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화에 핀 독
1화
찬 기운이 먼저 의식을 건드렸다.
습기 머금은 흙내. 등 뒤로 밟히는 낙엽의 눅눅한 감촉. 코를 찌르는 쇠비린내는 아직 목덜미에 남아 있었다. 강휘는 눈을 뜨지 않았다.
호흡은 느리게. 몸은 죽은 것처럼.
오른쪽으로 열 걸음. 바짝 마른 잔가지가 밟히는 소리. 발걸음 하나에 체중이 과하게 실린다.
외공 수련이 덜 된 초식이다. 숨결은 둘. 한 명은 바람 위쪽에서 대기하고, 한 명은 지금 접근 중이다.
강휘의 손가락이 움찔거렸다. 전생의 마지막 감각이 손끝에 남아 있었다. 사형의 목소리. 배신이라는 말조차 아까울 만큼 담담한 어조. 그리고 허공으로 사라지던 발 디딤.
그 기억을 밀어내듯 눈을 떴다.
달빛 한 점 들지 않는 숲속. 인영은 이미 세 걸음 앞이었다.
복면. 손에는 가느다란 독침.
강휘는 일어나지 않았다. 옆으로 굴렀다. 몸이 기억했다. 낙엽 긁히는 소리와 동시에 상대의 손목이 허공을 찔렀다. 손끝에서 어긋난 독침이 강휘의 관자놀이 옆을 스치며 박혔다.
강휘는 상체를 틀며 왼손으로 암살자의 손목을 잡아당겼다. 전생의 실전 감각은 근육이 아닌 뼈에 남아 있었다. 힘은 없었다. 경지도 사라졌다. 하지만 손목의 꺾이는 각도와 상대의 무게 중심이 쏠리는 방향을 정확히 알았다.
암살자의 상체가 앞으로 기울었다. 강휘는 그 기울기에 몸을 실어 오른손으로 독침을 낚아챘다. 손가락 마디가 굵은 검지와 중지가 독침의 중간을 집었다.
암살자가 왼손을 뻗어 저항하려던 찰나, 강휘는 그의 손목을 놓고 팔꿈치로 목덜미를 내리찍었다. 단 한 번. 소리는 거의 없었다. 숨 막히는 짧은 신음만이 새어 나왔다.
쓰러지는 몸뚱이를 무릎으로 받아내며, 동시에 오른손을 뒤집어 독침을 암살자의 어깨에 꽂았다.
전생의 매화검법에는 없는 동작이었다. 반사적으로 튀어나온 손끝의 기억.
암살자의 몸이 경직됐다. 호흡이 가빠졌다. 독침에 실린 맹독이 퍼지는 속도가 예상보다 빨랐다. 강휘는 잠시 숨을 골랐다. 이런 힘도 없이 상대를 제압한 자신의 몸이 낯설었다.
바람 위쪽의 숨결 두 개가 멀어지고 있었다. 대기조는 도망쳤다. 놈들은 아직 강휘가 죽은 줄 알았다.
강휘는 쓰러진 암살자의 품을 뒤졌다. 청성파의 외문무공을 익힌 흔적이 손바닥 굳은살에 남아 있었다. 전생에서도 보던 손모양이었다.
입문한 지 얼마 안 된 외문제자들. 이들에게 청성파의 정식 무공을 가르치지 않는다. 대신 이런 더러운 일에 쓴다.
품속에서 작은 가죽 주머니가 나왔다. 같은 독침 두 개. 그리고 말린 약초 몇 가닥.
강휘는 약초를 코 가까이 가져갔다. 전생의 기억이 냄새만으로 재료를 분류했다. 칠엽초, 사혈등, 오공분.
청성파에서는 구할 수 없는 배합이었다. 독문의 조제법이다.
입가가 살짝 비틀렸다.
장한걸.
이름을 입 밖에 내진 않았다. 다만 손끝으로 약초를 비비며 힘을 줬다. 독문과의 연계.
전생에서 그가 직접 털어놓은 것과 같은 흔적이었다. 파문 이튿날, 사내를 떠나기 전 술잔을 기울이며 했던 말이 떠올랐다. ‘열어둔 길이 하나 있네.’
취한 척하는 기억으로 던진 그 한마디가 이제야 증거가 되었다.
강휘는 독침 두 개를 천천히 챙겼다. 하나는 이미 사용했고, 하나는 깨끗했다. 사용한 침의 끝에서 미세하게 푸른빛이 돌았다.
어둠 속에서도 눈에 띄는 독의 농도였다. 이 정도면 급소가 아니어도 전신 마비까지는 반 시진. 죽음까지는 한 시진.
그는 암살자의 허리춤에서 패물 하나를 빼냈다. 구리로 만든 허리띠 고리. 청성파 외문제자가 분실하면 곤란해할 만한 물건이었다. 추적대가 올 것을 대비해 챙겨둘 가치가 있었다.
몸을 일으켰다. 근육들이 비명을 질렀다. 전생의 경지는 완전히 사라졌다.
내공은 한 점도 느껴지지 않았다. 오직 전투 감각과 경험만이 남은 몸뚱이. 당장 검을 든 청성파 제자 하나와 정면으로 붙어도 이길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강휘는 발밑의 낙엽을 차냈다. 쓰러진 암살자는 아직 숨이 붙어 있었다. 독침의 마비 효과로 눈만 깜빡이고 있을 뿐. 강휘는 그를 다시 내려다봤다.
“누가 보냈는지는 묻지 않겠다.”
암살자의 눈동자가 움찔했다.
“돌아가서 전해라. 일이 틀어졌다고.”
강휘의 목소리는 건조했다. 마치 내일의 날씨를 말하는 것처럼 담담하게 이어졌다.
“그리고 한 마디만 더. 매화는 아직 안 폈다고.”
암살자의 표정은 읽을 수 없었다. 하지만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강휘는 더 묻지 않았다.
몸을 돌려 숲의 어두운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절벽 아래서 올라가는 길은 전생에도 써본 적 없는 길이었다. 낙엽 쌓인 사면을 조심스럽게 더듬어 올랐다.
추적대가 오기까지 시간이 많지 않았다. 한 시진? 아니면 반 시진. 청성파의 외문 대기조가 도망친 속도를 감안하면 서둘러야 했다.
무릎을 쓰지 않고 올라야 했다. 부상은 사치였다. 한 걸음, 한 걸음, 낙엽 밑의 돌부리를 손으로 짚어가며. 손톱 밑에 흙이 끼고 손가락 마디가 하얘졌다. 힘은 없었지만 중심을 잡는 요령만은 전생 그대로였다.
절벽 위로 올라서자 바람이 달랐다. 매화 향기. 아직 피지 않았을 계절인데도 전생의 기억이 불러낸 착각이었다. 강휘는 잠시 숨을 들이켰다. 이번 생에서 처음 맡는 밤공기였다.
그는 손에 쥔 독침 두 개를 천천히 천으로 감싸 품속에 넣었다. 패물은 허리춤에 단단히 묶었다. 약간의 흙을 털어내고 발걸음을 옮겼다.
방향은 남쪽. 십 리만 가면 작은 역참이 있었다. 거기서부터는 선택이었다. 전생과 다른 길을 걷기 위한 첫걸음.
강휘는 다시 한 번 손끝을 내려다봤다. 독침을 찌른 검지와 중지 사이에 미세한 푸른빛이 스며 있었다. 아직 독이 스며들지는 않았다. 하지만 상기시켰다. 이 몸으로 다시 싸우려면 독에 대한 내성부터 길러야 한다고.
그는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밤이 깊은 숲을 가르며 남쪽으로 발을 옮겼다. 등 뒤로 절벽 아래의 암살자가 움직이기 시작할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추적대가 출발할 시간도.
전생에서보다 모든 게 빨랐다. 장한걸의 수가 하루 먼저 놓여 있었다. 그렇다면 강휘의 대응도 하루 빨라야 했다.
발걸음이 조금씩 빨라졌다. 근육은 아직 적응하지 못했지만, 뼈는 이미 알고 있었다. 전생의 패배를 딛고 이번 생에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
숲을 벗어나자 별빛이 쏟아졌다. 강휘는 잠시 하늘을 올려다봤다. 같은 하늘 아래서 같은 배신자를 상대할 기회가 왔다.
입술 사이로 짧은 숨이 새어 나왔다.
“아직 안 폈다.”
매화 이야기가 아니었다. 그가 복수를 개화시키지 않았다는 뜻이었다. 아직.
밤새 남쪽 길을 달려 성벽 너머로 들어왔다. 아침에는 동문 시장 인파에 섞여 미행을 떨쳤고, 오후 내내 금릉각 맞은편 찻집에 앉아 여관 출입구를 살폈다. 해가 기울 무렵에야 자리를 옮겨 여관 안으로 들어섰다.
황혼이 금릉각 여관의 기와를 붉게 물들였다. 강휘는 낡은 청색 도포에 검집을 고쳐 메고 여관 입구에 섰다. 소매 끝 매화 자수는 실밥이 풀려 희미했다.
여관 안은 무인들로 북적였다. 술잔 부딪치는 소리, 주사위 구르는 소리, 흥정하는 소리. 강휘는 구석 자리로 걸음을 옮겼다.
전생의 기억 속 금릉각 배치가 떠올랐다. 저쪽 계단 위가 감시 사각이다. 뒷문은 부엌을 지나 마구간으로 통한다.
자리에 앉아 차를 시켰다. 주전자가 놓이고 찻잔에 물이 차올랐다. 김 오르는 차를 입술에 대지 않고 내려다봤다.
발소리가 다가왔다. 묵직하고 규칙적인 보폭.
석중원이 맞은편에 앉았다. 검은 망토에 감춘 손이 탁자 위로 올라왔다. 오른손등 화상 흉터가 촛불 아래서 당겨졌다. 그는 말 없이 강휘를 보았다. 좁고 날카로운 눈매가 움직이지 않았다.
강휘도 입을 열지 않았다.
잠시 뒤 여관 주인이 다가와 석중원에게 물었다. “손님, 주문하시겠습니까.”
석중원이 손을 저었다. 주인이 물러갔다.
“청성파 놈들이 금릉각으로 온다.” 석중원이 낮게 말했다. “내일 낮이면 도착할 거다.”
강휘는 찻잔을 들어 한 모금 마셨다. 차 맛이 텁텁했다. “정보가 빠르군.”
“추격 명령이 떴다. 탈영과 동문 살해 혐의.”
강휘의 손가락이 찻잔 가장자리에서 멈췄다. 전생보다 이틀 빠르군. 장한걸이 서둘렀나.
“그래서.” 강휘가 찻잔을 내려놓았다.
“혼자 가면 잡힌다. 나와 함께 가면 다르다.”
“무슨 차이지.”
석중원의 눈빛이 미세하게 움직였다. “나는 길을 안다. 금릉각 지리를 꿰고 있다. 우회로도, 은신처도.”
전생에서 석중원이 했던 말이다. 똑같은 제안, 똑같은 논리. 강휘는 차 표면에 비친 자신의 눈을 보았다. 짙은 갈색 눈동자가 금속처럼 반짝였다.
“조건은.”
“조건은 없다. 그냥 동행이다.”
거짓말이다. 강휘는 찻잔을 빙글 돌렸다. 전생의 기억이 속삭였다.
이 자는 장한걸의 수하다. 지금도 감시 임무를 수행 중이다. 모든 정보는 장한걸에게 보고된다.
“이유가 있을 거다.” 강휘가 말했다.
석중원이 잠시 침묵했다. 손등의 흉터가 촛불에 일렁였다. “청성파에 빚이 있다. 네가 파문당한 방식이 마음에 안 든다.”
진심인가. 아니면 연기인가. 강휘는 석중원의 왼쪽 쇄골 부근을 무심히 보았다. 옷깃에 가려 보이지 않지만, 그 아래 청회색 문신이 있다. 전생에서 본 그대로다.
상관없다. 어차피 이용할 거다.
“좋다.” 강휘가 말했다. “함께 간다.”
석중원의 어깨에서 힘이 빠졌다. 미세한 변화였지만 강휘는 놓치지 않았다. 안도인가. 아니면 덫에 걸린 사냥감을 확인한 포수의 호흡인가.
“방은.” 석중원이 일어섰다. “2층에 두 개 잡았다. 마주 보는 방이다.”
강휘가 고개를 끄덕였다. 차값을 탁자에 놓고 따라 일어섰다.
계단을 오르는 내내 석중원이 앞장섰다. 강휘는 그의 뒷모습을 주시했다. 검은 망토 자락이 계단에 쓸렸다. 어깨의 움직임이 규칙적이었다. 훈련된 무인의 걸음걸이다.
2층 복도는 좁고 어두웠다. 석중원이 한쪽 방문을 가리켰다. “네 방.”
강휘가 문고리를 잡았다. 그때였다.
석중원의 오른손이 품 안으로 들어갔다. 천천히, 조심스럽게. 손가락이 무언가를 더듬었다. 종이의 촉감. 작은 쪽지의 모서리.
강휘는 문을 반쯤 열고 멈췄다.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 하지만 오른쪽 어깨 너머로 석중원의 그림자가 벽에 비쳤다.
석중원의 손이 멈췄다.
강휘가 고개를 살짝 돌렸다. 딱히 의미 없는 각도로, 마치 방 안을 살피는 듯이.
그것으로 충분했다. 석중원이 품에서 손을 뺐다. 빈손이었다. 손가락이 가볍게 오므라들었다.
두 사람 사이의 공기가 달라졌다. 좁은 복도에 침묵이 가라앉았다.
강휘가 먼저 입을 열었다. “밤에 추워지면 곤란하군.”
석중원이 고개를 약간 기울였다.
“옷가지가 부족해서 말이다.” 강휘가 문을 완전히 열며 덧붙였다. 눈치채지 못한 척, 일상적인 말투를 유지했다.
“여관 주인에게 부탁해라.” 석중원이 짧게 답했다. 이어 맞은편 방문을 열었다.
서로 등을 돌렸다. 강휘가 방으로 들어갔다. 문을 닫는 순간까지 표정을 굳혔다. 문이 닫히자 손가락이 문고리를 짚은 채 멈췄다.
쪽지.
전생에서도 봤다. 석중원은 매일 밤 전서구로 보고했다. 이번에는 아직 보내지 못했다. 시선을 느꼈기 때문이다.
강휘는 방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내일이면 청성파가 도착한다는 빠른 전개에 입술이 마르고, 손끝이 살짝 떨렸다. 이 몸은 아직 무공을 익히지 못했다. 아직 검을 쥘 힘도 없다. 주먹을 폈다 쥐었다.
창 밖은 어둠이 내려앉았다. 강휘는 바닥에 앉았다. 전생의 매화검법을 체내에 천천히 그렸다.
검을 쥐지 않은 손으로 초식을 더듬었다. 손가락이 허공을 긋고, 어깨가 회전하고, 허리가 비틀렸다. 매화가 가지에 맺히듯, 검로가 근육에 새겨졌다. 이렇게라도 몸이 기억해야 한다.
내일이면 이 모든 움직임이 필요해질 거다.
맞은방에서는 석중원이 쪽지를 손에 쥔 채 탁자 앞에 앉았다. 촛불이 손등 흉터 위로 그림자를 드리웠다. 그는 쪽지를 펴지도, 접지도 못한 채 손가락 사이로 굴렸다. 강휘의 마지막 시선이 떠오른 듯, 눈썹이 미세하게 찡그려졌다.
쪽지는 여전히 품 안으로 돌아가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