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verStory

예외의 온도

5화

회의실 문이 열리기 전부터, 서지오는 알고 있었다. 복도 저편에서 들려오는 발소리만으로도 충분했다. 구두 굽이 바닥을 긁는 특유의 리듬, 보폭보다 살짝 느리게 따라오는 호흡. 그게 들어왔다. 이재윤이었다.

“오랜만입니다, 편집자님들.”

검은 셔츠 소매를 팔꿈치까지 접어 올린 그가 커피 캐리어 두 개를 들고 있었다.

“회의가 길어질 것 같아서요. 아래 카페에서 픽업해왔습니다.”

서지오는 노트북 화면에 시선을 고정했다. 엑셀 시트의 숫자들이 흔들렸다. 이재윤이 탁자를 따라 걸어와 그녀의 맞은편 자리에 캐리어를 내려놓았다.

“서지오 씨. 아메리카노에 샷 추가죠? 예전 그대로.”

종이컵 하나를 꺼내 그녀 앞에 밀었다. 그의 손등에 희미한 흉터가 보였다. 서지오는 컵을 받지 않고 그를 똑바로 바라봤다.

“커피는 아까 마셨습니다. 이재윤 작가님.”

“아, 그래요?” 이재윤이 미소를 거두지 않았다. “그럼 목이라도 축이시게.” 종이컵을 노트북 옆에 그대로 두고 자기 자리로 물러났다.

한다윤이 태블릿을 내려놓는 소리가 평소보다 컸다. “자, 오늘 안건부터 정리할게요.” 그의 시선이 서지오의 왼손을 훑고 지나갔다. 키보드 위 손가락 끝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감성 태그 2차 분류안을 먼저 보시죠.” 서지오가 겨우 입을 열었다. 목소리는 반음 높았다. 노트북을 모니터에 연결하며, 그녀는 이재윤의 시선을 등 뒤에서 느꼈다. 두 눈이 천천히 그녀의 목덜미를 따라 내려왔다.

한다윤이 일어나 자료를 나눠주며 이재윤 앞에서 멈췄다. “이재윤 작가님께서는 사진 콘셉트 관련 피드백 주시면 됩니다만, 오늘은 주로 데이터 구조 쪽이라서요. 지루하실 텐데.” 유인물을 건네며 덧붙였다.

“괜찮습니다. 궁금한 게 많아서요.” 이재윤이 유인물을 읽지 않고 한다윤을 올려다봤다. 두 사람의 시선이 공중에서 부딪히며 회의실 온도가 1도쯤 내려갔다. 한다윤이 먼저 웃었다. 부드러운 곡선이었다. “다행이네요.”

그가 돌아서며 서지오의 의자 뒤로 지나갔다. 유인물을 그녀 왼쪽에 내려놓으며 한다윤의 손등이 잠시 시야에 들어왔다. 이재윤의 시선이 차단된 각도였다. 서지오의 손가락이 서서히 멈췄다.

회의가 진행됐다. 서지오가 2차 분류안을 설명하며 모니터를 가리켰다. “여기, ‘멜랑콜리’ 태그를 독립 축으로 뺀 건……”

“좋네요.” 이재윤이 말을 끊었다. 팔짱을 끼고 의자에 기댄 채였다. “멜랑콜리는 슬픔과 달라요. 서지오 씨가 예전에 하던 말이랑 똑같네요.”

서지오의 손목이 굳어졌다. 시계 줄이 책상 모서리에 닿으며 작은 소리를 냈다. 정시현이 몸을 움직였다. “이재윤 작가님, 혹시 콘셉트 쪽 먼저……”

“아, 기다리시게.” 이재윤이 손을 들어 제지했다. 시선은 여전히 서지오에게 고정돼 있었다. “끝까지 듣죠. 편집자님 발표.”

한다윤이 태블릿을 들어 올렸다. “죄송합니다만, 데이터 구조 관련 질문이 있어서요.” 화면을 서지오 쪽으로 돌리며 자연스럽게 두 사람 사이의 시선 축에서 이재윤을 밀어냈다. “이 태그 계층이 상위 감성 코드랑 매핑이 헷갈리는데, 설명 한 번만 더 부탁드려도 될까요?”

서지오가 그를 바라봤다. 한다윤의 눈이 빨랐다. “……네.” 그녀가 모니터로 시선을 돌리며 설명을 이었다. 이재윤이 입가에 가벼운 미소를 띤 채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회의 직후, 서지오는 노트북을 접자마자 회의실을 나갔다. 유리문이 평소보다 큰 소리로 닫혔다. 이재윤이 천천히 일어나 서지오 앞에 놓인, 끝내 손대지 않은 아메리카노를 내려다봤다.

종이컵 표면의 물방울이 탁자 위로 흘러내렸다. 한다윤은 태블릿을 가방에 넣으며 그 광경을 지켜봤다. 표정은 평온했지만 가방 지퍼를 잠그는 손끝에 힘이 들어가 있었다.

탕비실. 정시현이 머신 앞에서 캡슐을 교체하고 있었다. 한다윤이 들어서자 그녀가 어깨 너머로 힐끗 보더니 고개를 돌렸다. “아, 대표님.”

“커피 한 잔 하려고요.” 한다윤이 그 옆으로 다가섰다. 정시현의 손이 멈췄다.

“선배한테 관심 많으세요?”

캡슐이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한다윤이 머신을 바라보며 대답했다. “네, 많아요.”

정시현이 그를 돌아봤다. “야, 너무 솔직하잖아.”

“거짓말할 이유가 없어서.”

정시현이 작게 웃었다. 커피 추출음이 탕비실을 채웠다. “저 선배 말이야.” 그녀가 낮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예전에 누구한테 많이 아팠어. 누군지 말은 안 했지만, 그 사람이 일방적으로 집착하고 통제하려고 한 모양이더라고. 그게 끝난 뒤로 선배는 자기 속도로 오는 사람만 받아들여.” 머신이 멈췄다.

정시현이 종이컵을 꺼내며 덧붙였다. “누구든 그 속도를 못 지키면, 선배가 먼저 문 닫아요.”

한다윤이 잠시 침묵했다. 형광등이 낮은 진동음과 함께 깜빡였다. “알겠습니다.” 그의 목소리에서 모든 애교가 빠져 있었다.

“대표님도 참 특이하네. 보통은 이런 말 하면 변명부터 하는데.”

“전 제 속도로 안 갈 거니까요. 그 사람 속도에 맞출 겁니다.”

정시현이 그를 한동안 바라봤다. 입가를 살짝 올렸다. “……그래. 그럼 좀 응원해볼까.”

점심시간 무렵, 편집부 사무실은 한산했다. 서지오는 원고를 네 번째 훑고 있을 때였다.

“지오야.”

그녀의 어깨가 움찔했다. 이재윤이 사무실 입구에서 태블릿을 든 채 느긋하게 다가왔다. 동료 몇 명이 고개를 들었다.

“식사하러 안 가고 여기 있었네.”

서지오가 노트북을 닫았다. “이재윤 작가님, 업무 건이시면 메일로 주셔도 됩니다.”

“업무야, 업무.” 이재윤이 태블릿을 켜서 책상 위에 올렸다. 흑백 사진들이 넘실거렸다. 빛이 모서리마다 무너지는 오래된 필름 사진들. “기억나? 우리 같이 찍었던 작업이야. 이번 프로젝트 콘셉트 잡을 때 참고하려고 꺼내봤어.”

서지오는 화면을 보지 않고 그를 똑바로 바라봤다. “그 작업은 3년 전에 끝난 프로젝트입니다. 지금과 무관하다고 생각합니다만.”

이재윤이 여유 있게 웃었다. “무관하지 않아. 지금 네 감성 태그 자료 봤잖아.

예전 네가 했던 말이랑 정확히 같았어. 사람 감성이라는 게 쉽게 바뀌는 게 아니더라고.” 태블릿을 한 장 넘겨 더 가까이 밀었다. “예전처럼 자연스럽게 일하자고, 지오야.”

서지오가 숨을 들이쉬었다. 등이 의자 등받이에 닿지 않았다. “이재윤 작가님.” 평소보다 낮은 목소리, 완전한 존대였다. “저는 업무 외 대화는 원치 않습니다. 사진 콘셉트 관련된 안건만 메일로 주시면 검토하겠습니다.”

사무실 안의 공기가 정지했다. 키보드 소리가 멈췄다. 이재윤의 미소는 흔들리지 않았다.

그는 태블릿을 천천히 집어 들며 고개를 갸웃했다. “차갑네. 예전엔 내 커피도 마시고 그랬으면서.”

서지오의 손이 책상 아래에서 주먹을 쥐었다. 표정은 움직이지 않았다. “그땐 그랬고, 지금은 아닙니다.”

이재윤이 그 말을 곱씹듯 잠시 침묵했다가 다시 웃었다. 입술을 한쪽만 올리며. “그래.

그럴 수 있지.” 태블릿을 품에 안고 한 걸음 물러섰지만 시선은 여전히 그녀에게서 떼지 않았다. “또 올게. 콘셉트 회의는 아직 많이 남았으니까.”

뒤돌아 나가는 발소리가 복도로 사라질 때까지 사무실 안의 누구도 말을 꺼내지 못했다. 서지오는 그대로 멈춰 앉아 있었다. 화면이 절전 모드로 들어가며 노트북이 어두워졌다. 까만 액정 위로 복도 불빛이 비껴 흘렀다. 그녀의 주먹 쥔 손이 책상 아래에서 풀리지 않았다.

6시 30분. 출판사 건물 현관을 나서자 저녁 공기가 제법 선선했다.

서지오는 가방 끈을 고쳐 쥐고 계단을 내려갔다. 오늘 하루는 길었다. 회의.

수정 요청. 점심도 대충 넘겼다. 발걸음이 무거웠다.

그리고 멈췄다.

현관 앞 가로등 아래, 한다윤이 서 있었다.

그는 스마트폰을 보고 있다가 그녀가 나오자 고개를 들었다. 마치 우연히 마주친 사람처럼 눈을 깜빡였다.

“어, 편집자님.”

서지오가 걸음을 멈췄다.

“여긴 어떻게……”

“아, 저도 이 근처에서 볼일이 좀 있어서요. 끝나고 나오는데 때마침 보여서.”

한다윤이 스마트폰을 주머니에 넣으며 웃었다. 흰 셔츠 소매가 팔꿈치까지 걷혀 있었다.

볼일. 이 근처에서. 오후 6시 반에.

서지오는 그의 얼굴을 잠시 바라봤다. 눈이 마주치자 한다윤이 슬쩍 시선을 돌렸다가 다시 그녀에게로 가져왔다.

“오늘 회의 때 좀 불편해 보이셔서.”

그의 목소리가 한 톤 낮아졌다. “혼자 가시는 것보다 제가 같이 가는 게 낫지 않을까 싶었어요.”

당황해서 할 말을 찾지 못했다. 평소 같았으면 정중히 거절했을 것이다. 그런데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가로등 불빛이 그의 호박색 눈에 닿아 금색으로 부서졌다. 그 눈이 묘하게 진지했다. 웃고 있지 않았다.

“……그냥 우연이 아니었군요.” “네.” 그가 솔직하게 인정했다. “퇴근 시간 알아내느라 고생 좀 했어요.”

방금 전까지의 ‘우연히’ 말투가 사라지고, 그 자리에 담담한 반말이 놓였다. 서지오는 그 갑작스러운 전환에 눈을 깜빡였다.

한다윤이 한 걸음 물러서며 손을 내저었다. “압박하려는 건 아니에요. 진짜로.

그냥…… 오늘 같은 날은 누군가 옆에 있는 게 나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내가 그 누군가였으면 좋겠고.”

서지오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거절하지 않았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머릿속에서 여러 가지 답이 스쳤다. 그중 어느 하나도 입 밖으로 꺼내지 못했다.

한다윤이 옆으로 비켜서며 길을 터줬다. “걸으면서 얘기해요. 날도 좋은데.”

그리고는 한 발짝 먼저 걷기 시작했다. 부담스럽지 않은 거리. 충분히 떨어져서, 충분히 가까이에서.

서지오는 잠시 그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어깨가 넓었다. 셔츠가 바람에 살짝 부풀었다.

그녀도 따라 걷기 시작했다.

아니, 이건 이상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평소의 그녀라면 거절했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나란히 걷고 있었다. 한다윤이 발걸음을 늦춰 그녀의 보폭에 맞췄다.

“오늘 회의는 원래도 길었는데 편집자님이 중간에 정리 한 번 해주셔서 살았어요.” “부담은요.” 서지오가 짧게 답했다. “아직 안 가졌어요.”

그 말에 한다윤이 작게 웃었다. 숨소리만 새는 웃음이었다. 둘은 인도를 따라 천천히 걸었다.

누군가와 나란히 걷는 것. 퇴근길에 누군가의 보폭이 옆에 있다는 것. 언제적 일인지 기억도 안 났다. 그런데 지금 이 순간, 오히려 침묵이 편안했다.

한강변 공원 입구에 다다랐을 때, 공원 너머로 설치 중인 텐트와 부스 뼈대가 보였다. 서지오가 걸음을 늦추며 턱짓으로 그쪽을 가리켰다.

“다음 주 출판사 야외 북 페어 준비네요.” “여기였어요?” “네. 공지 받았어요. 이재윤 씨 사진 전시 부스도 저쪽에 운영한대요.”

한다윤이 멈췄다. 완전히 발걸음을 세웠다. 인도 한복판에서였다.

지나가던 자전거 한 대가 경적을 울리며 비켜갔다. 그는 꼼짝도 하지 않고 공원 쪽을 바라봤다. 그러고는 그녀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날.” 한다윤의 목소리에서 애교가 사라졌다. 어미가 딱 떨어졌다. “내가 꼭 참석하겠습니다. 당신을 혼자 두지 않을게요.”

바람이 강을 건너 불어왔다. 서지오의 앞머리가 흩어졌다. 그녀는 그 말을 들었다. 한 글자도 놓치지 않고.

위화감.

당연히 느껴야 했다. 행사장에까지 따라오겠다는, 너무나 직접적인 보호 선언. 과거의 누군가에게 들었다면 숨이 막혔을 것이다.

그런데 숨이 막히지 않았다.

오히려 막혔던 숨이 조금 트이는 느낌이었다. 안도감. 처음 맛보는 종류의 것이었다. 절벽 끝에서 누군가 손을 내밀어 잡아주기보다, 그냥 옆에 서 있겠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게 한다윤이라는 것.

서지오는 눈을 감았다 떴다. 혼란스러웠다. 이게 뭐지. 지금 내가 느끼는 이 감정은 뭐지.

“한다윤 씨.” “네.” “거기까지 오시는 건 아마 공식 참석으로 처리해야 할 거예요. 제가 명단에 넣어둘게요.”

한다윤이 눈을 깜빡였다. 예상 못 한 대답인 듯했다. 그러다 입꼬리가 천천히 올라갔다. 눈이 반달 모양으로 휘어졌다.

“그러니까…… 거절은 아니네요.” “명단 얘기였어요.”

그녀가 앞서서 걷기 시작했다. 등 뒤에서 한다윤의 낮은 웃음소리가 들렸다.

“명단. 네. 좋아요.”

서지오는 걷는 속도를 조금 늦췄다. 그가 따라잡을 때까지. 돌아오지 못할 선을 넘은 걸까.

아니, 애초에 선이란 게 뭘까. 그녀가 그어온 수많은 선들. 그중 하나가 조금씩 흐려지고 있었다. 지워도 되는 선인지 시험해보는 기분이었다.

두 사람은 다시 나란히 걸었다. 한강 건너로 노을이 막 지고 있었다.

밤. 서지오의 집.

가방을 내려놓고, 신발을 벗고, 손을 씻었다. 냉장고에서 물을 꺼내 한 모금 마셨다.

그녀는 침대에 걸터앉아 스마트폰을 집었다. 모먼트 앱 아이콘을 눌렀다. 오늘 밤 업로드할 시를 준비해뒀다. 제목은 ‘경계의 온도’.

초안을 열었다.

그리고 멈췄다.

업로드 화면 아래, 댓글 하나가 이미 달려 있었다. 한 시간 전이라고 타임스탬프가 찍혀 있었다. 그녀가 아직 올리지 않은 시에.

이미지가 첨부된 댓글이었다. 흑백 사진. 흐릿한 강변. 노을 진 하늘 아래 누군가의 뒷모습. 그리고 그 위에 덧씌워진 텍스트.

‘경계를 세우는 자는 경계에 갇힌다.’

등골이 서늘해졌다. 그녀가 아직 올리지 않은 시의 마지막 구절과 정확히 일치하는 문장. 손끝이 차가워졌다. 스마트폰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녀는 천천히 그 댓글의 발신자 프로필을 눌렀다.

jyunphoto.

서지오는 스마트폰을 떨어뜨렸다. 침대 위로 떨어진 액정이 천장을 향해 빛나고 있었다.

예외의 온도5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