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화에 핀 독
2화
밤공기가 객실 창틀을 두드렸다. 강휘는 바닥에 앉은 채 허공을 그리던 손을 내렸다.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이 몸은 아직 초식 하나를 완성할 근력도 없다. 숨을 고르며 주먹을 쥐었다 폈다.
문 너머로 발소리가 멎었다.
이어 문을 두드리는 소리. 가볍지 않았다.
강휘가 일어나 문을 열었다. 석중원이 복도에 서 있었다. 검은 망토는 벗었고, 흑색 무사복 차림이었다. 오른손등 흉터가 희미한 촛불 아래서 당겨졌다.
“할 말 있다.”
강휘는 물러서며 문을 열어 주었다. 석중원이 방 안으로 들어섰다. 탁자도, 의자도 없는 좁은 객실이었다. 두 사람은 선 채로 마주 봤다.
“청성파 추격대가 내일 낮 도착한다.” 석중원이 말했다. “다섯이다. 외문제자 셋에 내단을 익힌 자 둘.”
강휘는 팔짱을 끼었다. “그래서.”
“혼자 상대 못 한다.”
“봐서 알겠군.”
석중원의 눈빛이 움직였다. 강휘의 태도가 예상과 달랐기 때문이다. 생사의 기로에 선 자의 반응이 아니었다.
“나는 금릉각 지리를 안다.” 석중원이 말을 이었다. “우회로, 은신처, 추적을 피할 경로까지.”
“조건은.”
“함께 간다.”
강휘는 침묵했다. 전생에서 들었던 그대로의 제안이었다. 똑같은 논리, 똑같은 어조. 장한걸의 수하라는 걸 알면서도 선택지는 없었다. 지금의 몸으로 청성파 다섯을 상대하는 것은 자살이었다.
석중원이 한 걸음 다가섰다. “결정해라. 시간 없다.”
그때 강휘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스쳤다. 전생의 기억이 떠오른 탓이었다. 이 남자는 내내 자신을 감시할 것이고, 모든 움직임을 보고할 것이다. 하지만 동시에 길도 안내할 것이다.
“좋아.”
석중원의 눈썹이 거의 감지되지 않을 정도로 올라갔다. 예상보다 빠른 수락이었다. 그는 잠시 입을 열지 않았다. 무언가를 더 말하려다 관둔 듯, 고개만 끄덕였다.
“내일 동트기 전 출발한다.”
“알았다.”
석중원이 돌아서다 멈췄다. 어깨 너머로 강휘를 바라봤다. “한 가지 묻지.”
강휘는 기다렸다.
“왜 나를 믿나.”
날카로운 질문이었다. 석중원 스스로도 자신의 제안이 의심받을 만하다는 걸 알고 있었다. 강휘의 수락이 너무 빨랐다.
강휘는 어깨를 으쓱했다. “믿는 게 아니다.”
“그럼.”
“이용하는 거다.”
석중원의 시선이 얇아졌다. 좁고 날카로운 눈매에 힘이 실렸다. “솔직하군.”
“속이는 것보다 낫지.”
석중원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품속으로 들어가려던 손을 바지 옆으로 내렸다. 쪽지는 다시 저녁의 그 자리 그대로였다. 그는 아무 말 없이 문을 열고 복도로 나갔다.
강휘가 문을 닫았다. 빗장을 걸지 않았다.
석중원의 발소리가 맞은편 방문을 열고 닫는 소리. 이어 침묵.
강휘는 다시 바닥에 앉았다. 석중원은 의심할 것이다. 하지만 그게 낫다.
믿는 척하면 거짓말을 찾는다. 처음부터 이용한다고 말하면, 오히려 계산이 명확해 보인다. 상대가 어떤 선택을 할지 예측하기 쉬워진다.
손가락이 다시 허공을 그렸다. 이번에는 매화검법 세 번째 초식의 검로였다. 전생에서 가장 많이 쓴 초식. 손목이 꺾이고, 손가락이 뻗었다.
회귀한 지 하루. 검을 쥐지 못해도 근육은 기억한다.
내일 동트기 전. 그때까지 이 몸에 단 하나의 초식이라도 새겨야 한다.
맞은편 방에서는 석중원이 여전히 쪽지를 품에서 꺼내지 못했다. 탁자 위 촛농이 굳어가고 있었다.
새벽 안개가 채 걷히기 전이었다. 금릉각 여관 아래층이 갑자기 소란스러워졌다.
말발굽 소리. 이어 여관 주인이 허둥지둥 계단을 올라오는 발소리.
강휘는 이미 눈을 뜨고 있었다. 바닥에 앉은 채 다리를 풀며 숨을 고른 지 한참이었다. 전생의 매화검법을 근육으로 더듬던 밤이 지나갔다.
오른손 검지의 굳은살을 엄지로 눌렀다. 아직 굳지 않았다. 이 손으로 검을 쥔 지 고작 하루다.
문밖에서 주인의 목소리가 들렸다. “손님, 청성파에서 붙은 방이 왔습니다!”
강휘는 일어서며 도포를 걸쳤다. 문을 열자 복도에 석중원이 이미 서 있었다. 언제 나왔는지 검은 망토를 두르고 벽에 기댄 채였다.
“내려가서 본다.” 석중원이 짧게 말하고 계단으로 향했다.
아래층 주방 쪽 벽에 방문이 하나 붙어 있었다. 선지에 붉은 인주가 번진 관인. 건조된 지 얼마 안 된 먹 자국. 여관 주인이 옆에서 손을 비비고 있었다.
강휘는 글을 읽었다.
청성파 외문제자 강휘. 동문 살해 및 탈영. 현상금 은자 오십 냥.
신장 약 오 척 팔 촌. 마른 체격에 검은 눈동자. 왼쪽 관자놀이 아래 칼자국.
고개를 약간 기울였다. 전생의 방문과 같았다. 다른 점은 하나뿐이었다. 전생에는 은자 삼십 냥이었다.
장한걸이 이번에는 돈을 더 얹었군.
“추격대가 벌써 금릉각으로 들어왔다.” 석중원이 낮게 말했다. “다섯 명이다.”
강휘는 방문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배치는.”
“여관 앞길에 둘, 뒷문에 하나, 서쪽 골목에 둘. 매복이다.”
전생보다 빠르고, 인원도 많고, 포위도 치밀했다. 강휘는 속으로 계산을 다시 했다. 전생에서는 세 명이었다.
매복도 없었다. 단순 추격이었다. 이번에는 다르다.
사흘. 장한걸이 서두른 이유는 사흘 앞당겨진 전개 때문이다. 원인은 모르지만 결과는 분명하다.
석중원이 팔짱을 낀 채 강휘를 보았다. “어쩔 거냐.”
강휘가 돌아섰다. “올라가서 말하지.”
두 사람은 다시 계단을 올랐다. 강휘가 자기 방으로 들어가고, 석중원이 뒤따랐다. 문이 닫혔다.
강휘는 탁자 앞에 서서 찻잔을 집었다. 식은 차를 한 모금 마셨다. 탁자 모서리에 관자놀이 칼자국이 희미하게 비쳤다.
“길은 안다고 했지.” 강휘가 말했다.
“안다.”
“몇 개나.”
“금릉각에서 북쪽으로 빠지는 길이 셋. 지하 수로가 하나. 성벽 너머 은신처가 둘.”
강휘는 찻잔을 내려놓았다. 전생에서 석중원이 알려준 것보다 하나 더 많았다. 지하 수로. 그건 전생에 듣지 못한 정보다.
“정보 출처는.”
석중원의 눈매가 미세하게 좁아졌다. “나대로 있다.”
방 안에 잠시 침묵이 흘렀다. 밖에서는 아침 장이 서는지 물건 나르는 소리가 들렸다.
“이용할 거다.” 강휘가 탁자를 짚으며 말했다.
석중원이 턱을 약간 들었다.
“추격대 다섯이 여관을 포위했다. 곧 이 방까지 올라올 거다. 도망치는 건 선택이 아니다.”
“그럼.”
“먼저 치고 나간다.”
석중원이 팔짱을 풀었다. “다섯을 혼자서.”
“아니다.” 강휘가 석중원의 눈을 똑바로 보았다. 짙은 갈색 눈동자가 아침 햇살에 반짝였다. “너와 함께다.”
석중원이 침묵했다. 손가락이 망토 아래로 살짝 움직였다. 품 안의 쪽지를 만지는 버릇인지도 몰랐다.
강휘는 알았다. 알고도 말을 이었다.
“우리는 필요에 의해 움직일 뿐이다.” 강휘의 목소리는 건조했다. “네가 길을 알고, 나는 싸울 이유가 있다. 그걸로 충분하지.”
“동료인가.”
“공모자다.”
석중원의 표정이 변하지 않았다. 하지만 눈빛이 한순간 깊어졌다. 뭔가를 저울질하는 듯했다.
강휘는 그 눈빛을 놓치지 않았다. 전생에서도 이 순간이 있었다. 그때는 몰랐다. 이 남자가 정보를 팔고 있다는 걸. 지금은 안다.
“조건이 있다.” 석중원이 입을 열었다.
“말해.”
“내 지시를 따를 것. 길은 내가 정한다.”
강휘가 입가를 살짝 올렸다. 씁쓸함과 냉소가 섞인 미소였다. “네가 길을 알면 그렇게 하겠다. 단, 싸움은 내 방식대로 한다.”
“네 무공은.”
“봉인당했다.” 강휘가 망설임 없이 말했다.
석중원의 시선이 강휘의 손으로 내려갔다. 검을 쥐는 오른손. 굳은살이 박힌 검지. 손톱 밑 미세한 어둠.
“검을 쥘 수는 있나.”
“쥘 수 있다. 초식을 펼칠 내공이 없을 뿐.”
석중원이 고개를 약간 돌렸다. 창밖을 본 것 같았지만 시선은 아무것도 향하지 않았다. 결정을 내릴 때의 무심한 동작이었다.
“좋다.” 석중원이 말했다. “공모자다.”
“그래.”
“오늘 밤에 움직인다. 낮에는 추격대가 경계가 삼엄하다.”
강휘가 끄덕였다. 그렇게 아침의 짧은 흥정은 끝났다. 동상이몽의 공모가 입 밖으로 나온 순간이었다.
석중원이 방을 나갔다. 문이 닫히기 전, 그가 잠시 멈춰 섰다. 무언가 말하려는 듯 어깨가 움직였다. 하지만 결국 아무 말 없이 복도로 사라졌다.
강휘는 탁자에 앉았다. 손가락이 허공에서 짧게 꺾였다. 매화검법 세 번째 초식.
가지가 바람에 휘는 동작. 내공 없이도 근육만으로 그릴 수 있는 길. 밤새 반복한 움직임이었다.
석중원은 정보를 흘렸다. 지하 수로를 알려준 건 의도된 친절인가, 진심인가. 전생에서 숨긴 걸 이번에는 왜 꺼냈을까. 쪽지를 손에 쥔 채 고민하던 그 버릇이 떠올랐다.
강휘는 품 안의 독침을 만졌다. 암살자에게서 빼앗은 전리품. 아직 쓸모가 남아 있었다.
전생보다 전개가 빠르다면, 전생보다 빠르게 움직이면 된다.
해가 지고 금릉각에 어둠이 내려앉았다.
여관 아래층은 여전히 북적였다. 술잔 부딪치는 소리, 주사위 구르는 소리, 웃음소리. 추격대원들이 술을 마시며 주변을 감시하는 소리가 벽을 타고 올라왔다.
석중원은 방에서 나오지 않았다. 복도 너머로 인기척조차 없었다.
한밤중이 되자 북적임이 조금씩 가라앉았다. 여관 주인이 촛불을 낮추는 소리. 추격대원들의 발소리가 여관 앞길과 뒷문을 오갔다.
강휘는 방 안에서 기척을 죽이고 있었다. 검집을 고쳐 메고, 독침을 소매 안에 밀어 넣었다. 창틈으로 바깥을 살폈다. 뒷문 쪽 그림자가 하나 줄었다.
그때였다.
맞은방 문이 살짝 열리는 소리. 천천히, 경첩이 삐걱이지 않게. 석중원의 발소리가 복도로 나왔다. 평소보다 가볍게 밟는 걸음. 계단을 내려가지 않고 복도 끝 창문 쪽으로 향했다.
강휘는 문고리에 손을 얹었다. 열지 않았다. 숨을 멈추고 귀를 기울였다.
창문 여는 소리. 바람이 순간 복도로 밀려 들어왔다. 이어 기와를 밟는 소리. 지붕으로 올라간 것이다.
강휘는 조용히 방문을 열었다. 복도는 어두웠다. 창문이 반쯤 열려 있었다.
차가운 밤공기가 스며들었다. 지붕 위로 검은 망토 자락이 순간 스쳤다. 석중원이 여관 뒤편으로 내려가고 있었다.
전서구.
강휘는 창문에 기대어 숨을 내쉬었다. 지금이라도 따라가서 멈추게 할 수 있었다. 쪽지를 빼앗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러면 판이 깨진다. 석중원이 쪽지를 보내지 않으면 장한걸은 다음 수를 두지 못한다. 장한걸이 수를 두지 않으면 읽을 수 없다.
강휘는 손을 창틀에서 떼었다. 소매 안 독침의 차가운 촉감이 손목에 닿았다.
여관 밖에서 작은 날갯짓 소리가 났다. 전서구가 어둠 속으로 날아올랐다. 북쪽으로. 장한걸이 있는 청성파 방향으로.
석중원이 지붕에서 내려오는 소리. 다시 창문으로 들어올 기척.
강휘는 재빨리 방으로 돌아왔다. 문을 닫았다. 탁자에 앉아 숨을 골랐다.
맞은방 문이 열렸다 닫혔다. 복도는 다시 고요해졌다.
보고. 첫 보고가 올라갔다. 내용은 무엇일까.
탈영병 추격을 앞둔 긴박한 상황. 공모 제안을 수락한 일. 지하 수로 정보를 흘린 일.
아마도 그중 일부만 적었을 것이다. 석중원은 정보를 선택적으로 흘리는 남자였다.
강휘는 어둠 속에서 입술을 움직였다.
“장한걸아.”
목소리는 땅에 스며들 듯 작았다.
“네 덫을 내 손으로 조여주마.”
객잔 밖에서 발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규칙적인 보폭. 무인들의 걸음걸이다. 추격대가 야간 순찰을 시작한 모양이었다.
강휘는 눈을 감았다. 내일이면 이 모든 움직임이 필요해질 거다. 손가락이 허공에서 다시 한 번 짧게 꺾였다. 매화가 가지에 맺히듯, 검로가 근육에 새겨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