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외의 온도
8화
바닥에 떨어진 스마트폰의 화면이 위로 향해 있었다. 메시지 창은 여전히 열려 있고, 캡처된 시 전문이 희부옇게 빛나고 있었다.
서지오는 그 위로 손을 뻗지 못했다. 허공에서 멈춘 손가락이 가늘게 떨렸다. 숨이 가슴 어딘가에 걸려 올라오지 않았다.
'네 시는 내가 알아야만 하는 거야, 지오야.'
머릿속에서 문장이 메아리쳤다. 익숙한 말투였다. 과거에 수도 없이 들었던, 부드럽지만 선택지를 남기지 않는 그 억양. 너의 모든 것은 내가 알아야만 한다. 네 생각, 네 감정, 네가 쓴 글 한 줄까지도.
스마트폰을 집었다. 손끝에 힘이 없어 두 번 만에 겨우 쥐었다. 화면을 닫지도, 메시지를 삭제하지도 못했다.
그냥 바라봤다. jyunphoto. 차단했던 계정이 아니다.
이건 모먼트 메시지다. 플랫폼 안에서, 익명의 벽 너머에서도 그는 그녀를 찾아냈다.
소파에 주저앉았다. 쿠션이 낡은 스프링 소리를 냈다. 무릎 위에 올려둔 스마트폰이 다시 한 번 울렸다.
'도망치지 마. 네가 쓴 건 결국 나한테 온다고.'
목이 조여왔다. 서지오는 눈을 감았다. 감은 눈꺼풀 안쪽으로 2년 전의 풍경이 스쳐 지나갔다.
작업실 문을 잠그던 손. 휴대폰을 빼앗아 연락처를 검색하던 손가락. 내가 모르는 네 친구가 왜 필요해, 지오야. 그때도 목소리는 부드러웠다.
지금은 다르다. 차단해도 다른 번호로, 모먼트 메시지로, 어떤 경로로든 뚫고 들어온다. 더 이상 피할 구멍이 없다는 걸, 몸이 먼저 알고 있었다. 어깨가 굳고 허벅지에 힘이 들어갔다. 도망칠 수 없는 먹잇감의 생리였다.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손바닥이 차가웠다. 냉장고 소리만 거실에 웅웅거렸다. 시계를 보지 않았지만 시간이 몇 분쯤 흘렀을까. 아니, 몇 분이 아니라 몇 초였을지도 몰랐다.
손가락이 저절로 움직였다. 최근 통화 목록. 한다윤 대표.
어느 순간부턴가 즐겨찾기에 추가돼 있던 이름이 화면 맨 위에 떠 있었다. 북 페어 때 그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내가 옆에 있을게요.' '당신이 허락한 만큼만.'
통화 버튼을 눌렀다. 신호음이 두 번 울리기도 전에 연결됐다.
“편집자님?”
한다윤의 목소리는 평소처럼 밝았다. 하지만 서지오가 숨을 들이키는 소리에 상대가 곧바로 조용해졌다.
“……이재윤이.”
목소리가 갈라졌다. 서지오는 침을 삼켰다.
“이재윤이 제 계정을 다 알고 있어요. 오늘 시를 올렸는데, 올리자마자 전문을 캡처해서 보냈어요.”
수화기 너머로 짧은 정적이 흘렀다. 그 침묵이 오히려 서지오의 호흡을 한 박자 늦췄다.
“언제부터인지 몰라요. 그런데 이젠 정말 끝이에요. 이 사람, 제가 어디에 뭘 쓰든 다 볼 거예요.”
“주소 알려주세요.”
한다윤이 말했다. 애교기 하나 없는, 짧고 건조한 반말이었다.
“지금 갈게요.”
서지오는 대답 대신 숨을 한 번 더 들이켰다. 그리고 들었다. 자신이 입을 열어 집 주소를 말하는 소리를.
한 글자 한 글자, 동 이름부터 집 호수까지. 말하면서도 이상했다. 여기는 아무에게도 알려준 적 없는 은신처였다.
정시현조차 한 번 왔을 뿐인 곳. 그런데 지금, 수화기 너머의 남자에게 현관 비밀번호까지 말하려는 자신을 멈추지 않았다.
“……102동 301호예요. 비밀번호는 제 생일 뒤 네 자리.”
“10분 안에 도착할게요.”
한다윤의 목소리가 다시 한 번 가라앉았다.
“그때까지 아무 문도 열지 마요. 저 말고는.”
전화가 끊겼다. 서지오는 스마트폰을 무릎에 내려놓았다. 손가락이 여전히 떨리고 있었다. 거실 바닥에 놓인 스탠드 불빛이 흔들림 없이 천장을 비추고 있었다.
내가 지금 뭘 한 거지.
스스로에게 묻지 않았다. 이미 알고 있었다. 자신이 처음으로 누군가를 자신의 은신처로 부르고 있다는 사실을.
그리고 그 사실이, 지금 이 순간의 공포보다 덜 무섭지 않다는 것도 알았다. 다만 질감이 다른 두려움이었다. 이재윤에 대한 공포가 찌르는 칼끝이라면, 이것은 어둠 속에서 더듬어 잡은 난간 같았다.
벽시계 초침이 째깍거렸다. 소파에 앉은 채로 팔짱을 꼈다. 그러다 풀었다.
손바닥을 무릎에 문질렀다. 현관문을 바라봤다. 아무 문도 열지 말라는 말이 귓가에 남아 있었다.
거실 구석의 작은 화분에 물을 줬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식탁 위엔 오늘 아침 내린 커피잔이 그대로 놓여 있었다. 평소의 서지오라면 절대 그냥 두지 않았을 일인데, 오늘은 치울 생각조차 나지 않았다.
인터폰이 울렸다.
서지오가 현관으로 걸어갔다. 모니터 너머로 한다윤의 얼굴이 보였다. 이마에 송글송글 땀이 맺혀 있었다. 머리카락이 조금 흐트러져 있었다.
문을 열었다.
한다윤이 한 걸음 안으로 들어왔다. 들어오자마자 멈춰 서서 그녀의 얼굴을 살폈다. 눈가, 입술, 손끝. 천천히, 그러나 놓치지 않는다는 듯이.
“괜찮아요?”
그제야 목소리가 평소 톤을 조금 되찾았다. 하지만 눈은 여전히 웃지 않았다.
“……네.”
서지오가 거실로 돌아서며 소파 위의 스마트폰을 가리켰다.
“여기 있어요. 그 사람이 보낸 메시지.”
한다윤이 그녀의 손을 따라 시선을 옮겼다. 그리고 다시 서지오를 바라봤다.
“봐도 돼요?”
서지오는 고개를 끄덕였다. 목소리가 아닌, 눈 깜빡임으로.
한다윤이 스마트폰을 집었다. 화면을 넘기며 메시지를 확인하는 그의 손놀림엔 군더더기가 없었다. 미간이 살짝 좁아졌다. 화면을 다 읽고 나서도 잠시 동안 그 미간은 펴지지 않았다.
“직접 캡처해서 보낸 거네요. 시간차가 거의 없어요. 올리자마자 받은 거나 다름없어요.”
스마트폰을 조심스럽게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유리와 부딪히는 소리가 작았다.
“이제 내 시는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것 같아요.”
서지오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낮았다. 마치 확인하는 듯한 말투였다. 감정을 실었다기엔 너무 담담했지만, 끝음이 미세하게 떨렸다.
한다윤이 그녀 쪽으로 몸을 돌렸다.
“서지오 씨.”
반말이 아니었다. 그는 지금 이 순간에 한해서만 존댓말을 골랐다. 천천히, 한 글자씩 밟듯이 말했다.
“당신이 허락하지 않으면, 누구도 당신의 세계를 침범할 수 없습니다.”
서지오가 눈을 들었다. 한다윤의 동공이 흔들리지 않았다. 그는 계속했다.
“당신 글에 댓글 다는 것도, 메시지 보내는 것도, 당신이 허락하지 않으면 월권이에요. 이건 지금도 여전히 당신 거예요.”
서지오의 입술이 열렸다 닫혔다.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대신 오른손이 왼쪽 팔꿈치를 살짝 감싸 쥐었다. 천천히, 힘을 풀 듯이.
“……그 사람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한다윤이 짧게 숨을 내쉬었다.
“내가 그렇게 만들게요.”
그 순간, 거실의 공기가 살짝 바뀌었다. 스탠드 불빛은 여전했고 냉장고 소리도 여전했지만, 서지오의 어깨에서 뭔가 조금 내려간 것 같았다. 완전히 풀린 건 아니었다. 하지만 적어도, 굳은 채로 멈춰 있지는 않았다.
한다윤이 말했다.
“여기서 나갈 준비할 수 있어요? 오늘 밤은 제 집에서 지내요. 내일 아침에 같이 법률 상담부터 받고요.”
명령이 아니었다. 질문이었고, 서지오가 대답하기 전까지 그는 한 발짝도 더 다가오지 않았다.
서지오가 현관 쪽을 바라봤다. 가방은 신발장 위에 걸려 있었다. 그 가방을 집기까지 일곱 걸음. 그동안 한다윤은 움직이지 않았다.
가방을 집었다. 스마트폰도 손에 쥐었다. 충전기는, 두고 가기로 했다.
현관에서 신발을 신으며 서지오가 말했다.
“……제발.”
목소리가 한 번 꺾였다.
“나를 데려가 줘요.”
한다윤이 현관문을 열었다. 복도의 형광등 불빛이 서지오의 발끝을 비췄다. 그는 돌아보지 않고, 그러나 분명하게 말했다.
“내가 당신의 모든 경계를 지킬게요. 그러니까.”
잠시 뜸을 들였다.
“도망치지 말아요.”
서지오는 대답하지 않았다. 다만, 한다윤이 걸어간 복도 쪽으로 한 걸음, 따라나섰다.
차 안에 오르기까지, 서지오는 자신의 질문을 수차례 삼켰다. 복도에서 엘리베이터로, 엘리베이터에서 주차장으로 이어지는 침묵 속에서 그 의문은 혀끝까지 올라왔다가도 한다윤이 정확히 반 보 뒤에서 걸음을 맞추는 소리에 밀려 내려가곤 했다. 하지만 고속도로에 진입하고, 가로등 불빛이 규칙적인 간격으로 눈꺼풀을 스치기 시작하자 더 이상 물리기 어려운 무엇이 목구멍을 눌렀다.
차 안은 조용했다. 길게 뻗은 올림픽대로의 가로등 불빛이 2초마다 한 번씩 앞유리를 쓸고 지나갔다. 서지오는 조수석에서 무릎 위에 얹은 손을 바라보고 있었다. 손가락 사이로 창밖의 불빛이 규칙적으로 스쳤다.
그가 먼저 말을 꺼내지 않았다. 차가 신호에 걸릴 때마다 핸들 위에 얹은 손가락만 가볍게 두드렸다. 그 리듬이 이상하게 규칙적이어서, 서지오는 거기에서 의도적인 배려를 읽었다. 내가 말할 때까지 기다리는 거다.
“한다윤 대표님.”
“응.”
대답은 금방 돌아왔다. 서지오는 입술을 살짝 적셨다. 목소리가 갈라질 것 같아 짧게 숨을 들이켰다.
“아까 그 행사장에서…… 이재윤이 제 시를 말했을 때, 대표님이 말씀하셨죠. ‘경계의 온도’ 전문을 아신다는 걸 제가 깨달았던 것 같아요.”
한다윤이 핸들을 고쳐 쥐었다. 손가락이 단단히 감겼다.
서지오는 그의 옆얼굴을 보지 않았다. 대신 계기판의 희미한 빛에 시선을 고정했다.
“어떻게 알고 있었어요. 그 시를, 그렇게 정확히.”
차 안의 공기가 한 겹 두꺼워졌다. 앞차의 브레이크등이 길게 번지자 한다윤이 속도를 줄였다. 그는 운전대를 잡은 채로 잠시 입을 다물고 있었다. 이마를 스치는 가로등 불빛이 그의 눈매를 한 번 깜빡이게 했다.
“지금 그 질문에 대답하면, 편집자님이 이 차에서 내릴 거예요.”
목소리에서 애교가 사라져 있었다.
“나쁜 대답이라서가 아니라. 내 대답이 사실이어도, 편집자님을 설득할 시간이 필요한 거니까.”
서지오의 손가락이 멈췄다.
“당신이 허락할 때, 말씀드리겠습니다. 모든 걸. 지금은 당신이 안전한 게 먼저입니다.”
그의 말투는 더 이상 반존대를 요구하지 않았다. 마음을 정한 뒤의 차분한 반말이었다. 서지오는 계기판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바늘이 시속 60킬로미터를 약간 밑돌고 있었다. 속도를 내지 않는다는 사실이, 오히려 그가 이 길을 벗어날 생각이 없다는 증거처럼 느껴졌다.
“……알겠습니다.”
자신의 목소리가 예상보다 차분해서 스스로도 조금 놀랐다. 손바닥을 무릎 위에서 폈다 쥐었다. 손끝의 떨림이 아직 남아 있긴 했지만, 더 이상 숨이 막히지는 않았다.
한다윤이 왼쪽 깜빡이를 켰다. 차량이 유연하게 차선을 옮겨 탔다. 한남대교 진입로 표지판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서지오는 잠시 눈을 감았다. 이재윤의 메시지 화면이 아직 눈꺼풀 안쪽에 남아 있었지만, 그 위로 계기판의 희미한 빛과 규칙적인 깜빡이 소리가 덧씌워졌다.
*그녀가 내게 손을 내밀었다. 아파트 현관 앞에서, 떨리는 손으로 내 소매를 붙잡고 ‘데려가 달라’고 말했다. 나는 이미 2년 전부터 이 순간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녀의 첫 시, 길지 않은 문장들, 손목 안쪽의 희미한 흉터, 침묵이 길어질 때마다 오른손 검지로 왼손 손톱을 누르는 작은 버릇까지. 나는 이 모든 것을 지켜봤다. 그리고 아직, 그 사실을 말할 수 없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한다윤이 가속 페달을 살짝 밟았다. 차가 한남대교 위로 올라서자 강 건너의 불빛들이 일제히 실내로 쏟아져 들어왔다. 서지오의 감은 눈꺼풀 위로 붉고 푸른 빛이 번졌다.
그녀가 눈을 떴다. 한다윤의 옆얼굴이 강 건너 불빛에 실루엣으로 떠 있었다. 그는 운전에 집중한 눈빛으로 정면을 응시하고 있었다. 두 손이 핸들을 잡은 각도가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았다.
서지오는 다시 눈을 감았다. 이번에는 조금 더 깊게 숨을 들이켰다. 좌석의 온기가 허리와 어깨를 감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