다. 이재윤 스튜디오의 이재윤 작가님.

지문이 키보드 위에서 얼어붙었다. 손끝이 차가웠다.

그가 사진작가라고? 그가 이 프로젝트에? 여기에?

서지오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무릎이 책상 모서리에 부딪혔지만 통증은 늦게 느껴졌다. 복도를 가로질러 화장실로 들어갔다.

빈 세면대 앞에 서서 수도꼭지를 돌렸다. 차가운 물이 손등을 때렸다. 양손을 모아 물을 받고, 손목까지 적셨다.

비누칠을 두 번 했다. 손가락 사이사이를 문지르고, 손톱 밑을 긁어내고, 다시 헹궜다. 물은 계속 흘렀다.

거울을 보지 않았다. 심호흡을 한 번. 둘. 셋.

물을 잠갔다. 종이 타월로 손을 닦으며 손끝의 떨림을 눌렀다. 타월을 구겨 휴지통에 넣었다.

괜찮다. 업무다. 프로젝트 하나일 뿐이다.

편집장실 문 앞에 섰다. 노크하고 들어갔다.

“편집장님, 잠시 괜찮으실까요.”

책상 너머에서 편집장이 돋구 너머로 올려다봤다. “아, 서 주임. 사진작가 확정 메일 봤어요?”

“네. 그건데, 오후에 외근 일정이 생겨서 오리엔테이션에—”

“외근이요? 어디?”

서지오는 한 박자 늦게 입을 열었다. “신진 작가 원고 검토차 종로 쪽에 다녀와야 합니다. 오래 걸리진 않을 텐데, 혹시 회의 시작에 늦더라도——”

“거절합니다.” 편집장이 돋구를 내렸다. “오늘 오리엔테이션에 편집팀 전원 필참이에요. 이 프로젝트 우리 쪽에서 가장 공들인 거, 서 주임이 더 잘 알잖아요.”

“그렇지만 급한——”

“급한 거면 내일 오전에 가도 충분할 거고.” 편집장의 시선이 다시 서류 위로 떨어졌다. “7시, 3층 대회의실. 늦지 말아요.”

서지오는 1초 정도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알겠습니다.”

제자리로 돌아와 의자에 앉았다. 노트북 화면은 아까 그 메일이 그대로 떠 있었다. 닫기 버튼을 눌렀다.

바탕화면이 드러났다. 평범한 풍경 사진이었다. 아무 의미 없는, 그저 기본으로 설정된 이미지.

그녀는 팔꿈치를 책상에 대고 이마를 손바닥으로 받쳤다. 눈을 감지도, 뜨지도 않은 채 숨을 들이쉬었다. 일이다. 일.

저녁 6시 50분. 3층 대회의실은 형광등 불빛이 밝았다.

긴 테이블 양쪽으로 편집팀 네 명과 모멘토 측 세 명이 자리 잡았다. 한다윤은 서지오의 대각선 맞은편에 앉아 있었다. 그는 태블릿을 켜고 회의 아젠다를 확인하며 이따금 문 쪽을 올려다봤다. 시계는 로즈골드 메쉬 밴드. 흰 셔츠 소매가 살짝 접혀 있었다.

서지오는 노트북 앞에서 회의록 템플릿을 열어뒀다. 파일명을 입력하고, 참석자 란에 이름을 채워 넣었다. 한다윤(모멘토 대표). 타이핑이 한 글자씩 느렸다. 엔터 키를 누를 때마다 손가락에 미세한 지연이 붙었다.

옆자리의 후배 편집자가 몸을 기울였다. “선배, 오늘 긴장한 것 같아요. 손이 좀 떨리는 거——”

“괜찮아요.” 서지오는 화면에서 눈을 떼지 않고 대답했다. “저혈압이라 가끔 그래요.”

후배가 무슨 말을 덧붙이려는 순간, 복도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느리고, 리듬이 있는 걸음이었다.

회의실 문이 열렸다.

문고리를 쥔 손의 검지에 은반지가 끼워져 있었다. 어깨까지 내려오는 흑발, 헐렁한 검은 셔츠, 슬림한 검은 팬츠. 카메라 가방이 왼쪽 어깨에 걸려 있었다.

이재윤이었다.

그가 방 안을 천천히 훑었다. 편집장을 향해 살짝 고개를 숙이고, 모멘토 팀을 향해 인사했다. 그리고 시선이 서지오에게 닿았다. 멈추지 않았다.

“오랜만이야, 지오야.”

부드럽고 여유로운 톤이었다. 미소가 입가에 걸려 있었고, 그 미소는 회의실 전체를 향한 것이 아니라 오직 한 사람만을 겨냥하고 있었다.

서지오의 숨이 멎었다. 그녀의 오른손이 의자 손잡이를 움켜쥐었다. 손가락 마디가 하얗게 질렸다. 노트북 화면의 커서가 빈 칸에서 깜빡였다.

한다윤은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다만 그의 시선이 서지오의 옆모습으로 정확히 이동했다. 창백해진 관자놀이, 경직된 어깨, 손잡이를 쥔 손의 힘줄. 한다윤의 표정은 웃고 있을 때와 전혀 다른, 서늘하게 가라앉은 것이었다.

회의실 안이 한순간 술렁였다. 편집팀 막내가 누군가에게 속삭였고, 모멘토의 실무 담당자가 태블릿을 내려놓았다.

이재윤은 그 침묵과 술렁임을 모두 즐기는 듯한 걸음으로 빈 자리로 향했다. 서지오의 맞은편이었다.

예외의 온도2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