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넨의 느린 여관
6화
복도 등불이 흔들렸다. 귀족 상인의 말이 공기처럼 가라앉기 전에, 나는 한 걸음 물러섰다.
“제 직원의 사적인 일입니다.”
내 목소리는 생각보다 평온했다. 귀족 상인은 내 대답에 놀라지 않았다. 오히려 기다렸다는 듯 고개를 기울였다.
“주인장은 충성심이 대단하군. 하지만 그 여인의 귀걸이는 평민의 손에서 나올 수 없는 물건이오. 알면서도 모르는 척하는 건가.”
“모르는 척이 아니라, 알 필요가 없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나는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남자의 미소가 얇아졌다.
“흥미롭군. 이 작은 여관에 숨은 이야기가 많아.”
그 말을 끝으로 그는 내 어깨 너머로 시선을 던졌다. 복도 저편, 아무것도 없는 어둠을 한 번 바라보고는 말없이 자기 방으로 들어갔다.
문 닫히는 소리가 복도에 울렸다.
나는 가만히 서 있었다. 손바닥이 축축했다. 심장이 갈비뼈을 두드리는 속도가 평소보다 빨랐다.
저건 경고다. 그냥 지나칠 인간이 아니야.
잠시 후 내 방으로 들어갔다. 침대에 걸터앉아 손을 폈다. 떨리진 않았다. 그게 더 이상했다.
새벽빛이 창문 틈으로 번졌다. 나는 평소보다 한 시간 일찍 주방으로 내려갔다. 어젯밤 씻어둔 찻잔들이 선반에서 희미하게 빛나고 있었다.
주전자에 물을 채웠다. 손바닥을 주전자 바닥에 대고 천천히 숨을 들이쉬었다.
미지근한 정도면 충분해. 끓이면 안 돼.
전날 린이 알려준 대로였다. 손바닥에서 은은한 온기가 퍼졌다. 마법이라고 부르기 민망한 수준이지만, 이게 내 한계였다. 1분쯤 지나자 주전자에서 김이 가늘게 올랐다.
린이 주방 문을 열고 들어왔다.
“빨리 했네.”
그녀의 목소리는 여전히 짧았다. 눈 밑이 살짝 어두웠다. 나는 대꾸하지 않고 찻잎 통을 건넸다.
린은 익숙한 손놀림으로 허브티를 우리고, 나는 빵과 치즈를 나무 도마에 담았다. 그 사이 린이 젖은 찻잔들을 향해 손바닥을 폈다. 손끝에서 옅은 냉기가 번지더니, 물기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마치 증발을 수십 배 앞당긴 것처럼.
“편리하네.”
“이 정도는 기본.”
린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찻잔을 쟁반에 올렸다. 식당 테이블 세 개에 각각 찻잔과 빵 접시를 세팅했다. 나는 접수대 옆에 작은 메모판을 세웠다. 오늘의 허브티 – 무료 시음.
계단에서 발소리가 났다. 가죽 구두 소리였다.
귀족 상인이 내려왔다. 짙은 남색 코트에 단정하게 빗은 머리. 어젯밤과 똑같은 의미심장한 눈빛이었다. 그는 아무 말 없이 창가 자리에 앉더니 메뉴판을 집어 들었다.
“아침 식사 준비됐습니다.”
내가 말하자 그는 고개만 끄덕였다. 하지만 시선은 메뉴판이 아니라 접수대 옆에 선 린에게 가 있었다. 린은 그 시선을 알면서도 무시하고 찻잔을 닦았다.
마차 대기 승객 두 명이 덤으로 내려왔다. 어제 시음회에서 만났던 행상 토비와, 낯선 중년 여성이었다. 두 사람은 반대편 테이블에 앉아 허브티를 한 모금씩 마셨다.
“아, 이거 어제 그 차구먼.”
토비가 만족스러운 얼굴로 중얼거렸다. 여성 승객도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귀족 상인이 일어섰다. 찻잔을 든 채로.
나는 본능적으로 허리를 곧추세웠다. 남자는 느릿한 걸음으로 접수대 쪽으로 걸어갔다. 린 앞에 섰다.
“아침부터 수고가 많소.”
린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가족 유품이라더니, 그 귀걸이.”
남자의 목소리는 부드러웠다. 하지만 식당 공기가 한 겹 차가워졌다.
“카론도 변경백령의 문양과 아주 닮았더군. 실례지만 정확히 어디서 구하셨소?”
린의 손이 찻잔에서 떨어졌다. 그녀의 얼굴은 표정이 없었지만, 목덜미 근육이 살짝 경직되는 게 보였다.
“가족 유품입니다.”
짧은 대답이었다. 린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한 톤 낮았다.
“가족이라. 흠.”
귀족 상인은 찻잔을 입가로 가져가며 의미심장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린은 시선을 피해 선반 쪽으로 몸을 돌렸다. 그 순간 그녀의 팔꿈치가 쟁반 모서리에 닿았다.
쟁반이 기울었다.
내가 한 걸음에 다가가 바닥에 닿기 직전 받아냈다. 찻잔 두 개가 달그락거렸다. 린은 잠시 멈춰 섰다. 입술을 달싹였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의미심장한 솜씨로군요. 카론도 가문의 세공사가 아니면 흉내조차 못 낼 문양인데.”
귀족 상인은 더 말을 붙이지 않았다. 그저 빙그레 웃으며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그 미소가 린의 대답보다 더 많은 것을 알고 있다는 듯했다.
린은 내게서 쟁반을 건네받으며 짧게 숨을 내쉬었다. 그녀의 손끝이 떨렸다. 내가 보기엔 분노 반, 두려움 반이었다.
몇 초의 침묵. 그리고 린이 입을 열었다.
“죄송합니다. 잠시 바람 좀 쐬고 오겠습니다.”
평소보다 딱딱한 말투였다. 얼굴이 창백했다. 그녀는 앞치마를 벗어 의자에 걸치고는 곧바로 뒷문 쪽으로 걸어갔다. 구두 소리가 경쾌하게 울리다 문 너머로 사라졌다.
“……저기, 주인장.”
토비가 손을 들었다. 찻잔이 비어 있었다.
“이 차 한 잔만 더 줄 수 있나? 마차 올 때까지 시간이 좀 남아서.”
낯선 여성 승객도 내 쪽을 바라보며 조용히 찻잔을 내밀었다.
“네, 잠시만요.”
나는 주방으로 향했다. 뒷문 쪽을 한 번 돌아보았지만, 린의 뒷모습은 이미 보이지 않았다.
귀족 상인은 여전히 창가 자리에서 차를 홀짝이고 있었다. 만족스러운 듯 눈을 가늘게 뜨고.
아침 식사가 끝난 뒤 손님들이 하나둘 흩어졌다. 토비는 마차 시간에 맞춰 서둘러 나갔고, 귀족 상인은 방으로 올라갔다. 나는 접수대에 서서 장부를 정리했다. 선결제 열여섯 닢과 숙박비 은화 세 닢. 숫자를 다시 세어 보았지만 어젯밤과 달라진 건 없었다.
린은 뒷마당 쪽으로 나간 뒤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
여관 문이 열리고 마르타가 들어왔다. 팔에는 비어 있는 시장 바구니를 끼고 있었다. 목에 걸린 의원 배지가 아침 햇살에 반짝였다.
“주인장, 아침부터 부지런하시네요.”
“마르타 어르신. 빵집은 괜찮으세요?”
“오늘은 조수에게 맡겼어요. 장 보러 가는 길에 잠시 들렀습니다.”
마르타는 접수대 앞에 멈춰 섰다. 그녀의 눈이 식당과 주방 쪽을 천천히 훑었다.
“린 양은 어디 있나요?”
“뒷마당이요. 바람 좀 쐬러.”
마르타는 고개를 끄덕였다. 손이 배지로 올라가 작은 금속 테두리를 만지작거렸다. 이틀 전 장터에서 봤던 습관이었다.
“주인장,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나는 장부를 덮었다.
“어젯밤, 시몬 주점에서 낯선 상인 하나가 질문을 많이 했다고 하더군요.”
마르타의 목소리는 낮았다.
“이 마을에 은귀걸이를 한 젊은 여자가 있느냐고. 귀걸이에 새겨진 문양이 무엇인지도 묻고 다녔다고 합니다.”
내 손이 장부 위에서 멈췄다. 어젯밤 복도에서의 대화가 떠올랐다. 그 귀걸이는 평민이 가질 수 있는 물건이 아니오.
“주점에 있던 사람들은 대답을 못 했대요. 하지만 그 상인은 아직 포기하지 않은 모양이더군요.”
“……누군지는 아세요?”
“이 여관에 묵고 있는 귀족 상인이랍니다.”
마르타의 눈이 내 표정을 가만히 살폈다.
나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전생의 기억이 스쳤다. 퇴근길 지하철에서 읽던 판타지 소설 속 장면. 몰락한 귀족 가문을 쫓는 상인 길드의 묘사. 그리고 은색 귀걸이 하나가 신분을 증명하는 장치로 쓰이던 이야기들.
이런 건 소설 속에서나 일어나는 일이라고 생각했는데.
“린은 믿음직한 파트너입니다.”
내가 말했다. 짧고 또렷하게.
마르타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너무 몰아세우지 말고 지켜봐 주게. 묻고 싶은 말이 많더라도 말이지.”
그녀는 내 손을 가볍게 두드렸다. 손끝에서 밀가루 냄새가 났다.
“장터에 다녀오겠습니다. 빵이 필요하면 들러주시고.”
마르타는 문을 밀고 나갔다. 열린 문틈으로 아침 공기가 밀려 들어왔다. 나는 접수대에 기댄 채 숨을 천천히 내쉬었다.
주점에까지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아직은 궁금증 수준이지만, 시간이 지나면 달라질 것이다. 나는 주머니에서 열쇠 꾸러미를 꺼내 손에 쥐었다. 차가운 금속 감촉이 손바닥에 닿았다.
뒷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발걸음이 주방 쪽으로 이어졌다. 린이었다.
나는 접수대를 떠나 주방으로 향했다. 문을 열자 린이 싱크대 앞에 서 있었다. 얼굴이 약간 붉어져 있었다. 바람을 쐰 흔적이었다. 그녀는 손을 물에 적시며 내 쪽을 보지 않았다.
“차 한 잔 더 할래?”
내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린이 잠시 멈칫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주전자에 물을 올리고 허브티 통을 꺼냈다. 린이 아침에 블렌딩한 혼합 차였다. 캐모마일과 레몬밤이 섞인 차분한 향이 작은 주방 안에 퍼졌다.
둘은 식탁에 마주 앉았다. 찻잔 두 개 사이로 김이 올라왔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린은 찻잔을 두 손으로 감싸 쥐고 창밖을 바라봤다. 나는 그녀의 귀걸이를 보지 않으려고 애쓰며 차를 한 모금 마셨다.
부드러운 온기가 목을 타고 내려갔다.
“무슨 일이 있으면 언제든 말해도 돼.”
내가 말했다. 탁자 너머로 린의 손가락이 살짝 움직였다. 그녀는 여전히 창밖을 보고 있었다.
“……고마워요.”
작은 목소리였다. 딱딱하던 평소 말투 사이로 뭔가 한 꺼풀 벗겨진 소리.
린이 찻잔을 내려놓고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그리고 아주 잠깐, 그녀의 입가에 미미한 곡선이 생겼다. 처음 보는 표정이었다.
나도 아무 말 없이 차를 한 모금 더 마셨다. 창밖의 빛이 점점 밝아지고 있었다.
마르타의 말이 떠올랐다. 지켜봐 주게. 나는 아직 아무것도 알지 못했다. 귀걸이 문양에 담긴 의미도, 린이 왜 이 마을에 오게 되었는지도. 다만 이 사람이 여관을 위해 한 일들은 모두 진심이었다는 것만은 확실했다.
린이 자리에서 일어나 싱크대 앞으로 갔다. 아직 씻지 않은 아침 조리도구 몇 점이 남아 있었다. 그녀가 물을 틀자 수돗물 소리가 조용한 주방을 채웠다.
나는 찻잔을 씻어 건조대에 올렸다. 린이 설거지를 하며 말했다.
“만약…….”
물소리가 잠시 멈췄다.
“내가 더 이상 여기 있을 수 없게 된다면.”
그녀는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손은 여전히 접시를 쥔 채였다.
“당신은 여관을 혼자 잘 운영할 수 있겠죠?”
나는 두 걸음 다가갔다. 그리고 말 없이 린의 손목을 잡았다. 물기에 젖은 손목이었다. 린의 손이 멈췄다.
“여긴 네 집이야.”
내 목소리가 생각보다 단단하게 나왔다.
“무슨 일이 있어도 내가 지킬 거야.”
린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하늘색 눈에 얇은 물막이 맺혔다.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내 손을 뿌리치지도 않았다.
아직 증명한 건 아무것도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