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verStory

비 오는 서점

3화

비는 밤새 그치지 않았다. 새벽 세 시쯤 한 번 잦아들었다가, 동이 트기 직전 다시 굵어졌다. 환풍기가 돌아가는 소리도 빗소리에 묻혔다.

이여름은 2층 계단 앞에 서서 위를 올려다보았다. 한 손에는 양동이, 다른 손에는 걸레. 어제 진우가 떠난 뒤부터 천장에서 물 떨어지는 간격이 짧아졌다. 새벽에 두 번이나 양동이를 비웠다.

계단을 올랐다. 일곱 번째 칸에서 발밑이 살짝 울렸다. 나무가 습기를 머금으면 부푸는 소리. 어릴 적부터 듣던 소리였다.

2층 구석. 시집이 꽂힌 칸으로 다가갔다. 비가 센 건 바로 그 위 천장이었다. 양동이를 내려놓고 걸레를 바닥에 댔다. 책등에 물기가 닿지 않도록 맨 위 칸 책들을 빼내기 시작했다.

김춘수 시집은 세 번째 칸에 꽂혀 있었다.

손이 멈췄다.

1987년판. 표지 모서리가 누렇게 바랬다. 몇 년째 손을 댄 기억이 없었다.

책을 뽑았다. 익숙한 무게감에 손바닥이 젖었다. 표지가 아니라 속지가.

펼치자 책 중간께가 약간 벌어졌다. 끼워둔 무언가 때문에 등 부분이 살짝 떠 있었다. 손끝으로 더듬어 찾은 건, 반으로 접힌 봉투였다.

공기가 멎었다.

봉투 앞면에는 자신의 글씨가 있었다. 진우에게.

붓펜으로 눌러쓴 글자. '진' 자의 삐침이 살짝 떨려 있었다. 열아홉 겨울, 책상 앞에서 밤새 고민하며 쓴 편지였다. 주려고 쓴 게 아니었다. 주지 못할 걸 알면서도 쓰지 않으면 숨이 막혀서였다.

봉투를 열지 않았다. 열지 않아도 내용을 알았다. 어떤 말을 썼는지, 어떻게 끝맺었는지, 왜 부치지 않았는지까지.

그대로 쥐고 벽에 등을 기댔다. 바닥이 차가웠다.

눈물이 났다. 소리는 없었다. 손등으로 입을 막고, 어깨만 떨렸다.

차가웠다.

찬물로 세수하고 거울을 보았다. 붉은 눈. 살짝 부은 눈두덩이. 린넨 원피스 주머니 속에서 편지가 바스락거렸다.

1층으로 내려와 주전자를 올렸다. 보리차 한 잔을 따르고 카운터에 앉았다. 차가 입천장을 데울 만큼 뜨거웠다. 손끝은 여전히 차가웠고.

유리창 너머로 빗줄기가 길게 비껴 내렸다. 우산을 쓴 사람들이 가게 앞을 빠르게 지나갔다. 인도 위 물웅덩이가 발걸음마다 튀었다.

문이 열렸다.

우산을 접는 소리. 구두 바닥 물기를 문턱에서 터는 소리. 이여름이 고개를 들었다.

서진우가 문 앞에 서 있었다. 어제와 같은 짙은 회색 점퍼, 같은 검은 공구함. 빗물에 젖은 머리카락이 이마에 붙어 있었다.

“……환풍기.”

진우가 공구함을 살짝 들었다.

“어제 필터 갈면서 배기구 쪽 마감 상태를 못 봤다. 확인만 하고 갈게요.”

“그러세요.”

이여름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찻잔을 카운터 구석으로 밀어두고, 한 걸음 물러섰다. 편지가 주머니에 닿아 허벅지 쪽으로 무게가 쏠렸다.

진우가 눈을 가늘게 떴다. 먼저 1층 천장을 살피기 위해 고개를 들었다.

“저쪽 벽도 보겠습니다.”

카운터 반대편 벽을 가리켰다. 어제는 2층과 외벽 위주였지만 오늘은 다르다. 장마 중 누수는 바닥과 벽 접합부에서도 온다.

진우가 쪼그려 앉아 벽 하단 균열에 게이지를 갖다댔다. 숫자를 읽으며 수첩에 기록했다. 이여름은 그로부터 세 걸음 거리에서 서 있었다.

시집은 바닥에 놓여 있었다. 아까 2층에서 내려올 때 함께 챙겨 내려온 것을 깜빡했다. 정확히는 편지를 주머니에 넣느라 책만 내려놓은 것을 잊었다.

진우의 시선이 바닥에 닿았다.

“……이 책.”

손을 뻗었다. 이여름의 어깨가 움찔했다.

진우가 시집을 집어 들었다. 앞표지, 뒤표지를 살폈다. 손에 익은 듯한 움직임이었다.

“예전에도 자주 꺼내 보셨죠.”

표현이 애매했다. '예전에도'. 10년 전 이 서점에서 그가 본 모습일 수도, 아니면.

“어릴 때 좋아했던 시인이었어요.”

이여름이 대답했다. 목소리가 생각보다 낮았다.

“지금은요.”

“……찾을 게 좀 있어서요.”

진우는 책을 건네지 않았다. 대신 표지를 조심히 쓸었다. 습기에 살짝 눅눅해진 책등을 손가락으로 밀자, 책장 사이가 또 벌어졌다. 편지가 빠져나온 자리가 여전히 살짝 들떠 있었다.

“책갈피 있었나.”

혼잣말처럼 작게 중얼거렸다. 곧바로 표정을 지우고 책을 이여름 쪽으로 내밀었다.

이여름이 받아 들었다. 두 사람의 손이 스치지 않았다.

“저…….”

진우가 몸을 일으켰다. 수첩을 접어 점퍼 주머니에 넣으며 말했다.

“어머니가 아프셨습니다.”

이여름의 손이 굳었다. 시집을 움켜쥔 손가락이 하얘졌다.

진우는 벽 쪽을 보며 천천히 말을 이었다.

“아버지 돌아가시고 얼마 안 돼서. 병원에서 더 큰 데로 가야 한다고 해서, 준비할 시간이 없었습니다.”

공구함을 챙기며 허리를 폈다. 이여름을 향하지 않았다.

“말씀드리지 못해서…….”

거기서 말을 잘랐다.

이여름의 목울대가 움직였다. 삼킨 말들이 목에 걸린 듯 숨을 들이켰다. 그래서 그 밤. 편지도, 전화도, 아무 말도 없이 떠난 이유가 그거였나. 버린 게 아니라.

물어볼 말이 입 안에 가득 찼다. 편지도, 손목의 흉터도, 그 밤 앞에 서성이다 돌아간 발걸음도.

“그럼…….”

입이 열렸다. 진우가 손을 들었다.

“점검은 이걸로 충분합니다. 보고서 제출이 내일이에요.”

“잠깐만. 그 편…….”

“계측값은 조합에서 직접 통보드릴 거고요.”

이미 문 쪽으로 발을 돌리고 있었다. 공구함을 든 손만 단단히 쥐고, 다른 손은 문 손잡이를 잡았다.

이여름이 한 걸음 다가섰다.

“기다려요. 내 말…….”

문이 열렸다. 빗소리가 쏟아져 들어왔다.

“들어가 계십시오.”

짧은 말만 남기고 나갔다. 유리문이 닫히고, 우산도 펴지 않은 채 빗속으로 걸어가는 뒷모습이 보였다. 빗물이 점퍼 어깨를 순식간에 적셨다.

이여름은 문 앞에 선 채 그 뒷모습을 바라봤다. 거리가 흐려졌다가 다시 선명해졌다. 아직도 손에 시집을 쥐고 있었다.

손가락 사이로 종이가 비어져 나왔다. 편지였다. 주머니에서 꺼내려다 만 채로 뭉개져 있었다.

거리에는 아무도 남지 않았다.

비가 더 세차졌다.

이여름은 카운터로 돌아갔다. 시집을 내려놓고 편지를 폈다. 읽지 않았다.

읽는 대신 접힌 자국을 따라 반듯하게 접어, 시집 사이에 끼워 넣었다. 편지가 꽂히자 책등이 다시 살짝 들떴다. 아까 그 자리 그대로.

손가락으로 표지를 한 번 쓰다듬었다. 할머니에게 배운 대로, 책의 모서리를 벽 쪽으로 가지런히 밀었다.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진우의 번호는 없었다. 하지만 어제 박중섭에게서 받은 안전 진단 업체 연락처 명단이 서랍에 있었다. 펼쳐서 두 번째 줄, 서진우.

통화 버튼을 눌렀다. 네 번 울렸다.

“……네.”

진우의 목소리. 배경에는 빗소리. 아직 차에 타지 않은 모양이었다.

“여름입니다.”

짧은 침묵. 진우가 숨을 들이켰다.

“……예.”

“오늘 그 책. 김춘수 시집.”

이여름은 시집을 바라보며 천천히 말을 이었다. 손가락이 무의식중에 책등을 다시 한 번 쓸었다.

“그 안에 편지가 있었어요. 10년 전에 쓴 거.”

수화기 너머로 빗소리만 들렸다.

“못 준 편지인데, 그걸 오늘 찾았단 말이에요.”

“…….”

“다시 찾은 건 못 준 거랑 다른 거니까.”

이여름이 말을 멈췄다. 더 이상은 말할 수 없었다. 어차피 다 아는 이야기였다. 편지가 있었다는 것, 그 편지가 어떤 말이었는지, 왜 줬어야 했는지. 직접 말하지 않아도.

긴 침묵 뒤에 진우의 목소리가 돌아왔다.

“……비 많이 오니까.”

끊어질 듯 낮은 소리였다.

“문단속 잘 하십시오.”

전화가 끊겼다.

이여름은 핸드폰을 내려놓고 한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빗줄기가 유리창을 때리는 소리만 가게 안에 가득했다. 시집 옆에 손을 올렸다. 편지가 든 책은 여전히 거기 있었다.

해질 무렵에도 비는 그칠 기미가 없었다.

이여름은 창가에 서서 거리 건너편 간판을 보고 있었다. '종이비'라는 글자 위로 빗물이 끊임없이 흘러내렸다. 할머니가 직접 단 글자. 나무판에 먹을 올린 글씨가 30년 비바람에 조금씩 바랬다.

핸드폰이 울렸다.

박중섭이었다. 이여름은 통화 버튼을 누르며 아까 마시던 보리차 잔을 집었다. 식어서 미지근했다.

“여름 씨, 지금 괜찮아요?”

박중섭의 목소리가 평소보다 한 톤 빨랐다. 이여름의 손이 멎었다. 찻잔을 내려놓았다.

“무슨 일이세요.”

“안전 진단 결과 나왔어요. 조합에서 방금 전에…….”

수화기 건너편에서 서류 넘기는 소리가 났다. 박중섭이 말을 고르는 듯 짧은 침묵이 흘렀다.

“……철거 권고입니다.”

비 오는 서점3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