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넨의 느린 여관
3화
다음 날 아침, 여관 주방.
나는 냉장고 문을 열었다. 선반 위에 고기와 채소, 계란 비슷한 게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전생 같으면 투숙객용 조식 뷔페였지만, 지금은 이걸로 간단하게 만들면 된다.
프라이팬을 올리고 불을 켰다. 고기를 꺼내 도마에 올리자 손끝이 살짝 저렸다. 찬 기운. 그래도 신경 쓰지 않고 썰었다.
기름을 두르고 고기를 올리자 지글거리는 소리가 났다.
딱 3초였다.
고기가 순식간에 잿빛으로 변했다. 연기가 올랐다.
“뭐—”
주방 문이 열렸다. 린이었다. 그녀가 내 손의 프라이팬을 보더니 헛웃음을 쳤다.
“마법 보존인데 그냥 구웠어.”
“……마법 보존.”
“냉장고에 붙은 문양 안 보여.”
내가 냉장고 문을 다시 보자 거기에 옅은 푸른색 문양이 있었다. 전날 점검 때도 못 봤다. 아니, 봤는데 머릿속에서 걸러졌다.
“해제부터 해야 열 가해도 안 망가져.”
“해체 방법은?”
“문양 위에 손 올리고 ‘해제’라고 말하면 돼. 기본인데.”
린이 싱크대로 다가와 내 손에서 프라이팬을 빼앗았다. 변질된 고기를 쓰레기통에 버렸다. 그녀의 손놀림은 어제 점검 때와 똑같이 정확했다.
“……냉장 보관은 얼마나 유지되는 겁니까.”
“일주일. 냉장고 멀쩡하면.”
“상하면.”
“파란색이 빨간색으로 바뀌어.”
기본을 또 몰랐다. 나는 식탁으로 가 의자에 앉았다. 어제 계약서에 사인한 직후의 안도감은 사라졌다.
린이 찬장에서 빵과 치즈를 꺼냈다. 칼로 치즈를 썰며 내 쪽을 보지도 않고 말했다.
“빵으로 때워.”
“미안합니다.”
“됐고. 점심은 제대로 준비해.”
그게 린의 방식이었다. 한 번 실수에 두 번 말하지 않는다. 대신 기회를 준다.
……
한 시간 뒤, 로비.
빵과 치즈로 간단히 아침을 때우고 있었다. 린은 카운터 안쪽에서 장부를 정리하고 있었다. 여관 문 밖에서 가벼운 발소리가 들렸다.
“안녕하세요—!”
쾌활한 목소리와 함께 릴라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등에는 여느 때처럼 약초 바구니를 메고 있었다. 오늘은 건조 약초 냄새가 더 진했다.
“어머, 빵만 드셨어요? 완전 횡한데!”
“사정이 좀 있어서.”
내가 어깨를 으쓱이자 릴라는 빙글 웃으며 바구니를 식탁 위에 올렸다.
“좋은 타이밍이네요! 오늘 가져온 약초들 상태가 진짜 좋거든요.”
바구니 안에는 작은 천 주머니들이 여러 개 있었다. 릴라가 하나씩 꺼내며 설명하기 시작했다.
“이건 말린 카모마일 비슷한 건데, 차로 우려내면 신경 안정에 좋아요. 여행자들한테 인기 많고요. 이건 소화에 좋은 잎이고, 이건—”
그녀의 손이 한 주머니 앞에서 멈췄다. 순간 장난스러운 미소가 올라왔다.
“아, 근데 이건 빼야겠다.”
“왜.”
“독초거든요.”
릴라가 깔깔 웃었다. 내가 주머니를 뚫어지게 보자 그녀가 윙크했다.
“정령이 말해줬어요. 농담이에요, 농담! 그냥 냄새만 맡아도 알 수 있는 거예요.”
나는 주머니를 집어 들었다. 겉보기엔 평범한 말린 허브였다. 냄새를 맡자 약간 씁쓸한 향이 올라왔다.
“저게 일반인이 구별할 수 있는 겁니까.”
“음— 경험이 좀 필요하긴 하죠. 저도 처음엔 실수 많이 했어요.”
릴라가 내 손에서 독초 주머니를 받아 바구니 맨 밑에 넣었다. 그리곤 남은 주머니들을 식탁 위에 가지런히 펼쳤다.
“오늘은 이 네 가지로 추천드려요. 차 종류별로 하나씩이면 손님 오셨을 때 딱 좋을 거예요.”
“가격은.”
“전부 해서 은화 두 닢이요!”
카운터 쪽에서 린이 고개를 들었다. 시선을 가격표 쪽으로 던지더니 작게 끄덕였다. 적정가라는 신호였다.
“한 닢 반.”
“어— 네! 그럼 그걸로!”
흥정이라고 하기 민망할 정도로 금방 결정이 났다. 나는 카운터 서랍에서 돈을 꺼내 건넸다.
릴라가 돈을 주머니에 넣으며 말했다.
“앞으로 일주일에 한 번씩 들를까요? 필요한 거 있으면 미리 말씀해 주시고.”
“그렇게 하죠.”
“좋아요! 그럼 다음 주에 올게요. 손님 많아지길 빌면서!”
릴라는 빈 바구니를 다시 등에 메고 문 쪽으로 걸어갔다. 문을 열다가 갑자기 돌아봤다.
“아참, 차 우릴 때 물 온도 너무 뜨거우면 안 돼요! 끓이고 조금 식혀야 맛이 살아요.”
“기억하겠습니다.”
“네—!”
문이 닫혔다. 발소리가 멀어졌다. 마을 외곽 숲길 쪽으로 향하는 걸음이었다.
린이 카운터에서 나와 약초 주머니들을 집었다.
“괜찮은 거래였어.”
“은화 한 닢 반이면.”
“시장 가격이야. 이 정도면.”
주머니 하나를 열어 냄새를 맡았다. 그녀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차라면 제대로 끓일 수 있어.”
“……기대하겠습니다.”
내가 대답하자 린은 아무 말 없이 주방으로 향했다. 손에는 약초 주머니들이 들려 있었다.
릴라가 숲길 쪽으로 사라지고 나자 로비가 한결 조용해졌다. 카운터 위에는 방금 산 약초 꾸러미가 놓여 있었다. 나는 접수대 서랍을 열어 계약서를 한 번 더 들여다봤다. 린의 서명. 마른 잉크 자국을 손끝으로 쓸었다.
린이 주방에서 나왔다.
“대장간.”
“……네?”
“수리 도구 없이 맨손으로 지붕 고칠 거야.”
그 말에 계약서를 접어 서랍에 넣었다. 그녀는 벌써 문 쪽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나는 앞치마를 벗어 카운터에 걸쳤다.
마을 길은 오전 햇살이 따뜻했다. 어젯밤 내린 비가 흙바닥에 군데군데 고여 발끝을 적셨다. 린이 앞장섰다. 그녀는 주저 없이 마을 중앙 샛길로 접어들었다. 길가 상점들도 이제 막 문을 여는 참이었다.
대장간은 금방 알아볼 수 있었다. 굴뚝에서 연기가 피어오르고, 문 앞에 낡은 쇠붙이들이 상자째 쌓여 있었다. 문은 열려 있었다.
안쪽에서 쇠를 두드리는 규칙적인 소리가 났다.
베른은 풀무질을 멈추고 우리를 돌아봤다. 손에 들었던 집게를 내려놓고 작업용 장갑을 벗었다. 땀에 젖은 얼굴이었지만 표정은 변함없었다.
“주인장.”
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 린은 팔짱을 끼고 한 걸음 물러섰다.
“도구를 좀 빌릴 수 있을까 해서요.”
베른이 나를 보다 린을 슬쩍 훑었다. 그걸로 충분한지 고개를 까딱이고는 작업대 옆 선반으로 걸어갔다. 왼쪽 다리가 약간 굼떴다. 그는 망치 두 개와 못 상자, 작은 톱을 차례로 꺼내 헝겊 위에 올렸다.
“이거면 되나.”
“네, 충분합니다. 언제까지 돌려드리면……”
“필요 없을 때.”
베른은 이미 다른 도구를 정리하고 있었다. 대화 종료라는 뜻이었다. 나는 도구를 챙겨 들었다. 생각보다 무게가 제법 나갔다.
“난로.”
그의 목소리가 등 뒤에서 들렸다.
“조만간 본다.”
나는 뒤돌아 고개를 숙였다.
“고맙습니다.”
린이 대장간 문을 나서며 중얼거렸다.
“말은 짧아도 손은 빠르네. 쓸데없는 인사 안 하는 게 제일 마음에 들어.”
여관으로 돌아오는 길, 내 양손은 도구로 가득했다. 망치와 톱이 걸을 때마다 부딪히며 경쾌한 소리를 냈다. 전생 같으면 인사치레 한참 했을 텐데, 여기선 짧은 문답으로도 필요한 게 해결됐다. 그게 이상하게 편했다.
여관 문을 열자마자 린이 말했다.
“밥부터 하자. 배고파서 일 못 해.”
“지금 바로 할게요.”
나는 도구를 로비 한쪽 구석에 내려놓고 주방으로 향하려 했다. 그때 문 밖에서 느릿한 발소리가 들렸다.
“여보세요.”
낮고 차분한 목소리. 마르타였다.
그녀는 빵 굽는 냄새를 옷에 배게 한 채 로비로 들어섰다. 손에는 작은 바구니. 눈은 곧바로 접견실 천장으로 향했다. 임시 방수포가 쳐진 곳을 한참 올려다봤다.
“정기 순찰 겸 들렸어요. 지난번 점검표는 수리 완료 전제로 통과시킨 거라.”
마르타가 목에 걸린 배지를 습관처럼 만졌다. 나는 린과 눈이 마주쳤다. 그녀는 표정 하나 안 바꾸고 카운터로 걸어가 아무 일 없다는 듯 서 있었다.
“아직 지붕은 임시 조치만 해둔 상태입니다.”
“눈으로 보니 알겠네요.”
마르타가 복도 쪽으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그녀는 객실 문 앞에서 잠시 멈췄다. 문틀에 낡은 흠집이 여러 개 있었다. 마르타의 손가락이 그 흠집 하나를 가볍게 쓸었다.
“이 여관이 문 닫은 지 거의 반년이 넘었어요. 전 주인은……”
말을 멈추고 배지를 꼭 쥐었다.
“전 주인이 알면 슬퍼하겠지. 이렇게 낡아 가는 걸 보면.”
나는 대답을 찾지 못했다. 마르타는 이내 손을 떼고 나를 돌아봤다.
“증축이나 큰 구조 변경을 생각하고 있다면, 마을 회의 승인을 먼저 받으셔야 해요. 아시죠.”
“네, 알고 있습니다.”
“지금은 그럴 단계가 아닌 것 같지만…… 기억해 두세요.”
그녀는 바구니에서 종이봉투 하나를 꺼내 카운터 위에 올렸다.
“시식용 빵이에요. 가게에 남은 거지만 식사 전에 드세요.”
“감사합니다, 마르타 님.”
마르타는 가볍게 손을 들어 보이고 여관을 나갔다. 문 닫히는 소리가 로비에 잔잔하게 울렸다.
린이 카운터에서 종이봉투를 집어 냄새를 맡았다.
“호밀이네. 식기 전에 먹자.”
주방으로 들어서자 해 질 무렵의 붉은 빛이 작은 창문을 통해 들어오고 있었다. 나는 간단히 수프를 끓였다. 전생 기억으로 대충 만든 레시피였는데, 물을 너무 많이 잡았다.
린이 한 숟갈 떠먹고 말했다.
“형편없어.”
“……알고 있어요.”
그녀가 더는 말하지 않고 수프를 다 비운 건 예의인지 배고픔인지 구분이 안 됐다. 접시를 치우려는 내 손을 막고 그녀가 직접 개수대로 가져갔다.
“허브차는 내가 가르쳐 줄게.”
린은 선반 위의 약초 꾸러미를 꺼내 펼쳤다. 아까 릴라에게서 산 것들이다. 그녀는 잎사귀 하나를 들어 코에 가져갔다.
“이건 캐모마일. 이건 페퍼민트.”
손가락이 움직일 때마다 약초 냄새가 조금씩 풀렸다. 그녀는 꾸러미를 세 무더기로 나누며 종류별로 정리했다.
“네 요리는 형편없지만, 허브차는 금방 배울 거야. 물 온도만 맞추면 되니까.”
“……제 요리 실력은 일단 접어두죠.”
“접을 것도 없어. 실력이 아예 없으니까.”
린이 내 눈을 똑바로 보며 말했다. 입꼬리는 조금 올라가 있었다. 아주 조금.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그래도 뭔가 하나 배우면 한 걸음 나아간 느낌이네요.”
그녀가 찻주전자를 집어 들었다. 바닥에 얇은 먼지가 쌓인 걸 행주로 닦아내고 뚜껑을 열어 안쪽을 확인했다.
“내일 아침 일찍 허브차 끓이는 법부터 가르쳐 줄게.”
“내일 아침이요?”
“손님이 오기 전에 마실 만한 걸 만들어야 하니까.”
그 말에 가슴 어딘가가 살짝 따뜻해졌다. 미소를 참을 수 없었다. 린이 못 본 척하며 찬장에 찻주전자를 올렸다. 그녀의 손이 주전자 손잡이를 곧게 맞추며 멈칫했다.
“기대하는 얼굴이네.”
“들켰네요.”
나는 웃으며 말했다. 주방 창밖은 어느새 어두워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