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넨의 느린 여관
2화
빗소리가 잦아든 건 새벽쯤이었다.
양동이에 고인 물은 반쯤 차 있었다. 천장 구멍으로 희끄무레한 아침 빛이 새어 들었다. 유하람은 접견실 의자에 앉은 채로 잠에서 깼다. 목이 뻐근했다.
린은 벽에 기댄 자세 그대로였다. 눈은 이미 떠 있었다.
“잤어?”
“조금.”
린이 일어나며 가볍게 목을 돌렸다. 그녀의 시선이 천장 구멍을 스치고 바닥의 양동이에 멎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냥 확인한 것뿐이었다.
그때 문이 열렸다.
노크도 없이.
“위생 점검 나왔습니다.”
두 명이었다. 하나는 손에 서류판을 끼고 있었고, 다른 하나는 작은 마법 랜턴을 들고 있었다. 유하람은 얼떨결에 일어섰다.
“점검이요?”
“마을 회의 정기 위생 점검입니다. 예고는 지난주에 나갔을 텐데.”
서류판을 든 쪽이 말했다. 중년 남자였다. 다른 하나는 더 젊었고, 표정이 딱딱했다.
유하람은 전생의 기억을 더듬었다. 그런 공지는 본 적이 없었다. 전 주인이 받았거나, 아니면 아예 전달이 안 됐거나.
린이 일어섰다.
“주방 먼저.”
그녀가 유하람을 향해 짧게 말했다. 점검관이 아니라 유하람에게 한 말이었다.
“네?”
“주방 정리 안 됐지. 지금 할 수 있는 것만 해.”
린은 점검관들을 돌아봤다. 그녀의 얼굴에는 아무 긴장도 없었다.
“잠시만 기다려주시죠.”
점검관들은 서로 눈을 마주쳤다. 서류판의 남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5분 드리겠습니다.”
유하람은 린을 따라 주방으로 들어갔다. 어제 비가 새서 바닥이 군데군데 젖어 있었다. 린은 선반 위 식기들을 훑어보고 냄비 뚜껑을 열었다. 인상을 살짝 찌푸렸다.
“사용한 건 씻어서 뒤집어 둬. 안 쓴 건 행주로 닦고.”
“행주는…….”
“저기 걸려 있네.”
린은 싱크대 옆의 마른 행주를 턱짓으로 가리켰다. 유하람은 시키는 대로 움직였다.
“환기는?”
“접견실 창문 열었어.”
린은 냄비를 가지런히 정리하며 말했다. 그녀의 손놀림은 빠르고 정확했다. 상인 시절 점검을 여러 번 겪은 사람의 움직임이었다.
“침구류는?”
“아직.”
“올라가서 창문 열고 이불 털어. 2층 전부.”
유하람은 계단으로 향했다. 뒤에서 린의 목소리가 따라붙었다.
“돌아와서 바닥 물기 닦아. 걸레는 계단 아래 창고.”
“알겠습니다.”
계단을 오르며 유하람은 속으로 혀를 찼다. 전생에서는 호텔 위생 점검 매뉴얼을 만들던 놈이 여기선 허둥대기만 한다. 그래도 이쪽 상식은 다르니까.
2층 방들의 창문을 차례로 열었다. 이불을 잡고 창밖으로 두어 번 털었다. 습기가 빠져나가는 느낌이 들었다. 아래층에서 린이 무언가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점검관들에게 설명하는 건지, 아니면 시간을 끄는 건지.
유하람은 내려와서 걸레를 찾았다. 계단 아래 작은 문을 열자 곰팡이 냄새가 났다. 걸레는 생각보다 깨끗했다. 주방 바닥을 닦는 동안 점검관들이 주방으로 들어왔다.
랜턴을 든 쪽이 선반 밑과 모서리를 비췄다. 서류판의 남자는 주방 벽에 붙은 ‘식재료 보관 수칙’ 표지판을 확인했다. 린이 조금 전에 표지판을 닦아낸 게 보였다.
“보관 상태는?”
“마법 보존 중입니다.”
린이 냉장고 문을 열었다. 흰 김이 약간 새나왔다. 점검관이 고개를 끄덕였다.
“냉장 마법 효율은 80퍼센트 이상입니다. 어제의 정전에도 문제 없었고.”
그녀가 덧붙인 말에 점검관이 눈썹을 올렸다. 서류판에 무언가를 적었다.
“주방 상태는 양호하네요.”
두 사람은 접견실로 돌아갔다. 양동이에 고인 물을 보고 멈칫했다.
“천장은?”
“어젯밤 폭우에 일부 손상됐습니다. 마을 회의에 수리 신청 예정입니다.”
린이 대답했다. 유하람보다 먼저.
“아직 신청 전이지만, 임시 방수 조치는 해뒀고요. 침구류는 방금 환기했습니다.”
서류판의 남자가 점검표를 한 번 더 훑었다. 마지막으로 접견실 구석의 벽난로 굴뚝 개폐 상태를 확인하고 뭔가를 적었다. 도장을 꺼냈다.
꾹.
“합격입니다. 수리 신청은 늦지 않게 하시고.”
점검표 한 장을 탁자 위에 남기고 두 사람은 나갔다. 문이 닫혔다. 유하람은 탁자 위의 종이를 집어 들었다. ‘위생 점검 합격’이라고 찍힌 도장이 선명했다.
“고맙습니다.”
린은 어깨를 한 번 으쓱였다. 그녀의 시선은 이미 주방 쪽을 향하고 있었다.
“행주, 제대로 안 짰네. 물기 남았어.”
“……확인하겠습니다.”
린은 더 말하지 않았다. 그냥 주방으로 들어가 행주를 다시 짜서 걸었다. 그녀가 정리한 선반 위 식기들은 가지런히 줄 맞춰져 있었다. 마치 처음부터 그래 온 것처럼.
점검표에 찍힌 도장이 아직 눈에 선했다. 합격. 린이 정리한 주방은 의외로 깔끔했다. 바닥의 파편 자국만 빼면 평소보다 나은 정도였다.
“됐다.”
린이 행주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목소리엔 피곤이 묻어 있었다.
유하람은 그제야 긴장이 풀리는 걸 느꼈다. 다리에 힘이 빠졌다. 카운터에 손을 짚으려다 그만 발이 미끄러졌다. 바닥에 남은 물기였다.
“아이고!”
무심코 튀어나왔다.
린의 시선이 느려진 느낌이었다. 그녀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뭐라고?”
“어, 그게.”
유하람은 식은땀을 닦았다.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전생의 말버릇이 또 나왔다. 이번이 두 번째다.
“발이 미끄러져서요. 놀라서.”
“처음 듣는 말인데.”
“고향 쪽 사투리 비슷한 겁니다.”
린은 잠시 그를 쳐다봤다.
“이상한 사투리.”
“……그러게요.”
더 캐묻지 않은 게 다행이었다. 그녀는 이미 다른 데 관심이 가 있었다. 조리대 위의 식재료를 훑어보는 눈빛이었다.
“배고파.”
“제가 뭐 좀 해볼게요.”
유하람은 냉장고 문을 열었다.
전생 기억이 조금 남아 있었다. 숙박업계에서 일한 건 아니었지만, 기본적인 조리는 할 줄 알았다. 손님이 없을 때 야근하다 편의점 도시락 대신 직접 해먹은 정도. 그래도 이 정도 식재료면 간단한 건 만들 수 있을 것 같았다.
야채를 꺼냈다. 싱싱했다. 냉장고 안은 생각보다 온도가 낮았다.
“이걸로 간단히 볶음 요리를……”
“잠깐.”
린이 손을 내저었다. 표정이 굳어 있었다.
“그거, 냉장 마법 걸린 식재료야.”
“네?”
“어?”
둘 다 멈칫했다.
유하람은 손에 든 야채를 내려다봤다. 겉보기엔 평범했다. 약간 차가운 정도.
“이게…… 마법이 걸려 있어요?”
“당연하지. 오래 보관하려면 기본이잖아.”
린은 기가 막힌 듯 한숨을 쉬었다.
“몰랐나.”
몰랐다. 전생엔 없던 개념이었다. 냉장고는 그냥 냉장고였지 마법이 아니었다.
“마법 해제를 먼저 해야……”
말이 끝나기도 전에 유하람은 프라이팬에 야채를 올렸다.
불이 닿자 야채가 순식간에 변했다. 물렁해지더니 연기가 피어올랐다. 생선 비린내 비슷한 냄새가 주방에 퍼졌다. 색이 잿빛으로 변한 건 순식간이었다.
“아.”
“늦었네.”
린은 냄새에 얼굴을 찡그렸다. 프라이팬 안의 야채는 원래 형태를 거의 알아볼 수 없었다.
“이런.”
유하람은 불을 껐다.
변질된 야채를 들어 올리자 부서질 듯 말랑거렸다. 이건 음식이 아니었다. 그냥 폐기물이었다. 조리대 위에 올려놓으니 흐물흐물한 덩어리가 기분 나쁜 색으로 반짝였다.
“……죄송합니다.”
“사과 그만. 입에 달고 산다.”
린이 접근했다. 변질된 야채를 조리대 구석으로 밀어냈다. 그 동작은 의외로 조심스러웠다.
“쓰레기통. 어디.”
“저기 구석에.”
그녀는 변질된 덩어리를 휴지로 싸서 처리했다. 그리고 냉장고 앞에 섰다. 손바닥을 냉장고 문에 갖다 댔다.
“이런 기초도 모르면서 여관 주인.”
“……할 말이 없네요.”
린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손끝에서 희미한 빛이 났다. 냉장고 안쪽 어딘가에서 작은 진동이 느껴졌다. 그녀가 문을 다시 열었을 때 야채 칸은 전과 같은 온도였다.
“마법 냉장고. 작동만 시켜놨어.”
“고맙습니다.”
“고마워할 상황 아니야. 네 여관이잖아.”
유하람은 입을 다물었다. 이세계 생활 상식. 마법 활용법.
하나도 모르는 게 없었다. 모르는 것만 있었다. 그가 아는 건 전생의 경영 지식뿐. 여관을 운영하려면 그것만으론 부족했다.
“린 씨.”
“왜.”
“잠깐 접수대로 가서 얘기 좀 하실래요.”
“여기서 하면 안 돼?”
“서류가 필요할 것 같아서요.”
린은 눈썹을 살짝 올렸다. 그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은 접수대로 나왔다. 접견실 천장은 어젯밤 비닐과 판자로 임시 수리했지만 여전히 비가 새는 자국이 남았다. 카운터 위에는 점검표가 놓여 있었다.
린은 벽 쪽으로 걸어갔다. 그녀의 시선이 게시판에 붙은 마차 시간표로 향했다.
마부가 남기고 간 낡은 종이 한 장. 정오, 오후 5시. 두 번뿐인 운행. 린은 그걸 물끄러미 보다 손을 뻗었다.
종이를 손가락으로 한 번 쓸었다. 그리고선 아무 말 없이 손을 내렸다.
유하람은 그 모습을 보며 입을 열었다.
“도우미 계약을 제안하고 싶습니다.”
“……도우미.”
“숙식은 무료로 제공하고요. 여관 수익이 생기면 일정 비율을 인건비로 드리겠습니다.”
린은 시간표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왜 나.”
“솔직히 지금 혼자선 못할 것 같습니다.”
“자각은 빠르네.”
그녀가 뒤돌았다. 표정은 여전히 읽을 수 없었지만 목소리는 평소보다 조금 느렸다.
“계약서.”
“여기 있습니다.”
유하람은 서랍에서 종이 한 장을 꺼냈다. 여관 운영 설명서 사이에 끼워져 있던 표준 계약 양식이었다. 손으로 직접 써야 하는 빈칸이 많았다.
펜을 들어 조건을 적었다.
숙식 제공. 수익 배분 비율. 계약 기간은 일단 한 달.
린은 카운터 앞으로 다가와 계약서를 내려다봤다. 팔짱을 낀 채 1분 가까이 그냥 읽었다.
“수익 배분. 얼마.”
“순수익의 20%.”
“40.”
“지금 적자예요.”
“그럼 30.”
“……알겠습니다.”
유하람은 비율을 고쳐 적었다. 전생 같으면 깎는 기술 같은 걸 생각했겠지만, 지금은 인원이 필요했다. 그녀의 시선은 여전히 계약서에 꽂혀 있었다.
“계약 기간 한 달. 짧네.”
“서로 부담 없이 하려고요.”
“도망칠 생각 없다는 건 알겠고.”
그녀가 오른손을 내밀었다.
“펜.”
린이 직접 서명란에 이름을 적었다. 획이 빠르고 정확했다. 서체는 생각보다 반듯했다. 유하람도 그 옆에 이름과 인장을 찍었다.
계약서가 접수대 위에 놓였다.
린이 한 번 접더니 유하람 앞으로 밀었다.
“내가 들고 있을 테니까 필요하면 복사해.”
“네.”
“내일부터 진짜 손님 받을 준비를 시작한다.”
그녀가 짧게 말했다. 약속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