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verStory

라이넨의 느린 여관

13화

정오를 알리는 마을 회관의 종이 울렸다.

탁자 위에는 밤새 다듬은 증거 자료 목록과 조례 초안이 나란히 놓여 있었다. 린이 마지막으로 해독제 조제 기록을 접어 자료 더미에 끼워 넣었다.

종소리가 잦아들기도 전에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한 사람이 아니었다.

여관 문이 열렸다. 들어온 건 검은 옷을 입은 마른 중년 남자와 가죽 갑옷을 걸친 장신의 무장이었다. 중년 남자는 로비 한가운데서 걸음을 멈추고 접견실을 천천히 훑었다. 무장은 문 옆에 섰다. 오른손이 허리춤의 검자루 근처에 있었다.

“라이넨의 느린 여관이 맞습니까.”

“그렇습니다.”

내가 대답하자 그는 얇은 미소를 지었다. “실례가 많았습니다. 저는 크레스, 카론도 변경백 가문의 수석 집사입니다.” 옆의 무장을 턱짓으로 가리켰다. “이쪽은 호위대장 요안.”

린이 내 옆에서 숨을 멈췄다. 그녀의 시선이 크레스의 왼쪽 가슴에 수놓인 작은 문양에 고정되어 있었다. 그녀의 귀걸이와 같은 문양이었다.

크레스가 품에서 두루마리 서류를 꺼내 탁자 위에 펼쳤다. “린 아가씨. 혼약 파기와 가문 재산 횡령 혐의로 신병 인도를 공식 요구합니다. 마을 회의장에서 청문회를 열어 정식 절차를 밟을 것입니다.”

린은 서류를 내려다봤다. 그녀의 손가락 끝이 살짝 떨렸다. 서류에는 린의 본명과 혼약 상대방의 이름, 카론도 변경백 가문의 직인이 찍혀 있었다. 혼약 체결 날짜는 4년 전.

“내가 열여섯이었을 때.”

크레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변경백 각하께서는 지금도 아가씨의 귀환을 바라십니다.”

린의 하늘색 눈이 서류에서 떠나지 않았다. 얼굴에서 핏기가 빠져나가고 있었다. 요안이 문 앞에서 한 걸음 안쪽으로 움직였다. 신발 밑창이 마룻바닥을 짧게 긁었다.

“기다리십시오.”

내가 말했다. 크레스의 시선이 내게로 옮겨졌다.

“이 여관은 현재 마을 회의의 관할 아래 있습니다. 린은 이 여관의 공동 운영자입니다. 마을의 동의 없이 신병 인도를 강제할 권한이 귀족 측에 있습니까.”

크레스의 미소가 얇아졌다. “청문회야 열리면 좋지요. 하지만 신병 인도 요청은 가문 간의 사안입니다.

마을 조례보다 상위의 권한이죠.” 그가 서류의 마지막 장을 넘겼다. “혼약 파기의 경우, 당사자는 가문의 재판권에 따라 처리됩니다. 마을의 의견은 청문회에서 참고할 수 있지만 구속력은 없습니다.”

요안이 문고리를 손바닥으로 짚었다. 문이 완전히 닫혔다.

린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미안하다.”

그녀가 내게 말했다. 입술이 바싹 말라 있었다.

“내가 여기 있었기 때문에…… 이런 일이.”

“린.”

“괜찮아.” 그녀가 손을 내저었다. “이 여관, 이제 막 자리 잡았는데. 손님들도 돌아왔고…….” 목소리가 평소보다 더 건조해졌다. “청문회까지 기다리면 마을에도 피해가 갈 거야.”

린이 자료 더미에서 손을 뗐다. 그녀의 손이 허리춤으로 내려가 약초 주머니를 만졌다. 떠날 때처럼.

“기다려.”

나는 그녀의 손목을 잡았다. 차가웠다.

“이건 네가 혼자 결정할 일이 아니야.”

린이 입술을 깨물었다. “그건…….”

“집이라고 했잖아.” 내가 말했다. “우리 집. 그러면 이 집 문제는 너 혼자 짊어질 짐이 아니야.”

“네가 떠나시면 마을도 이 사건에서 발을 뺄 수 없습니다.” 나는 계속 말했다. “마르타 의원님이 청문회를 소집하셨고, 베른 씨는 증거를 확보하셨어. 마을 전체가 이미 개입한 사건입니다.”

린의 눈이 흔들렸다. “하지만…… 귀족 가문이야. 마을이 감당할 수 없어.”

“감당할 수 있는지는 우리가 정하는 게 아니야.” 나는 그녀의 손목을 놓지 않았다. “마을 회의가 결정할 일이지. 우리는 증거를 제출하고 진실을 말하면 돼. 너는 어젯밤에 그렇게 하기로 했잖아.”

린이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거부하는 동작이 아니었다. 스스로를 타이르는 듯한 느린 움직임이었다.

크레스가 가볍게 기침했다. “감동적인 대화입니다만, 시간이 별로 없습니다. 청문회는 정오 한 시간 뒤에 열립니다. 그때까지 아가씨의 신병은 저희가 확보합니다.”

요안이 문에서 등을 떼며 한 걸음 앞으로 나왔다.

그때였다. 문 밖에서 묵직한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절뚝이는 리듬이었다.

문이 밖에서 열렸다. 요안이 고개를 돌렸다.

베른이 서 있었다. 오른손에는 천으로 감싼 녹슨 검을 쥐고, 왼손에는 접은 종이 한 장을 들고 있었다. 작업용 가죽 앞치마가 그대로였다. 그의 회색 눈이 크레스와 요안을 차례로 훑었다.

“들었다.”

베른이 탁자로 걸어왔다. 의족이 마룻바닥을 규칙적으로 두드렸다. 요안이 베른의 걸음걸이를 보며 눈썹을 약간 찡그렸다.

베른이 탁자에 천을 풀었다. 낡은 검이 모습을 드러냈다.

“증거.” 그가 종이를 탁자 위에 올렸다. “원본.”

크레스의 눈이 검에 꽂혔다. 검날에 새겨진 희미한 문양. 그가 이것을 알아보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북부 변경의…….”

베른이 고개를 한 번 까딱했다. 그리고 린을 바라봤다.

“가지 마라.”

그의 말은 거기까지였다. 베른이 문 옆으로 물러나 섰다. 요안과 베른 사이의 거리는 네 걸음 정도. 출입구는 여전히 봉쇄된 상태였지만, 이제 문 안쪽에 베른이 서 있었다.

린의 손목을 잡은 내 손에 힘이 더해졌다. 그녀가 작게 숨을 들이켰다.

정오 직후, 여관 로비에 절룩이는 발소리가 울렸다. 베른이 밀봉 편지를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바르토가 보냈다.”

땀은 없었지만 숨소리엔 서둘러 온 기색이 남아 있었다. 유하람이 밀봉을 뜯자 짧고 굵은 문장이 드러났다.

크레스가 제시한 혼약 서류는 위조다. 원본은 3년 전 가문 내부에서 폐기됐다. 기록 보관소의 마법 감정사가 확인했다.

린이 유하람의 어깨 너머로 글자를 읽었다.

“위조.”

한 마디에 지난 며칠의 무게가 실렸다. 손가락이 편지 귀퉁이를 꼭 쥐었다.

“네가 떠날 이유는 없어졌다.”

린이 고개를 들었다. 하늘색 눈에 체념 대신 분노와 희망이 동시에 떠올랐다.

“서류가 가짜여도, 저들은 또 올 거야.”

“그래서 우리도 준비한다.”

유하람이 편지를 베른에게 건넸다. 베른은 접어 조끼 안주머니에 정확히 넣었다.

“다음 단계.”

“마을의 증언이 필요하다. 릴라와 마르타.”

린이 얇은 외투를 집으며 말했다.

“나는 릴라에게 간다. 버섯 사건의 기록, 정령이 알려줬던 그걸 증거로 달라고 할게.”

“나는 마르타를.”

문을 열자 오후의 빛이 긴 그림자를 로비 바닥에 드리웠다.

릴라의 작업장은 약초 바구니와 레시피 쪽지로 벽면이 가득했다. 린이 문을 밀자 씨앗을 고르던 릴라가 고개를 들었다.

“린 언니! 이 시간에 웬일이야?”

린은 허리춤의 가죽 주머니를 만지며 다가섰다.

“부탁이 있어. 숲 정령이 알려줬던 달그늘버섯. 그때 네가 들었던 기억, 증거로 쓸 수 있게 해줄 수 있어?”

릴라의 평소 수다스러움이 잠시 멈추었다.

“……정령님들이 싫어하던 그 버섯. 우리가 채집한 게 아니라 이 여관에 선물로 왔었잖아.”

“맞아. 그게 외부에서 흘러들어온 거였어. 증명할 수 있으면 좋겠어.”

릴라가 벽장을 열었다. 유리병 하나를 꺼내는데, 뚜껑 안쪽에 작은 나뭇잎 말린 조각이 들어 있었다.

“이거. 그날 밤에 정령님이 내 바구니 밑에 슬쩍 넣어줬어. 달그늘버섯이 자라는 깊은숲에서만 나는 시든 이끼 조각이야. 비교 대조용으로 쓸 수 있어.”

“고마워.”

“내일 청문회에 바로 가져갈게. 내가 뭘 들었는지도 맹세코 다 말할 거야.”

눈가가 조금 붉어진 릴라의 미소를 뒤로하고, 린은 은색을 띤 이끼 조각이 담긴 유리병을 받아 들었다.

마르타의 주택 앞마당에는 나무 덧문이 반쯤 닫혀 있었다. 노크에 오래 걸리지 않아 문이 열렸다. 의원 배지가 단추 사이에서 흔들렸다.

“유하람 씨, 들어오세요.”

평소보다 낮은 목소리였다. 유하람은 탁자 앞에 앉으며 진술서 초안을 꺼냈다.

“베른이 입수한 밀봉 편지가 왔습니다. 혼약 서류는 위조고, 원본은 이미 폐기됐다는 확인이에요.”

마르타의 손이 배지에 닿아 작은 금속 테두리를 따라 천천히 움직였다.

“……그랬군요. 저들이 그렇게까지 할 줄이야.”

“증거는 모였습니다. 하지만 법정에서는 증인의 말이 증거만큼 무겁습니다.”

탁자 위 진술서 초안을 그녀가 손끝으로 짚었다. 전 주인과의 약혼, 상단 유치 실패, 조례의 빈틈. 이미 한 번 털어놓은 과거였다.

“아직도 죄책감이 무거우신 건 압니다.”

마르타의 눈가에 잔주름이 깊어졌다.

“부끄럽게도 그렇습니다. 하지만…….”

배지를 꼭 쥔 손마디가 하얘졌다.

“내가 입을 열어야, 이 마을이 다시 같은 실수를 하지 않겠지요.”

“무리하게 만드는 건 아닙니다.”

마르타는 작게 고개를 저으며 웃음기 없는 미소를 지었다.

“부탁받을 일이 아닙니다. 내가 졌던 빚이오. 전 주인에게, 이 마을에.”

유하람은 빈 종이 한 장을 탁자 위로 밀어 넣었다.

“증언 동의서를 한 부 작성했습니다. 강요하지 않겠습니다. 마르타 님이 직접 결정해 주십시오.”

마르타는 펜을 들었다. 손이 떨리지 않고 곧게 서명을 완성했다.

“내일, 청문회에서 말하겠습니다. 조례가 왜 그렇게 쓰일 수밖에 없었는지도.”

한숨과 함께 동의서가 탁자 위에 놓였다.

해질 무렵, 유하람이 여관 로비로 돌아왔을 때 베른이 의자에 앉아 녹슨 검을 손질하고 있었다.

“끝났다.”

베른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낮았다. 유하람이 탁자 위에 동의서를 올렸다.

“마르타가 증언한다. 릴라도 샘플을 준비했다고 했어.”

베른이 빗돌을 내려놓고 일어나 밀봉 편지를 탁자 구석에 밀어 두었다.

“내일.”

린이 들어왔다. 손에 든 유리병을 탁자 위에 올려놓으며 귀걸이를 한 번 만졌다. 손끝이 은색 표면을 스치자 촛불이 반사되어 천장에 작은 빛을 던졌다.

“내일, 나는 나 자신으로서 여기에 남겠다고 말할 거야.”

짧고 단단한 목소리였다. 유하람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탁자 위엔 동의서와 진술서, 증거 목록이 가지런히 쌓였다. 린이 마지막 페이지를 점검하는 동안 촛불 심지가 한 번 튀었고, 마을 주민들 사이에서는 린을 동정하는 목소리와 보수적 반발이 공존하며 내일의 청문회를 앞두고 분위기가 고조되어 갔다.

라이넨의 느린 여관13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