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verStory

예외의 온도

3화

이재윤이 걸어왔다. 네 걸음. 느리고 여유로운 보폭이 회의실의 침묵을 가로질렀다. 서지오의 맞은편 자리가 아니라, 그녀의 오른쪽 바로 옆자리 의자 등받이에 손을 얹었다.

“여기, 앉아도 되지?”

질문은 편집장을 향했지만, 시선은 서지오의 옆얼굴에 고정되어 있었다. 편집장이 “아, 네. 그렇게 하시죠” 하고 대답할 때쯤 이재윤은 이미 의자를 빼고 있었다.

카메라 가방이 탁자 옆 바닥에 내려졌다. 지퍼가 반쯤 열려 있고, 안에서 렌즈통이 살짝 보였다. 이재윤이 앉으면서 서지오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그녀의 왼쪽 손목 쪽으로 시선이 닿았다.

서지오는 손목을 뒤집어 탁자 아래로 내렸다. 무의식적이었다. 손목 안쪽이 허벅지에 닿을 때까지 손등을 안으로 감쌌다.

이재윤이 낮게 웃었다.

“시계 안 차고 다니는 건 여전하네. 예전에는 그거 때문에 약속에 늦고 그랬잖아.”

탁자 위로 편집팀 막내의 볼펜이 굴러떨어졌다. 누군가 줍는 소리가 났다. 서지오는 듣지 못했다. 귀에서 미세한 고주파가 울리고 있었다. 이재윤의 목소리가 익숙한 주파수로 그 고주파를 뚫고 들어왔다.

“손목시계 알레르기랄까. 가죽 밴드도 안 되고, 메탈 밴드도 안 되고. 유일하게 멀쩡했던 게——”

“그 얘기는 지금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서지오의 목소리가 나왔다. 평소보다 반음 높은, 철사처럼 팽팽한 톤이었다. 완전한 존대였다.

이재윤의 미소가 한 겹 두꺼워졌다. 그는 고개를 살짝 기울이고서 서지오를 바라보았다. 그 시선이 그녀의 손목에서 팔뚝, 어깨, 그리고 목까지 천천히 올라갔다. 마치 렌즈로 피사체의 초점을 맞추듯이.

“그래, 일 이야기나 하자고 온 자리니까.”

의자에 등을 기대며 그가 팔짱을 꼈다. 오른손 검지의 은반지가 회의실 형광등을 받아 반짝였다.

“그런데 우리, 2년 만이잖아. 편집팀 분들한테 소개는 내가 알아서 할게. 나, 이재윤. 이번 화보 촬영 맡은 사진작가. 그리고……”

그가 서지오에게로 상체를 틀었다.

“지오하고는 대학 때부터 알던 사이. 맞지?”

서지오의 손가락이 노트북 키보드 위에서 멈췄다. 화면 속 커서가 회의록 빈 칸에서 아홉 번째로 깜빡였다. 그녀의 시야 가장자리에서 색이 빠져나가고 있었다. 회의실 벽의 베이지, 탁자의 마호가니, 맞은편 유리창 너머의 저녁 하늘. 모든 색이 수채화 물감을 빨아들인 종이처럼 천천히 바래고 있었다.

맞은편 대각선 자리에서 의자가 밀리는 소리가 났다.

한다윤이 일어났다. 평소보다 느리게. 그가 회의실을 가로질러 서지오의 왼편으로 걸어왔다. 발소리가 탁자 옆에서 멈췄다. 이재윤과 서지오 사이를 절반쯤 가리는 각도였다.

“편집자님.”

서지오는 고개를 들지 못했다. 자신의 손가락 마디가 하얘지는 것만 보고 있었다. 한다윤이 그녀의 시야 아래쪽으로 들어왔다. 무릎 높이까지 몸을 낮춘 것이다.

“제가 개입해도 될까요?”

밝고 애교 섞인 말투는 없었다. 의성어도 없었다. 대신 짧고 건조한 단문이었다. 회의실 전체가 들을 수 있는, 그러나 오직 한 사람에게만 묻는 목소리였다. 무게가 실린 ‘다’ 체의 종결어미가 탁자 아래로 낮게 깔렸다.

서지오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한다윤의 눈은 평소처럼 웃고 있지 않았다. 연한 호박색 동공이 조용히 그녀만을 담고 있었다.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의 숨이 한 번, 길게 떨렸다.

턱을 끄덕였다. 한 번. 아주 작게. 손목을 감싼 오른손에 힘이 풀리지 않은 채였다.

한다윤이 일어섰다. 그의 시선이 이재윤에게로 옮겨갔다. 회의실 안의 온도가 한순간에 달라졌다. 편집팀 막내가 들이켰던 숨을 삼켰다.

이재윤은 여전히 미소를 입가에 걸고 있었다. 두 남자의 눈이 공중에서 만났다. 누구도 먼저 피하지 않았다.

가로등 불빛이 젖은 보도블록을 핥고 지나갔다. 25분 후, 서지오는 카페 유리창 너머로 그 불빛을 다시 보고 있었다. 에스프레소를 내리는 기계음이 낯설게 귀를 때렸고, 손목을 쥐었던 그의 체온이 아직 피부 위에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회의실의 공기가 한순간에 굳었다. 이재윤의 발걸음이 멈췄다. 서지오의 맞은편 의자까지 딱 세 걸음.

그 거리를 한다윤이 막아섰다. 언제 자리에서 일어났는지, 그의 체격이 이재윤과 서지오 사이를 완전히 가로막았다.

“자리 옮기시죠.”

한다윤의 목소리는 더 이상 대형견 같지 않았다. 낮고, 건조했으며, 한 글자 한 글자가 정확히 박혔다.

이재윤의 미소가 얇아졌다. “저는 이분과——”

“들으셨어요.”

한다윤이 한 걸음 더 들여놓았다. 이재윤의 어깨가 살짝 뒤로 밀렸다.

“아, 그래요.” 이재윤은 미소를 완전히 거두지 않았다. 다만 눈가의 근육이 미세하게 경직됐다. “요즘 서지오 씨 곁에는 이런 식으로——”

서지오의 의자가 밀리는 소리가 났다. 그녀가 일어난 것이다. 오른손은 여전히 손잡이를 쥔 채였다.

“데리고 나갈게요.”

한다윤이 뒤를 돌아보지 않고 말했다. 서지오를 향한 말이었다. 그의 어깨 너머로, 이재윤의 눈빛이 서지오에게 닿으려는 순간, 한다윤이 그 시선을 다시 차단했다. 몸을 살짝 비튼 각도가 정확히 이재윤의 시야에서 서지오를 덮었다.

서지오의 입술이 움직였다. “……네.”

그 한 글자에 한다윤이 움직였다. 노트북을 접을 시간도 주지 않고 그의 손이 서지오의 가방 끈을 집었다. 어깨에 걸쳐진 가방을 자신의 손으로 받아든 동작은 사무적이면서도 정확했다.

편집장이 자리에서 반쯤 일어났다. “잠시만요, 지금 오리엔테이션이——”

“죄송합니다. 편집자님 건강이 좋지 않으셔서요.”

한다윤의 존댓말은 이미 문밖을 향해 있었다. 모멘토 실무 담당자가 멍하니 태블릿을 든 채로 그 뒷모습을 바라봤다.

이재윤이 팔짱을 풀었다. “다음에 뵙죠, 지오야.”

서지오의 걸음이 한 박자 굳었다. 한다윤이 돌아보지 않고 낮게 말했다.

“그냥 걸으세요.”

복도로 나왔다. 형광등 불빛 아래서 서지오의 얼굴은 더 창백했다. 그녀는 자신의 손목을 반대편 손으로 감싸 쥐고 있었다. 손가락으로 감추기엔 손끝 떨림이 컸다.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는 한다윤의 손등에 핏줄이 섰다. “괜찮아요.”

“……괜찮지 않아요.”

서지오의 대답은 반사적이었다. 말하고 나서야 자신의 목소리가 얼마나 갈라졌는지 깨달았다. 그녀가 입술을 깨물었다.

한다윤이 그녀를 똑바로 바라봤다. “아까 전화로 동의하셨어요. 제가 개입하는 거.”

“기억해요.”

“아직 유효합니까.”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서지오가 먼저 들어갔다. 거울 벽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보지 않으려고 시선을 바닥에 뒀다.

“……유효해요.”

한다윤이 그 뒤를 따라 탔다. 문이 닫혔다.

그의 손가락이 1층 버튼을 눌렀다. 로비에 도착할 때까지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건물 밖으로 나오자 저녁 공기가 제법 쌀쌀했다. 서지오가 자신의 팔을 감싸 쥐었다. 코트를 가져오지 않았다는 사실을 현관 앞에서야 깨달았다.

“저기 있는 카페로 가죠. 바로 앞이에요.”

한다윤이 턱짓으로 가리킨 곳은 건물 정면에서 횡단보도 하나를 건너면 닿는 작은 로스터리 카페였다. 서지오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횡단보도 신호가 바뀌길 기다리는 동안, 한다윤이 가방을 건넸다. 서지오가 손을 내밀자 손잡이를 잡는 대신 가방의 무게 중심이 넘어오도록 천천히 놓았다. 손이 닿지 않게.

“필요하면 말해요. 내가 주문하고 올 테니까.”

서지오가 가방 끈을 움켜쥐었다. 가죽이 손바닥에 파고들었다. “……커피만 주문해 주세요.”

“어떤—— 아, 알겠어요.”

한다윤이 카페 문을 밀었다. 안쪽으로 들어간 그의 뒷모습을 유리 너머로 보며 서지오는 한 번 깊게 숨을 들이켰다. 폐 속까지 차가운 공기가 밀려왔다. 눈을 감고 셋까지 세었다. 눈을 떴을 때 다리는 덜 떨렸다.

카페 안은 손님이 거의 없었다. 구석 자리에 앉은 커플 한 쌍과, 노트북을 펼쳐둔 프리랜서로 보이는 사람 하나.

한다윤이 계산대 앞에 서 있었다. 바리스타에게 뭔가 주문하며 손가락 두 개로 수량과 사이즈를 표시하고 있었다. 한 번 더 덧붙이듯 말을 보탰다. 따뜻한 걸로, 진하게.

서지오는 창가 자리에 앉았다. 의자 등받이가 단단했다. 손가락으로 테이블 가장자리를 더듬었다. 나무 결이 거칠었다. 이 감촉이 현실이라고, 스스로에게 확인시키듯 두 번 문질렀다.

한다윤이 쟁반을 들고 왔다. 머그잔 두 개에서 김이 올랐다. 한 잔은 그녀 앞에, 다른 한 잔은 자신의 앞에 놓았다. 그리고 의자를 조금 뒤로 빼고 앉았다. 팔을 뻗어도 닿지 않을 거리였다.

서지오가 머그잔을 감싸쥐었다. 손바닥으로 열이 스며들었다. 그녀의 눈가가 붉어졌다.

“이런 적이 처음이라서.”

서지오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한다윤이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가 말을 이었다.

“누군가 대신 막아준 적이.”

목소리가 마지막 부분에서 갈라졌다. 한다윤은 자신의 머그잔만 내려다봤다. 그의 속눈썹이 가로등 빛을 받아 그림자를 드리웠다.

“그 사람, 예전에 사귀었던 사람이죠.”

서지오가 고개를 약간 들었다. 단정이 아니라 확인에 가까운 어조였다.

“네.”

“편집자님한테 나쁜 사람이에요.”

한다윤의 말투에 물음표는 없었다. 서지오가 쓴웃음을 지었다. “말을 잘 안 했을 뿐인데, 어떻게 알았어요?”

“몸이 다 말하고 있었으니까요.”

한다윤이 처음으로 그녀의 눈을 똑바로 바라봤다. “손목 떨림이랑 얼굴 핏기랑…… 그런 걸 보면 아는 거예요.”

서지오가 머그잔을 입가로 가져갔다. 커피를 한 모금 삼켰다.

그리고 멈췄다.

쌉싸름한 다크 로스트. 산미는 거의 느껴지지 않고, 텁텁하지 않을 만큼 진하게 우려낸 맛. 설탕도 시럽도 없고 온도는 정확히 혀가 데이지 않을 최대치.

그녀가 즐겨 마시는 커피였다. 이 로스터리 카페는 처음 와봤을 텐데.

서지오가 머그잔을 내려놓았다. 천천히, 소리가 나지 않게.

“한다윤 씨.”

“네.”

“내가 커피를 어떻게 마시는지…… 내가 말한 적 있었나요.”

한다윤의 손가락이, 자기 잔을 감싼 채로 미세하게 움찔거렸다. 그러나 그의 얼굴은 평온했다. 입가에 작은 미소가 걸렸다.

“비슷한 거 좋아하는 사람이 있어서요. 그냥 그거 따라 한 건데…… 맞았나 보네.”

목소리는 밝았다. 평소의 대형견 모드로 돌아와 있는 그였다.

서지오는 대꾸하지 않았다. 다시 머그잔을 들었다. 김이 올라오는 액체 표면을 응시하며, 그녀는 생각했다.

이 남자는 내가 말하지 않은 것을, 너무 많이 알고 있다.

의혹은 마시는 커피보다 더 뜨겁게, 목구멍을 타고 내려갔다.

예외의 온도3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