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verStory

예외의 온도

6화

스마트폰을 집어 들기까지 몇 초가 걸렸다. 손끝이 저릿했다. 화면은 여전히 그 댓글을 비추고 있었다.

jyunphoto.

서지오는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떨림이 손목을 타고 팔뚝까지 올라왔다. 화면을 끄고, 다시 켰다.

댓글은 사라지지 않았다. 한 시간 전. 그가 이 시를 읽었다. 내가 올리기도 전에.

어떻게.

손가락이 굳어 움직이지 않았다. 신고 버튼을 누를까. 차단 버튼을 누를까.

둘 다 말이 안 된다고 생각했다. 아직 올리지 않은 시에 달린 댓글을 신고한다고? 증거가 뭐지.

초안을 캡처한 적 없다. 그런데도 이 남자는 그걸 알고 있다.

냉장고 모터가 낮게 윙윙거렸다. 평소에는 듣지 못하던 소리가 오늘 밤엔 유난히 컸다. 그녀는 댓글 창을 한 번 더 들여다봤다.

흑백 사진 속 뒷모습. 노을. 저건……

나다. 지난주 퇴근길, 한강변에서 잠시 멈춰 섰을 때다. 누군가 찍고 있었다는 걸 몰랐다.

댓글을 삭제했다. 손가락이 아직 떨렸다. 차단 버튼을 누르려다 멈췄다.

차단한다고 달라질 게 있나. 그는 이미 이 계정을 알고 있다. 차단은 오히려 그에게 확인을 주는 꼴이다.

알아. 내가 두려워한다는 걸.

시를 올렸다. '경계의 온도'. 본문은 그대로.

마지막 두 줄만 지웠다. 그 구절이 그의 손에 들어간 이상, 똑같이 올릴 수는 없었다. 화면에 업로드 완료 알림이 떴다.

그녀는 앱을 종료하고 스마트폰을 침대 옆 탁자에 엎어 놓았다. 액정이 바닥을 향했다. 불빛이 사라졌다.

잠들기까지 오래 걸렸다.

다음 날 아침, 출판사 사무실.

서지오는 평소보다 일찍 출근했다. 일곱 시 사십 분. 사무실은 비어 있었다.

형광등이 하나둘 깜빡이며 켜졌다. 그녀는 자리에 앉아 컴퓨터를 켰다. 업무 메일함을 열었다. 눈이 저절로 멈췄다.

발신자: 이재윤.

제목: 어젯밤 시.

커서가 떨렸다. 그녀는 마우스를 움켜쥔 채 화면을 응시했다. 미리 보기에 본문 첫 줄이 보였다.

'경계를 세우는 자는 경계에 갇힌다. 그 문장, 나를 닮아서 불편하더라.'

서지오는 메일을 열지 않았다. 미리 보기로 충분했다. 가슴이 조여들었다.

그는 알고 있다. 이 계정이 나라는 걸. 구구절절 확인할 필요도 없었다.

메일은 그 자체로 증명이었다. '나를 닮아서'라는 표현. 예전에도 그러더니.

그가 내 문장을 평가할 때 쓰던 말투였다. 마치 자기 소유라도 되는 것처럼.

손이 키보드에서 떨어졌다. 무릎 위에 올려놓은 손가락이 차가웠다. 메일을 삭제할까.

휴지통에 넣어도 소용없다. 그는 다시 보낼 것이다. 답장하지 않는 게 최선이다. 반응하지 않는 것.

정시현이 여덟 시 칠 분에 들어왔다.

“선배, 왜 벌써……”

말을 끝맺기 전에 서지오의 얼굴을 보고 입을 다물었다. 책상 위 차가운 커피, 켜지 않은 모니터 보호기, 무릎 위에서 가지런히 포개진 손. 정시현은 자기 자리로 가며 느리게 가방을 내려놓았다. 한 번 더 돌아봤다. 서지오는 움직이지 않았다.

“선배, 혹시……”

“아침 회의 자료 정리 중이에요.”

말이 너무 빨랐다. 정시현은 고개를 끄덕이고 자기 컴퓨터를 켰다. 묻지 않았다. 서지오는 모니터 화면이 절전 모드로 어두워질 때까지 그 자세로 있었다.

아홉 시. 사무실이 사람들로 채워졌다. 서지오는 정해진 일정대로 움직였다.

회의 자료 출력, 메일 확인, 편집부 주간 회의 참석. 말을 걸면 대답했다. 필요하면 지시했다.

하지만 종일 누군가가 그녀의 의자 등받이를 손끝으로 누르고 있는 느낌이었다. 어깨가 펴지지 않았다. 이마에 힘이 들어갔다. 허리를 곧게 세우고 앉은 채로 한 시간을 보낸 것 같았다. 시계를 보니 겨우 십 분이 지나 있었다.

점심시간이 가까워질 무렵, 책상 위 업무용 전화가 울렸다. 서지오는 한참 뒤에 수화기를 들었다.

“편집부 서지오입니다.”

“편집자님.”

한다윤이었다. 밝은 목소리. 평소와 똑같은 톤. 그녀는 수화기를 귀에 댄 채 눈을 감았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편집자님?”

“네.”

“목소리가.”

한다윤이 잠시 멈췄다. 수화기 너머로 숨소리가 들렸다.

“목소리가 이상해요. 무슨 일 있어요?”

서지오는 모니터를 똑바로 바라봤다. 이재윤의 메일이 아직 읽지 않은 상태로 목록에 떠 있었다. 『어젯밤 시』.

“아닙니다. 오전이라 좀 피곤해서요.”

“잠을 못 주무셨네요.”

한다윤의 말투가 달라졌다. 애교 섞인 올림이 완전히 사라졌다. 건조한 반말. 정확했다.

“오늘 점심 약속 잡으려고 했는데. 취소할까요.”

“괜찮습니다. 그냥……”

“아니요.”

한다윤이 말을 잘랐다. 부드럽지만 단호하게.

“점심은 제가 알아볼게요. 편집자님은 제가 갈 때까지 거기 계세요.”

“한다윤 씨, 정말 괜찮……”

“열두 시에 도착합니다.”

전화가 끊겼다. 서지오는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손바닥이 땀에 젖어 있었다.

시계를 봤다. 11시 47분. 그가 여기서 모멘토 사무실까지 걸리는 시간을 가늠해봤다.

일정을 조정했다기엔 너무 빨랐다. 약속을 취소한 게 아니라, 처음부터 없었던 거다.

서지오는 천천히 허리를 의자 등받이에 기댔다. 이재윤의 메일은 여전히 저기 있었지만, 지금은 그보다 더 무거운 어떤 예감이 그녀의 가슴께를 눌렀다. 열두 시. 13분 남았다. 그녀는 메일함을 닫고 컴퓨터를 절전 모드로 전환했다.

점심시간, 출판사 로비.

서지오가 편집부 문을 열고 나오자 한다윤이 안내 데스크 옆에 서 있었다. 그녀 쪽을 똑바로 보고 있었다. 그가 점심 약속을 취소했다는 아침 문자를 떠올렸다. 그런데 여긴 왜 온 거지.

“여긴 무슨 일로……” 서지오가 다가가며 말을 꺼냈다.

한다윤이 대답 대신 그녀의 얼굴을 한참 들여다봤다. 눈동자가 왼쪽 눈 아래부터 오른쪽 관자놀이까지 천천히 훑고 내려왔다. 마치 데이터를 스캔하는 듯한 집중력이었다.

“눈 밑이 좀 어두워졌네요. 어제 밤에 못 주무셨죠.”

서지오가 손가락 하나로 자기 눈 밑을 살짝 눌렀다. “그냥 좀 일찍 깼어요.”

“그리고 점심 약속 취소한 건 그쪽이 아니라 저예요.”

한다윤이 로비 의자에 걸쳐둔 자신의 재킷을 집었다. “혼자 밥 먹을 기분도 아닌 것 같아서 왔어요. 잠깐만 걸으실래요. 근처 조용한 카페 알아뒀거든요.”

서지오는 잠시 망설였다. 오늘 아침부터 계속 손끝이 차가웠다. 이메일을 열 때마다, 사무실 앞 복도에서 구두 소리가 들릴 때마다. 그런데 한다윤 앞에선 그 차가움이 조금씩 풀리는 걸 어제 퇴근길에 알았다. 그게 더 무서웠다.

“네. 잠깐이요.”

한다윤이 문을 밀어 열었다. 밖으로 나서자 봄날 오후의 따뜻한 바람이 두 사람 사이로 지나갔다.

-

카페는 출판사에서 골목 하나 건넌 작은 로스터리였다. 평일 점심시간인데도 자리가 많았다. 한다윤이 구석 창가 자리를 가리켰다. 유리 너머로 플라타너스 가로수가 햇빛을 듬성듬성 걸러내고 있었다.

“앉아 계세요. 제가 주문해올게요.”

서지오가 의자를 빼며 고개를 들었다. “아니, 제가……”

“오늘은 라벤더 라떼 아니고, 콜드브루 허니 레몬이요.”

한다윤이 이미 카운터 쪽으로 몸을 반쯤 돌리며 말했다. “라벤더 라떼 싫어하게 된 지 얼마 안 됐죠? 예전엔 즐겨 마셨는데.”

서지오의 손이 의자 등받이에 멈췄다. “……그걸 어떻게.”

한다윤은 대답하지 않고 카운터로 걸어갔다. 뒤에서 보는 그의 어깨가 평소보다 살짝 올라가 있었다.

잠시 후 두 잔의 유리컵이 테이블에 놓였다. 한다윤이 건넨 컵에는 레몬 슬라이스가 얇게 떠 있었다. 서지오는 컵을 받아 들지 않고 손가락으로 유리 표면의 물방울만 살짝 문질렀다.

“한다윤 씨는.”

그녀의 목소리가 평소보다 반음 낮았다. “제가 말하지 않은 걸 너무 많이 알고 있어요. 커피 취향. 퇴근 시간. 어제 제 기분까지.”

한다윤이 자기 앞의 아메리카노를 한 모금 마셨다. 눈은 컵을 향하고 있었지만 시선의 초점은 그녀에게 닿아 있었다.

“그게 불편하세요.”

질문이 아니라 확인이었다.

“네. 그리고……” 서지오가 숨을 한 번 쉬었다. 레몬 슬라이스가 유리컵 안에서 살짝 기울었다. “누군가가 제 비밀을 알고 있는 것 같아요. 제가 아직 아무에게도 보여주지 않은 글 같은 걸. 그걸로…… 절 압박하는 느낌이에요.”

이다음에 이재윤의 이름을 말해야 하나. 아니, 한다윤 앞에서 그 이름을 꺼내는 건 선을 넘는 일이었다. 선 하나가 무너지면 나머지도 무너질 거라는 걸 그녀는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한다윤이 잠시 컵을 내려다봤다. 손목시계의 로즈골드 메쉬 밴드가 창밖 빛을 받아 반짝였다. 테이블 위로 흘러내린 빛 한 조각이 그녀의 손등에 닿았다가 사라졌다.

그가 고개를 들었다. 평소의 애교 섞인 말투가 전혀 없었다. 눈이 반달 모양으로 휘지도 않았다. 그냥 똑바로 그녀를 보고 있었다.

“당신이 허락한 만큼만, 내가 가까이 있겠다.”

문장이 짧았다. 어미가 ‘다’ 체로 딱 떨어졌다. 서지오의 어깨에서 힘이 빠졌다.

이 말투를 이미 어디선가 들은 적 있다. 그의 집에서, ‘나는 기억하는 사람이다’라고 말했을 때처럼. 그때는 무서웠는데, 지금은 아니었다.

“허락이라는 건……” 서지오가 낮게 중얼거렸다. “내가 그어놓은 선들을 말하는 건가요.”

“네.”

“그걸 당신이 지켜줄 수 있어요.”

“지킨다.”

한다윤이 컵을 테이블 안쪽으로 밀어 넣었다. 팔꿈치를 테이블에 대고 상체를 살짝 앞으로 기울였다. 거리가 좁혀졌지만 서지오는 뒤로 젖히지 않았다. 자신도 모르게 그쪽으로 조금 더 가까이 앉아 있었다.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다 알죠.”

“짐작은 한다. 하지만 네 입으로 말할 때까지 묻지 않겠다.”

서지오가 처음으로 컵을 들어 한 모금 마셨다. 차가운 콜드브루에 섞인 레몬 향이 목 안쪽을 간질였다. 이 사람한테는 뭘 숨겨도 소용없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게 오늘은 이상하게 안심이 됐다.

한다윤이 아메리카노를 한 모금 더 마시고는 컵을 내려놓았다. 그의 손가락이 컵 손잡이를 한 번 돌렸다 놓았다. “난 원래 먼저 묻고 행동하는 사람 아니거든. 너한테만 이래.”

“……왜죠.”

“이미 말했잖아. 당신이 나한테 유일한 예외라고.”

서지오가 고개를 숙였다. 유리컵에 맺힌 물방울이 천천히 흘러내려 냅킨 위에 작은 얼룩을 만들었다. “무서워요.

누군가가……” 그녀가 말을 끊었다. 손끝이 다시 차가워지려는 걸 꾹 눌렀다. “아니에요. 말하지 않을래요.”

“좋아.”

한다윤이 잠시 창밖을 바라봤다. 플라타너스 잎 사이로 바람이 지나가고 있었다. 그가 다시 그녀를 향했다. “네가 꺼내고 싶은 이야기만 하면 돼. 나는 그걸로 충분해.”

서지오는 휴대폰을 가방에 넣은 채로 두었다. 이재윤의 메일은 확인하지 않았다. 적어도 지금 이 순간만은.

한다윤이 자리에서 일어나 계산을 마치고 돌아왔다. 서지오도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카페를 나서며 그가 말했다.

“출판사까지 같이 걸어요.”

“네.”

두 사람은 느린 걸음으로 골목을 빠져나왔다. 한다윤은 서지오의 왼쪽에서 반걸음 뒤에 서서 걸었다. 인도에 드리운 플라타너스 그림자가 두 사람의 발끝을 번갈아 덮었다. 대문 앞에서 서지오가 멈춰 서며 짧게 고개를 숙였다.

“고마워요.”

“들어가세요.”

한다윤이 손을 살짝 들었다가 내렸다. 서지오가 몸을 돌려 건물 안으로 사라질 때까지 그는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유리문이 닫히자, 한다윤은 돌아서서 천천히 카페 쪽으로 걸어갔다.

출판사 인근 카페 안으로 다시 들어선 그는 구석 진동 벨이 울리지 않는 좌석으로 자리를 옮겼다. 스마트폰을 꺼내 통화 버튼을 눌렀다. 수신음이 두 번 울리고 강민혁의 목소리가 들렸다. “대표님.”

한다윤은 허리를 의자 깊숙이 기대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재윤이 결국 그 계정을 알아챘어. 법적 문제 없이 그녀를 보호할 2차 데이터 전처리 준비를 시작해.”

차가운 아메리카노가 든 유리컵 표면에 물방울이 맺혀 흘러내렸다.

예외의 온도6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