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verStory

종이와 시간 사이

4화

새벽 네 시가 조금 넘었을 때, 이서연은 작업실 탁자 위에 원고 묶음을 연대순으로 가지런히 정렬해 놓고 마지막 사진 한 장을 손에 쥔 채 멈춰 서 있었다. 스탠드 불빛 아래 흑백 사진 속 서점은 지금과 많이 달랐다. 원고 더미 옆에는 외삼촌의 메모가 따로 분류되어 있었다.

서점의 건축적 원형을 기록한 짧은 글과, 지역 문인들의 이름이 빼곡히 적힌 목록. 책갈피는 그 옆에 놓여 있었다. 닳은 마분지 가장자리가 스탠드 불빛을 받아 누렇게 떠 있었다.

이서연은 안경을 벗어 손등으로 눈을 한 번 문질렀다. 다시 안경을 쓰고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화면 상단의 시계를 확인하고는 전화를 걸었다. 수신음이 몇 번 울리지 않아 유정은이 받았다. 목소리는 반쯤 잠겨 있었지만 곧바로 또렷해졌다.

“이서연 언니? 아직 퇴근 안 했어?”

“응. 미안한데, 지금 올 수 있어?”

이서연의 목소리는 낮고 조용했다. 탁자 위에 흩어진 사진들을 한 번 훑으며 덧붙였다.

“어젯밤에 좀 찾은 게 있어서. 같이 보고 싶어.”

수화기 너머로 이불을 박차는 소리가 들렸다.

“당연히 가지. 이 시간에 전화할 정도면 진짜 큰일이네. 나 씻고 바로 간다. 커피 내려놔.”

전화를 끊자 작업실이 다시 조용해졌다. 이서연은 원고 묶음을 한 번 더 확인하고 나무 궤짝 위에 올려두었다. 사진들은 연대순으로 묶어 고무줄로 살짝 여몄다. 책갈피는 잠시 망설이다가 원고 위에 가지런히 내려놓았다.

유정은이 서점에 도착한 것은 오전 아홉 시가 조금 지나서였다. 들어오자마자 숨을 조금 헐떡이며 카운터 위의 커피잔을 한 모금 들이켜고는 작업실 탁자로 다가갔다. 원고 묶음과 사진을 한 번 훑어보던 유정은의 눈이 커졌다.

“잠깐, 이거.”

유정은은 사진 한 장을 집어 들었다. 서점 앞에 모인 중년 문인들의 모습이었다.

“이분들, 우리 동네 문학관에 사진 걸려 있는 분들이야. 60년대에 여기서 시 낭독회 했다고 들었어.”

이서연이 고개를 들었다. 유정은은 연달아 원고를 넘기며 외삼촌의 메모를 읽어 내려갔다. 낮은 목소리로 읽다가 점점 빨라졌다.

“‘종이와 시간 사이’는 지역 문인들의 구심점 역할을 해 온 공간… 건축적으로도 초기 상가주택의 원형을 간직한 사례.”

유정은이 이서연을 돌아보았다. 얼굴이 조금 붉어져 있었다.

“언니, 이거 문화재 등록 가능할지도 몰라.”

이서연은 안경을 살짝 올렸다.

“그걸 확인하고 싶었어.”

이서연은 카운터로 가서 노트북을 열었다. 지역문화재단 사이트를 검색해 번호를 찾았다. 유정은은 원고와 사진을 조심스럽게 정리하며 옆에서 번호를 읽어 주었다. 전화는 세 번 만에 연결됐다.

“안녕하세요. ‘종이와 시간 사이’ 서점입니다.”

이서연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조금 더 천천히, 또렷하게 이어졌다. 서점의 건축 연대와 보관 중인 지역 문인들의 자료를 설명할 때는 원고를 한 장씩 집어 가며 정확히 읽었다. 전화를 끊고 몇 초 뒤에 다시 벨이 울렸다. 담당자가 내부 논의 후 거는 전화였다.

“오늘 오후에 현장 방문 가능하십니다.”

이서연이 짧게 숨을 들이쉬었다. 유정은은 두 손을 꼭 쥐고 입을 막았다.

“자료 사본을 준비해 두겠습니다.”

이서연이 차분하게 대답하고 전화를 내려놓았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유정은이 말문을 열었다. 목소리가 평소보다 반 톤 높았다.

“우리, 진짜 될지도 몰라.”

“아직 가능성일 뿐이야.”

이서연은 그렇게 말했지만, 손가락 끝이 조금 떨리고 있었다. 탁자 위에 내려놓은 책갈피의 닳은 모서리를 한 번 쓰다듬었다.

“사본을 지금 만들자.”

이서연은 원고 묶음을 들고 복사기로 향했다. 유정은이 사진 봉투를 챙기며 뒤를 따랐다.

다음 날 새벽, 이서연은 서점 이층 작업실에서 복사기를 몇 번이고 돌려 사본을 세 벌 만들었다. 지친 몸으로 아래층으로 내려와 카운터를 정리하던 참이었다.

아침이 채 밝기도 전에 서점 문이 열렸다. 문에 달린 벨이 짧게 울렸다. 이서연은 작업실에서 나오다 걸음을 멈췄다. 카운터 앞에 강지오가 서 있었다. 전날과 같은 수트 차림이었지만 넥타이 매듭이 평소보다 살짝 느슨했다.

“……아직 개점 시간이 아닙니다.”

“알아.”

강지오의 시선이 카운터 위를 훑었다.

“책갈피.”

“네?”

“어젯밤에 여기 두고 갔다.”

이서연이 작업실 탁자 위에서 책갈피를 집어 들었다. 마분지 가장자리가 손끝에 닿았다.

“이거…… 강지오 씨가 만든 거 맞죠.”

강지오의 손이 허공에서 멈췄다.

“직접 만드셨냐고요.”

“……그래.”

강지오의 목소리가 평소보다 낮았다. 손을 뻗어 책갈피를 집으면서 시선을 피했다.

“오래됐네.”

“10년이요.”

이서연의 대답에 강지오의 손이 잠시 멈췄다. 책갈피를 집어 넣는 동작이 평소보다 서툴렀다.

“그리고 하나 더. 이번 감정 건…… 내가 빠질 거야.”

“……네?”

“이해충돌 신고할 거다. 오늘 중으로.”

이서연은 안경을 살짝 올렸다가 손을 내렸다.

“그게…… 가능한 일인가요.”

“규정상으론 가능해. 지금 담당에서 빠지는 게 맞고.”

강지오는 책갈피를 안주머니에 넣었다. 외투를 여미는 손끝이 조금 빨랐다.

“서점 감정, 다른 직원이 맡게 될 거야.”

“그럼 강지오 씨는.”

“난 이 건에서 손 떼.”

문이 열리며 바깥 공기가 들어왔다. 벨이 다시 짧게 울렸다.

“책갈피…… 찾아가셔서 다행이네요.”

강지오는 대답 없이 고개만 한 번 끄덕이고 문을 닫았다. 이서연은 카운터에 손을 짚었다. 손바닥 아래 나무 결이 차갑게 느껴졌다.

두 시간쯤 지났을까. 유정은이 태블릿을 흔들며 말했다.

“언니, 이거 봐요. 신청자 어제보다 열두 명 더 늘었어!”

그때 문이 열렸다. 50대 초반의 여성이 들어섰다. 무채색 정장 차림에 손에는 작은 서류 봉투를 들고 있었다.

“이서연 씨 계신가요.”

“제가 이서연입니다.”

“지성은행 자산관리팀 김영선입니다. 예전에 이 가게 전 주인이신…… 외삼촌 분 거래를 제가 맡았었어요.”

이서연의 표정이 조금 풀렸다.

“아…… 외삼촌이 늘 은행에 계신 분이 도움 많이 주신다고.”

“그런 말씀은…… 제가 오늘은 그 이야기 하러 온 건 아니고요.”

김영선은 서류 봉투를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목소리가 한 톤 낮아졌다.

“최명호 씨라고, 이 건물 관리인이시죠.”

유정은이 태블릿을 내려놓으며 다가왔다. 두 손을 꼭 쥐었다.

“그 양반이 또 무슨 짓을.”

“은행 내부에 서점 경영 상태가 심각하다는 자료를 보냈습니다. 사실관계가…… 많이 왜곡돼 있더군요.”

봉투에서 작은 USB 메모리 하나가 나왔다. 김영선은 USB를 카운터 위로 밀며 말을 이었다.

“저희 지점장과 통화한 녹취 파일입니다. 서점을 경매로 넘기게 해달라고, 감정가를 낮춰달라고 하는 내용이 들어 있어요.”

이서연은 USB를 집어 들었다. 손끝에 힘이 들어갔다.

“이걸 왜 저에게.”

“제 상사가 최명호 씨 편을 들고 있어서…… 공식 경로로는 한계가 있었습니다. 이서연 씨에게 직접 전달하는 게 가장 빠르다고 판단했습니다. 제 개인적인 결정입니다.”

유정은이 이서연의 팔을 잡았다.

“언니, 이거면 되는 거 아냐? 저 양반이 무슨 짓 했는지 증거잖아.”

“……김영선 님, 이거 주시면 곤란해지실 수도.”

“이미 각오하고 왔어요. 고인이 되신 외삼촌께 신세를 많이 졌습니다. 이 정도는 해야 마음이 편할 것 같아서요.”

문이 닫히고 한동안 둘 다 말이 없었다. USB가 카운터 위에서 작게 빛났다. 유정은의 입이 떨어졌다.

“……언니, 우리 찾아가자.”

“어디를.”

“최 사장 사무실!”

이서연은 USB를 손에 꼭 쥐었다. 책갈피를 돌려주던 강지오의 손이 떠올랐다. 감정에서 손 떼겠다던 그 말이.

“그래.”

이서연이 안경을 살짝 올리며 말했다.

“가서…… 이야기는 들어봐야겠네.”

유정은은 벌써 에코백을 챙겨 들고 있었다. 얼굴이 붉어져 있었다. 이서연은 USB를 셔츠 주머니에 넣고 카운터 뒤 선반에서 서점 열쇠를 집었다.

“정은아.”

“응?”

“녹취 파일…… 밖에서 한 번 확인하고 들어가자.”

유정은이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이서연은 문을 열며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최명호의 사무실은 상가 건물 2층 복도 끝에 있었다. 유정은이 노크도 없이 문을 밀었다.

“어, 어?”

최명호가 책상에서 상체를 일으켰다. 책상 위에는 은행 로고가 찍힌 서류 뭉치가 흩어져 있었다.

“이게 무슨…… 들어오시기 전에──”

“이거, 최 사장님 목소리 맞죠.”

유정은이 USB를 들어 올렸다. 목소리가 평소보다 한 톤 낮았다.

“지난주 수요일, 은행 감정팀에 전화하셨던 녹취예요. 서점 매출이 조작됐다고, 이서연 씨가 상습적으로 장부를 속였다고──그게 무슨 근거로 하신 말씀이세요.”

최명호의 손수건이 멈췄다. 작은 눈이 USB로 쏠렸다가 이서연에게로 옮겨 붙었다.

“아, 그…… 그건 오해야──”

“녹취 다 들었습니다.”

이서연의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끝음이 단단했다.

“최 사장님께서 은행에 제공한 자료, 저희 감정 보고서에 반영돼 있었어요. 출처도 없는 허위 매출 데이터였고요.”

“원본 대조해 드릴까요.”

이서연이 태블릿을 켜 서점 회계 장부를 띄웠다. 최명호의 이마에 땀이 맺혔다.

“아니, 잠깐만요, 이서연 씨.”

손수건으로 이마를 닦으며 최명호가 일어섰다. 입꼬리가 떨렸다.

“저도 건물주를 대리하는 입장에서…… 정보가 좀 부풀려진 건 있을 수 있죠. 하지만 큰 틀에서──”

“큰 틀이요?”

유정은이 한 걸음 다가섰다.

“서점이 문 닫게 만드는 게 큰 틀이에요? 거짓 정보로 은행 심사에 개입한 게──”

“유정은 씨! 말씀이 너무 과하시네!”

최명호가 손수건을 탁자 위로 내던지며 손가락질을 했다.

“너 같은 애송이가 감히──”

“그만하시죠.”

이서연이 태블릿을 내리고 최명호의 눈을 똑바로 보았다.

“지금 이걸 은행 감사실과 건물주 측에 동시에 제출할 생각입니다. 그 전에 직접 설명하실 기회를 드리는 거예요.”

최명호의 손이 허공에서 멎었다.

그 시각, 은행 본점 7층 대출심사과. 강지오는 접수 창구 앞에 서 있었다.

“강지오 차장님, 오늘 현장 일정 없으신데……”

“업무 관련은 아닙니다.”

강지오가 서류 봉투를 창구 안으로 밀었다. 겉면에 ‘이해충돌 신고서’라고 인쇄돼 있었다.

“종이와 시간 사이 서점 감정 건 관련, 신고 사유는 개인적 이해관계.”

“이…… 차장님, 이거 접수되면 해당 건에서 배제되시는데──”

“알고 있습니다.”

강지오의 목소리는 짧고 단호했다. 직원이 서류를 접수했고, 컴퓨터 화면에 접수 번호가 떴다.

“추가로.”

강지오가 두 번째 서류를 꺼냈다.

“최명호, 상가 건물 관리 대리인. 이 인물이 감정팀에 제공한 비공식 자료 목록입니다. 규정 위반 소지가 있어 내부 감사를 요청합니다.”

창구 직원이 서류와 강지오의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다 조용히 목례했다. 강지오는 짧게 고개를 끄덕이고 돌아섰다.

최명호의 사무실, 침묵이 길어졌다.

“……이서연 씨.”

최명호가 손수건을 집어 들었다.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나도 어쩔 수 없었어요. 건물주가 압박을…… 임대료를 못 올리면 내 자리도──”

“그래서 저희를 거짓말로 묻으려고 하셨습니까.”

이서연의 목소리에 처음으로 날이 섰다.

“그런 변명이 통할 거라고 생각하세요.”

최명호가 손수건을 말아쥐고 의자에 털썩 앉았다. 시선이 탁자 위 서류들 사이로 흩어졌다.

“내가…… 내가 잘못……”

말끝이 흐려졌다.

은행 본점 정문을 나서며 강지오는 휴대폰을 꺼냈다. 화면에 서점 전화번호가 떠 있었지만 통화 버튼을 누르지 않았다. 햇살이 유리창에 반사돼 어깨 위로 쏟아졌다. 그는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고 걸음을 옮겼다.

서점으로 돌아온 두 사람 사이에는 잠시 말이 없었다. 유정은이 입을 뗐다.

“언니…… 우리가 방금 진짜로 한 거지.”

이서연이 피식 웃었다. 긴장이 풀린 듯했지만 온전히 가라앉지 않은 웃음이었다.

“그런 것 같아.”

그때 서점 전화가 울렸다.

“네, 종이와 시간 사이입니다.”

─ 아, 이서연 씨. 지역문화재단 김영선입니다.

“예, 안녕하세요.”

─ 보내주신 자료 검토가 끝났습니다. 내일 오전 중으로 현장 실사 나가겠습니다. 사진 속 건축 원형이 현장에 얼마나 남아 있는지 확인하고 싶어서요.

이서연의 손이 수화기를 세게 쥐었다.

“내일 오전이요.”

─ 예. 문화적 가치가 인정되면 금융 연계도 가능합니다. 그 부분은 실사 후에 자세히 말씀드리죠.

“감사합니다.”

이서연이 전화를 내려놓았다. 유정은이 두 손을 꼭 쥔 채 올려다보고 있었다.

“내일 현장 실사 온대.”

“정말?”

둘의 시선이 조용히 마주쳤다. 유정은의 눈에 물기가 번졌지만, 웃음을 참느라 입술이 실룩였다. 서점 창밖으로 긴 오후의 햇살이 스며들었고, 책장 사이로 그림자가 길게 늘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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