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오는 서점
2화
휴대폰을 손에 쥔 채 한동안 그대로 서 있었다. 박중섭의 목소리가 귀에 남아 핑 돌았다. 발표 나는 즉시 철거 쪽으로 강하게 밀어붙일 모양이야. 창밖엔 여전히 비가 내리고 있었다. 빗방울이 유리창에 부딪혀 아래로 흘러내리는 모양이 천천히 번졌다.
이여름은 휴대폰을 주머니에 밀어 넣고 계단 쪽으로 몸을 돌렸다. 당장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기다리는 수밖에. 그 사실이 명치께를 무겁게 눌렀다.
계단을 내려가 1층에 닿았을 때, 카운터 앞에 분홍색 플라워 블라우스에 짧은 백발의 고은숙이 서 있었다. 우산을 접으며 빗물을 털고 있었다.
“어이, 여름아. 비가 얼마나 쏟아지는지 길이 다 잠겼다.”
“고은숙 할머니. 비 오는데 어떻게……”
“심심하이. 이런 날은 서점에 앉아서 책 보고 가야제.”
고은숙이 카운터 의자에 앉으며 이여름의 얼굴을 유심히 보았다. 미소가 반쯤 사그라졌다.
“니 얼굴이 와 그리 파리하노. 무슨 일 있었나?”
이여름은 고개를 저으며 억지로 입꼬리를 올렸다.
“아니에요. 그냥 좀 피곤해서.”
“거짓말하네. 내가 니 얼굴을 몇 년을 봤는데. 아까 어떤 젊은 양반이 우산 접고 나가던데. 키 크고, 검은 우산 들고. 그 사람 땜에 그런가?”
이여름은 대답하지 않고 서가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등 뒤로 고은숙의 목소리가 따라붙었다.
“내가 보기엔 낯이 좀 익던데…… 맞다. 십 년 전에도 한 번 왔었나? 그때도 비가 억수로 오던 날이었는데.”
이여름의 손이 책등에 닿다 멈췄다. 심장이 느리게 한 번 뛰고는 다시 제 속도를 찾았다. 뒤를 돌아보지 않은 채 물었다.
“기억하세요?”
“기억 안 나겠나. 니가 그때 완전히…… 하여간 그런 일이 있었지. 근데 그 양반이 왜 또 온 거고? 설마 재개발 건인가?”
“……네. 안전 진단 나오셨어요.”
“에휴, 그 나쁜 것들. 비 많이 오는 날 골라서 온 것 좀 봐라. 약점 잡으려고 작정을 했네.”
이여름은 서가에서 손을 떼고 카운터로 돌아왔다. 고은숙의 앞에 차가운 보리차 한 잔을 내려놓았다. 고은숙이 잔을 받아 쥐며 이여름의 손등을 토닥였다.
“걱정 마라. 이 서점은 니 할머니가 삼십 년 넘게 지킨 곳인데 쉽게 없어지겠나.”
그 말이 가슴 한쪽을 찔렀다. 이여름은 그저 고개만 끄덕였다.
고은숙이 보리차를 한 모금 마시고 입을 열었다.
“근데 그 젊은 양반, 손에 뭔가 이상한 거 못 봤나? 소매 밑에 뭐가 있는 것 같던데. 손목 쪽.”
“……못 봤어요.”
“그런가. 내가 잘못 봤나. 됐다. 늙은이 헛소리 하지 말고 책이나 좀 보고 갈란다. 시집 있는 데가 어디더라?”
“2층 오른쪽 구석이에요.”
“그래. 거기. 올라갈 테니까 니는 볼일 봐라.”
고은숙이 계단 쪽으로 느릿하게 걸어갔다. 이여름은 카운터에 서서 잠시 생각에 잠겼다. 손목에 뭔가. 그 말이 머릿속에서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가게 문이 열렸다. 빗소리가 한순간 커졌다가 다시 줄어들었다. 우산을 접는 소리, 구두 바닥에 묻은 물기를 문턱에서 터는 소리. 서진우가 문 앞에 서 있었다. 왼손에 공구함을 쥔 채, 오른손으로 젖은 머리카락을 뒤로 쓸어 넘겼다.
“……필터. 환풍기 필터. 차에 여분이 있어서 지금 갈고 가려고요.”
이여름은 굳었던 어깨를 가까스로 내렸다.
“아, 네.”
“2층 올라가도 되죠?”
“그럼요.”
서진우가 고개를 짧게 숙이고 계단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이여름이 안내인처럼 일정한 간격을 유지하며 뒤를 따랐다.
계단 입구에서 고은숙이 2층에서 내려오고 있었다.
“아, 그 젊은 양반 또 왔네. 환풍기 고친다며? 수고하이.”
서진우는 잠시 멈춰 서서 공손하게 고개를 숙였다.
“아까 뵀습니다.”
고은숙이 옆으로 비켜서며 공간을 내주었다. 서진우가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이여름은 고은숙 옆을 스쳐 지나며 그 뒤를 따라 올랐다.
계단 중간쯤이었다. 좁은 공간에 세 사람의 발소리가 겹쳤다. 서진우가 오른손으로 난간을 짚으며 몸을 틀었다.
그때 공구함이 벽에 부딪혔다. 작은 충격에 서진우의 왼손 소매 단추가 난간 모서리에 걸렸다. 단추가 풀리며 소맷자락이 위로 밀려 올라갔다. 손목 안쪽 피부가 드러났다.
이여름은 그만 시선을 빼앗겼다. 손목 안쪽으로 길게 뻗은 흉터. 오래된 자국이었다. 피부보다 한 톤 연한 색으로, 칼날에 베인 듯 직선으로 이어져 있었다. 너비는 손가락 한 마디 정도, 길이는 손목에서 팔뚝 쪽으로 손바닥 하나쯤이었다.
두 걸음 차이로 따라오르던 이여름의 발이 멈추었다. 계단이 삐걱 소리를 냈다.
서진우는 공구함을 벽에 기댄 채 재빨리 오른손으로 소매를 끌어내렸다. 단추를 다시 채우지도 않고 손목을 완전히 가렸다. 일련의 동작이 한 호흡 안에 이루어졌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계단을 올라갔다.
이여름은 그 자리에 섰다. 그 흉터는 십 년 전에는 없었다. 확실했다. 손목 안쪽까지 단추를 잠그고 다닐 정도라면, 오래전부터 감춰왔다는 의미였다.
“여름아, 와 안 올라가노?”
고은숙이 아래에서 올려다보며 물었다. 이여름은 정신을 차리고 발을 옮겼다.
“갑니다.”
2층에 오르자 서진우는 이미 환풍기 앞에 서 있었다. 벽에 붙은 낡은 환풍기 덮개를 풀고 필터를 꺼내는 중이었다. 소매는 다시 단단히 여며져 있었다. 이여름이 가까이 다가갔지만, 서진우는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필터 갈고 나면 확인할 게 더 있나요.”
서진우가 스패너를 돌리며 짧게 답했다.
“아니요. 오늘 점검은 이것으로 마지막입니다.”
목소리가 오기 전보다 한 톤 낮아 있었다. 말끝이 약간 갈라져 있었다.
이여름은 잠시 망설였다. 묻고 싶은 말이 입술 끝까지 올라왔다. 그러나 입을 열지 않았다. 여기서 물으면, 그건 점검과 상관없는 사적인 질문이 된다. 그렇게 되면 지금 이 공적인 거리, 사무적인 말투, 그 모든 게 한순간에 무너질 것 같았다.
침묵 속에서 환풍기 필터 교체 소리만 요란했다. 새 필터가 제자리에 끼워지고, 덮개가 다시 닫혔다. 서진우가 스패너를 내려놓았다.
“끝났습니다.”
서진우가 공구함을 챙기며 말했다. 처음으로 이여름 쪽으로 얼굴을 돌렸다.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다. 서진우의 눈이 무언가를 말하려는 듯 흔들렸다가, 이내 아래로 내려갔다.
“그럼.”
계단 쪽으로 걸음을 옮기는 서진우의 등이 말수가 적어졌다. 아까보다 발걸음이 빨랐다. 이여름은 그 뒤에서 입술을 깨물었다.
계단을 내려가는 발소리가 점점 멀어졌다. 1층에서 고은숙의 목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
“벌써 가나? 비가 더 오기 전에 얼른 가소.”
이여름은 환풍기 아래 선 채로 서진우가 내려간 계단을 바라보았다. 낡은 필터가 바닥에 놓여 있었다. 검게 변색된 필터 표면에 곰팡이가 얼룩처럼 번져 있었다.
계단 아래쪽에서 문이 열리고 닫혔다. 빗소리가 한순간 가까워졌다가 다시 유리창 너머의 소리로 돌아갔다. 이여름은 벽에 등을 기댔다. 왼손 손목 안쪽을 자신도 모르게 오른손으로 감쌌다.
계단에서 느릿한 발소리가 들렸다. 고은숙이 손에 작은 시집 한 권을 들고 올라오는 소리였다.
“환풍기 다 고쳤나? 근데 니 표정이 또 와 그리 어둡노.”
“……아니에요. 곰팡이 냄새가 너무 심해서 그래요.”
거짓말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 거짓말이 유일한 방패였다.
서진우가 외벽 측정 장비를 들고 밖으로 나간 지 오 분쯤 지났을 무렵이었다. 문이 열리고 고은숙이 특유의 큰 발소리로 들어왔다. 비닐우산을 접어 문 옆 통에 꽂고, 손등에 묻은 빗물을 치마에 털며 카운터를 향했다.
“비가 오다 말다 헌다, 올해 장마는 끈덕지네.” 이여름이 카운터에서 고개를 들었다. 고은숙의 플라워 블라우스 어깨가 축축했다. “우산 쓰고도 젖었네요.” “이 동네 골목은 바람이 돌아서 우산이 소용없다.”
고은숙이 카운터 앞에 서서 가게 안을 한 번 훑었다. 시선이 계단 입구에 놓인 공구함에 멎었다. “아까 어떤 젊은 남자가 나가는 걸 봤다.
감정 평가 나온 사람이가?” “……네.” 고은숙이 고개를 갸웃했다. 눈가 주름이 깊게 접혔다. “그 사람 말이다.” 목소리가 한 톤 낮아졌다.
“십 년쯤 전에도 이 앞에서 본 얼굴이다.” 이여름의 손이 카운터 모서리를 짚었다. “겨울이었는데, 밤에 저 앞 가로등 밑에 한참 서 있더라. 서점 쪽만 보고.
들어오지도 않고.” 빗소리가 순간 멀게 느껴졌다. “그때도 지금처럼 키가 크고 말랐다. 얼굴이 반쯤 가려져서 확실하진 않은데, 눈매가 비슷하이.”
이여름이 카운터 위 흩어진 메모지를 가지런히 모았다. 손끝이 약간 굳었지만 목소리는 평소와 같았다. “기억이 확실하세요?
벌써 십 년 전인데.” “내가 동네서 삼십 년을 살았다. 지나가는 사람 얼굴은 한 번 보면 잊어버려도, 그날 밤은 날이 유난히 추워서 기억에 남았어. 그 친구 코트도 없이 한 시간은 서 있었을 걸.” 고은숙의 말이 더 이어지기 전에 이여름이 컵을 건넸다.
“물 드릴까요. 오늘 습해서 목도 마르실 텐데.” “어, 고맙다.” 고은숙이 정수기 옆 일회용 컵을 받아 물을 한 모금 마시고 다시 입을 열었다. “근데 그 친구 말이다.” 이여름이 카운터 서랍을 열고 주문 리스트를 꺼냈다.
고은숙의 시선을 피하지도, 마주치지도 않는 각도였다. “요즘 안전 진단이 한창이라 낯선 사람들이 많이 와요. 얼굴이 비슷한 경우도 있고.” “그런가.” 고은숙이 컵을 내려놓았다.
물이 조금 남아 컵 안에서 흔들렸다. 그녀가 이여름의 표정을 찬찬히 살폈다. 이여름은 여전히 리스트를 손가락으로 훑고 있었다.
“그래도 내가 봤을 땐 같은 사람이다.” 물러서지 않는 말투였다. 확신보다 걱정이 섞여 있었다.
이여름이 리스트를 접어 서랍에 다시 넣었다. 뚜껑 닫히는 소리가 생각보다 크게 났다. “알겠어요.
신경 써주셔서 고마워요, 할머니.” 목소리에 힘을 빼려 애썼다. 고은숙이 더 묻지 않았다. 대신 우산 통을 턱짓으로 가리켰다.
“장마 끝나면 동네 상가 모임 한 번 하자카더라. 니도 나오나?” “……생각해볼게요.” 고은숙이 짧게 웃었다. 오른손 은반지가 카운터에 닿으며 작은 소리를 냈다.
“생각만 하지 말고 얼굴 좀 비춰라. 혼자 있을수록 소식이 끊어진다.” 그 말을 끝으로 고은숙이 몸을 돌렸다. 우산을 집어 들고 문을 나서면서도 한 번 더 서점 안쪽을 돌아봤다. 입을 열려다 그냥 닫고, 빗속으로 걸어갔다.
이여름은 카운터 의자에 앉았다. 다리가 갑자기 무거워졌다. 코트도 없이 서점만 바라보며 서 있던 사람.
그날 밤은 서진우가 오기로 한 날이었다. 하루 종일 심장을 졸이며 기다리던 약속. 한 번도 오지 않은 그 약속.
빗소리가 다시 짙어졌다. 2층 천장에서 물방울 떨어지는 간격이 빨라졌다. 이여름이 손바닥을 펴서 보았다.
서진우의 왼손목을 감싼 붕대가 눈앞에 떠올랐다. 그 아래 뭔가 자국이 있었을까. 물어볼 수 없었다. 물어볼 사이가 아니었다.
서진우가 서점으로 돌아온 건 삼십 분 뒤였다. 옷깃에 빗물이 배어 있었고, 손에는 방금 뽑은 측정지를 들고 있었다. 문을 열자마자 이여름과 시선이 마주쳤다. “외벽 점검 끝났습니다.” “수고하셨어요.” 이여름이 카운터에서 일어났다. 손에 쥐었던 볼펜을 내려놓다 바닥에 떨어뜨렸다.
“보고서 관련해서 말씀드릴 게 있습니다.” 서진우가 측정지를 카운터 위에 펼쳤다. 손끝으로 두 군데를 짚었다. “지붕과 2층 외벽 접합부 실리콘 방수가 완전히 노화됐어요. 빗물이 벽체 안으로 스며든 흔적이 오늘 측정치로도 확인됐고요.” 태블릿을 켜서 사진을 넘겼다. 벽면을 적외선으로 찍은 이미지에 푸른 띠가 번져 있었다. “습도가 높은 날엔 곰팡이 포자 농도가 기준치를 넘습니다. 장마철에 2층 난간 쪽 서가는 지속적으로 위험해요.” 이여름이 사진을 내려다보았다. 할머니가 가장 좋아하던 시집 코너였다.
“보고서는 현장 상황을 그대로 반영할 겁니다. 제 소견은 아니고요, 측정 장비에 찍힌 수치와 육안 확인 결과만 기재합니다.” 서진우의 말투에는 변함이 없었다. 태블릿을 접어 가방에 넣으면서 마지막으로 덧붙였다. “건물 노후도와 누수 범위를 고려할 때, 추천 등급이 D등급 이하로 나올 가능성이 높아요.” D등급. 철거 심의 대상. 이여름의 손가락이 카운터 아래에서 주먹을 쥐었다. 목소리는 차분하게 가라앉혔다. “여기는 삼십 년 넘게 이 동네 사람들이 책을 빌려 보고, 돌려주고, 비 오는 날이면 2층 창가에서 빗소리 들으며 시집 읽던 곳이에요.” 서진우가 가방 지퍼를 잠그던 손을 멈췄다. “건물 등급만으로는 알 수 없는 가치가 있는 공간이에요.” 이여름이 말을 맺었다. 숨이 차지 않도록 천천히 내뱉었다.
서진우가 잠시 침묵했다. 눈이 카운터 너머 책장으로 향했다가 다시 이여름에게 돌아왔다. 표정은 여전히 읽을 수 없었다.
“그 가치까지 계측하는 건 안전 진단의 범위가 아닙니다.” 말을 마치고 공구함을 집었다. 손목이 움직일 때마다 소매 끝이 살짝 올라갔다 내려갔다. 붕대가 보일 듯 말 듯했다.
이여름이 그 손목을 쳐다보았다. 서진우가 눈치채고 소매를 끌어내렸다. “결과는 조합에서 직접 전달할 겁니다.” 짧은 인사만 남기고 서점 문을 열었다.
빗소리가 순간 크게 밀려 들어왔다가 문이 닫히며 다시 작아졌다. 이여름은 카운터에 서서 문이 닫힌 자리를 한동안 바라봤다. 가게 안이 전보다 더 좁게 느껴졌다. 서가 사이로 스민 습기가 바닥까지 내려앉은 것 같았다.
서진우는 차 문을 열고 운전석에 앉았다. 시동을 걸지 않고 핸들에 두 손을 올렸다. 왼손 소매를 천천히 걷어 올렸다.
붕대 아래로 손목 안쪽까지 이어지는 옅은 흉터가 드러났다. 손끝으로 그 자리를 한 번 쓸었다. 그날 밤 들어가지 못했다.
문 앞까지 갔다가 손잡이를 잡지 못하고 돌아섰다. 주머니에는 병원 진단서가 구겨져 있었고, 오른손에는 아무 말도 쓰지 못한 빈 메모지 한 장이 쥐여 있었다. 그리고 돌아서서 다시는 오지 않았다.
빗물이 차 앞유리를 타고 흘러내렸다. 서진우가 눈을 감았다 떴다. 손목의 흉터 자리를 아프지도 않은데 한 번 더 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