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verStory

종이와 시간 사이

1화

10월 오전 햇살이 서점 유리문을 비스듬히 가로지르고 있었다. 이서연은 카운터에 앉아 은행 등기우편물을 쥔 채 멎어 있었다. 봉투 겉면의 발신인란을 세 번째 읽고 있을 때, 문이 열렸다.

“안녕하십니까. 지성은행 자산평가팀 강지오입니다.”

목소리가 익었다. 그보다 먼저, 서 있던 자세가 이서연의 숨을 한 겹 눌렀다. 어두운 네이비 수트, 심플한 실크 타이. 10년 전과 똑같이 이마를 시원하게 드러낸 머리 모양이었지만 미간의 얕은 주름과 단호한 눈빛만은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이서연은 엉덩이를 반쯤 들다가 도로 앉으며 손끝으로 책상 모서리를 한 번 쓸었다.

“……네, 통지는 받았습니다.”

강지오의 걸음이 카운터 앞에서 잠시 멎었다. 시선이 이서연의 얼굴을 훑고 내려왔다.

“이서연 씨. 오랜만입니다.”

사무적이었다. 어쩌면 업무용 목소리 그대로. 이서연은 그 말의 무게를 받아내듯 봉투를 내려놓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네요. 현장 감정이 필요하다고…… 여기 문건입니다.”

서류 봉투를 밀자 강지오가 받아 들었다. 손끝이 닿지 않게, 서랍에서 건넬 때보다 빠르게 손을 뗐다.

“둘러봐도 되겠습니까.”

“그렇게 하세요.”

강지오는 봉투를 내려다보지 않고 첫 페이지부터 꺼냈다. 눈이 서류를 훑는 동안, 이서연은 그가 오른손 검지를 허공에서 한 번 꺾는 걸 보았다. 예전에도 그러곤 했지. 생각에 잡히면 손끝으로 글씨를 쓰던.

“……건물 전체가 저당 잡혔고, 상속세 체납도 있군요.”

페이지를 넘기던 강지오의 이마에 얕은 주름이 잡혔다.

“감정가가 담보 설정 금액을 밑돌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대로면 대출 갱신 대신 경매 절차로 넘어갈 거고, 남은 기간은 석 달 정도로 보시면 됩니다.”

석 달.

이서연은 서점 안을 둘러보았다. 책장 사이로 낡은 가죽 소파가 보였고, 외삼촌이 직접 분류해둔 시집 코너에는 아직 먼지 한 점 없었다. 그 풍경을 눈에 담은 뒤에야 강지오를 다시 마주했다.

“개선할 방법은 없나요.”

“감정은 현장 실사와 시세 데이터를 기준으로 합니다. 개인의 의사가 들어갈 틈은 없습니다.”

강지오는 서류를 접어 봉투에 넣지 않고 손에 든 채, 무심히 소파 쪽을 보았다.

“10년 전보다…… 가게 분위기는 여전하군요.”

“……신경 쓰실 필요 없습니다.”

말이 생각보다 빨리 튀어나왔다. 이서연은 괜히 카운터 위의 볼펜을 정리하며 어깨를 조금 움츠렸다. 강지오가 다시 이서연을 쳐다보았다. 입술을 반쯤 열었다가 다문 순간, 그의 손이 넥타이 매듭을 짧게 당겼다.

그때, 서점 문이 거칠게 열리며 벨이 요란하게 울렸다.

“이런, 아직 장사 시작 전이신가? 난 늘 시간을 못 맞춰서 말이지. 아, 손님이 계셨구먼.”

최명호가 특유의 배를 앞세워 걸어 들어왔다. 화려한 패턴의 실크 셔츠 위로 굵은 금 체인 팔찌가 왼쪽 손목에서 달그락거렸다.

“강…… 강지오 씨시군요. 은행 감정인이 여기까지 직접 오신 걸 보면, 역시 문제가 좀 있다는 얘긴가.”

“업무 중입니다.”

강지오는 짧게 답했다. 최명호의 작은 눈이 이서연과 강지오 사이를 오갔다.

“이서연 씨, 제가 누차 말씀드린 것 같은데. 요즘 이 건물 시세가 장난 아니게 올랐어요. 은행에서 경매로 넘기겠다 싶으면 주저할 이유가 있나. 새로 들어올 세입자는 임대료를 세 배는 더…….”

“죄송합니다만, 저는 아직 서점을 닫을 생각이 없습니다.”

이서연은 끊어서 말했지만 끝이 살짝 갈라졌다. 최명호가 손수건을 꺼내 이마를 닦으며 웃었다.

“생각이야 좋죠. 그런데 현실이 그걸 좀 도와주나요.”

최명호의 시선이 강지오의 손에 들린 서류에 닿았다가 떨어졌다.

“어차피 은행에 정확한 현황이 전달돼야 하는 거니까─ 저도 건물주 대리인으로서 소상히 알려드려야 할 것들이 좀 있네요. 예를 들어, 적자가 얼마나 누적됐는지라든가.”

강지오가 그제야 최명호를 정면으로 바라보았다.

“감정 기준은 객관적 수치입니다. 대리인의 의견이 평가 결과를 바꾸는 일은 없습니다.”

“아이고, 기준이야 그렇지만 현장의 흐름이라는 것도…….”

최명호의 말이 채 끝나기 전에, 문이 다시 열렸다. 이번에는 벨 소리보다 빠르게 목소리가 쏟아져 들어왔다.

“언니! 이벤트 신청 폭주했어!”

유정은이 낙서 가득한 캔버스 에코백에서 태블릿을 꺼내며 뛰어왔다. 평소처럼 밤색 단발머리에 보라색 헤어핀을 꽂고, 어깨 위로 무선 이어폰이 달랑거렸다.

“우리 동네 카페 주인 아저씨가 공유 쫙 해주셨는데, 참가 신청 벌써 스물 건이야!”

유정은은 카운터에 다다르고 나서야 최명호와 강지오를 차례로 발견했다. 입을 동그랗게 벌렸다가 작게 찌푸렸다.

“……아이고, 최 사장님도 오셨네요.”

“빈티지 도서 이벤트라고? 젊은 애들 취향이야 알 바 아니지만…….”

최명호가 태블릿을 힐끗 보며 미간을 모았다.

“이런 걸로 서점이 살아날 거라고는 아무도 안 믿을걸. 은행에서도 진지하게 생각 안 하실 텐데.”

“참가자 리스트 봐요. 동네 서점 살리기 프로젝트로 지역 신문사에서도 연락 왔단 말이에요.”

유정은의 목소리가 한 톤 올라갔다. 손에 꼭 쥔 태블릿이 조금 흔들렸다.

“사람들이 이 서점을 잊지 않고 있다는 증거잖아요. 문화적인 가치가 있는 공간이면 그게 곧 경쟁력일 수도 있고…….”

“경쟁력이요? 하하. 유정은 씨, 그거 착각이야. 은행 대출 갱신엔 문화 가치 같은 거 한 푼도 안 쳐줘.”

최명호가 손수건을 접어 주머니에 넣으며 미소 지었다.

“어차피 저분도 딱딱하게 말씀하셨잖아. ‘객관적 수치’만 본다고. 자, 그림이 그려지시죠?”

유정은이 반박하려다 이서연을 바라보았다. 이서연은 조용히 태블릿을 받아 화면을 넘겼다. 스무 명의 신청자 목록 아래, 댓글창이 길게 이어져 있었다. ‘초등학교 때 여기서 첫 책 샀어요’ ‘골목길에서 사라지면 안 되는 공간’.

“최 사장님. 말씀은 잘 알겠습니다만…….”

이서연은 태블릿을 유정은에게 돌려주며 입을 뗐다.

“저녁에 또 얘기하시죠. 지금은 은행 감정 절차가 우선이니까요.”

최명호가 눈썹을 치켜올렸다.

“……뭐, 그러시든지. 대신 아까 그 이벤트 얘기, 은행에 알리는 걸 막을 순 없을 테고.”

웃으면서도 목소리는 단단했다. 최명호가 문을 열고 나가면서, 마지막으로 강지오 쪽을 슬쩍 보았다.

“강 과장님, 그래도 현장 분위기까지 무시하실 분은 아니시죠? 나중에라도 커피 한 잔 하시지.”

강지오는 답하지 않았다. 문이 닫히고 벨 소리가 가늘게 남았다. 유정은이 숨을 한 번 크게 들이쉬었다.

“언니, 저 인간 또 와서 뭐라 한 거야? 아까 은행 얘기…….”

“정은아.”

이서연이 유정은의 손목을 잠깐 잡았다 놓으며 고개를 저었다.

“조금 있다 들을게. 지금은…….”

“괜찮습니다.”

강지오가 말을 잘랐다.

“감정 실사는 여기서 마무리하겠습니다. 추가로 확인할 사항이 생기면 연락드리죠.”

그는 서류 봉투를 마저 접어 안쪽 주머니에 넣었다. 카운터 위로 명함이 미끄러지듯 놓였다. 깔끔한 흰색 명함.

“이 번호로 언제든…… 아니, 업무 시간에 연락 주십시오.”

이서연이 명함을 집으려다 멈칫하며 손가락을 카운터 가장자리에 한 번 스쳤다.

“……네. 수고하셨습니다.”

강지오는 한 걸음 물러서다가, 뒤돌기 직전 시집 코너를 잠시 더 보았다.

“아까 그 평가 결과. 석 달이라는 건 달력 얘기가 아닙니다.”

문이 열렸다 닫혔다. 오전 햇살이 좁아졌다 넓어졌다 다시 좁아졌다. 이서연은 명함을 집어 들고 뒷면을 확인할 생각도 못 한 채, 유정은이 다가오는 소리를 멀찍이 들었다.

“언니…… 저 사람, 언니랑 원래 알던 사이야?”

이서연은 명함을 앞치마 주머니에 넣으며 카운터 구석의 먼지 한 톨을 손끝으로 털어냈다.

“10년 전에…… 조금. 신청자 리스트 좀 더 자세히 보여줘.”

유정은이 태블릿을 내밀며 얼굴을 가까이 들이밀었지만, 더 묻지는 않았다.

서점 카운터에 마지막 손님이 나간 뒤 이서연은 명함을 한참 들여다보다 앞치마에서 빼내 책상 서랍 깊숙이 밀어 넣었다. 유정은이 커피머신을 닦는 동안 이서연은 태블릿의 신청자 리스트를 훑으며 메모를 남겼고, 오후 두 시 무렵 유정은에게 잠시 자리를 부탁하고 사무실로 향했다. 복도에 켜 둔 형광등이 낡은 안정기 특유의 윙윙거림을 냈고, 그 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사무실 문을 닫자 서점의 공기가 한결 가라앉았다. 이서연은 탁자 위에 쌓인 외삼촌의 유품 상자 앞에 섰다. 먼지 냄새가 코를 찔렀다. 손끝이 낡은 골판지 가장자리를 스치다 멈췄다.

정리해야 하는데.

상자 안에는 오래된 장부, 단골 손님들이 남긴 메모, 그리고 편지 뭉치들이 층층이 쌓여 있었다. 조심스럽게 편지들을 하나씩 꺼내 연대순으로 나누었다. 대부분 거래처와의 업무 서신이었다.

손이 특정 뭉치 위에서 멎었다.

베이지색 봉투 여러 개가 고무줄로 묶여 있었다. 위쪽 봉투들은 거래 명세서 같은 실용적인 내용이었지만, 아래쪽은 달랐다. 이서연의 검지가 봉투 모서리를 살짝 눌렀다.

편지 뭉치를 가만히 내려다보는 눈빛이 복잡하게 일렁였다. 고무줄을 당겨 손목에 걸었다 놓기를 반복했다. 몇 번이고 다시.

마치 만지면 안 되는 물건을 확인이라도 하듯.

결국 봉투 하나를 반쯤 빼내다가 다시 밀어 넣고는 상자 뚜껑을 닫았다. 이서연은 손을 들어 이마를 한 번 짚었다가 내렸다. 손끝에 미세한 떨림이 남아 있었다.

서점 카운터 구석에 앉은 강지오는 태블릿 화면을 톡톡 두드리며 감정 보고서 초안을 마무리하고 있었다. 통계 수치와 비교 매물 데이터가 빼곡했다.

입력이 끝나자 잠시 멈칫했다.

서류 가방 안쪽 지퍼 칸에 손을 넣었다. 노트북 어댑터와 케이블 사이로 손가락이 스쳤다. 표정이 아주 잠깐 풀어졌다가 단단하게 굳었다.

꺼낸 것은 10년 묵은 수제 책갈피였다.

누렇게 바랜 마분지에 손으로 그린 작은 시계 그림이 있었다. 가장자리가 닳고 코팅이 군데군데 벗겨져 있었지만, 중앙에 적힌 글씨만은 또렷했다. '종이와 시간 사이에서.'

글씨는 서툴지만 반듯했다.

강지오는 책갈피를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엄지로 글씨를 한 번 쓸었다. 오른손 검지가 바지 위에서 짧은 획을 그었다. 아주 작은 동작이었다.

그 너머로 서점 안쪽 복도가 보였다. 이서연이 사무실 문을 닫은 지 십 분쯤 지나 있었다. 강지오는 책갈피를 재빨리 서류 아래로 밀어 넣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해 질 무렵의 빛이 서점 앞 유리창을 길게 가로질렀다.

강지오는 카운터에 보고서용 서류 봉투를 올려놓았다. 이서연은 진열대에서 나와 한쪽 팔을 가볍게 포갠 채 그 앞에 섰다.

“감정 보고서 최종안입니다.”

강지오의 목소리는 낮고 사무적이었다.

“내일까지 전자 문서로도 발송되지만… 직접 전달드리는 게 맞다고 생각했습니다.”

이서연이 봉투를 집어 들었다. 열어보지 않고 테이블 위에 다시 내려놓았다. 손끝에 아직 힘이 없었다.

“수치는 어떻게 나왔습니까.”

“예상보다 낮습니다.”

강지오가 태블릿을 들어 보였다.

“건물 전체의 노후도와 상가 공실률이 반영된 결과… 현재 평가액으로는 대출 갱신이 어렵습니다.”

이서연은 잠시 숨을 골랐다.

“네.”

짧고 건조한 대답이었다.

“3개월입니다.”

강지오가 한 걸음 다가섰다. 그림자가 카운터 위로 길게 드리웠다.

“그 안에 담보 가치를 높일 근거가 마련되지 않으면 은행은 경매 절차에 들어갑니다.”

이서연의 손가락이 팔꿈치를 꽉 움켜잡았다.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차분하고 단호한 눈빛이었다.

“그걸… 이렇게까지 정확히 알려주시는 이유가 뭡니까.”

강지오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감정인으로서 의뭅니다. 불리한 상황일수록 늦게 아는 편이 더 나쁩니다.”

“그래요.”

이서연이 짧게 웃었다. 웃음 같지 않은 웃음이었다.

“그럼 이제 끝난 건가요.”

“아직 검토하실 부분이—”

“됐습니다.”

이서연이 말을 잘랐다. 그녀의 손이 서류 봉투를 집어 들었다.

“네가… 무슨 자격으로 여기까지 와서 이러는 거예요, 강지오 씨.”

카운터 너머로 정적이 흘렀다.

강지오의 표정이 당혹감으로 굳어졌다. 손에 든 태블릿을 내리려다 멈칫했다. 입술이 열렸다 닫혔다.

“그건…”

“10년 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래요.”

이서연의 목소리는 여전히 낮았지만 끝이 살짝 갈라져 있었다. 그를 정면으로 바라보던 이서연이 천천히 등을 돌렸다.

“다음부터는 전화로 먼저 알려주세요. 굳이 올 필요 없으니까.”

강지오가 대답하지 못했다. 손이 바지 주머니 속 책갈피 쪽으로 움찔하다 멈췄다. 미간의 주름이 깊어질 뿐이었다.

“돌아가세요.”

이서연은 진열대 안쪽으로 사라지며 서류 봉투를 품에 안았다.

강지오는 잠시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서점의 형광등이 깜빡였다가 다시 켜졌다. 현관문을 밀고 나가자 밖은 이미 어둑어둑했다. 상가 앞 가로등에 불이 들어오고 있었다.

서점 안, 문이 닫힌 뒤였다.

이서연은 사무실로 돌아와 상자 뚜껑을 다시 열었다. 아까 밀어 넣었던 봉투를 이번에는 주저 없이 꺼냈다.

베이지색 봉투 안에서 접힌 편지 한 장이 나왔다.

종이를 펼쳐 들었다. 익숙한 글씨체였다. 절반쯤 읽다가 멈춰, 손끝으로 편지 가장자리를 조심스럽게 매만졌다. 이마가 조금 더 숙여졌다.

혼잣말이 새어 나왔다.

“이건… 나한테 온 거였어….”

종이와 시간 사이1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