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외의 온도
7화
한강변 공원에 들어선 순간, 팔에 닿는 5월 햇살이 제법 따가웠다. 북 페어 행사장은 오전부터 사람들로 붐볐다. 흰 천막 부스가 잔디밭을 따라 길게 늘어서 있고, 곳곳에 독립출판물과 아트북을 쌓아둔 탁자가 놓여 있었다.
서지오는 우리 출판사 부스 앞에서 행사 리플릿을 정리하고 있었다. 베이지 린넨 재킷에 화이트 티셔츠, 진한 네이비 슬랙스 차림이었다. 어제보다 얼굴빛이 조금 나아 보였지만, 리플릿을 건네는 손끝에 힘이 없었다.
나는 행사장 입구 근처, 커피 트럭 옆에 서서 그녀를 지켜봤다. 서지오의 동선은 예측 가능했다. 부스에서 두어 걸음 떨어진 지점에서 관객을 맞고, 15분마다 수첩을 꺼내 메모를 확인하고, 뒤편 탁자로 가 새 리플릿을 집어 온다. 손목이 유난히 얇은 왼손으로.
그녀가 팸플릿을 정리하다 문득 고개를 들었다. 시선이 공원 서쪽, 이재윤의 사진 전시 부스 쪽으로 쏠렸다가 금세 돌아왔다. 서지오의 오른손이 왼쪽 손목을 감싸 쥐었다. 내가 손목 시계를 풀 때처럼.
리플릿 한 장이 바닥에 떨어졌다.
나는 커피 트럭을 떠나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서지오 뒤쪽으로 네 걸음. 부스 사이 통로에 선 채, 그녀의 시야에 들지 않는 각도에서 멈췄다.
아이들과 반려견을 동반한 관람객이 내 앞을 가로막았다. 그 사이로 이재윤의 부스가 보였다. 흑백 사진을 걸어둔 패널이 바람에 살짝 흔들렸다.
그는 부스 앞에 서 있었다. 검은 셔츠에 슬랙스 차림. 어깨까지 내려오는 머리를 묶지 않고 풀어헤친 모습이 행사장의 축제 분위기와 어긋나 있었다.
이재윤이 몸을 돌렸다. 내 쪽으로 오는 게 아니라 서지오의 부스를 향해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그의 왼손에 작은 태블릿이 들려 있었다.
나는 부스 뒤편으로 한 걸음 더 다가갔다. 서지오의 등 뒤에서 행사 안내판 옆에 섰다. 그녀의 어깨 너머로 이재윤의 움직임이 또렷이 보였다.
20미터. 15미터. 그의 걸음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서지오가 리플릿 뭉치를 내려놓고 손목을 한 번 더 만졌다. 그녀의 숨이 짧아지는 게 보였다.
이재윤이 서지오 앞에 섰다. 1미터 거리. 그녀가 부스 앞 탁자를 사이에 두고 반걸음 물러나자, 이재윤이 비스듬히 탁자를 돌아왔다. 그녀는 부스 뒤편 천막 기둥 쪽으로 자연스럽게 밀렸다.
“오늘 진짜 덥다. 그렇지 않아?”
이재윤의 목소리는 부드러웠다. 하지만 그는 서지오의 오른쪽으로 한 걸음 더 들어왔다. 그녀가 등을 기둥 쪽으로 기대며 멈췄다.
“무슨 일이시죠.”
서지오의 완전한 존대였다. 그녀의 손이 탁자 모서리를 짚었다. 손가락 끝이 하얘졌다.
“일 얘기하러 왔어. 이번 전시 사진 말이야. 네 피드백이 필요해서.” 이재윤이 태블릿을 들어 보이며 웃었다. 입가에 미소가 걸려 있었지만 눈은 웃지 않았다. “예전처럼 자연스럽게 말이야. 너는 항상 내 작업에 솔직했잖아.”
“공식 피드백은 메일로 주시면 됩니다. 지금은 행사 진행 중이라 업무 외 대화는 어렵습니다.”
“업무 외 대화?” 이재윤이 고개를 갸웃했다. “우리가 하는 모든 대화는 업무야. 너와 나는 결국 같은 프로젝트를 만드는 사람들이잖아. 예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래.”
서지오가 한 걸음 옆으로 비켜서려 했다. 이재윤이 태블릿을 내밀며 그 앞을 막았다. 화면에는 흑백 인물 사진 하나가 떠 있었다. 빛을 등진 여자의 실루엣.
“이 사진, 네가 골랐던 거 알지? 기억나? 3년 전 네 말이… ‘사람은 누구나 빛을 받는 쪽과 그림자 쪽이 동시에 찍혀야 진짜 초상이다’였어. 아직도 정확하다고 생각해. 특히 지금 네 모습 보니까 더.”
서지오의 턱이 굳었다. 그녀가 숨을 들이쉬려는 순간, 나는 부스 옆에서 걸어 나왔다. 세 걸음이면 충분했다. 내가 그녀의 오른쪽에 서자 이재윤의 태블릿을 든 손이 공중에서 멈췄다.
“이재윤 작가님.”
내 목소리는 평소보다 낮았다. 모든 애교가 꺼진 톤이었다. 고개를 돌려 이재윤을 똑바로 바라봤다. 나는 웃지 않았다.
“지금 이 분과 나누시는 대화, 행사 기획팀에 공식 민원으로 접수하겠습니다.”
이재윤의 눈빛이 살짝 흔들렸다. 그가 미소를 유지하며 태블릿을 내렸다. “무슨 민원이요? 그냥 사진 이야기였는데.”
“행사 관계자가 명백히 불편함을 표했고, 업무 외 대화를 사절했습니다. 그런데도 진로를 막고 사적인 과거를 언급하며 물러서지 않으셨죠. 이건 스토킹 처벌법상…”
잠시 뜸을 들였다. 근처 부스에서 일하던 스태프 두 명이 이쪽을 바라봤다.
“경계에 해당합니다. 원하시면 지금 바로 행사 사무국에 녹취된 CCTV 열람 요청해드리죠.”
이재윤의 미소가 1초 만에 사라졌다. 그가 반걸음 물러서며 두 손을 들었다. 태블릿을 가슴께로 내리며 “알겠어요. 과민반응이신 것 같은데…” 하고 말을 흐렸다.
“과민반응?”
내가 한 걸음 더 들어갔다. 이재윤과 내 어깨가 30센티미터 거리로 좁혀졌다. 나는 그를 내려다보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두 번 다시 이 분을 불편하게 하지 마십시오. 세 번째는 없습니다.”
이재윤의 입술이 열렸다 닫혔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태블릿을 접어 옆구리에 끼었다. 스태프 한 명이 다가와 “무슨 일이세요?” 하고 묻자, 고개를 저으며 “아무 일 아닙니다” 하고 중얼거렸다. 그리고 돌아서서 빠르게 자기 부스 쪽으로 걸어갔다.
서지오의 손이 아직 탁자 모서리를 쥐고 있었다. 그녀의 호흡이 차차 느려졌다. 나는 그녀 쪽으로 몸을 돌렸다.
“괜찮아요?”
서지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눈가가 붉어져 있었다. 하지만 울지는 않았다.
“고마워요.” 목소리는 평소보다 반음 낮았고, 숨결이 약간 떨렸다.
“잠깐 걸을까요. 저쪽에 조용한 벤치 있어.”
서지오가 다시 끄덕였다. 나는 그녀의 왼쪽으로 돌아 반걸음 뒤에서 걸었다. 행사장 중앙 통로를 벗어나 한강 쪽으로 난 산책로로 접어들자, 사람 소리가 멀어졌다.
버드나무 그늘 아래 빈 벤치가 보였다. 서지오가 먼저 앉았다. 나는 그녀 옆에 앉지 않고 벤치 옆 플라타너스 나무에 등을 기댔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서지오가 무릎 위에 올려둔 두 손을 바라봤다.
“제가 대처를 제대로 못 했어요.” 그녀가 입을 열었다. “늘 그렇죠. 그 사람 앞에 서면…”
거기서 말을 멈췄다.
“그 사람이 당신을 얼리는 방식을 아는 거예요. 그건 당신 잘못이 아니야.”
내가 나무에서 등을 떼며 말했다. 목소리는 여전히 차분하고 짧았다. 하지만 서지오가 내 얼굴을 올려다봤을 때 나는 살짝 입꼬리를 올렸다.
“그리고 내가 잘했죠? 완전 멋있었죠? ‘세 번째는 없습니다’ 이 대사.”
서지오가 작게 웃었다. 숨을 내쉬는 소리 같기도 했다. “네. 진짜 멋있었어요.”
그녀가 손목을 만지작거리다 손을 내렸다. “근데 한 가지 궁금한 게 있어요.”
“뭔데요?”
“어떻게 그렇게 정확한 타이밍에 나타난 거예요? 계속 보고 있었어요?”
나는 대답 대신 어깨를 으쓱였다. 서지오가 고개를 갸웃했다.
“당신, 나 그림자처럼 따라다녔죠.”
“적어도 오늘은.”
그녀가 나를 한참 바라봤다. 시선이 무겁지 않았다. 그냥 확인하는 눈빛이었다.
“일단 행사 끝날 때까지 계속 그럴 거예요. 나중에 항의하든가.”
서지오가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는 천천히 일어나서 내 옆에 섰다. 산책로 저편, 이재윤의 부스 텐트 꼭대기가 나무 너머로 살짝 보였다가 바람에 가려졌다. 그녀가 그 방향을 보지 않았다. 대신 내 팔꿈치 쪽으로 시선을 두었다.
“그럼 부스 복귀는 내 에스코트 받으시죠.”
내가 장난스럽게 팔꿈치를 내밀었다. 서지오가 잠시 망설이다가 내 팔뚝에 손가락을 살짝 얹었다. 3초 정도. 그녀가 손을 떼고 먼저 걷기 시작했다.
나는 그 뒤를 따랐다. 반걸음 거리. 이재윤의 부스 앞을 지날 때, 그가 태블릿을 만지작거리며 앉아 있는 모습이 스쳐 보였다. 그의 손에 쥔 스타일러스 펜이 부러질 듯 눌려 있었다.
모멘토 사무실은 오후의 햇살이 길게 늘어지는 시간이었다. 강민혁이 한다윤의 개인 공간 문을 두 번 두드렸다.
“들어와.”
한다윤은 모니터 앞에서 자판을 두드리다 고개를 들지 않았다. 강민혁이 탁자 옆에 서서 태블릿을 내밀었다.
“이재윤이 행사장에서 물러난 직후, 모먼트에서 익명 계정 관련 검색을 시작했어. 서지오의 시에 쓰인 표현들을 조합해서.”
한다윤이 자판에서 손을 뗐다. 화면에 띄워진 데이터 로그가 그의 눈에 스캔됐다.
“바보 같긴. 그걸 흔적으로 남기다니.”
“의도된 흔적일 수도 있어. 무서워하라는 신호.”
강민혁의 목소리는 건조했다. 한다윤은 의자에 기대어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내가 행사장에서 그를 밀어낸 뒤부터야. 협박 수단을 찾는 거지.”
“서지오의 모먼트 계정 접근 로그, 이재윤 계정과 중복되는 검색 패턴이 오후 들어 네 건으로 늘었어.”
한다윤이 일어나 창가로 걸어갔다. 한강 쪽 하늘이 뿌옇게 빛나고 있었다.
“내가 지난주에 심어둔 계정 보호 레이어는?”
“이상 없음. 다만 그가 계정 자체를 공개하겠다고 협박하면, 기술적 차단만으로는 막을 수 없어. 이미 내용을 캡처했을 가능성이 커.”
한다윤은 유리창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바라봤다. 동공이 약간 확장돼 있었다.
“캡처 파일이 있다면 협박은 시간문제다.”
강민혁이 태블릿을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한다윤은 여전히 창밖을 보며 말했다.
“내가 지난달부터 서지오 계정에 심은 감지 알고리즘은 실시간으로 돌아가고 있어. 누군가 특정 시를 외부로 추출하면 기록이 남아.”
“이재윤이 알면 좋아할 정보네.”
한다윤의 입가가 살짝 올라갔다가 사라졌다.
“그 기록은 모멘토 서버에 남지 않아. 내 개인 단말에서만 확인 가능해. 법적 문제는 없어. 증거로 쓰려는 게 아니야. 미리 아는 거지.”
강민혁이 그를 한동안 바라봤다. 무슨 말을 하려다 멈추고, 태블릿을 집어 들었다.
“알겠다. 나는 법무팀과 접촉해 둘게.”
강민혁이 문을 닫고 나가자, 한다윤은 다시 모니터 앞으로 돌아갔다. 서지오 모먼트 계정의 보호 상태 대시보드가 초록색으로 점멸하고 있었다. 그는 로그 창을 열었다. 이재윤의 마지막 검색 시간이 오후 4시 12분.
“찾고 있겠지. 그 시를.”
한다윤의 목소리는 방 안의 먼지처럼 가라앉아 있었다. 그의 손이 무의식적으로 마우스를 쥐었다 놓았다.
“하지만 네가 찾는 건 내가 이미 감싸고 있어.”
저녁 무렵, 출판사 인근 카페는 한산했다. 정시현이 먼저 도착해 창가 자리를 잡았다. 유리잔 두 개에 물이 채워져 있었고, 그녀의 왼손이 테이블 위를 두드리고 있었다.
서지오가 문을 밀고 들어왔다. 걸음이 평소보다 느렸다.
“여기야. 마셔. 얼굴이 하얘.”
서지오가 물을 한 모금 마셨다. 손목의 힘이 풀려 유리잔이 테이블에 닿을 때 작은 소리가 났다.
“……오늘 고마웠어요.”
“내가 한 거 없어. 한다윤 대표가 거의 다 했지.”
서지오가 고개를 숙여 식탁에 놓인 냅킨 끝을 손끝으로 접었다 폈다 했다. 정시현이 의자를 앞으로 당겼다. 평소 빠르던 말투가 갑자기 느려졌다.
“내가 그 사람한테 경고한 적 있어. 이재윤. 2년 전에.”
서지오가 고개를 들었다. 정시현의 눈은 평소처럼 반짝이지 않았다. 카페 안에서 에스프레소 머신이 짧게 증기를 내뿜었다.
“……선배님이 어떻게.”
“너 그때 정말 많이 아팠잖아. 아무 말 안 하고 혼자 견디더라. 나는 네 옆에서 보고만 있었고. 어느 날 도저히 안 되겠어서, 스튜디오로 찾아갔어. 문 열자마자 말했지. 서지오한테 다시는 연락하지 마라. 네가 한 짓 내가 다 알고 있다.”
서지오의 눈이 살짝 커졌다. 입술이 열렸다가 닫혔다. 정시현은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봤다. 어둑어둑해진 골목에 가로등이 하나둘 켜지고 있었다.
“그 후로 한동안 조용했어. 이번 프로젝트 들어오기 전까지는.”
“……몰랐어요. 왜 말 안 했어요.”
“네가 그 사람 이름 듣는 것만으로도 숨 못 쉬는 거, 내가 몰랐을 것 같아?”
서지오의 손이 물잔 아래로 내려갔다. 냉기가 손바닥에 스며들었다. 그녀가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고마워요.”
정시현이 자리에서 일어나 서지오의 어깨를 한 번 두드렸다.
“네가 혼자가 아니라는 것만 알면 돼. 이제 집에 가라. 얼굴이 너무 안 좋아.”
서지오는 그녀의 손을 붙잡지 못했다. 시선으로 정시현의 등을 따라갔다. 카페 문이 닫히고, 탁자 위에 놓인 물잔 두 개가 나란히 흔들림 없이 서 있었다.
밤, 서지오의 집. 거실 스탠드만 켜져 있었다. 서지오는 소파에 앉아 스마트폰으로 모먼트 앱을 열었다. 빈 칸에서 커서가 깜빡였다.
‘보호자의 그림자’
당신은 내 뒤에 서서 그림자를 덮고 / 나는 그것이 어둠인지 알면서도 / 발걸음을 멈추지 않는다
본문은 짧았다. 세 줄. 사진은 첨부하지 않았다. 배경 색상은 흰색. 업로드 버튼을 누르자 게시물이 피드에 올라갔다.
잠시 후, 스마트폰이 부르르 떨렸다. 좋아요 알림. 모멘토 공식 계정이었다. 서지오는 그 알림을 한참 동안 바라봤다. 손끝이 화면 위를 맴돌았다.
모멘토 사무실. 컴퓨터 앞에 앉은 한다윤의 손가락이 마우스에서 떨어졌다. 화면에는 서지오의 시와, 그 아래 작은 하트 하나.
한다윤은 스마트폰을 집어 들어 강민혁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내일 행사 전까지 이재윤 계정 모니터링 강화해 줘. 혹시 그가 댓글을 달면 즉시 알려줘.’
답장이 곧바로 왔다. ‘알겠다.’
한다윤은 스마트폰을 내려놓고 다시 모니터를 바라봤다. 시의 마지막 줄이 화면에 남아 있었다. ‘발걸음을 멈추지 않는다.’
“멈추지 않아도 돼.”
한다윤은 키보드를 두드려 다른 창을 열었다. 이재윤의 모먼트 활동 로그가 실시간으로 스크롤됐다. 지금까지는 아무 움직임도 없었다.
서지오의 집. 시를 올린 지 20분쯤 지났을 때, 스마트폰이 다시 울렸다. 모먼트 메시지 알림. 발신자는 jyunphoto.
손가락이 얼어붙었다. 서지오는 숨을 들이키고 메시지를 열었다. 화면에 ‘경계의 온도’ 전문이 통째로 캡처된 이미지가 로딩됐다. 그 아래 한 줄.
‘네 시는 내가 알아야만 하는 거야, 지오야.’
스마트폰이 손에서 미끄러져 바닥에 떨어졌다. 화면은 위로 향한 채 메시지 창이 열려 있었다. 서지오의 손이 허공에서 멈췄다. 숨이 나오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