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넨의 느린 여관
7화
점심 무렵, 시장에 나갔다. 장바구니에 빵과 치즈, 말린 허브 몇 묶음을 담았다. 햇살이 따가웠다. 어제 비가 온 뒤라 흙바닥은 아직 촉촉했다.
대장간 앞을 지날 때 베른이 문간에 서 있었다. 팔짱을 끼고 나를 보고 있었다.
“주인장.”
베른이 짧게 불렀다. 나는 걸음을 멈췄다. 그가 작업장 안쪽으로 고개를 까딱했다. 따라 들어갔다.
화덕의 열기가 얼굴에 닿았다. 베른은 망치를 내려놓고 장갑을 벗었다.
“소문 자네 여관 여자 얘기.”
“린이요?”
베른이 끄덕였다. 그는 작업대 위의 쇳조각을 한쪽으로 밀었다.
“시몬 주점에서 상인이 묻더군. 귀걸이 문양, 어디 가문이냐고.”
내 손이 장바구니 손잡이를 꽉 쥐었다. 베른은 그걸 슬쩍 보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한두 명이 들은 게 아니야.”
“……누가 들었는지 알아요?”
“주점에 있던 절반쯤.”
베른은 거기까지였다. 더 묻지도, 충고하지도 않았다. 다만 회색 눈이 내 표정을 잠시 살폈다가 돌아섰다.
고맙다는 말을 하려다 멈췄다. 베른은 고개를 까딱하고 풀무질을 다시 시작했다. 대장간을 나왔다.
돌아오는 길, 발걸음이 빨라졌다. 시장통의 시끌거림이 멀게 느껴졌다. 소문이 생각보다 빠르다. 베른이 직접 말을 걸어올 정도라면 이미 마을에 꽤 퍼졌다는 뜻이다.
여관 문을 열자 로비에 릴라가 서 있었다. 등에는 약초 바구니, 손에는 작은 꾸러미 두 개.
“어머, 주인장님! 딱 맞춰 왔네요!”
릴라가 꾸러미를 들고 다가왔다. 밝은 목소리였지만 눈빛은 평소와 달랐다. 호기심과 걱정이 섞여 있었다.
“주문하신 말린 캐모마일이랑 레몬밤이에요. 이번 건 특히 향이 좋아요.”
“고마워.”
꾸러미를 받아 접수대에 올렸다. 릴라는 발뒤꿈치를 들었다 내리며 머뭇거리다 입을 열었다.
“그런데…… 괜찮아요?”
“뭐가?”
“여관 분위기가 좀…… 심상치 않다고 들었어요. 시장에서도 막 뭐라고 하고.”
릴라가 내 눈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나는 장부를 펼치며 어깨를 으쓱였다.
“대수롭지 않아. 손님이 좀 시끄러워서 그런 거야.”
“……진짜예요? 린 언니도 괜찮고?”
“괜찮아.”
릴라는 고개를 갸웃했다. 내 얼굴을 한 번 더 살피더니 바구니를 고쳐 멨다.
“뭐…… 주인장님이 그렇게 말하면 그런가 보죠. 근데 필요하면 언제든 불러요! 내가 아는 약초 중에 마음 안정에 좋은 것도 있고!”
“알았어.”
릴라가 문 쪽으로 걸어가다 뒤를 돌아봤다. 웃는 얼굴이었지만 평소만큼 밝지는 않았다.
“내일 또 들를게요.”
문이 닫혔다. 나는 꾸러미를 주방으로 옮겼다. 캐모마일 향이 코끝을 스쳤다. 린이 이걸로 차를 우려내던 모습이 떠올랐다.
오후 초 무렵, 접수대에서 장부를 정리하고 있는데 문이 열렸다. 마르타였다. 손에는 빈 장바구니, 목에는 의원 배지.
“주인장께 잠시 실례해도 되겠습니까.”
목소리가 평소보다 낮았다. 나는 장부를 덮고 의자를 권했다. 마르타는 앉지 않았다. 접수대 앞에 선 채 배지를 만지작거렸다.
“린이라는 아이, 무슨 사정이 있습니까.”
질문이 아니라 확인이었다. 나는 잠시 숨을 골랐다.
“왜 그러시죠.”
“시몬 주점에서부터 시작된 말이 장터에 돌고 있어요. 은귀걸이 문양을 아는 자가 나타났다고.”
마르타의 갈색 눈이 내 시선을 잡았다. 깊은 주름 사이에서 날카로운 빛이 보였다.
“그 상인은 단순한 호기심이 아니에요. 무언가 찾고 있고, 린 양에게서 그 단서를 본 거죠.”
“……자세한 것은 저도 몰라요.”
나는 손바닥을 장부 위에 올렸다.
“하지만 린은 제 여관의 직원이고, 지금까지 일을 성실히 해왔습니다. 그걸로 충분하지 않습니까.”
마르타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그걸로 충분한지는 마을이 정할 일이에요. 만약 귀족 가문 간의 분쟁이라도 마을에 끌려들어온다면…….”
“아직 아무 일도 안 일어났습니다.”
내 목소리가 예상보다 단단하게 나왔다. 마르타의 눈썹이 미세하게 올라갔다. 나는 숨을 들이쉬고 덧붙였다.
“무슨 일이 생기면 제가 책임지죠.”
“……당신이요?”
“네. 여관 주인으로서요.”
잠시 침묵이 흘렀다. 마르타의 손가락이 배지 테두리를 따라 움직였다. 한 번, 두 번. 그러고는 멈췄다.
“마을 회의가 열리기 전에 뭔가 밝혀지는 게 좋을 거예요.”
“회의요?”
“아직 확정은 아닙니다. 다만 심상치 않은 일이 계속되면 그렇게 될 거란 뜻이에요.”
마르타는 내 대답을 기다리지 않았다. 빈 바구니를 팔에 걸고 문 쪽으로 향했다. 문 앞에서 잠시 멈추더니 어깨 너머로 말했다.
“린 양을 지키려면, 혼자서 모든 걸 감당하려 들지 마세요.”
문이 닫혔다. 나는 한동안 의자에 앉아 있었다. 장부의 숫자들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로비의 시계추가 오후 세 시를 알렸다. 린은 아직 2층 방에서 나오지 않았다. 나는 시간을 확인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하 창고로 내려갔다. 마르타와의 대화가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뭔가 손을 움직이지 않으면 견딜 수 없었다.
창고는 예상대로 어지러웠다. 전 주인이 남긴 상자들, 계절 용품, 수리 도구들이 먼지 쌓인 채 쌓여 있었다. 오른쪽 구석에 낡은 나무 상자 세 개가 포개져 있었다. 맨 위의 상자를 열자 오래된 천 조각과 녹슨 촛대가 나왔다.
두 번째 상자 안에는 등기부 사본 몇 권과 편지 묶음이 있었다. 손때가 짙게 밴 종이들 사이로 손바닥만 한 가죽 일기장이 끼어 있었다.
일기장을 집어 들었다. 표지는 바랬고 등뼈 부분 실밥이 풀려 있었다. 첫 페이지를 열자 전 주인의 글씨가 보였다. 작고 또박또박한 필체였다.
날짜는 10년 전 초가을 무렵이었다. 대부분 여관의 일상이었다. 식재료 구입 목록, 수리한 곳, 투숙객의 이름과 방 번호. 그러다 중간쯤, 짧은 문장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문양의 방문자가 도착했다. 검은 망토에 은색 문양을 단 옷. 귀족임은 분명하다.``
손가락이 멈췄다. 등 뒤로 냉기가 내려앉았다. 나는 페이지를 더 넘겼다.
``이름을 밝히지 않았다. 어느 가문인지 알 수 없다. 다만 내가 알던 어떤 문장과 닮았다.``
그다음 페이지는 찢겨 있었다. 남은 페이지들에도 ``문양의 방문자``에 관한 기록은 한 줄, 두 줄씩만 이어졌다.
``사흘 머물렀다. 누군가를 찾고 있다고 했다.``
``마을을 떠날 때까지 자신을 숨겼다. 뒤따르는 자가 있을지 모른다고 했다.``
일기장을 덮었다. 심장이 빠르게 뛰고 있었다. 지금 이 여관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과 너무 닮았다.
나는 일기장을 셔츠 안주머니에 넣고 상자를 정리했다. 먼지 낀 손을 털고 계단을 올라갔다. 주방으로 가서 손을 씻었다. 차가운 물이 피부를 때렸다.
해 질 녘이 되었다. 식당 창문으로 노을빛이 길게 깔렸다. 저녁 식사 준비를 위해 테이블을 닦고 접시를 놓았다. 오늘 투숙객은 셋. 마차 대기 승객 두 명과 귀족 상인이었다.
린이 2층에서 내려왔다. 얼굴에는 약간의 피로가 남아 있었지만 걸음걸이는 평소처럼 조용하고 정확했다.
“도와줄 게 있으면.”
“식기 세팅 부탁해.”
린이 끄덕이고 식당으로 갔다. 나는 주방에서 빵을 썰고 스프를 데웠다. 평소와 똑같은 일상 동작이었지만 손에 힘이 더 들어갔다.
투숙객들이 하나둘 식당에 모였다. 대기 승객들은 창가 자리에 앉아 조용히 식사를 시작했다. 귀족 상인은 중앙 테이블에 자리를 잡았다.
린이 식기를 나르고 스프를 대접했다. 상인은 별말 없이 식사를 받았다. 나는 접수대 쪽에서 상황을 지켜봤다.
식사가 절반쯤 진행됐을 때였다. 상인이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금속이 접시에 닿는 소리가 조용한 식당에 울렸다.
“실례지만.”
린의 손이 미세하게 멈췄다. 상인이 냅킨으로 입가를 닦으며 말을 이었다.
“아침에는 대답을 못 들은 것 같아서 말이오. 그 귀걸이, 카론도 변경백령의 문양과 닮았다고 생각하지 않소?”
침묵이 내려앉았다. 창가의 승객 두 명이 흘낏 우리 쪽을 쳐다봤다. 린은 쟁반을 가슴 앞에 든 채 굳었다. 입술이 살짝 벌어졌지만 말은 나오지 않았다.
내가 식당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손님.”
상인의 시선이 내게로 옮겨졌다. 미소 비슷한 것이 입가에 걸렸다.
“아, 주인장. 내가 실례를 했나?”
“충분히 들으셨을 겁니다. 가족 유품이라고 했어요.”
나는 린 옆에 섰다. 그녀의 새하얀 손마디가 보였다. 나는 숨을 들이쉬고 말했다.
“린은 이 여관의 소중한 동료입니다. 더 이상 개인적인 질문은 곤란합니다.”
상인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그는 천천히 의자에서 일어나 나를 내려다봤다. 나보다 키가 반 뼘쯤 컸다.
“동료라……. 주인장은 이 여자가 누군지 알고 그런 말을 하는 건가?”
“충분히 알고 있습니다. 적어도 이 여관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사람이라는 건요.”
“낭만적이군.”
상인이 낮게 웃었다. 그는 린 쪽으로 한 걸음 기울었지만 내가 앞을 막았다. 상인의 구두가 멈췄다.
“좋아. 지금은 물러나지.”
상인이 냅킨을 테이블 위에 올렸다. 그의 손끝이 식탁보를 한 번 두드렸다.
“다만 알아두게. 카론도 변경백의 실종된 혈육에 관한 이야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어. 누군가는 반드시 확인할 거야.”
상인이 돌아서서 방으로 향했다. 발소리가 복도로 사라질 때까지 식당 안은 조용했다. 승객 두 명은 얼른 식사를 마치고 서둘러 나갔다.
린은 여전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나는 접수대 쪽 의자를 하나 끌어왔다.
“앉아.”
린이 천천히 의자에 앉았다. 쟁반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은 손이 떨리고 있었다.
“……왜.”
린의 목소리가 갈라져 있었다. 그녀가 고개를 들었다. 하늘색 눈에 분노와 공포가 얽혀 있었다.
“왜 이렇게 나를…….”
“린.”
나는 그녀의 옆자리에 앉았다.
“네가 말할 준비가 될 때까지 기다릴게.”
린의 눈이 살짝 커졌다. 나는 식탁 위에 손을 올렸다. 거리는 내버려뒀다. 다만 시선만은 그녀에게 두었다.
“상인이 뭐라 하든, 마을에 소문이 돌든, 나는 네 편이야. 그게 지금 내가 증명할 수 있는 전부다.”
린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는 고개를 숙이고 두 손을 무릎 위에 포갰다. 어깨가 작게 떨렸다가 멈췄다.
한참 뒤, 린이 일어났다.
“……먼저 올라갈게.”
“그래.”
린이 식당을 나갔다. 계단을 오르는 발소리가 이내 멀어졌다. 나는 식탁에 남은 접시들을 치웠다. 빵 부스러기를 쓸어내고 촛불을 줄였다.
카론도 변경백. 그 이름을 나는 몰랐다. 하지만 일기장 속 ``문양의 방문자``가 현재와 무관하지 않다는 건 확신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방문자도 누군가로부터 도망치고 있었다.
일기장을 내려다봤다. 셔츠 안주머니 속 가죽이 체온으로 따뜻해져 있었다.
2층으로 올라가 주인실로 들어갔다. 책상 위에 일기장을 펼쳤다. 깜박이는 촛불 아래 10년 전의 글씨가 떠올랐다.
``문양의 방문자. 어느 가문인지 알 수 없다. 다만 내가 알던 어떤 문장과 닮았다.``
가문의 문장. 귀족의 문양. 누군가를 찾아 이 여관에 왔고, 자신을 숨겼다. 지금 린에게 일어나고 있는 일과 거의 같다.
그 순간이었다.
둔탁한 종소리가 밤공기를 가르며 울려 퍼졌다. 한 번. 다시 한 번.
마을 회의장의 종이었다. 나는 창가로 걸어갔다. 마을 중앙 쪽에서 희미한 불빛들이 하나둘 움직이고 있었다.
종소리는 멈추지 않았다. 그 무거운 진동이 밤하늘을 채우며 내려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