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넨의 느린 여관
11화
탁자 위에 식은 차가 두 잔 놓여 있었다. 린은 의자에 기대 눈을 감고 있었고, 나는 증축 승인 서류 사본의 귀퉁이를 손가락으로 접었다 폈다 하고 있었다. 빗소리는 여전했다.
문이 열렸다. 베른이었다. 어깨에 빗물이 얹혀 있고, 왼손에는 천으로 감싼 긴 물건을 들고 있었다.
“대장간 열기 전에.”
린이 눈을 떴다. 베른은 탁자 앞까지 걸어와 천을 풀었다. 녹슨 검이 드러났다. 날에 군데군데 패인 자국이 있었지만, 손잡이 부분은 깨끗하게 손질돼 있었다.
“이걸로 사람을 지킬 수 있다.”
“대장간에서요?”
베른은 칼자루를 내 쪽으로 돌려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검 끝이 나무판에 살짝 닿으며 둔탁한 소리를 냈다.
“옛날 물건이다. 내가 썼다.”
린이 자세를 고쳐 앉았다. 베른은 왼쪽 다리를 살짝 굽히며 탁자 모서리에 손을 짚었다. 절뚝임이 평소보다 두드러졌다.
“스물셋에 모험가였다. 산 너머 유적까지 갔고, 괜찮은 파티였다.”
말을 끊었다. 창밖을 한 번 흘깃 보더니 덧붙였다.
“무릎 아래를 잃었다. 지금은 의족.”
“그걸 왜 저한테.”
“위험해질 수도 있다.”
베른이 품에서 접은 종이를 꺼냈다. 폐쇄 명령서 원본이었다. 손가락으로 하단의 도장을 짚었다.
“이 문장. 마을 회의 공식 도장과 다르다.”
나는 일어서서 종이를 들여다봤다. 확실히 예전에 봤던 위생 점검표의 도장과 선 굵기가 달랐다. 인주 색도 조금 더 붉었다.
“위조?”
“확인 필요.”
베른은 검을 내 쪽으로 밀었다. 나는 잠시 망설이다가 손끝으로 칼등을 따라 긁었다. 녹 가루가 손가락에 묻어났다.
“날이 살아 있네요.”
“손질은 해뒀다.”
린이 입을 열었다. “누구한테 확인할 생각이야.”
“정오 마차. 바르토라는 옛 동료가 온다. 필적과 문장 감별에 밝다.”
베른은 이미 문 쪽으로 몸을 돌리고 있었다. 천으로 검을 다시 감싸려는 손짓을 내가 막았다.
“검은 여기에 두고 가시죠. 들고 정류장까지 가면 눈에 띕니다.”
베른은 반 박자 멈추더니 고개를 까딱했다. 서류를 웃옷 안주머니에 넣었다.
“돌아올 때 확인서 가져온다.”
문이 열리고 닫혔다. 빗소리가 잠깐 커졌다가 다시 일정해졌다. 나는 검을 벽에 기대 세웠다. 린이 차를 한 모금 마시며 중얼거렸다.
“옛 동료라. 대장장이도 참 인맥이 넓네.”
정오 직전, 빗줄기가 약간 가늘어졌다. 마차 정류장의 나무 지붕 밑에 베른이 서 있었다. 왼손으로 서류를 눌러쥐고 오른손은 외투 주머니에 넣은 채였다.
멀리서 말발굽 소리. 마차 한 대가 물안개를 뚫고 들어왔다. 마부가 고삐를 당기자 바퀴가 자갈을 밟으며 멈췄다.
문이 열리고 중년 남성이 내렸다. 가죽 조끼에 짧은 회색 머리, 손목에는 잉크 얼룩이 여러 개 묻어 있었다.
“베른. 오랜만이군.”
베른은 대답 대신 서류를 펼쳐 내밀었다. 바르토는 안경을 꺼내 쓰고는 도장 부분을 가까이 들여다봤다.
잠시 후. “이거…… 작년 가을부터 도는 위조 문장이다. 아인발트 소국 귀족들이 땅 살 때 자주 쓰더군.”
“확실해.”
“틀림없어. 선 긋는 순서가 다르다. 진짜 마을 회의 도장은 바깥 원부터 찍는데, 이건 안쪽 십자 먼저야.”
바르토는 조끼 안주머니에서 작은 잉크병과 펜을 꺼냈다. 정류장 벤치에 서류를 올려놓고 빈 여백에 몇 줄을 빠르게 적었다.
“목격 증언을 서면으로 남긴다. 이걸로 공식 기록에 쓸 수 있을 거야.”
쓰기를 마친 바르토가 종이를 건넸다. 서명 밑에 작은 인장까지 찍혀 있었다.
베른은 종이를 받아 들고 턱을 한 번 당겼다. 바르토는 펜을 정리하며 피식 웃었다.
“인사치곤 꽤 괜찮은 표정이군.”
마부가 채찍을 가볍게 휘둘렀다. 바르토는 마차에 오르며 손을 한 번 들었다.
“조심해라. 위조 서류 돌리는 놈들치고 순순히 물러나는 꼴 못 봤다.”
마차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베른은 확인서를 반으로 접어 서류 원본과 함께 외투 안에 넣었다. 빗물이 정류장 처마 끝에서 떨어져 그의 장화 옆에 작은 웅덩이를 만들었다.
베른은 발걸음을 돌렸다. 절뚝이는 걸음이 평소보다 조금 더 빨랐다. 여관으로 향하는 길이었다.
계단을 내려가며 린이 뒤에서 말했다.
“베른은 아직 멀었나.”
“곧 도착하겠지.”
지하 창고의 공기는 차고 습했다. 선반에 정리된 식자재 사이로 촛불이 흔들렸다. 린이 허브 더미를 가리켰다.
“여기서 버섯이 나왔어. 나머지도 다시 확인한다.”
“그래.”
나는 손을 뻗어 허브 묶음을 하나씩 들어 올렸다. 마른 캐모마일 줄기 사이로 뭔가 바스락거렸지만 벌레였다. 한숨이 새어나왔다.
“한국에서는 이런 실수로 사표 썼을 텐데.”
“뭐.”
린의 눈길이 내 옆얼굴에 꽂혔다. 아차 싶었지만 이미 늦었다.
“그냥 혼잣말이야.”
린은 더 묻지 않았다. 그 대신 선반 구석의 상자를 끌어당겼다.
“이거.”
먼지 쌓인 나무 상자였다. 뚜껑을 열자 곰팡이 냄새가 올라왔다. 안에는 오래된 장부 몇 권과 천 조각, 그 아래에 가죽 표지의 작은 수첩이 있었다.
“전 주인 물건.”
내가 집어 들었다. 낡은 가죽이 손가락 끝에 바스러질 듯 말랑했다. 첫 장을 펼치자 빼곡한 필체가 촛불 아래 드러났다.
‘봄비가 길다. 마르타가 지붕을 걱정한다. 빵집 일도 바쁠 텐데 매일 들르는 게 대견하고 고맙다.’
손이 멈췄다. 두 번째 장을 넘겼다.
‘오늘 마르타와 저녁을 함께했다. 호밀빵과 양파 수프. 그녀가 웃는 모습을 오래 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뭐야.”
“일기장인가 보네.”
린이 내 옆으로 다가왔다. 같이 페이지를 훑었다. 날짜가 몇 달 건너뛰더니 갑자기 짧은 문장이 나타났다.
‘상단 유치 실패. 전 재산을 날렸다. 마르타가 마을 회의에서 나를 변호했지만 표결은 4대 1. 그녀만 손을 들었다.’
다음 장은 잉크가 번져 있었다. 물방울 자국 위로 글씨가 흐릿하게 이어졌다.
‘마을을 떠날 생각은 없다. 하지만 여관은 앞으로 마르타에게 더 큰 짐이 될지 모른다. 그녀가 나 때문에 의원직을 버리게 해서는 안 돼.’
나는 수첩을 덮었다. 손바닥 안의 가죽이 뜨겁게 느껴졌다.
“마르타 님과 연인이었어. 전 주인.”
린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의 하늘색 눈이 내 손에 든 일기장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계단 위에서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절룩이는 발걸음이 계단을 내려왔다. 베른이었다.
“찾았다.”
그는 손에 종이 한 장을 들고 있었다. 접힌 자국이 선명한 문서였다.
“프란츠의 위조 확인서.”
내가 일어났다. “뭐라고 적혀 있어.”
베른은 종이를 내밀었다. 그의 굵은 손가락이 문서 하단의 서명을 가리켰다.
“바르토의 이름. 실물은 아냐.”
린이 확인서를 받아 읽었다. 그녀의 입술이 살짝 벌어졌다.
“폐쇄 명령서가 가짜라는 증거. 바르토의 직인이 없어.”
나는 일기장을 베른에게 보여줬다.
“이건 지하에서 찾았어. 전 주인의 기록인데, 마르타 님과의 관계가 적혀 있었어.”
베른은 고개를 까딱했다. 눈빛이 무거워졌다. 그는 아무 말 없이 계단 쪽으로 턱짓했다.
셋이 마르타의 집 문 앞에 섰을 때는 오후의 햇살이 길게 늘어지고 있었다. 내가 노크했다. 안에서 발소리가 들리더니 문이 열렸다.
“주인장.”
마르타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한 톤 낮았다. 그녀의 손이 무의식적으로 목걸이 배지를 만지작거렸다.
“들어오세요, 셋 다. 볼일이 뭔지 대충 알 것 같네요.”
마르타의 거실은 정갈했다. 빵 냄새가 옅게 배어 있었고, 탁자 위에는 식은 차 한 잔이 놓여 있었다. 그녀는 우리에게 앉기를 권하지 않았다.
“먼저 이것부터 보시겠습니까.”
내가 탁자 위에 일기장을 올렸다. 이어 린이 내미는 확인서를 나란히 펼쳤다. 마르타의 시선이 일기장으로 향했다. 그녀의 얼굴에서 핏기가 빠져나갔다.
“어디서……”
“여관 지하 창고입니다. 전 주인 어른의 물건이었어요.”
마르타는 일기장을 집지 않았다. 그녀의 손가락이 가죽 표지를 스치듯 만졌다. 배지를 쥔 왼손 손가락이 하얘졌다.
“맞아요. 그분과…… 오래 함께했어요.”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렸다. 그녀는 천천히 숨을 들이쉬었다.
“상단 유치는 제가 밀어붙인 일이에요. 그 사람은 반대했지만…… 젊은 저는 마을을 키우는 게 답이라고 믿었거든요. 실패했을 때, 그 사람만 모든 걸 뒤집어쓰고 여관이 무너졌어요. 저는 의원직을 지켰죠.”
린이 낮게 숨을 들이쉬었다. 마르타의 눈가가 붉어졌다.
“그 이후로 저는 조례에만 의지했어요. 규칙을 더 단단하게 만들면, 더 이상 누구도 다치지 않을 거라고…… 하지만 이번에 오히려 당신들을 다치게 했네요.”
마르타가 확인서를 집었다. 눈으로 훑고는 탁자에 다시 내려놓았다.
“바르토…… 그자가 이런 짓을 했을 줄은.”
“확인서는 위조입니다. 폐쇄 명령 자체가 절차를 위반한 거예요.”
나는 일기장의 해당 페이지를 펼쳐 보였다.
“전 주인 어른은 이렇게도 쓰셨습니다. 마을을 떠날 생각은 없었다고. 그리고 당신이 의원직을 버리는 걸 원하지 않았다고요.”
마르타의 어깨가 떨렸다. 그녀는 일기장 위로 손을 올렸다. 그녀의 눈물이 종이에 닿을 듯 말 듯 멈췄다.
“하지만 조례는 조례입니다.”
“조례에 흠결이 있어요. 누군가의 상처를 막겠다고 만든 규칙이 오히려 상처를 만들었습니다. 이대로 두면 안 돼요.”
마르타가 고개를 들었다. 눈물 자국이 뺨에 번져 있었지만 시선은 단단해졌다.
“……무엇을 원하시는 거죠.”
“청문회를 열어 주십시오. 이번 사건을 공개적으로 검토하고 조례를 재검토할 기회를 만들어야 합니다.”
마르타는 배지를 만지작거리다가 멈췄다. 그녀는 일기장과 확인서를 번갈아 바라봤다. 침묵이 길었다.
“좋아요. 청문회를 소집하겠습니다. 다만 하루만 시간을 주세요. 증거와 증인을 정리할 필요가 있습니다. 약속드리죠.”
“고맙습니다.”
내가 확인서를 접어 챙기고 일기장을 집었다. 마르타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그녀는 마지막으로 입을 열었다.
“그 사람도…… 당신에게 일기장이 전해진 걸 기뻐할 거예요.”
밖으로 나오자 거리의 공기가 서늘했다. 베른이 말없이 내 옆에서 주먹을 쥐었다. 손에 든 일기장을 들어올리며 내가 말했다.
“이 조례는 누군가의 상처로 만들어졌지만, 이제 우리가 고칠 차례야.”
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베른의 굵은 손가락 관절이 하얘질 정도로 힘이 들어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