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넨의 느린 여관
14화
정오의 종이 울렸다.
회의장 본청의 긴 탁자에는 마을 의원 일곱 명이 자리 잡았다. 마르타가 중앙에 앉아 배지를 만지작거렸다. 방청석에는 릴라와 베른, 그리고 몇몇 마을 사람들.
유하람은 린의 옆자리에 앉았다. 그녀의 손이 탁자 아래에서 작게 떨리고 있었다. 귀걸이가 창문 너머 빛을 받아 한 번 반짝였다.
크레스가 먼저 일어섰다. 호위대장 요안은 뒷짐을 진 채 벽에 기대 섰다.
“마을 회의 여러분, 본 건은 단순합니다.”
크레스의 손에서 양피지가 펼쳐졌다. 붉은 봉인 왁스가 박힌 서류.
“카론도 변경백 가문의 손녀, 린 아가씨는 4년 전 체결된 혼약을 파기하고 가문의 재산을 횡령해 도주했습니다.”
회의장이 술렁였다. 보수파 의원인 노인이 끼어들었다.
“증거가 있소?”
“여기 혼약 서류 원본입니다. 가문의 직인이 찍혀 있지요.”
크레스가 양피지를 탁자 위로 밀어 넣었다. 금색 끈으로 묶인 서류가 의원들 앞으로 건네졌다.
노인 의원이 서류를 살피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직인이 확실하군. 문양도 카론도 가문의 것이 맞고.”
다른 의원 둘이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보수파 진영에서 수군거림이 퍼졌다.
마르타가 손을 들었다.
“잠시. 피고인 측 발언권을 먼저 보장해야 합니다.”
크레스가 얇은 미소를 지었다.
“물론입니다. 절차는 지키지요. 하지만 증거는 명확합니다.”
린의 손이 더 세게 떨렸다. 유하람은 그녀의 손등을 짧게 한 번 두드렸다. 그리고 일어섰다.
“그 서류, 가짜입니다.”
회의장이 조용해졌다.
크레스의 눈썹이 올라갔다.
“뭐라?”
유하람은 품에서 다른 양피지를 꺼냈다. 접힌 자국이 선명한, 오래된 서류. 베른이 건넨 밀봉 편지 안에 들어 있던 혼약 원본이었다.
“원본 혼약 서류는 3년 전 카론도 가문 내부에서 폐기됐습니다. 여기 폐기 기록과 마법 감정사의 대조 확인서도 있습니다.”
마르타가 자리에서 일어나 서류를 받아 들었다. 그녀가 두 양피지를 나란히 펼쳐 놓자, 직인의 색상이 미세하게 달랐다.
“붉은 왁스의 색조가 다르군요. 원본 쪽이 더 짙습니다.”
노인 의원이 다시 들여다봤다.
“정말 다르군. 그런데…… 누가 감정한 거요?”
회의장 뒤쪽에서 베른이 입을 열었다.
“내 동료.”
짧은 두 글자. 베른의 손엔 빗돌 대신 접힌 편지 봉투가 쥐여 있었다.
크레스가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다.
“이건 터무니없는——”
“자리에 앉으십시오.”
마르타의 목소리가 차분하게 내려앉았다. 그녀가 배지를 한 번 만졌다.
“본 회의는 증거 검증 절차에 들어갔습니다. 마르타 의원으로서 증인 소환 절차를 요청합니다.”
배지를 만지는 그 손동작. 더는 죄책감의 습관이 아니었다. 십 년 묵은 결의였다.
보수파 의원들 사이에서도 침묵이 흘렀다. 증거는 탁자 위에 놓였고, 그들의 의심은 흔들렸다.
마르타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첫 번째 증인은 린 양입니다.”
린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손끝의 떨림이 멎어 있었다. 증인석으로 걸어가는 그녀의 발소리가 목재 바닥에 하나씩 박혔다.
“이름은 린.”
잠시 멈춤.
“카론도 변경백의 손녀가 아니라, 4년 전 도망친 여자.”
회의장이 숨을 멈췄다.
“열여섯에 혼약이 강제됐다. 상대는 보지도 못한 남자. 나는 도구가 아니었다.”
린의 손이 귀걸이로 올라갔다.
“이건 내가 열다섯에 받은 가문의 징표. 내가 누구인지 증명하는 게 아니라…… 누구에게 묶여 있었는지 기억하게 하는 물건.”
그녀의 손가락이 은색 표면을 천천히 훑었다.
“떼어버리려고 몇 번이나 시도했다. 못 했다. 하지만 오늘부로 의미를 바꾸겠다.”
귀걸이를 그대로 쥐었다.
“이건 내가 도망친 증거. 그리고 살아남은 증거다. 나는 여기 라이넨에서 산다. 더는 도망치지 않는다.”
의원들 사이에서 옷깃 스치는 소리만 이어졌다. 누군가 코를 훌쩍이는 소리도 났다. 릴라였다.
마르타가 천천히 일어섰다.
“두 번째 증인. 본 의원이 증언하겠습니다.”
의원들의 시선이 모였다.
“이 마을의 조례는 보호막입니다. 십 년 전, 대규모 상단 유치에 실패했을 때…… 이 마을이 산산조각날 뻔했어요. 제 약혼자가 그 희생양이었습니다.”
마르타의 손이 배지 위에 얹혔다.
“조례는 그때 만들어졌습니다. 외부인을 막으려는 게 아니에요. 마을보다 강한 자본이 들어와 이곳을 무너뜨리는 걸 막기 위한 장치였어요.”
잠시 숨을 들이쉬었다.
“하지만 그 공포가 지나쳐서, 들어와야 할 사람마저 막았습니다. 바로 저 자신이 그 빈틈을 만들었고…… 소중한 사람을 잃었습니다.”
마르타의 눈가에 잔주름이 깊어졌다.
“이 배지를 만질 때마다 그날을 떠올립니다. 오늘은 처음으로…… 부끄러움 대신 기쁨으로 만집니다.”
배지가 그녀의 손바닥 안에서 빛났다.
유하람이 일어섰다. 손에 낡은 일기장 한 권을 들고 있었다.
“마지막 증거입니다.”
표지의 가죽이 닳고 색이 바랜 일기장.
“이 여관의 전 주인이 남긴 일기장입니다. 십 년 전 마르타 의원의 약혼자가 여관의 지하 창고에서 석 달간 마을을 위해 준비했던 상단 유치 초안, 그리고 자신의 희생에 대한 기록이 담겨 있습니다.”
일기장을 펼쳤다. 마지막 페이지가 탁자 위로 건네졌다.
“이 여관은 단순한 건물이 아닙니다. 마을을 위해 누군가가 모든 것을 걸었던 장소입니다. 지금 우리가 서 있는 이곳이, 바로 그 유산입니다.”
노인 의원이 일어나 일기장을 건네받았다. 침묵 속에서 페이지가 한 장씩 넘어갔다.
“이건…… 옛날 주인의 필체가 맞군. 마르타 의원, 정말인가?”
마르타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뺨에 한 줄기 빛이 흘렀다.
크레스가 입을 열려다 멈췄다. 요안이 작은 손짓으로 그를 막았다.
마르타가 종을 한 번 울렸다.
“표결하겠습니다. 의원 여러분, 조례 개정안에 찬성하십니까?”
일곱 명의 손이 동시에 올라갔다. 노인 의원, 보수파 의원들, 그리고 마르타까지. 만장일치.
“조례 개정이 가결되었습니다. 이로써 라이넨의 느린 여관은 마을의 공식 숙소로 등록되며, 린 양은 완전한 주민으로 인정됩니다.”
회의장에 박수 소리가 울렸다. 릴라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손뼉을 쳤다. 베른은 앉은 채로 고개를 한 번 까딱했다.
크레스가 의자를 밀고 일어났다. 요안이 그 뒤를 따랐다. 문이 닫히는 소리.
린이 돌아서서 유하람을 바라봤다. 그녀의 눈시울이 붉었다.
“……해냈다.”
유하람은 말없이 그녀의 어깨를 감쌌다. 린의 이마가 그의 어깨에 닿았다. 떨림이 완전히 멎은 손이 유하람의 등을 천천히 두드렸다.
마르타가 일기장을 품에 안았다.
“돌아가겠습니다. 전 주인에게…… 오랜 빚을 조금은 갚았습니다.”
유하람이 고개를 숙였다.
“오셔야 할 곳은 회의장이 아니라 여관입니다. 오늘 저녁, 자리를 마련하겠습니다.”
마르타의 눈가가 휘어졌다.
박수가 잦아들고 의원들이 하나둘 퇴장했다. 유하람과 린은 나란히 회의장 문을 나섰다. 베른과 릴라가 조금 떨어져 따라왔다.
여관으로 돌아오는 길, 오후 햇살이 길을 비췄다.
린이 말없이 유하람의 손을 잡았다. 그의 손바닥 안에서 그녀의 손가락이 천천히 움직였다.
여관 앞까지 왔을 때였다.
문 옆에 그림자 하나가 서 있었다. 벽에 기댄 채 팔짱을 낀 남자. 호위대장 요안이었다.
린의 걸음이 멈췄다.
요안이 벽에서 몸을 떼고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아가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