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verStory

예외의 온도

9화

모멘토 사무실은 야근 시간이면 더욱 조용해졌다. 한다윤은 개인 집무실에서 키보드 위에 손을 얹은 채 화면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모니터 두 대가 나란히 켜져 있었고, 왼쪽에는 서지오의 편집부에서 보내온 기획서 PDF가, 오른쪽에는 AI 감성 분석 대시보드가 떠 있었다.

“와…… 대표님 진짜 안 가시네요.”

강민혁이 문틈으로 얼굴을 들이밀었다. 한다윤은 시선을 모니터에 둔 채 대답했다.

“곧 갈 거야. 너 먼저 가.”

“그 말 벌써 한 시간째인데요.”

강민혁이 탁자 위 빈 커피잔을 집어 들었다. 집무실 한쪽에는 오후 내내 쌓인 머그잔이 두 개 더 놓여 있었다. 한다윤이 마우스를 굴려 무언가를 클릭했다. 오른쪽 모니터에 클라우드 폴더가 열렸다. 폴더명은 ‘온도’.

“그 폴더…… 아까도 보고 계셨죠.”

한다윤이 이제야 얼굴을 들었다. 평소보다 차분한 눈빛이었다.

“민혁아.”

“네.”

“내가 지금부터 하는 말, 이 방에서만 듣고 나가.”

강민혁이 문을 닫고 안으로 들어서며 손에 든 커피잔을 조용히 내려놓았다. 한다윤은 클라우드 폴더를 더블클릭했다. 화면 가득 축소판 이미지들이 펼쳐졌다. 모두 모먼트 앱의 캡처 화면. 날짜별로 정리된 폴더가 24개였고, 가장 오래된 것은 2년 전 3월로 표시되어 있었다.

“서지오 씨의 모먼트 계정이야.”

강민혁의 눈이 살짝 커졌다. 한다윤이 스크롤을 내리자 첫 번째 폴더 속 짧은 시 한 편이 보였다.

‘나는 기억하는 사람이다 / 네가 잊은 모든 네 숨의 높낮이를.’

“2년 전 이 시를 처음 봤을 때…… 숨을 못 쉬겠더라.”

목소리가 낮아졌다. 마우스를 쥔 손가락이 미세하게 떨렸다.

“익명 계정이었어. 팔로워도 거의 없었고. 근데 그 짧은 문장들 안에…… 누군가의 모든 계절이 들어 있었어. 나는 그걸 놓칠 수가 없었다.”

강민혁이 숨을 들이켰다.

“그래서…… 2년 동안?”

“처음엔 그냥 알림 설정만 해뒀어. 새 글이 올라오면 바로 읽고 싶어서.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그걸로는 부족해졌다. 모먼트 서버가 언제 글을 내릴지 모르잖아. 그 사람의 시가 사라지는 게…… 견딜 수가 없었어.”

한다윤이 클라우드 폴더를 닫았다. 모니터가 어두워졌다.

“그래서 저장했어. 모든 글. 모든 사진. 그 사람이 올렸다 지운 것까지.”

“그걸…… 그분은 아세요?”

한다윤이 고개를 저었다. 강민혁의 입술이 열렸다 닫혔다. 한다윤은 키보드를 밀어내고 의자에서 일어났다.

“내가 이걸 말하는 이유는 하나야. 이재윤이라는 사람이 지금 서지오 씨 계정을 알아냈어. 나는 그 계정을 지킬 준비가 되어 있고, 넌 내가 어디까지 준비해왔는지 알아야 해.”

강민혁이 한참 만에 입을 열었다.

“……대표님, 그거 스토킹이에요.”

“알아.”

한다윤의 대답은 짧았다. 모니터 전원을 끄며 말을 덧붙였다.

“그러니까 이건 내가 감당할 몫이야. 그녀가 알게 되는 날, 나는 변명하지 않을 거다. 그 전까지는…… 지키기만 하면 돼.”

강민혁이 더 묻지 않았다. 한다윤은 재킷을 집어 들었다. 벽시계는 저녁 7시 12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출판사 건물 앞 인도는 퇴근 인파로 붐볐다. 서지오가 로비를 빠져나와 횡단보도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가방에서 스마트폰을 꺼내려는 순간, 진동이 울렸다.

화면에 번호만 떴다. 저장되지 않은 번호.

걸음이 멈췄다. 손끝이 차가워졌다. 진동이 길게 이어지다 끊겼다. 다시 울렸다. 통화 버튼을 눌렀다.

“……네.”

“오랜만이야, 지오야.”

이재윤의 목소리였다. 숨이 멎었다. 횡단보도 신호등이 붉은 불로 바뀌고, 사람들 사이로 차량들이 앞유리를 반짝이며 지나갔다.

“말 안 해도 돼. 내가 할 말만 하면 되니까.”

이재윤의 말투는 부드러웠다. 서지오는 왼손으로 가방 끈을 움켜쥐었다.

“듣고 있었어. 네 시. 얼음이 녹는 속도. 좋더라.”

스마트폰이 손에서 미끄러질 뻔했다. 한 손으로 벽을 짚었다. 건물 외벽의 차가운 대리석이 손바닥에 닿았다.

“계정도 알고 있고, 글도 다 봤어. 너 혼자라고 생각했지? 아니야. 나는 네가 뭘 쓰는지 항상 알고 있었어. 그게 당연하잖아. 나는 네 숨소리까지 기억하는 사람인데.”

이재윤이 짧게 웃었다. 서지오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주변 사람들이 어깨를 스치며 지나갔다.

“내일 저녁 7시. 내 작업실로 와. 주소는 알지? 안 오면…… 네 편집부 사람들한테도 보여줄 수 있어. 이 시들, 누가 썼는지. 꽤 재밌어할걸.”

서지오가 숨을 들이켰다.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너무 무서워하지 마. 나는 그냥…… 너랑 얘기하고 싶은 것뿐이니까.”

통화가 끊겼다. 서지오는 벽에 기댄 채로 서 있었다. 신호등이 초록불로 바뀌고 다시 붉은불로 바뀌었다.

손가락 끝이 얼음처럼 차가웠다. 숨이 가빠졌다. 과거의 조각들이 귀 안에서 맴돌았다. ‘네 숨소리까지 기억하는 사람인데’라는 문장이 귀에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몸을 일으켰다. 다리가 무거웠다. 횡단보도를 건너지 않고, 몸을 돌려 인근 골목으로 들어갔다.

평소 들르던 카페 간판이 보였다. 손으로 문을 밀었다. 안쪽은 한산했다.

구석 자리에 앉자마자 스마트폰을 꺼내 메시지 앱을 열었다. 한다윤의 이름을 찾았다. 손가락이 떨려서 오타가 세 번 났다. 지우고, 다시 썼다. 마지막에는 겨우 여섯 글자를 눌렀다.

「도와주세요.」

보내기 버튼을 누르고 화면을 내려놓았다. 카페 유리창 너머로 가로등 불빛이 번졌다. 3분도 지나지 않아 답장이 왔다.

「지금 갑니다. 위치 알려주세요.」

서지오가 카페 이름을 전송했다. 테이블 위에 두 손을 올려놓고 깍지를 꼈다. 손가락이 차가웠다.

이재윤의 목소리가 아직 귓가에 맴돌았다. 카페 문이 열리고 누군가 들어왔다. 발걸음이 빨랐다.

한다윤이었다.

그가 곧장 구석 테이블로 걸어왔다. 숨을 살짝 몰아쉬고 있었고, 평소의 여유로운 표정은 사라지고 없었다. 서지오 앞에 쪼그려 앉아 눈높이를 맞췄다.

“무슨 일이에요.”

서지오가 깍지 낀 손을 풀었다. 스마트폰 화면을 켜서 통화 기록을 보여주었다. 손끝이 아직 떨렸다.

“이재윤이에요. 전화가 왔어요.”

한다윤이 화면을 응시했다. 눈동자가 좁아졌다.

“뭐라고 했죠.”

“내 시 계정을 알고 있대요. 모두 다. 처음부터. 그리고 내일 작업실로 오라고…… 안 오면 편집부에 알리겠대요.”

목소리가 마지막 부분에서 갈라졌다. 한다윤이 천천히 일어나 맞은편 의자에 앉았다. 두 손을 테이블 위에 가지런히 올려놓았다.

“안 갑니다.”

단호한 어조였다. 서지오가 얼굴을 들었다.

“안 돼요. 회사에 알리면……”

“알리게 두세요.”

한다윤의 말투가 바뀌었다. 애교도, 미소도 사라진 짧은 단문이었다.

“나는 그쪽이 뭘 알리든 상관없어요. 내가 신경 쓰는 건 당신 상태예요.”

서지오의 눈이 붉어졌다. 아랫입술을 깨물자 한다윤이 잠시 침묵하다 다시 입을 열었다.

“법적 조치를 준비할게요. 지금 이 순간부터.”

“하지만 증거가……”

“통화 기록이 있어요. 그리고 그 사람이 보낸 메시지도 있을 거예요. 지난번 캡처본까지 합치면 충분해요.”

서지오가 숨을 들이켰다. 떨림이 가슴까지 번져서 손바닥 전체가 저렸다. 한다윤이 천천히 손을 내밀었다. 손바닥을 위로 향한 채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잡아도 돼요.”

잠시 망설이다 오른손을 그의 손 위에 올렸다. 한다윤이 손가락을 접어 손등을 감쌌다. 따뜻했다. 손끝의 떨림이 조금씩 가라앉았다.

“나는 당신이 무서워하는 모든 것과 싸울 거예요. 허락한 만큼만.”

한다윤의 목소리는 여전히 낮고 차분했다. 그러나 그 끝에, 거의 들리지 않을 정도로 얇은 긴장이 실려 있었다. 서지오는 고개를 숙였다.

손등 위로 전해지는 체온에 눈꺼풀이 무거워졌다.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카페 안에 잔잔한 재즈가 흐르고 있었고, 창밖은 어둑해져 있었다.

한다윤이 손을 놓지 않았다. 손등 위에 얹힌 손가락이 조금씩 힘을 더했다. 너무 세지 않을 만큼만. 서지오가 그 힘을 느끼며 눈을 감았다.

우리는 자리에서 일어나 저녁 공기를 가르며 청담동 카페에서 한남동 출판사 골목으로 이동했다. 25분 남짓한 거리였다. 한다윤이 운전대를 잡는 동안 서지오는 조수석에서 창밖을 보며 손가락을 꼼지락거렸고, 그 작은 움직임을 놓치지 않은 한다윤이 내비게이션 목적지를 살짝 수정해 출판사 인근 카페로 경로를 바꾸었다.

차가 멎고, 좁은 골목 사이로 난 카페 입구까지 나란히 걸었다. 한다윤이 문을 열어 주었고 서지오가 먼저 안으로 들어섰다.

출판사 인근 카페는 한남대교에서 차로 10분 거리였다. 한다윤이 평소에도 출판사 사람들과 자주 이용하는 곳이라며 안내한 자리는 통유리창을 등진 2인석이었다. 서지오는 의자에 앉자마자 가방에서 휴대폰을 꺼내 테이블 위에 올려두었다. 진동 한 번에 반응할 수 있도록.

“따뜻한 걸로 하나 주문할게요.”

한다윤이 메뉴판을 펼치지도 않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서지오가 시선을 올렸다.

“아까도 말했지만…….”

“괜찮아요. 오늘은 진짜 쉬어야 할 날이에요.”

애교 없는 목소리였다. 서지오가 입을 다물자 한다윤이 카운터 쪽으로 걸어갔다. 셔츠 소매가 팔꿈치까지 걷혀 있었고, 걷어 올린 손목에 시계 따위 없었다. 평소 차던 로즈골드 메쉬 밴드는 오늘 처음 보인다 싶을 정도로 눈에 띄지 않았다.

그가 계산대에서 무언가 단촐하게 주문하는 모습이 보였다. 손가락 두 개로 수량을 표시하고,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덧붙였다. 따뜻한 걸로, 진하게. 서지오는 문득 카페 거울에 비친 자신의 옆모습을 보았다. 목까지 올라온 스웨터 깃 안에 숨은 맥박이 불규칙하게 뛰고 있었다.

테이블 위에 놓인 휴대폰이 짧게 울렸다.

시선이 화면을 향했다. 모먼트 알림도, 메일도 아니었다. 문자 메시지.

발신자 번호는 등록되지 않은 새 것. 예감은 늘 그랬다—확인하기 전에 이미 손끝이 차가워졌다. 메시지를 열었다.

『지오야.

네 시는 참 예쁘더라. 특히 어젯밤 거, ‘얼음이 녹는 속도’. 이제 그만 숨고 나와. 네가 내게 돌아오면 이 모든 건 없던 일로 할게.

하지만 계속 이렇게 나를 피하면…… 어쩔 수 없지. 네 익명 계정, 출판사 동료들한테 공유할 거야. 네가 쓴 모든 시를, 어떤 마음으로 썼는지 하나하나 설명하면서.

내일 저녁 7시까지. 너는 혼자 와.』

문자 아래로 좌표가 찍혀 있었다. 아는 곳이었다. 과거에 그가 작업실 삼았던 한강변의 반지하 공간. 서지오는 화면을 내려놓았다. 글자가 너무 또렷해서 오히려 읽고 나서도 몇 초 동안 의미가 머릿속에 닿지 않았다.

그제야 자신의 손이 떨리고 있다는 걸 알았다. 테이블 위에 평평히 놓인 휴대폰 화면에 손가락 마디가 부딪쳐 작은 소리를 냈다.

한다윤이 쟁반을 들고 돌아왔다. 찻잔 두 개와 작은 유리 포트. 김이 오르는 허브티 냄새가 먼저 도착했다.

그가 서지오의 표정을 보자마자 걸음을 멈췄다. 쟁반을 테이블 위에 조용히 내려놓고, 묻지 않은 채 휴대폰 쪽으로 시선을 내렸다. 서지오가 화면을 밀었다.

한다윤은 석 잔째의 차를 따르듯 천천히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화면을 읽는 얼굴은 평온했다. 아니, 평온한 게 아니었다.

눈웃음이 사라지고 동공 주변이 약간 이완됐다. 읽는 동안 단 한 번, 송곳니가 입술 안쪽을 살짝 눌렀다. 메시지 한 통의 무게를 정확히 알고 있는 사람의 미세한 표정 변화였다.

그가 휴대폰을 테이블 위에 뒤집어 놓았다. 화면이 바닥을 향했다. 손가락을 떼기 전에 0.5초쯤 망설였다. 조용한 분노는 그렇게 증명됐다.

“……과거의 내가 이 번호를 또 차단해도 의미가 없을 거예요.”

서지오의 목소리는 좀 전의 차분함을 억지로 벽돌처럼 쌓아 올린 느낌이었다.

“끝이네요. 이제 정말.”

한다윤이 그녀를 똑바로 바라봤다. 눈을 가늘게 뜨지도, 미간을 찌푸리지도 않았다. 다만 평소 그가 가진 모든 애교가 전원이 꺼지듯 사라졌다.

“네 시는 네 거다. 누구도 네 목소리를 훔칠 수 없어.”

서지오가 얼굴을 들었다. 한다윤은 핸드폰을 들어 자신의 기기로 무언가를 전송하며 계속 말을 이었다.

“기술적으로는 접속 기록과 캡처 로그를 다 추출할 수 있다. 지금부터는 법적 접근과 기술적 증거 확보를 병행한다. 내 변호사에게 바로 공유할 거고, 모먼트 보안팀에도 정식 요청을 넣는다.”

그가 잠시 멈췄다. 무언가를 찾는 듯한 눈빛으로 서지오의 얼굴을 훑었다. 이마에서 턱까지, 천천히.

“네가 예전에 차던 시계, 로즈골드 메쉬 밴드. 그 손목 안쪽의 흉터까지도. 너는 네 몸에 새겨진 모든 시간을 남에게 빼앗겨 본 사람이다.”

어깨가 멈췄다. 한다윤은 계속했다.

“나는 네 과거를 함부로 묻지 않았다. 묻지 않고도 네가 얼마나 많은 선을 긋고 살아왔는지 봤을 뿐이다.”

그가 휴대폰을 내려놓고 찻잔을 서지오 쪽으로 밀었다. 손가락이 찻잔 손잡이에 닿지 않게, 정확히 테이블 매트까지만.

“너는 이제 도망치지 않아도 된다. 네 선은, 내가 지킨다.”

서지오는 찻잔을 잡지 않았다. 그의 말이 한 겹씩 쌓여 안도감을 만들었지만, 그 안도감의 바닥 어딘가에 다른 것이 가라앉고 있었다. 로즈골드 메쉬 밴드.

그 시계는 2년 전에 잃어버렸다. 이사할 때 없어졌고, 이후에는 손목시계 자체를 차지 않았다. 흉터는 더 오래됐다.

대학 시절 유리잔에 베인 자리. 이 일에 대해 말한 것은 정시현 외에는 없었다. 단 한 번도 다른 사람에게 보여준 적도 없었다.

찻잔 표면에 맺힌 김이 흔들렸다. 자신의 숨결 탓이라는 걸 깨닫기까지 한 호흡 걸렸다.

“……그런데 어떻게 내 시계랑 이 흉터를 아는 거예요.”

한다윤이 숨을 멈췄다.

찻잔을 향해 가던 손이 공중에서 정지했다. 카페 안의 희미한 재즈 선율이 갑자기 크게 들렸다. 서지오는 떨리는 손을 무릎 아래로 내렸다.

“대답해 주세요.”

한다윤은 그대로 얼어붙은 채였다. 동공이 한 차례 확장됐다가, 이내 입술을 열었다. 그러나 아무런 소리도 나지 않았다.

예외의 온도9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