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verStory

장마가 걷히는 날, 너에게 닿으면

12화

다음 날 아침, 빗소리가 여전했다.

윤하늘은 카운터에 앉아 어젯밤 정리하지 못한 서류들을 넘기고 있었다. 공청회에서 돌아온 뒤 옷도 갈아입지 않고 카운터 의자에 앉은 채 잠들었고, 새벽녘에야 눈을 떴다. 어깨에 걸쳐진 얇은 담요를 만졌을 때 비로소 서지헌이 마지막까지 남아 있었음을 알았다.

서점 앞 유리문 너머로 빗줄기가 가늘게 흔들렸다. 열 시가 조금 넘은 시각이었다.

서지헌은 카운터 맞은편 작은 테이블에 앉아 있었다. 노트북 화면을 내려다보던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은 채 입을 열었다.

“구청에서 메일이 왔습니다.”

윤하늘의 손이 서류 위에서 멈췄다.

“내용을… 확인하셨어요.”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표정은 평소와 다름없었지만, 마우스를 쥔 손가락에 힘이 들어가 있었다.

“공식 통보입니다. 서점 건물을 마을 자산으로 보존하는 안건이 심의를 통과했고, 별도 예산으로 수리비 일부를 지원한다는 방침이에요. 빈 가게 활용 방안과 연계해서 내년 상반기까지 세부 계획을 수립한다고 합니다.”

윤하늘은 천천히 일어나 카운터를 돌아 나왔다. 테이블 앞에 서서 노트북 화면을 내려다봤다. 도시정비과에서 보낸 공문이었다. 두 번을 읽었다. 장마 탓인지, 아니면 잠이 덜 깬 탓인지 글자들이 좀처럼 머리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러니까…”

말을 잇지 못했다. 서지헌이 노트북을 살짝 밀어 그녀 쪽으로 돌렸다. 화면의 빛이 그의 손등에 닿았다.

“서점을 지키게 됐습니다.”

짧은 문장이었다. 변호사가 의뢰인에게 결과를 통보할 때처럼 정확하고 담담한 어조. 하지만 마지막 음절에서 목소리가 미세하게 갈라졌다.

윤하늘은 노트북을 내려다본 채 한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십 년 전 이곳을 떠난 사람과, 십 년 만에 돌아온 이 거리에서, 함께 싸워 이긴 결과였다.

“네.”

그녀가 대답했다. 짧은 한 글자. 공청회장에서 그가 그랬던 것처럼.

서지헌이 고개를 들었다. 두 사람의 시선이 테이블 위에서 마주쳤다. 아무 말도 오가지 않았지만, 굳이 필요하지 않은 순간이었다.

잠시 후 그가 몸을 일으켰다. 의자 다리가 마룻바닥에 끌리는 짧은 소리. 카운터 쪽으로 걸어가다 멈춰 서서 창밖을 바라봤다.

“저녁쯤 그칠 거라더군요. 비.”

윤하늘은 가만히 듣고 있다가 카운터 서랍에서 작은 봉투 하나를 꺼냈다. 편지 조각이 든 봉투였다.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어젯밤에 해야 했던 말이에요. 편지에 대해서.”

서지헌은 천천히 몸을 돌렸다.

“제가 십 년 전에 쓴 편지가 있다는 걸, 당신은 알고 계셨습니까.”

물음은 아니었다. 다만 확인이었다. 목소리는 낮고 조용했다.

윤하늘은 봉투 위에 손을 얹었다.

“알게 된 건… 며칠 안 됐어요. 지하 창고에서 발견했어요. 강다은 씨가.”

서지헌은 테이블로 다가왔다. 봉투를 집어 들지도, 열어 보지도 않았다. 그저 물끄러미 내려다볼 뿐이었다.

“십 년 전 여름, 서점 책갈피 사이에 넣어뒀습니다. 보내지 못한 편지였어요.”

“왜 보내지 않았어요.”

서지헌은 잠시 침묵했다. 창밖의 빗소리만이 대답을 대신했다.

“그날 밤, 집이 정리되고 있다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아버지가 모든 걸 잃으셨어요. 다음 날 아침 첫 기차를 타야 했고… 편지를 꺼내러 올 시간이 없었습니다.”

윤하늘은 봉투를 손으로 감쌌다. 가늘게 떨리는 손끝. 자신이 찢어버렸다고 믿었던 편지가 사실은 답장이었고, 그 답장을 쓴 사람은 먼저 마음을 담아 숨겨두고 떠나야만 했다.

“읽었어요.”

그녀가 말했다.

“일부만이지만, 당신 필체였고, 당신 목소리였어요.”

서지헌의 표정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변호사도, 협상가도 아닌, 십 년 묵은 편지의 주인이 거기 있었다.

“내용은 기억하십니까.”

“네. 마지막 문장.”

그가 시선을 내렸다. 손가락을 폈다 오므렸다. 무언가 입 밖으로 내려는 듯 움직이던 입술이 멈췄다. 대신 봉투 쪽으로 손을 내밀었다. 봉투를 집지 않고, 그녀의 손 위에 살짝 포개듯 얹었다.

“오늘 오후에 비가 그친답니다.”

전혀 다른 말이었다. 하지만 윤하늘은 그 손을 거두지 않았다.

오후 세 시, 장마가 걷혔다. 비가 그친 서점 이층 창가에 처음으로 긴 햇살이 들었다.

윤하늘은 창틀에 손을 짚고 서서 거리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젖은 보도블록이 반짝였고, 빈 가게들의 셔터는 여전히 닫혀 있었지만, 어제와는 다른 빛이 거리 위에 가라앉아 있었다.

계단을 오르는 발소리가 들렸다. 서지헌이었다. 그는 창가로 다가오지 않고, 계단 입구에 선 채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햇빛이 들어오는군요.”

윤하늘은 뒤돌지 않고 대답했다.

“며칠 만이에요. 햇빛.”

서지헌이 천천히 다가왔다. 그녀의 오른쪽, 한 걸음 거리에 섰다. 창밖으로 시선을 던졌다가 다시 그녀 쪽으로 돌렸다.

“그 편지. 읽고 나서…”

말을 멈추지 않았다. 그는 두 손을 포켓에서 빼내 창틀에 걸쳤다.

“십 년 전에는 전하지 못한 말이 여전히 유효한 건지, 그걸 이틀째 생각했습니다.”

“유효했어요.”

윤하늘이 그를 올려다봤다. 그녀의 눈가가 붉어져 있었지만, 목소리는 단단했다.

서지헌은 그 눈빛을 받았다. 변호사의 조심스러움도, 십 년의 빈자리를 메우려는 조바심도 아닌, 지금 이 순간에만 존재하는 표정이었다.

“그럼, 이제 들으실래요. 편지에 썼던 그 문장.”

“네.”

서지헌은 한 번 심호흡했다. 입을 열기까지 몇 초가 걸렸다.

“나는, 네가 필요해.”

윤하늘의 손이 창틀에서 미끄러졌다. 서지헌은 자신의 손을 그 아래로 밀어 넣어 떨어지기 전에 받았다.

“십 년이 지나도, 너야. 그거 하나는 바뀌지 않았어.”

여전히 존댓말을 섞어가며, 그러나 처음으로 반말을 올려놓으며 그가 말했다.

윤하늘은 웃으려다 말고 입술을 깨물었다. 서툰 웃음과,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표정이 뒤섞여 얼굴 위에 번졌다.

“저는, 당신한테…”

그녀도 반말을 꺼내려다 말았다. 결국 웃음에 가까운 한숨만 새어 나왔다.

서지헌이 그 손을 놓지 않고 물었다.

“대답은 아직입니까.”

“네. 생각 중이에요.”

윤하늘은 그를 올려다봤다. 햇살이 그의 어깨 위로 미끄러져 내렸다.

“나도, 너 필요해.”

또박또박, 자신을 확인시키듯 내뱉은 말이었다. 서투르고, 낯설고, 그래서 더 진심인 말.

서지헌의 눈이 조금 커졌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손에 힘이 들어가는 것만으로 답을 대신했다.

“그런데 솔직히 말하면, 아직 어색해요. 당신이 반말 쓰는 거.”

윤하늘이 작게 덧붙였다.

“어색한 게 문제라면, 자주 쓰면 됩니다.”

서지헌이 낮은 목소리로 받았다. 그의 입가에 아주 옅은 선이 그어졌다. 웃음이라고 부르기에는 너무 조심스러운 웃음이었다.

“그럼… 좀 더 써볼까. 지금부터.”

“네. 지금부터.”

햇살이 창가에서 그들의 그림자를 겹쳐 바닥에 길게 눕혔다. 서점 아래층에서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고, 거리 저편에서는 장마가 끝났음을 알리는 듯 누군가 셔터를 올리는 소리가 멀리서 들려왔다.

장마가 끝난 날, 열두 해 묵은 서점 이층 창가에서 두 사람은 서로를 마주 본 채 더듬더듬 말을 배우는 사람처럼, 천천히 대화를 시작했다.

서점 이층 계단을 내려오는 동안,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두 사람의 손은 다시 한 번 가볍게 맞닿았다가 떨어졌다. 낡은 나무 계단이 삐걍거리는 소리가 이층의 침묵보다는 가볍고, 1층의 어스름보다는 분명했다.

서점 1층은 아직 어스름이 채 가시지 않은 저녁 빛을 머금고 있었다. 윤하늘은 카운터 뒤에서 보온병을 찾아 컵 두 개를 꺼냈다. 서지헌은 창가 쪽 테이블에 앉아 공청회 이후 받은 서류 뭉치를 분류하고 있었고, 그의 손끝은 여전히 정확하고 빨랐다.

유리문 너머로 최노인이 나타난 건 그때였다. 지팡이를 짚지 않은 손에 무언가를 들고 있었다. 뒤이어 강다은이 숨을 약간 헐떡이며 문을 밀었다.

“어머, 최노인님도 오셨어요?”

최노인은 강다은의 말에는 대꾸도 않고 성큼 들어와 테이블 위에 봉지를 올려놓았다. 식혜 병 두 개와 찹쌀과자가 담긴 비닐이 바스락거렸다.

“구청에서 연락 왔다는 소식 들었다. 보존 확정.”

서지헌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최노인은 그를 슬쩍 올려다보더니 고개를 돌려 윤하늘 쪽을 향했다.

“근데 너희, 그걸로 끝난 거 맞나.”

강다은이 눈을 깜빡이며 최노인과 윤하늘을 번갈아 봤다. 윤하늘은 컵을 내려놓으며 담담하게 말했다.

“네. 더 숨길 것도 없고.”

그 말에 강다은의 시선이 윤하늘과 서지헌 사이를 오갔다. 서지헌이 정리하던 서류를 내려놓고 윤하늘 쪽으로 반 걸음 옮겼다. 손을 내밀지도, 시선을 피하지도 않았다. 그냥, 바로 옆에 섰다.

강다은의 입이 살짝 벌어졌다.

“잠깐…… 너희 둘, 언제부터?”

“십 년 전.”

서지헌이 짧게 답했다. 그의 목소리는 차분했고, 끝에 존댓말이 묻어 있었다. 윤하늘은 그의 대답을 받아 덧붙였다.

“십 년 전에 시작해서, 이제야 이어지고 있어요.”

최노인은 입맛을 다시며 식혜 병 뚜껑을 비틀었다. 뚜껑이 빠지는 소리가 경쾌하게 울렸다.

“진작 그럴 일이었어. 내가 뭐 때문에 그 편지를 십 년이나……”

말을 마저 하지 않고 컵을 당겼다. 강다은은 손으로 입을 가렸다가 내렸다가 하더니, 가방에서 작은 공방 카드를 꺼냈다. 직접 만든 북마크였다.

“내가 뭐 축하한다고 해도 될지 모르겠지만…… 이거. 원래는 서점 보존 기념으로 가져온 건데, 둘한테 줄게.”

윤하늘은 북마크를 받아 들었다. 마른 꽃잎이 코팅지 사이에 눌려 있었다. 수국이었다.

“고마워, 강다은 씨.”

“아, 근데 진짜…… 두 분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 했더니, 역시.”

강다은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텀블러를 들고 일어섰다. 최노인도 지팡이로 바닥을 한 번 두드렸다.

“난 간다. 니들끼리 있을 시간도 필요하겠다.”

“식혜는 데워서 마셔요.”

윤하늘이 따라 일어서며 말했지만, 최노인은 이미 문을 열고 있었다. 강다은이 그 뒤를 따르며 뒤돌아 손을 흔들었다. 문이 닫히자 서점 안은 갑자기 조용해졌다. 탁자 위에는 식혜 뚜껑과 찹쌀가루가 조금 떨어져 있었다.

윤하늘은 한동안 그 흔적들을 바라보다가, 수건을 꺼내 테이블을 닦았다. 서지헌이 다가와 빈 병과 봉지를 치웠다. 두 사람의 손이 스치고 떨어지는 동작에는 더 이상의 머뭇거림이 없었다.

밤이 되자 거리는 완전히 말랐다. 보도블록 틈에 고였던 물은 사라졌고, 상점들의 셔터에는 낮 동안 마르지 못한 물방울 자국만 희끄무레하게 남아 있었다. 윤하늘은 서점 밖으로 양동이와 천을 들고 나왔다.

서지헌이 뒤따르며 긴 대걸레를 받쳐 들었다.

“간판부터 하면 될까요.”

“네, 위쪽은 제가 좀 닦을 테니까……”

윤하늘은 천을 적셔 간판 아래쪽부터 훔치기 시작했다. ‘오래된 서점’이라는 글씨가 물기에 번들거리며 드러났다. 낮에 쏟아진 비가 씻어내지 못한 먼지가 수건에 묻어났다.

서지헌은 대걸레 손잡이를 조정하며 말했다.

“종이숲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지하 창고 책들, 복원 가능한 상태가 대부분이라고 합니다.”

“다행이네요.”

“보존 처리 후에 이쪽으로 다시 들여올지, 아니면 전시 기획으로 일부는 따로 보관할지. 그건 윤하늘 씨 결정에 따르겠습니다.”

윤하늘이 웃음을 살짝 흘렸다. 천을 적시러 양동이 쪽으로 몸을 숙이다 말했다.

“내 결정만으로 안 될 일이에요. 변호사님도 같이 결정해야죠.”

“……변호사님이라니.”

서지헌의 목소리에 아주 옅은 웃음기가 실렸다. 대걸레 자루를 고쳐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럼 서점 공동 운영자님이라고 할까요.”

“그게 낫네요.”

윤하늘은 천을 비틀어 짜며 섰다. 간판 왼쪽 아랫부분이 유난히 지저분했다. 그 옆, 건물 벽면에 붙은 낡은 표지판 하나가 가로등 불빛에 반쯤 보였다. ‘잡화점 골목’이라는 글씨가 녹슨 철판 위에 희미하게 찍혀 있었다.

“이거, 언제부터 여기 있었지…….”

윤하늘이 천을 든 손을 멈추고 표지판을 가리켰다. 서지헌도 고개를 들었다.

“저도 기억납니다. 초등학교 때 저기서 사진 찍었어요.”

“네?”

“어머니가 찍어주셨습니다. 골목 앞에서 가방을 멘 채로요.”

윤하늘은 표지판에서 손을 떼고 서지헌을 돌아봤다. 가로등 불빛이 그의 얼굴 절반을 비추고, 나머지는 서점 간판 그림자에 가려져 있었다.

“저도 있어요, 거기서 찍은 사진.”

“언제요.”

“아마 초등학교 2학년…… 겨울이었어요. 목도리 둘러매고 찍은 사진이 한 장.”

서지헌은 잠시 말이 없었다. 그러더니 대걸레를 벽에 기대 세우고 한 걸음 다가왔다.

“그럼 같은 골목에서 자랐을 가능성이 있겠군요.”

“어쩌면 서로 스쳐 지나갔을지도 모르죠.”

서로를 한참 바라봤다. 윤하늘의 입가에 웃음이 번졌다. 서지헌도 살짝 입꼬리를 올렸다.

“……그건 또 왜 웃으세요.”

“그냥. 십 년 전 편지 한 통을 숨기는 것보다 더 오래된 일이네요.”

서지헌이 눈을 내리깔았다. 오른손이 간판 아래쪽 테두리를 한 번 쓸었다.

“그 편지, 정말 못 보낸 게 다행이라고 생각한 적이 있습니다. 지금은 아닙니다만.”

“전 찢어버린 걸 몇 번이나 후회했는데.”

두 사람 사이로 밤공기가 천천히 흘렀다. 윤하늘은 젖은 천을 접어 양동이 가장자리에 걸쳤다. 서지헌이 내민 손을 그녀가 잡았다. 손가락 사이로 아직 식지 않은 저녁의 온기가 남아 있었다.

“서점 들어가서 사진 찾아볼까요. 어쩌면 삼촌이 보관하고 계실지도.”

“찾으면 그땐 꼭 보여주세요. 2학년, 목도리.”

“겨울.”

“네…… 겨울.”

윤하늘이 웃으며 손을 가볍게 쥐었다. 서지헌도 같이 웃었다. 표지판은 가로등 아래 그대로 남아, 녹슨 글씨가 희미하게 빛나고 있었다. 유리문을 밀자 실내의 마른 종이 냄새가 얼굴에 닿았다. 두 사람은 나란히 서서 서점 안으로 들어갔고, 간판의 불빛이 그 뒤를 조용히 덮었다.

장마가 걷히는 날, 너에게 닿으면12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