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verStory

예외의 온도

10화

한다윤이 숨을 멈췄다.

그 멈춤은 길지 않았다. 서너 호흡. 그러나 그 짧은 시간 동안 카페의 모든 소리가 따로 들렸다.

에스프레소 머신의 증기음. 저쪽 테이블에서 누군가 노트북을 덮는 소리. 서지오 자신의 심장이 갈비뼈 안쪽을 두드리는 둔탁한 진동.

한다윤의 입술이 열렸다. 닫혔다.

“……여기선 안 되겠다.”

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의자 다리가 바닥에 짧게 끌렸다. 서지오는 올려다보지 않았다. 찻잔의 김이 더 이상 흔들리지 않을 때까지 기다렸다.

“집으로 가요.”

한다윤의 목소리에서 애교가 사라져 있었다. 처음 듣는 톤이었다. 마른 나뭇가지가 부러지는 소리 같았다.

“거기서 다 말할게요.”

서지오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한다윤의 얼굴은 평소보다 창백했고, 턱선이 굳어 있었다. 웃을 때 반달 모양으로 휘던 눈이 지금은 그냥 호박색 유리알이었다.

“……좋아요.”

차 안은 조용했다. 한다윤이 운전하는 동안 서지오는 창밖만 바라봤다. 가로등 불빛이 유리창을 스치고 지나갈 때마다 자신의 얼굴이 희미하게 비쳤다. 표정 없는 얼굴. 그게 낯설지 않았다.

손끝이 아직 차갑다.

찻잔을 잡지 않은 채로 나온 탓이었다. 로즈골드 메쉬 밴드. 그 단어가 뇌리를 떠나지 않았다. 2년 전 이삿짐을 풀던 날, 시계가 없어진 걸 알았을 때의 그 허전함까지 함께.

한다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신호등 앞에 설 때마다 손가락으로 핸들을 짧게 두드렸다. 그 리듬만으로 그가 지금 얼마나 긴장했는지를 알 수 있었다.

차가 한남동 쪽 저층 빌라 앞에 멈췄다.

현관문을 열자 시더우드 향이 났다. 처음 왔을 때와 똑같은 향.

거실 불이 켜졌다. 한다윤은 서지오가 소파에 앉는 것도 기다리지 않고 서 있었다. 외투도 벗지 않았다. 서지오는 천천히 소파 앞에 섰다.

“말해 주세요.”

한다윤이 숨을 들이쉬었다. 그리고 한 걸음 다가왔다. 정확히 테이블 하나를 사이에 둔 거리에서 멈췄다. 그가 테이블 위에 올려둔 태블릿을 가리켰다.

“저걸 먼저 보는 게 빠를 거예요.”

서지오의 시선이 태블릿으로 향했다. 화면은 이미 켜져 있었다. 클라우드 폴더 하나가 열려 있었고, 폴더명은 날짜별로 정리된 일련의 숫자였다.

“비밀번호는 없어요.”

서지오가 태블릿을 들었다.

첫 번째 폴더를 열었다. 2년 전의 날짜. 썸네일들이 화면을 채웠다.

그녀의 모먼트 게시물들이었다. 밤하늘 사진에 흰색 텍스트로 올렸던 첫 시. 그 다음 시.

지우고 새로 올렸던 사진들. 올렸다 내린 글들까지 모두 스크린샷으로 저장되어 있었다.

다음 폴더. 그 다음 폴더.

계절별로, 달별로, 어떤 것은 주제별로 분류된 시리즈 폴더도 있었다. ‘겨울’, ‘경계에 관하여’, ‘녹는 점’.

손끝이 떨렸다. 태블릿 화면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서지오는 마지막 폴더까지 열었다. 가장 최근 날짜. 어젯밤 올렸던 시 ‘얼음이 녹는 속도’의 캡처본이 거기에 있었다. 이재윤이 보낸 협박 메시지의 그 캡처와 똑같은 구도. 그러나 이 파일의 캡처 시간은 그녀가 올린 지 3분 후였다.

태블릿을 내려놓았다. 손이 제멋대로 움직여 태블릿이 테이블 모서리에 부딪혔다.

“2년이에요.”

한다윤의 목소리가 뒤에서 들렸다. 서지오는 돌아보지 않았다.

“당신이 모먼트에 첫 시를 올린 날부터.”

“……어떻게.”

“jyunphoto 계정을 분석하다가 발견했어요. 당신이 올린 시에 이재윤이 ‘좋아요’를 누른 기록. 그걸 따라갔더니 당신 계정이었고.”

한다윤의 말투에는 더 이상 망설임이 없었다. 건조하고 짧은 문장들. 서지오는 그제야 그가 외투도 벗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다. 그 역시 도망칠 준비가 되어 있었던 걸까.

“처음엔 이재윤의 접근 패턴을 파악하려고 지켜본 거였어요. 그런데…….”

한다윤이 잠시 멈췄다.

“당신의 시를 읽었어요. 첫 시에서, 그 표현들이. 그냥, 멈출 수가 없었어요.”

서지오는 소파 팔걸이를 짚었다. 다리가 조금 풀렸다. 배신감이라는 단어보다 빠르게 밀려드는 건 소름이었다. 누군가가 2년 동안 자신의 모든 내면을 저장하고 분류하고 보관했다. 동의도 없이.

그런데도 지금 이 순간, 그녀의 심장은 분노보다 빠르게 뛰고 있었다.

“네가 선을 넘은 거야.”

서지오의 목소리가 낮게 갈라졌다. 한다윤이 바로 대답했다.

“알아.”

“나는…… 나는 여태 너한테 아무것도 허락한 적 없어. 시는 내 거였고, 그 계정은 익명이었고, 난 그걸 지키려고…….”

목소리가 떨리기 시작했다. 서지오는 이를 악물었다.

“왜 말하지 않았어요.”

한다윤이 숨을 들이쉬었다. 그가 테이블 반대편에 앉았다. 서지오는 여전히 서 있었다. 두 사람의 높낮이가 뒤바뀐 구도였다.

“당신은, 당신의 시를 아무에게도 보여주지 않았어요. 그게 당신의 경계였고, 나는 그 선을 넘으면 당신이 사라질 거란 걸 알았어요.”

“그렇다고 이게…….”

“데이터는 단 한 번도 외부로 나간 적 없어요.”

한다윤의 목소리가 무거워졌다. 애교도, 빈틈도 없었다. 26세의 청년이라기보다 오래 버텨온 무언가에 가까운 소리였다.

“모멘토 솔루션에도 쓰지 않았어요. 강민혁한테 보여준 것도 분석 태그 익명 통계뿐이고. 당신의 시 전문은…… 내가 읽었어요. 오직 나만.”

서지오는 태블릿을 다시 보았다. 화면 속 폴더들. 2년의 시간이 그 작은 아이콘들로 정리되어 있었다.

“왜.”

한다윤이 고개를 들었다.

“왜 그렇게까지.”

긴 침묵.

“처음 읽은 날 밤, 다섯 번을 다시 읽었어요.”

한다윤이 손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손가락이 살짝 오그라들었다.

“당신이 무슨 색으로 세상을 보는지 알고 싶었어요. 어떤 온도에서 마음이 닫히는지. 언제 숨을 들이쉬고, 어떤 단어를 쓰지 않는지.”

그가 손을 폈다.

“그게 내가 아는 가장 가까운 거리였어요.”

서지오의 눈이 태블릿 화면에 고정되었다. 2년 전 오늘. 지금쯤이면 첫 시를 올렸을 계절이었다.

폴더를 열었다. 밤하늘 사진. 그 위에 써넣었던 문장들.

‘나는 기억하는 사람이다 / 네가 잊은 모든 네 숨의 높낮이를.’

그 시구를 한다윤은 2년 동안 가지고 있었다.

서지오가 소파에 앉았다. 다리가 더 이상 버티지 못했다.

릴리프 플래닝 회의 때였다. 누군가 표절 시비를 걱정했을 때, 한다윤이 회의실에서 정확히 말했었다. ‘문장은 온도로 기억되니까요.’ 그때 그녀는 그 말을 듣고 문득 시선을 돌렸다. 다른 사람들은 못 들은 척 지나갔지만, 그녀의 머릿속에는 그 말이 꽂혔다.

그리고 책 제안서를 받고 고민하던 날. 한다윤은 이렇게 말했다. ‘두 번째 원고가 더 따뜻하다고 생각하실 거예요.’ 그녀가 아직 입 밖에 내지 않은 생각을 정확히 짚어냈다.

AI 감성 분석 솔루션은 그런 게 가능하다고 그가 설명했었다. 텍스트로 감정 온도를 측정한다고.

그러나 지금 생각하면 그 정밀함은 기술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2년 동안 오직 한 사람의 글을 읽고 분석하고 저장한다면, 아마 그 사람의 숨결까지도 예측하는 건 당연한 귀결이었을 것이다.

“그때…….”

서지오의 입술이 움직였다.

“릴리프 플래닝 회의에서. 네가 내 생각을 정확히 짚었잖아요. 그게 AI 때문이라고 생각했는데.”

한다윤이 침묵했다.

“그런데 아니었네요.”

“……아니었어요.”

“네가 그냥, 진짜로 나를 봤구나.”

한다윤의 숨소리가 한 번 흔들렸다. 그가 고개를 숙였다. 어깨가 미세하게 떨렸다가 멈췄다.

서지오는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분노는 아직 남아 있었다. 배신감도 그대로였다.

하지만 그 감정들과 함께, 지금 무언가가 조금씩 이름 붙여지고 있었다.

2년 동안 한 번도 선을 넘지 않은 남자. 이 집에 데려왔을 때도 손을 잡지 않은 남자. 이재윤의 협박 앞에서 분노했지만 서지오의 결정을 빼앗지 않았던 남자.

“손.”

서지오가 낮게 말했다. 한다윤이 고개를 들었다.

“떨리는 거, 알고 있었어요.”

서지오가 자신의 손을 내려다봤다. 떨림은 아직 남아 있었다. 한 손으로 다른 손을 감쌌다. 손끝이 차가웠다.

“직접 말했다면…… 나는 도망쳤겠네요.”

한다윤이 천천히 시선을 올렸다. 그의 눈동자에 거실 조명이 작게 박혀 있었다. 그곳에 담긴 건 요구가 아니었다. 기다림이었다.

“선을 넘었다고 생각해요.”

서지오가 태블릿을 들었다. 화면의 폴더들을 한 번 더 훑었다.

“그런데 그게 나를 해치려는 게 아니었다는 것도…… 이제는 알아요.”

한다윤이 아주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그가 손을 내려 테이블 위에 올렸다.

서지오가 다시 태블릿을 내려다봤다. 폴더들을 넘기다가 문득 손가락이 멈췄다. 나머지 폴더들과 다른 이름이 하나 눈에 띄었다.

‘법적 문제가 없도록 정리된 데이터’

서지오의 눈썹이 좁혀졌다. 폴더를 열었다. 그 안에는 엑셀 파일 하나, PDF 몇 개, 그리고 법무법인 명함 이미지 한 장이 들어 있었다. 파일 생성 날짜는 최근이었다.

강민혁의 이름이 엑셀 파일 속성에 적혀 있었다.

“……이건 뭐지.”

서지오가 태블릿을 들어 한다윤에게 보였다. 화면 속 폴더명이 거실 조명 아래서 또렷했다. 한다윤의 얼굴에 긴장이 스쳤다. 그가 입술을 열었다. 그리고 다물었다.

예외의 온도10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