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외의 온도
4화
차 안의 정적이 유난히 길었다.
서지오는 창밖만 바라봤다. 카페에서 마신 커피의 쌉싸름함이 아직 혀뿌리에 남아 있었다. 그보다 더 진하게 남은 건 의혹이었다.
어떻게 알았을까.
내비게이션 안내음이 짧게 울렸다. “목적지에 도착했습니다.”
한다윤이 차를 세웠다. 서지오의 집 앞이었다. 아파트 입구의 센서등이 희뿌옇게 켜져 있었다.
서지오가 안전벨트를 풀었다. 손가락이 버클을 더듬는 데 평소보다 오래 걸렸다.
“편집자님.”
한다윤의 목소리에 그녀의 손이 멈췄다.
“오늘 밤, 집에 혼자 있기 괜찮으시겠어요.”
서지오가 그를 돌아봤다. 한다윤의 옆얼굴이 가로등 빛에 반쯤 잠겨 있었다. 입가에는 미소가 없었다.
“제가 괜한 소릴 하는 건 아니에요. 편집자님 오늘…… 많이 놀라셨고, 이 집 주소는 그 사람이 알 수도 있고…… 저기.”
한다윤의 손가락이 핸들을 짧게 두드렸다. 가볍게, 그러나 미세하게 빨랐다.
“제가 사는 곳에 손님용 침구 있어요. 침실은 따로고.”
서지오가 대답하지 않았다.
“제안인 거예요. 싫으시면 여기서 내리시면 되고.”
한다윤이 그녀를 향해 몸을 약간 틀었다. 그의 눈이 호박색으로 반짝였다.
“어떻게 하실래요?”
서지오는 자신의 집 현관을 바라봤다. 불 꺼진 창문. 빈 거실. 이재윤이 이 주소를 안다는 사실은 확실했다.
그녀의 손목이 저릿했다.
“……네.”
“네?”
“잠시 신세를 지겠습니다.”
한다윤의 얼굴에 천천히 미소가 번졌다. 조금 전의 무게감은 사라지고, 평소의 밝은 표정이었다.
“좋아요. 그럼 출발!”
그가 시동을 다시 걸었다. 서지오는 자신의 집이 백미러 속에서 작아지는 걸 지켜봤다. 심장이 아직도 조금 빠르게 뛰고 있었다.
한다윤의 집은 한남동 쪽 저층 빌라였다. 주차장에서 엘리베이터를 타고 3층까지 올라갔다.
현관문을 열자 은은한 시더우드 향이 났다. 거실은 생각보다 넓었다. 미니멀한 가구와 벽 한쪽을 채운 빌트인 책장. 그 앞에 놓인 3인용 소파가 유일한 휴식 공간이었다.
“여기가 거실이에요. 저쪽이 오늘 주무실 방이고.”
한다윤이 스위치를 켜며 말했다. 불빛 아래 집은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집주인의 성격이 보이는 듯했다.
서지오는 소파 앞에 멈춰 섰다. 어깨에 걸친 가방을 내리지도 않았다.
“차라도 한 잔 드실래요?”
“네, 부탁드려요.”
한다윤이 거실 한쪽의 오픈 키친으로 향했다. 서지오는 소파에 앉았다. 가죽이 낡지 않아 아직 뻣뻣했다.
곧 전기 포트에서 물 끓는 소리가 났다. 하고 찬장 여닫는 소리. 잔 부딪히는 소리.
“편집자님, 캐모마일 괜찮으세요?”
“네.”
“담요도 가져다드릴게요. 밤에 쌀쌀해서.”
그가 다가왔다. 동작은 빠르고 효율적이었다. 쟁반에는 유리 찻잔 두 개와 얇은 모직 담요가 놓여 있었다.
서지오가 찻잔을 한 모금 마셨다. 정확히 그녀가 좋아하는 농도의 허브티였다. 너무 진하지도, 물 탄 듯 싱겁지도 않은.
“한다윤 씨.”
“네?”
“캐모마일은 어떻게 고르셨어요.”
그가 고개를 갸웃했다. “마침 집에 있는 차들 중에 캐모마일이 보여서요. 식탁 위에 올려뒀는데.”
한다윤이 태블릿을 집어 들었다. 화면을 몇 번 터치하더니 거실에 설치된 스피커에서 낮은 재즈 피아노가 흘러나왔다. 볼륨이 과하지 않고, 멜로디가 과하지 않았다. 딱 그 정도가 좋았다.
서지오가 찻잔을 내려놓았다. 손가락이 잔의 가장자리를 따라 천천히 움직였다.
“음악은요.”
“AI 추천이에요. 모멘토 모델 중에 음악 취향 분석하는 게 있어서.”
한다윤이 태블릿을 보여줬다. 화면에는 간단한 대시보드가 떠 있었다. ‘안정화 트랙’, ‘저자극 멜로디’, ‘재즈 피아노’ 같은 단어들이 보였다.
“저희 회사 솔루션이에요. 아까 말씀드린 감성 태그의 확장판인데, 텍스트 데이터만으로 취향 패턴을 추출하는 거거든요.”
“텍스트 데이터요.”
“네, 예를 들면…… SNS 포스팅이나 리뷰, 블로그 같은 거요. 그런 공개 데이터들을 분석하는 거예요. 프라이버시 이슈 없이.”
서지오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공개 데이터만으로 이 정도가 가능한가요.”
“네, 물론이죠.”
한다윤이 씩 웃었다. 그러나 그 웃음의 끝이 평소보다 빨리 접혔다. 아주 짧은 순간, 그의 동공이 움직이지 않았다.
“그리고 모델이 분석하는 건 통계일 뿐이니까. 방금 음악은 제 취향 세이브된 거였는데, 편집자님 제안 들어오기 전에 제가 틀려고 했던 거였어요. 우연히 맞은 거고.”
서지오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는 피아노 선율을 들으며 생각했다. 이게 우연이 셋째다. 커피, 차, 음악. 우연은 두 번까지라고 배웠는데.
한다윤이 소파에서 일어났다.
“이제 주무실 시간이네요. 침실로 안내해드릴게요.”
그녀도 일어섰다. 담요를 가슴 앞까지 접어 들었다. 촉감이 부드러웠다.
다음 날 아침, 서지오는 낯선 천장을 보며 눈을 떴다. 몇 초 동안 어디인지 몰랐다. 햇빛이 얇은 커튼을 통과해 방 안을 연하게 밝히고 있었다.
일어나 거실로 나갔다. 한다윤은 이미 깨어 있었다. 식탁에 토스트와 반숙 계란, 작은 과일 그릇이 놓여 있었다.
“좋은 아침이에요, 편집자님.”
그가 커피머신을 작동시키며 인사했다. 앞치마를 두르고 있었다.
“커피는 아메리카노 맞으시죠? 다크 로스트. 설탕 시럽 전부 빼고, 온도는 조금 뜨겁게.”
“……이번에는 또 무슨 우연이죠.”
서지오의 목소리가 건조했다.
한다윤이 잠시 멈칫했다. 그리고 웃었다.
“이건 어제 편집자님이 카페에서 드시는 걸 제가 직접 보고 기억한 거예요.”
“눈썰미가 대단하시네요.”
“원체 관심 있는 사람한테는 그래요.”
한다윤이 커피잔을 내밀었다. 그의 표정은 평소대로 밝았지만, 마지막 문장은 꼬리가 짧았다.
서지오는 자리에 앉아 아침을 먹기 시작했다. 식사를 거의 마칠 무렵, 식탁 위에 놓인 휴대폰이 진동했다.
화면에 메시지 미리보기가 떠올랐다. 발신인은 차단되지 않은 번호였지만, 내용은 익숙했다.
[이 번호도 바꿀까. 내가 계속 찾을 거라는 건 알지?]
서지오의 젓가락이 멈췄다. 손목의 힘이 빠졌다.
한다윤은 그녀의 시선이 휴대폰에 고정된 걸 보았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다만 그의 손이 식탁 너머로 움직여, 그녀 앞에 놓인 물잔을 살짝 옆으로 치워줬다. 넘어뜨릴 것 같아서였다.
“편집자님.”
“잠시만요.”
서지오가 휴대폰을 들었다. 메시지 앱을 열었다. 발신인: 이재윤.
그녀의 엄지가 화면 위를 떠다녔다.
그리고 차단 버튼을 눌렀다. 다음 화면으로 넘어가서, 해당 번호로 전화 수신도 차단했다. 일련의 동작이 빠르게 이어졌다.
서지오가 휴대폰을 뒤집어 식탁에 내려놓았다. 숨을 길게 들이쉬었다. 손가락이 약간 떨렸지만, 그 외에는 모든 것이 평소와 같았다.
“차단했어요.”
“네.”
“그걸로 됐어요.”
한다윤이 조용히 말했다. “수고하셨어요.”
서지오는 허탈한 듯 짧게 웃었다. “누군가한테 수고 들을 일인가요, 이게.”
“네. 자기 경계를 지키는 건 항상 수고로운 일이에요, 서른 살 전에는.”
그의 말투가 약간 가라앉아 있었다. 평소 늘이던 어미도, 장난기도 빠져 있었다.
“제가 스물여섯이지만, 이런 말 할 자격은 있어요. 포기하는 것보다 낫다.”
서지오는 빈 접시를 내려다보며 생각했다. 이 사람은 왜 이렇게까지 나한테 신경을 쓰지.
그녀가 물었다.
“한다윤 씨는 왜 그러는 거예요.”
“네?”
“나한테 이렇게 신경 쓰는 이유요.”
한다윤이 천천히 커피잔을 내려놓았다. 그의 눈이 그녀의 눈을 정면으로 마주했다. 동공 주변의 호박색이 빛을 받아 일렁였다.
“편집자님이니까요.”
“그건 답이 안 되는데요.”
“편집자님.”
그녀의 말을 끊고, 한다윤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미소가 꺼졌다. 애교가 전부 빠져나갔다.
“나는요. 기억하는 사람이에요.”
정적.
“누군가 내게 보여준 것들을, 나는 전부 다 기억해요. 그 사람이 무심코 지나친 말투랑, 좋아하는 것들이랑, 그리고…… 아플 때 숨 쉬는 방식까지.”
서지오의 손이 식탁 가장자리를 잡았다.
“그게 상대방을 이해하는 내 방식이에요.”
한다윤이 일어섰다. 빈 접시를 챙겼다.
“그 이상의 이유는 없어요. 적어도 지금은.”
서지오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의 손이 설거지를 위해 물을 틀었다. 물소리만이 잠시 거실을 채웠다.
그녀는 생각했다. 기억하는 사람. 누군가 보여준 것을 전부 기억하는 사람. 아플 때 숨 쉬는 방식까지.
그리고 떠올랐다. 그녀가 익명의 계정에 썼던 시구.
나는 기억하는 사람이다 / 네가 잊은 모든 네 숨의 높낮이를.
모먼트. momento_user.
의혹은 커피보다 더 진하게, 다시 목구멍을 타고 내려갔다.
한다윤이 식탁 쪽으로 돌아왔다. 서지오는 표정을 정리하고 일어섰다.
“한다윤 씨.”
“네?”
“다음 주 출판 기념 행사 준비…… 같이 도와주실 수 있을까요.”
그가 눈을 깜빡였다. 그러고는 천천히 웃었다. 이번에는 진짜 웃음에 가까웠다.
“물론이죠.”
서지오가 가방을 챙기며 말을 이었다.
“이재윤 작가가 행사장에도 올 거예요. 저는 피하지 않으려고요.”
한다윤이 물잔을 내려놓았다. 그의 손끝이 물기에 젖어 반짝였다.
“당당하게 맞서시겠다는 거네요.”
“네.”
한다윤이 잠시 그녀를 바라봤다. 그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그럼 저도 도울게요.”
“감사합니다.”
서지오가 현관으로 향하려는 찰나, 한다윤이 무언가 생각난 듯 태블릿을 집어 들었다.
“아, 그리고 편집자님.”
“네?”
“그 행사 준비하면서…… 혹시 필요하시면, 저희 모멘토 솔루션이 편집자님의 기획 방향성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수도 있을 것 같아서요.”
서지오가 돌아섰다.
“내 기획 방향성이요.”
“네. 텍스트 분석 기반이라서, 편집자님이 공개적으로 발표하셨던 기획안이나 인터뷰 데이터 같은 걸로…… 그 사람이 어떤 방향을 지향하는지 감성적으로 분석해주는 기능이 있거든요.”
한다윤의 목소리는 담담했다. 그러나 그의 눈은 웃지 않았다.
“내면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수도 있고요.”
서지오는 움직이지 않았다. 그의 말은 지극히 업무적인 제안이었다. 모멘토 솔루션 소개. 감성 분석 모델.
그러나 그녀의 머릿속에는 전혀 다른 문장이 맴돌았다.
나는 기억하는 사람이다. 네가 잊은 모든 네 숨의 높낮이를.
서지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한다윤 씨.”
“네.”
“그 솔루션.”
그녀의 시선이 그의 호박색 눈동자에 박혔다.
“언제 한 번 자세히 설명해주시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