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verStory

종이와 시간 사이

3화

다음 날 저녁, 폐점 직후의 서점은 조용했다.

이서연은 카운터에 앉아 외삼촌의 편지 상자를 정리하고 있었다. 유정은은 신문사 촬영 준비로 일찍 자리를 비웠다. 문득 문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벌써 닫았는데······.”

이서연이 고개를 들다가 굳었다. 강지오였다.

“감정 업무 마치고 들렀습니다. 커피 한 잔, 괜찮으시면.”

그의 목소리는 사무적이었다. 하지만 어제 그렇게 나갔던 사람이 다시 온다는 것 자체가 이상했다.

“······앉으세요.”

이서연은 작업실 쪽으로 가서 커피를 내렸다. 돌아왔을 때 강지오는 카운터 옆 작은 탁자 앞에 서 있었다.

그의 시선이 편지 상자에 꽂혀 있었다.

이서연의 손이 살짝 멈췄다. 커피잔을 탁자 위에 내려놓으며 최대한 무심하게 말했다.

“외삼촌 유품 정리 중이에요.”

강지오는 대답하지 않았다. 상자 겉에 놓인 편지 더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중 상단에 올려진 한 장.

손바닥만 한 크기. 복사본이었다.

원본은 10년 전 누렇게 변색된 공책 종이. 이서연은 그 편지를 그 자리에 두고 온 줄 알았다.

어제 상자를 급히 정리하다 위에 올려놓은 모양이었다.

강지오가 허리를 숙였다. 이서연은 숨을 멈췄다.

그의 손가락이 복사본 위를 짚었다.

“······내 글씨.”

목소리가 바뀌어 있었다. 사무적인 톤이 아니었다.

“이 편지.”

강지오가 고개를 들었다. 얼굴에서 핏기가 가시고 있었다.

“왜 여기 있어요.”

이서연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손끝이 차가워졌다. 커피잔을 내려놓은 손이 허공에 멎은 채 굳어 있었다.

“이서연 씨.”

강지오가 복사본을 집어 들었다. 손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이 편지, 내가 쓴 겁니다. 10년 전에. 당신 외삼촌한테 부탁해서······.”

말을 마치지 못했다. 눈빛이 빠르게 흔들렸다.

이서연은 알아챘다. 이제 더는 숨길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어요.”

강지오의 손이 멎었다.

“뭐라고요.”

“그 편지. 나한테 온 거라는 것.”

이서연은 겨우 숨을 들이쉬었다. 안경을 살짝 올리려던 손이 멎었다가 떨어졌다.

“외삼촌이 돌아가신 뒤, 유품 정리하다가 찾았어요.”

“·····언제요.”

“석 달쯤 됐어요.”

강지오가 편지를 내려다보았다. 기다란 침묵이 탁자 위로 내려앉았다.

“그럼······ 처음부터.”

그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한 손이 탁자 모서리를 움켜쥐었다.

“내가 누군지 알면서, 모르는 척했습니까.”

이건 질문이 아니었다. 확인이었다.

이서연의 입술이 떨렸다. 손가락 끝이 바지 주름을 꽉 움켜쥐고 있었다. 가슴속에서 무언가가 무너지는 소리가 들렸다.

변명하고 싶었다. 그럴 수 없었다. 어떤 말을 해도 이 순간을 지우지 못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 편지, 나한테 온 게 아니었어요?”

이서연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순간, 강지오의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졌다. 아니, 무너졌다.

눈가가 붉어졌다. 입술을 한 번 깨물고는 편지를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동작은 느렸지만 힘이 들어가 있지 않았다.

“······아니.”

한마디였다. 긴 손가락이 편지 위에 그대로 멎었다.

“당신한테 온 게 맞아요. 처음부터.”

이서연은 그 말에 숨을 삼켰다.

강지오는 편지를 내려다본 채로 말을 이었다.

“내가 전하고 싶다고 부탁한 것도. 그 편지 받을 사람이······ 당신이라고 한 것도.”

조용한 음성이었다. 어제의 날카로움도, 첫 만남의 냉철함도 없었다.

“근데 왜, 나는 이걸 지금 보고 있지.”

이서연의 손이 입을 막았다. 눈가가 뜨거웠다.

“외삼촌이······ 전해주지 않으셨어요.”

강지오가 고개를 들었다. 두 사람의 시선이 부딪혔다.

이서연은 그 눈을 똑바로 마주하지 못했다. 하지만 피하지도 않았다.

“처음 봤을 때는······ 찢어버리고 싶었어요. 그런데, 못 찢겠더라고요.”

말이 점점 짧아지고 있었다. 이서연은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그 사람이 왜 그랬는지, 이제는 물을 수도 없고······.”

강지오의 표정이 뒤틀렸다. 무언가 말하려다가 고개를 숙였다.

그때였다.

강지오가 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냈다.

서툰 손놀림으로 지갑 안쪽 칸을 열었다. 오래된 종이가 한 장 나왔다.

마분지. 가장자리가 닳고 빛바랜 수제 책갈피.

이서연의 숨이 멎었다.

“이건······.”

강지오는 책갈피를 손바닥 위에 올려놓았다. 엄지손가락으로 중앙 글씨를 한 번 쓸었다.

‘종이와 시간 사이에서.’

어제 책장 사이에서 보았던 그것과 같은 글씨였다.

“너한테 주려고 만든 거야.”

이서연은 책갈피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손을 뻗다가 멈췄다.

“······언제.”

“10년 전.”

강지오는 손바닥을 펼친 채로 가만히 있었다.

“네 생일 선물.”

마분지 위에 그려진 작은 시계 그림. 서툰 붓 터치. 코팅이 벗겨지고 색이 바랬지만 글씨만은 또렷했다.

이서연은 마침내 책갈피를 집어 들었다. 손끝에 닿은 가장자리가 보풀처럼 일어나 있었다. 손때가 묻고 닳아서.

10년 동안 누군가가 만지고 꺼내 보고······.

눈물이 한 방울 떨어졌다. 책갈피 위가 아니라 이서연의 손등 위로.

“계속······ 가지고 있었어요?”

강지오가 짧게 숨을 들이쉬었다. 대답은 없었다. 대신 오른손 검지가 바지 위에서 작은 획을 그었다.

그 버릇. 이서연은 고개를 들었다.

강지오의 눈이 붉어 있었다.

“10년 동안. 주지 못한 거야.”

목소리가 갈라져 있었다. 이서연은 책갈피를 두 손으로 감싸 쥐었다. 작은 종잇조각에서 묵은 손의 온기가 배어 나왔다.

“왜 아무 말도 안 했어요.”

이서연의 음성이 떨렸다. 책갈피를 가슴 앞으로 당겼다.

“10년 동안······ 나는 아무것도 모르고. 당신은 이걸 가지고 있었고.”

강지오는 대답하지 않았다.

“왜.”

이서연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떨림이 분노처럼 번졌다.

“그 편지도 그렇고. 왜······ 왜 다 알고도 아무 말도 안 해요.”

“너한테.”

강지오가 입을 열었다. 천천히.

“또 상처 줄까 봐.”

탁자 위로 무거운 침묵이 떨어졌다.

“······또.”

이서연이 무심코 따라 말했다. 강지오는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그때. 편지 부탁하고 기다렸다. 답장은커녕 네 얼굴도 못 봤고.”

그는 말을 끊었다. 잠시.

“한 달쯤 지나서야 알았어. 네가 전학 갔다는 거. 아무 말도 없이.”

이서연의 입술이 열렸다.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내가 무슨 잘못을 했나. 편지가 부담스러웠나. 아니면······ 그냥, 나 자체가 싫었나.”

강지오는 무표정하게 말했지만 눈빛이 붉은 채로 그대로였다. 이서연이 책갈피를 쥔 손에 힘을 주었다.

“그게 아니었어요.”

“이제 알아.”

강지오가 탁자 위의 편지 복사본을 보았다.

“ 지금와서 안다고, 그때가 지워지는 건 아니지만.”

“나는······.”

이서연이 겨우 입을 열었다.

“나는 외삼촌한테 전화 왔었어요.”

강지오의 눈빛이 멈췄다.

“전학 간 날 밤에. 어머니가 아파서 급히 간 거라고······ 편지고 뭐고 그런 거 생각할 겨를도 없었고.”

이서연은 숨을 들이켰다.

“나중에, 돌아왔을 땐 이미 2년이 지나 있었고······ 외삼촌은, 아무 말도 안 해줬어요.”

안경 아래 눈가가 젖어 있었다. 이서연은 안경을 벗지도 않고 손등으로 눈을 한 번 눌렀다.

“그냥, 나한테······ 그 편지가 온 적 없었던 것처럼.”

강지오의 표정이 무너졌다. 그 말에.

“그럼, 너는 모르는 거였어. 이 편지를 내가 쓴 줄도. 내가 기다리는 줄도.”

이서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작은 동작이었다.

강지오가 한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긴 정적.

“······내가.”

그의 목소리가 심하게 갈라져 있었다.

“내가 지금까지, 당신이 날 무시한 줄 알고······.”

거기까지였다.

강지오는 말을 잇지 못했다. 두 손을 탁자 위에 올려 깍지를 꼈다. 손끝이 하얘질 정도로 힘이 들어갔다.

이서연은 그 손을 내려다보았다. 아직 책갈피를 쥔 손이 가슴 앞에 있었다.

“나도요.”

둘 다 침묵했다.

서점 바깥은 어둑어둑해지고, 탁자 위 스탠드 불빛만 편지와 책갈피를 비추고 있었다.

침묵이 길어졌다. 길어질수록 더 무거워졌다.

원망이라고 하기엔 너무 많은 시간이 지나 있었다. 미안함이라고 하기엔 누구를 향해야 할지 애매했다.

강지오가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갈게.”

이서연이 고개를 들었다. 강지오는 이미 가방을 집어 들고 있었다.

“서점은.”

그가 말했다. 애써 사무적인 톤으로 돌아가려는 게 느껴졌다.

“내가 규정 안에서 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볼게.”

이서연은 대답하려다 말았다. ‘고마워요’라는 말이 적절할지, ‘괜찮아요’라고 거절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강지오는 책갈피를 보지 않았다. 이서연의 손에 쥔 채로 있었다.

“다음에······.”

그가 문 앞에서 멈춰 섰다.

“아니다.”

혼잣말처럼 중얼거리고는 문을 열었다.

종소리가 짧게 울렸다. 밖은 어두웠다.

강지오는 돌아보지 않았다. 이번에도.

서점 문이 닫힌 뒤 한참 동안, 이서연은 탁자 앞에 그대로 서 있었다.

책갈피가 손바닥 안에서 점점 따뜻해졌다.

10년 동안 누군가의 지갑 속에 있었다는 사실. 그 시간이 무게가 되어 손바닥 위로 내려앉는 느낌이었다.

눈물이 마르고 나자, 이상하게도 텅 빈 감각이 남았다.

이제는 다 털어놨다. 편지도, 오해도.

하지만 서점은 여전히, 석 달 뒤면 사라질지도 몰랐다.

이서연은 심호흡을 한 번 하고 편지 상자를 들었다. 탁자 위를 정리하려던 참이었다.

상자 밑바닥에서 뭔가 바스락거렸다.

처음엔 못 보던 봉투였다. 갈색 크라프트지. 겉면에 외삼촌의 글씨로 ‘서점 초기 자료’라고만 써 있었다.

봉투를 열자 사진이 나왔다.

흑백 사진이 여러 장. 1960년대로 보이는 건축 양식이 찍혀 있었다. 지금은 사라진 중정과 목재 서가. 한 장에는 서점 앞에 모인 사람들이 보였다. 삼삼오오 책을 든 중년 문인들.

그 아래는 원고 묶음이었다. 손글씨 원고. 지역 문인들의 이름이 빼곡히 적혀 있었다.

이서연은 사진을 한 장씩 넘겨 보았다. 서점의 옛 모습이 한 장 한 장 드러날 때마다 손이 느려졌다.

원고 더미 속에는 메모가 끼워져 있었다.

‘종이와 시간 사이는 단순한 서점이 아니라, 지역 문인들의 구심점 역할을 해 온 공간. 건축적으로도 초기 상가주택의 원형을 간직한 사례.’

외삼촌의 글씨였다.

이서연은 사진과 원고를 탁자 위에 펼쳤다.

스탠드 불빛 아래, 낡은 사진 속 서점이 조용히 빛나고 있었다. 책갈피를 그 옆에 내려놓았다.

‘······이런 게.’

이서연이 작게 읊조렸다. 안경을 살짝 올리며 사진 한 장을 집어 들었다.

문화적 가치.

그게 서점을 살릴 열쇠가 될지도 몰랐다. 아직은 막연한 가능성일 뿐이었지만.

탁자 아래로 불빛이 쏟아졌다. 이서연의 눈이 마지막 사진에 멎었다.

서점 앞 계단에 앉은 노 작가의 모습. 손에 쥔 책 표지가 흐릿하게 보였다.

그 아래로 낡은 책갈피가 놓여 있었다.

종이와 시간 사이3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