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외의 온도
11화
아침 햇살이 창틀을 한 뼘쯤 넘어왔을 때, 서지오는 소파에서 일어났다. 어젯밤 이대로인 채 잠든 모양이었다. 테이블 위에 놓인 스마트폰을 집어 들었다. 배터리가 12퍼센트 남아 있었다.
밤새 세 번 깼다. 한 번은 손목 흉터를 만지다가, 한 번은 냉장고 모터 소리에, 한 번은 아무 이유 없이. 그때마다 거실 창밖의 가로등을 확인했다. 여전히 켜져 있는지, 꺼졌는지.
서지오는 충전기를 연결하고 욕실로 향했다. 찬물에 손을 씻었다. 거울을 보지 않았다.
부엌으로 나와 물을 끓였다. 포트가 끓는 동안 스마트폰을 다시 집어 들었다. 통화 목록을 열었다. 맨 위에 박혀 있는 이름을 바라봤다. 손가락이 화면 위를 맴돌았다.
물이 끓었다. 포트의 스위치가 올라갔다.
그녀가 통화 버튼을 눌렀다.
신호음이 두 번 울리기도 전에 연결됐다.
수화기 너머에서 숨소리가 먼저 들렸다. 긴 침묵. 그리고 한다윤의 목소리.
“……서지오 씨.”
애교 없는 단문이었다. 잠 한숨 못 잔 티가 역력했다. 서지오는 의자 등받이에 기대지도 않고 서 있었다.
“어젯밤에 태블릿에 있던 폴더요.”
한다윤이 숨을 멈췄다.
“법적 문제가 없도록 정리된 데이터. 그거, 강민혁 변호사가 한 거죠.”
“맞아.”
“당신이 시킨 거예요.”
한다윤이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그 소리가 수화기 전체를 채웠다.
“내가 부탁했어.”
서지오는 식탁 의자를 빼서 앉았다. 한 손으로 찻잔을 감쌌다. 도자기의 열기가 손바닥에 번졌다.
“시계는요.”
“……응?”
“내가 2년 전에 잃어버린 시계. 그걸 어떻게 알았냐고요.”
한다윤이 대답하지 않았다. 서지오는 찻잔을 내려다봤다. 흰 잔 바닥에 티백이 가라앉아 있었다.
“당신 그 시계를 주웠죠.”
수화기 너머에서 숨이 한 번 끊겼다.
“2년 전에.”
“……맞아.”
서지오가 눈을 감았다. 감은 눈꺼풀 안쪽으로 거실 조명이 붉게 번졌다. 그날 비 오던 저녁이 떠올랐다.
이사하던 날이었다. 박스를 나르다가 손목이 가벼워진 걸 알아차렸다. 시계가 없었다.
빗속을 몇 번이나 왔다 갔다 했지만 찾지 못했다. 로즈골드 메쉬 밴드. 어머니가 남긴 유일한 물건이었다.
“어디서요.”
“한강진역 2번 출구 앞.”
한다윤의 목소리는 여전히 무게감이 실려 있었다. 농담기도 애교기도 없었다.
“비 오는 날이었어. 네가 박스 세 개를 들고 내리고 있었지. 지하철 계단에서.”
서지오는 대답하지 않았다.
“시계가 떨어졌는데 못 봤더라고. 내가 주웠는데…… 넌 이미 택시에 올랐고.”
한다윤이 잠시 멈췄다.
“그리고 나는 그 시계를 돌려주려고 너를 찾기 시작했어.”
서지오의 손가락이 찻잔 손잡이를 꽉 쥐었다. 관절이 하얘졌다. 그녀가 입을 열었다. 닫았다. 그리고 낮게 말했다.
“2년 동안…… 당신이 찾아낸 게 그 시계 때문이에요?”
“처음에는 그래.”
한다윤의 목소리에 미세한 균열이 실렸다.
“시계 주인을 찾으려고 모먼트를 뒤졌어. 인스타그램도. 아무것도 없더라. 그런데 몇 달 뒤에 이재윤 계정에서 네 시를 발견했고……”
그가 삼켰다.
“거기서부터는…… 시계 때문이 아니었어.”
서지오가 찻잔을 내려놓았다. 도자기가 식탁에 닿는 소리가 작았다.
“네가 세상을 보는 색이 궁금했어. 네 마음의 온도가 궁금했어. 네 숨결의 높낮이가 알고 싶었고.”
한다윤의 말이 점점 느려졌다.
“선을 넘었다는 걸 알아. 처음부터, 매 순간…… 하지만 멈출 수가 없었어.”
서지오는 창밖을 바라봤다. 햇살이 더 깊어져 있었다. 책상 위에 어젯밤 가지고 온 태블릿이 놓여 있었다.
폴더 속 엑셀 파일, PDF, 강민혁의 명함 이미지. 그 위에 쌓인 날짜들. 그가 네 결정을 빼앗지 않았다는 증거들.
“당신 말대로요.”
서지오가 천천히 말했다.
“직접 말했으면 나는 도망쳤을 거예요.”
수화기 너머에서 한다윤이 숨을 들이켰다.
“하지만…… 도망가지 않아도 되는 이유를 당신이 만들었어요. 2년 동안.”
서지오는 제 손등을 내려다봤다. 더 이상 떨리지 않았다.
“아직 완전히 괜찮은 건 아니에요.”
그녀가 한 호흡을 두었다.
“하지만 당신이 선을 넘지 않았다는 건 인정해요.”
한다윤의 숨소리가 멎었다. 서지오가 허리를 폈다. 척추가 반듯하게 세워졌다.
“그리고 이재윤…… 혼자 마주하지 않겠다고 했었죠.”
찻잔에 담긴 차가 조금 식어 있었다. 그녀가 잔을 한 번 더 감쌌다.
“약속 지켜주세요. 함께 마주해요.”
수화기 너머에서 긴 침묵이 흘렀다. 심호흡 한 번. 한다윤이 다시 입을 열었을 때 그의 목소리는 축축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애교 없이, 그러나 무게감은 조금 풀린 톤이었다.
“고마워, 서지오 씨.”
그가 천천히 말을 이었다.
“내가 바로 갈게. 만나서…… 구체적인 이야기 하고 싶어.”
서지오는 찻잔을 들어 한 모금 마셨다. 따뜻했다. 그녀가 대답했다.
“네. 기다리고 있을게요.”
통화가 끝났다. 서지오는 스마트폰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화면에 통화 종료 표시가 떠 있었다. 그녀가 잠시 그 화면을 바라보다가 일어났다. 커튼을 활짝 걷었다.
거실 가득 아침 햇살이 쏟아져 들어왔다.
모멘토 사무실 유리문 너머로 오전 햇살이 복도를 가로질렀다. 서지오는 한다윤의 뒤를 따라 회의실로 들어서며 시계를 확인했다.
밤새 거의 잠들지 못했지만 손끝 떨림은 멎은 지 오래였다. 태블릿 건을 마무리한 뒤 집으로 돌아가 샤워를 하고, 다시 나왔다. 한다윤에게서 먼저 연락이 왔다. 강민혁과 정시현을 부르겠다고 했다. 서지오는 망설이지 않았다.
회의실 문이 열리고 정시현이 들어왔다. 평소보다 빠른 걸음이었다. 서지오의 얼굴을 확인하고서야 숨을 한 번 깊게 들이쉬었다.
“야, 무슨 일인지 자세히는 못 들었어. 괜찮아?”
“앉아요.”
서지오가 말했다. 정시현은 더 묻지 않고 의자를 끌어당겼다.
강민혁이 마지막으로 들어왔다. 손에 얇은 서류 묶음과 태블릿을 들고 있었다. 한다윤과 눈을 한 번 마주치고 자리에 앉았다.
“데이터 분류 보고서 가져왔습니다.”
강민혁이 서류를 탁자 위에 내려놓으며 말했다. 한다윤에게는 반말을 쓰지만 회의실 안에서는 기본적으로 존대를 썼다. 서지오는 그 서류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들었다.
“본론부터 말할게요.”
한다윤이 자리에 앉으며 입을 열었다.
“이재윤이 서지오 씨한테 협박성 연락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강도가 올라가고 있어요.”
정시현의 표정이 굳었다. 그녀가 손가락으로 탁자 모서리를 한 번 두드렸다.
“내가 작년에 그 자식한테 경고했었어.”
정시현이 말했다. 목소리가 평소보다 반 톤 낮았다.
서지오의 시선이 정시현에게로 옮겨갔다. 정시현은 잠시 입술을 말아 물었다. 그리고 어미를 딱 끊어 말했다.
“북 페어 끝나고 얼마 뒤야. 이재윤이 출판사 근처까지 왔더라. 로비에서 마주쳤어.”
“무슨 말을 했습니까.”
강민혁이 물었다.
“선배한테 다시 접근하지 말라고. 안 되면 내가 경찰서 갈 거라고.”
정시현은 말을 마치고 서지오를 돌아봤다.
“말 안 한 건 미안해. 선배한테 알리면 선배가 더 예민해질까 봐. 근데 내가 좀 더 일찍, 더 강하게 했어야 했어.”
잠시 침묵이 흘렀다. 서지오는 정시현을 바라보며 눈을 깜빡였다. 정시현의 왼쪽 귀걸이 세 개가 형광등 아래서 희미하게 반짝였다.
그녀가 나서서 누군가에게 경고했다. 서지오가 모르는 사이에. 복도에서, 문 밖에서, 전화 너머에서. 그런 일이 있었다.
“미안할 필요 없어요.”
서지오가 말했다. 목소리가 차분했다.
“그런 적이 있었군요.”
“경고 수준으로는 안 끝날 사람이야, 그 남자.”
정시현이 고개를 저었다.
“그래서 준비했습니다.”
강민혁이 끼어들었다. 그가 서류 묶음 위를 손가락으로 짚었다.
“모멘토 클라우드 안에 있는 서지오 씨 게시물 데이터를 전부 법적 기준으로 분류해뒀습니다. 익명 데이터로 편입된 지 오래됐고, AI 감성 분석의 표본 코드로 등록돼 있어요.”
그가 태블릿을 켜서 화면을 돌렸다. 폴더 구조가 트리 형태로 표시되어 있었다. 날짜별 시, 이미지 파일, 삭제 기록. 그리고 옆에는 ‘법적 보관 코드’라고 적힌 별도 탭이 있었다.
“감성 태그 값만 추출한 메타데이터와 원본 데이터를 완전히 분리했습니다. 공개 협박을 시도하더라도 유출된 원본을 입증할 경로는 단절돼 있습니다. 만약 그쪽에서 유포하면……”
강민혁이 잠시 말을 끊었다. 한다윤을 쳐다봤다. 한다윤이 미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오히려 협박 시도와 불법 유출의 증거가 됩니다.”
서지오는 태블릿 화면을 가만히 들여다봤다. 어젯밤 자신이 두려움과 분노로 뒤적였던 그 폴더들. 강민혁과 한다윤은 같은 데이터를 두고 다른 작업을 해두었다. 한쪽은 감성을 수집했다. 다른 한쪽은 법적 안전장치를 마련했다.
“나도 이거 받고 나서야 알았습니다만.”
강민혁이 짧게 덧붙였다.
“처음에는 한다윤 대표한테 무슨 짓을 한 거냐고 따졌어요. 근데 그쪽 설명을 듣고……”
강민혁이 서지오를 똑바로 보며 말했다.
“데이터 자체는, 악용될 구석이 없었습니다.”
한다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두 손을 테이블 위에 얹고 앉아 있을 뿐이었다. 평소처럼 애교를 섞지도, 침묵을 깨려고 애쓰지도 않았다.
서지오는 태블릿에서 시선을 뗐다.
“변호사는.”
“준비했습니다.”
강민혁이 곧바로 서류 안쪽에서 명함 한 장을 꺼내 밀었다. 로펌 로고가 왼쪽 상단에 찍혀 있었다.
“사이버 명예훼손, 스토킹 처벌법 쪽으로 경험 많은 분입니다. 연락처는 제가 공유해드리고요.”
명함을 집어 들며 서지오가 잠시 크기를 가늠했다. 작은 종이 한 장. 이 종이가 이재윤과의 마지막 줄다리기에서 방패 역할을 할지 몰랐다.
정시현이 팔짱을 풀며 상체를 앞으로 기울였다.
“그 인간, 협박할 때 패턴이 있어. 처음엔 부드럽게 시작해. 감정 자극하고, 흔들리면 그때 세게 덮쳐.”
“알고 있습니다.”
서지오가 낮게 대답했다.
“근데 그걸 아는 거랑 대비하는 건 달라. 선배가 직접 마주할 생각이면, 호흡 먼저 챙겨. 그 남자 앞에서 침묵 길어지면 그쪽이 파고들어.”
정시현의 말에 서지오가 눈을 감았다가 떴다. 과거에는 침묵할수록 이재윤이 가까워졌다. 말을 아끼는 동안 더 많은 문장을 들이밀었다. 지금은 다르다는 걸, 당장 몸으로 증명해야 하는 자리였다.
“내일 직접 만나겠습니다.”
서지오가 또렷하게 말했다. 회의실 공기가 순간 멈췄다. 한다윤이 고개를 들었다.
“장소는 그쪽이 정하게 할 겁니다. 오든 안 오든 협박엔 변함이 없으니까요.”
“저도 동의합니다.”
한다윤의 목소리가 무게를 내렸다. 모든 애교가 꺼진, 건조한 단문이었다.
“나는 그 자리에 함께 있겠습니다.”
정시현이 한다윤을 바라봤다. 강민혁은 이미 수첩을 꺼내 메모를 시작했다. 서지오는 명함을 조심스럽게 재킷 안주머니에 넣었다. 가슴께에 단단히 밀착되는 감촉이 있었다.
저녁, 서지오의 집 거실.
등받이에 걸친 한다윤의 재킷이 소파 한쪽에 놓여 있었다. 그는 작은 보온병에서 차를 따라 건네며 아무 말도 걸지 않았다. 서지오는 식탁에 놓인 노트북을 닫고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배터리는 34퍼센트.
그때 모먼트 알림음이 짧게 울렸다.
서지오가 메시지 창을 열었다. 발신자는 jyunphoto.
“내일 오후 3시, 출판사 옆 카페로 와. 안 오면 네 시의 정체와 계정을 전부 공개한다.”
글자들이 한꺼번에 시야에 들어왔다. 서지오의 손가락이 순간 경직됐다. 손목 안쪽 흉터 부근이 뻐근하게 당겨왔다. 호흡이 한 박자 늦어졌다.
한다윤이 손을 내밀려다가 멈췄다. 그가 서지오의 손이 아닌, 휴대폰을 든 그녀의 손목 주변을 응시했다.
서지오가 천천히 손을 내려 휴대폰을 한다윤 앞으로 밀었다. 화면이 그에게 그대로 보이게.
“왔군요.”
한다윤이 메시지를 읽었다. 턱선 근육이 순간적으로 긴장했다.
“3시. 카페.”
서지오가 말했다. 떨림이 손목에서 팔꿈치까지 올라왔다가 천천히 빠져나갔다. 그녀는 고개를 들어 한다윤을 똑바로 바라봤다.
“함께 가요.”
한다윤이 손을 들어 휴대폰을 조심스럽게 밀어 되돌렸다. 그의 손가락 끝이 서지오의 손등 가까이에 닿을 듯 멈췄다가 떨어졌다.
“내가 뒤에 있을게. 네가 손들 때까지.”
그가 말했다. ‘다’ 체로 끝나는 단문. 눈빛이 무거웠다.
서지오는 휴대폰을 다시 손에 쥐었다. 화면 속 메시지가 빛을 내며 대기하고 있었다. 지워지지 않았다. 이제 괜찮았다.
서지오가 한다윤에게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