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화, 두 번 피다
1화
흑풍림의 밤은 바람 한 점 없었다.
소나무 가지 사이로 달빛이 기울게 내리꽂혀, 숲 바닥의 낙엽을 푸르스름하게 물들였다. 서문경은 굵은 소나무 등걸 뒤에 몸을 붙이고 숨을 죽였다. 열 걸음 앞, 공터에서 백무영의 목소리가 들렸다.
“물건은 가져왔느냐.”
백무영의 손에는 푸른 빛이 감도는 작은 병이 들려 있었다. 달빛을 받아 병 안의 액체가 희미하게 출렁였다. 맞은편에는 흑의를 걸친 사내가 서 있었다. 허리춤에 쇠사슬이 엮인 단검 두 자루가 달빛에 번득였다.
“돈부터 보여라.”
백무영이 품에서 두꺼운 지폐 뭉치를 꺼내 보였다. 사내가 손을 뻗자 백무영이 한 걸음 물러섰다.
“동시에.”
사내가 낮게 웃으며 손을 내렸다. 백무영은 오른손에 든 병을 앞으로 밀었다. 사내가 돈 뭉치를 내밀려는 순간, 서문경이 몸을 날렸다.
발끝으로 낙엽을 박차며 허리를 낮춰 파고들었다. 검집에서 빠져나온 검이 은빛으로 번뜩였다. 매화검법 초식 일 매화점설(梅花點雪). 검 끝이 사내의 오른쪽 손목을 쳐 올렸다.
손목에서 핏줄기가 솟았다. 사내가 비명을 지르기도 전에 서문경은 검을 비틀어 손아귀에 든 돈 뭉치를 쳐 냈다. 지폐가 공중에 흩어졌다.
“서문경!”
백무영의 외침이었다. 서문경이 등을 보이는 순간 백무영이 장법으로 내려찍었다. 서문경은 몸을 비틀어 어깨로 받아냈다. 충격이 뼈를 타고 올라왔다. 통증을 씹으며 오른발로 백무영의 무릎을 걷어찼다.
백무영이 비틀거리며 물러섰다.
그 틈에 사내가 왼손으로 단검을 뽑아 휘둘렀다. 서문경은 상체를 뒤로 젖혀 검날을 피하고, 매화검법 이 초식 매화분영(梅花分影)을 썼다. 검신이 세 갈래로 갈라지는 듯한 환영이 번지는 가운데 실체는 단 하나, 사내의 가슴을 향해 곧게 뻗었다.
검이 갈비뼈 사이로 파고들었다. 사내의 눈이 커졌다. 서문경이 검을 뽑자 피가 검은 옷을 적셨다. 사내는 무릎부터 꺾이며 쓰러졌다.
백무영이 독병을 든 채 뒷걸음질 쳤다.
“네가 살아 있을 줄은 몰랐다.”
“그랬겠지.”
서문경은 검을 내리지 않았다. 백무영은 한 손으로 무릎을 감싸고 있었다. 무릎뼈가 어긋난 듯했다.
“파문된 놈이 감히——”
“파문시킨 놈은 네놈이다. 그걸 기억해라.”
서문경은 천천히 다가섰다.
“오늘은 저놈이다. 너는 아직 아니다. 하지만 이것 하나는 알아 둬라.”
서문경은 숲 바닥에 흩어진 지폐를 턱짓했다.
“네가 거래하려 한 독은 오늘 밤 사라진다. 그리고 이 숲의 흔적은 내일 아침이면 누군가 발견할 것이다.”
백무영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부상을 입고 상대가 되지 않을 거란 걸 안 듯, 그는 이를 갈며 물러섰다.
“이 일로 끝난 줄 알아라.”
“끝이 아니라 시작이다.”
백무영이 몸을 돌려 어둠 속으로 달아났다. 절룩이는 발소리가 점점 멀어졌다.
서문경은 사내의 시신 옆에 무릎을 꿇었다. 부러진 단검이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그는 숨이 멎었는지 손가락 두 개를 목에 대고 확인했다. 맥박이 없었다.
손을 뻗어 사내의 품속을 뒤졌다. 비단 주머니 하나가 만져졌다. 안에는 작은 목제 상자가 있었다. 뚜껑을 열자 검은 윤기가 흐르는 환약 세 알이 놓여 있었다. 만독지환의 본품이었다.
서문경은 상자를 닫아 품에 넣고, 자신이 미리 준비한 유사한 목제 상자를 꺼내 사내의 품에 밀어 넣었다. 안에는 겉보기만 비슷한 가짜 환약이 들어 있었다.
숲 바닥의 낙엽을 손바닥으로 쓸어 시신의 손 위치를 교정했다. 검상이 찔린 부위를 확인하고는 자신의 검을 다시 뽑아 시신 주변의 소나무 둥치와 바위에 매화검법 초식 특유의 검흔을 남겼다.
일곱 군데였다. 매화검법의 기초 초식이 남기는 검흔은 칼날이 들어가는 각도가 사십오 도에서 오십 도 사이로 일정하게 휘는 특징이 있었다. 문파 조사관이라면 한눈에 알아볼 수 있을 정도였다.
서문경은 마지막으로 사내의 왼손 검지에 묻은 피로, 바닥의 낙엽 위에 매화 한 송이를 간략하게 그렸다. 꽃잎 다섯 장. 가운데는 비워 두었다.
검을 닦아 검집에 꽂았다. 시신을 한 번 더 훑어보고, 백무영이 도망친 방향의 발자국을 확인했다. 절룩이는 오른발이 남긴 깊은 자국이 또렷했다.
서문경은 숲을 빠져나갔다.
새벽녘, 순찰대가 흑풍림 바깥 순찰로를 따라 이동하고 있었다. 대장은 진장로의 직속인 철호였다. 등불을 든 대원들이 두 줄로 늘어서서 숲 가장자리를 훑었다.
“저기!”
한 대원이 소나무 사이에 쓰러진 시신을 가리켰다. 철호가 등불을 높이 들고 다가갔다. 검은 옷, 허리춤의 쇠사슬, 손목의 검상. 사파 연락책임을 한눈에 알 수 있었다.
“주변을 살펴라.”
철호의 명령에 대원들이 흩어졌다. 곧바로 보고가 올라왔다.
“여기 검흔이 있습니다. 일곱 군데.”
“발자국은 두 사람입니다. 한 명은 절룩이며 북쪽으로.”
철호는 검흔 앞에 쪼그려 앉았다. 등불을 가까이 댔다. 검날이 들어간 각도, 휘어진 깊이, 흩뿌려진 나무 껍질의 파열 방향까지 살폈다. 손가락으로 검흔의 끝을 더듬다가 멈췄다.
“매화점설이다.”
철호는 입술을 깨물며 일어나 낙엽 위의 핏자국을 더듬었다. 매화 형상이 그려진 자리. 꽃잎 하나가 약간 비뚤어져 있었지만, 초식을 구사한 자가 직접 손가락으로 그렸음을 알 수 있었다.
“또 다른 발자국은 어디로?”
“동쪽입니다. 가볍고 빠른 걸음새였습니다.”
철호는 시신의 품을 뒤져 목제 상자를 꺼냈다. 뚜껑을 열자 검은빛 가짜 환약이 달빛을 받아 반짝였다. 냄새를 맡았다. 독특한 비린내가 희미하게 올라왔다. 만독지환 특유의 향은 아니었다.
“사혈과 독문의 흔적이 함께 있다. 즉시 진장로님께 보고한다.”
철호가 허리춤에서 봉화통을 꺼내 푸른 불꽃을 쏘아 올렸다. 새벽 하늘에 매화지부(梅花支部)의 신호가 번졌다.
“시신은 그대로 두고 주변을 봉쇄하라. 현장을 건드린 자는 문파령으로 다스린다.”
대원들이 재빨리 움직였다. 철호는 검흔 앞에 다시 한 번 멈춰 서서, 올려다보이는 숲의 어둠 너머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사형. 살아 계셨군요.”
한 시진 뒤, 매화지부의 서재에서 진장로가 철호의 보고를 듣고 있었다. 진장로는 흰 수염을 천천히 쓰다듬으며 탁자 위의 가짜 만독지환을 내려다보았다.
“백무영의 부상은 확실하더냐.”
“발자국으로 보아 오른쪽 무릎을 크게 다친 듯합니다. 시신 곁에 백무영의 체취가 남은 지폐가 흩어져 있었습니다.”
“사파와의 거래 현장에서 매화검법 초식이 쓰였고, 백무영은 제자인데 거기 있었다.”
진장로의 눈빛이 차가워졌다.
“그리고 서문경의 생존 증거가 매화 흔적과 함께 남았다.”
“예.”
“백무영은 어디 있느냐.”
“아직 문파로 복귀하지 않았습니다.”
진장로는 탁자를 짚고 일어나 창밖을 바라보았다. 먼 동녘 하늘이 옅은 회색으로 밝아오고 있었다.
“이 일을 아는 대원들의 입단속을 철저히 하라. 백무영이 돌아오면 즉시 연행하여 나에게 데려오도록.”
“장로님, 한 가지 더 있습니다.”
철호가 낙엽에 그려진 매화 흔적에 대해 보고했다.
“서문경은 스스로 자신이 살아 있음을 증명하려 한 듯합니다. 그것도 매화검법 초식으로.”
진장로는 한동안 대답하지 않았다. 창틀에 손가락을 대고 무언가를 곱씹는 듯했다.
“가거라.”
철호가 물러난 뒤, 진장로는 탁자 위의 가짜 약병을 집어 들었다. 빈 병 안에서 가짜 환약이 달그락 소리를 냈다. 그는 병을 다시 내려놓으며 천천히 눈을 감았다.
철호가 물러나고 한 시진쯤 뒤, 아침 해가 중천으로 기울 무렵이었다. 진장로가 내린 입단속은 곧바로 효력을 발휘했고, 문파 안은 겉보기엔 평소와 다름없는 고요를 되찾았다. 서문경은 그 고요함이 진장로의 침묵 속에서 어떤 파문으로 번지고 있는지 알지 못한 채, 이미 화개루로 향하는 길 위에 있었다.
화개루의 낮은 조용했다. 찻집이라기엔 술항아리가 많고 주루라기엔 차 향이 짙은 이층 건물은 평소 단골조차 뜸한 시간대였다.
서문경은 이층 구석 좌석에 앉아 창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탁자 위엔 아직 차도 놓이지 않았다. 흑풍림에서 나온 지 두 시진.
품속에는 천으로 감싼 만독지환의 병이 무게를 실었다. 진장로에게 보고는 갔을 터였다. 지금쯤 백무영은 의원에서 어깨를 꿰매고 있겠지. 사파 연락책을 잃은 당혹감보다 더 거슬리는 게 있을 것이다.
매화검법의 검흔.
계단을 오르는 발소리가 났다. 가볍고 일정한 걸음걸이. 서문경은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흑풍림에서 살아 돌아온 사람이 내 찻집에 올 일인지.”
목소리는 젊었지만 목청엔 장사치 특유의 미끈한 여운이 섞여 있었다.
화소월이 탁자 건너편에 앉았다. 스무 살 남짓, 옥색 도포에 머리는 검은 비단으로 단정히 묶었다. 손엔 다기가 담긴 쟁반. 그녀는 찻잔 두 개를 내려놓으며 서문경의 얼굴을 살폈다.
“표정을 보니 차보다 술이겠군.”
“거래하러 왔다.”
서문경이 품에서 천에 싼 만독지환을 꺼내 탁자 위에 올렸다. 천을 펼치자 짙은 녹색의 작은 병이 드러났다. 화소월의 눈빛이 병에 닿는 순간, 찻잔을 집던 손이 멈췄다.
“만독지환.”
“알아보는군.”
“알아보고도 남지.” 화소월이 찻잔을 내려놓았다. “흑풍림에 누군가 이걸 갖고 들어갔다는 제보는 이미 받았다. 그런데 그 현장에서 백무영이 어깨에 검상을 입었다는 소식도 따라왔고.”
서문경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 침묵 자체가 확인이었다.
화소월은 팔짱을 끼고 의자에 등을 기댔다. “그 검상의 흔적이 매화검법이라면, 지금 백무영은 파문당한 사람에게 얻어맞은 셈이지. 꽤 볼만한 꼴일 텐데.”
“만독지환을 받아라. 대신 정보를 달라.”
“무슨 정보.”
“백무영의 사파 연락망.”
화소월의 눈썹이 미세하게 당겨졌다. 그녀가 다기를 들어 차를 따랐다. 우롱차의 옅은 향이 공기 중으로 번졌다. 찻잔을 서문경 쪽으로 밀며 그녀가 입을 열었다.
“만독지환은 해독이 불가능한 독이야. 중독자를 특정 향에 노출시키면 진행을 늦출 수 있다는 것 외에는 알려진 게 없어. 희소 가치는 있지만 정보 거래의 지불 수단으로는 과해. 내가 받아서 팔아 봤자 위험 부담만 크고.”
“충분한 가치다.”
“네겐 그렇겠지.” 화소월이 찻잔을 한 모금 마셨다. “하지만 나한테 왜 필요한지 네 입으로 말해.”
서문경은 잠시 그녀를 보았다. 지난 생, 화소월은 백무영의 뒤를 쫓다 사라졌다. 화개루를 뒤덮은 불길 속에서 그녀가 남긴 마지막 말은 ‘네가 살아 있단 걸 증명해’였다. 지금 이 자리에서 그 말을 들려줄 순 없었다. 대신 다른 방식으로 증명할 수밖에.
“백무영이 사파와 접촉한 증거를 쥐고 있다.”
화소월이 찻잔을 내려놓았다. “증거라고?”
“만독지환 자체가 증거다. 이것은 만독곡에서만 제조된다. 정파의 무인이 합법적으로 구할 수 있는 물건이 아니야.”
“알고 있어. 그래서 더 의문이야.” 화소월의 손가락이 찻잔 가장자리를 천천히 돌았다. “네가 파문당한 지 채 두 달도 안 됐다. 그동안 강호에서 어떻게 살아남았는지, 매화검법을 어떻게 유지하는지, 그리고 왜 만독지환을 들고 내 앞에 앉아 있는지. 그 세 가지를 모르는 상태에서 백무영의 적과 손잡을 순 없어.”
“적이 확실하냐.”
“너 자신이 그렇게 보여주면 되겠지.”
서문경이 천천히 일어났다. 창가 쪽 벽에 기대 세워 둔 검을 집었다. 화소월의 시선이 검집을 따라 움직였다. 검은 낡았지만 손때가 깊게 밴 물건이었다.
“매화검법은 문파의 비전이다. 외부인이 보는 것은 허락되지 않지만… 나는 파문당한 몸이니 규율을 따질 처지가 못 된다. 단 한 번만 보여주마.”
화소월의 손놀림이 찻잔에서 멎었다.
서문경이 검을 뽑았다. 쇳소리는 짧았다. 발이 반 보 앞으로 미끄러지며 검끝이 허공에 점 하나를 찍었다.
매화검법의 기초 초식, 한매농효. 첫눈이 내리기 전 천지가 응결되는 순간을 형상화한 검이다. 서문경의 손목이 꺾이지 않은 채 검끝이 좌측으로 살짝 돌며 기운을 한 점에 모았다.
찻잔 속 차 표면이 떨렸다.
이어 검끝이 위로 살짝 들렸다가 제자리로 돌아왔다. 딱 세 동작. 그걸로 끝이었다. 서문경은 검을 거둬 검집에 꽂았다. 그가 앉으며 검을 탁자 옆에 다시 기대 세웠다.
화소월의 눈빛이 달라져 있었다. 장사치의 가벼운 미소가 사라지고, 그 자리엔 정보상 본연의 날카로움이 자리했다.
“그게… 한매농효 맞지.”
“알아보는 사람은 드물다.”
“매화검법을 가르치는 의례가 어떤지는 나도 안다. 파문당한 사람이 의례 없이 저 정도 속도를 유지할 수 있을 리 없어.” 화소월이 앞으로 몸을 숙이며 팔짱을 풀었다. “네 정체에 대해선 더 묻지 않겠다. 대신 조건이 있다.”
“말해라.”
“첫째, 얻은 정보는 앞으로 나를 통해서만 거래한다. 다른 정보상에겐 흘리지 않는다.”
“동의한다.”
“둘째, 만독지환의 연구 결과를 나도 공유받는다. 독의 특성, 향에 대한 반응, 중독자의 진행 상태까지.”
서문경은 그녀를 똑바로 보았다. 화소월이 만독지환의 가치를 이미 파악하고 있었다. 단순한 희소품이 아니라 백무영을 옭아맬 증거물로서의 가치까지.
“받아들인다.”
“좋아.” 화소월이 옥색 도포 안주머니에서 작게 접은 종이 한 장을 꺼내 탁자 위에 펼쳤다. “백무영이 사파와 접촉할 때 쓰는 연락망이야. 중간에서 전서구를 받아 전달하는 전령이 하나 있고, 그 위로 실제 접선을 담당하는 ‘사영’이라는 자가 있어. 사영은 이틀에 한 번씩 남쪽 시장의 약재상 뒤편에 나타나. 외견은 사십 대 중반, 오른쪽 손등에 칼자국이 있고 걸음걸이가 약간 절룩인다.”
서문경은 종이를 집어 들었다. 약재상의 위치와 접선 시간, 전서구의 표식까지 기록되어 있었다.
화소월이 말을 이었다. “그런데 흑풍림 사건 이후 사영이 모습을 감췄다고 들었어. 백무영이 이미 상황을 눈치챘을 가능성이 높다.”
“사영이 사라졌다면 현장에 증거가 남았겠지.”
“약재상 뒤편의 은신처를 아직 털지 않았을 거야. 접선 장소가 발각된 걸 백무영은 모르니까.” 화소월이 찻잔을 비우며 일어났다. “다만 이 정보를 줬다고 해서 내가 네 편이 된 건 아니야.”
“알고 있다.”
“좋아. 그럼 거래 성립.”
서문경은 만독지환을 천으로 다시 싸서 품에 넣었다. 탁자 위의 종이는 접어 소매 깊숙이 밀어 넣었다.
“한 가지 더 묻겠다.”
화소월이 고개를 기울였다.
“옥기린이라는 사람을 아나.”
화소월의 눈빛이 다시 날카로워졌다. “의원도 아니고 약사도 아니지. 하지만 독에 관해서라면 강호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사람이야. 만독지환을 분석하려는 거라면… 나쁘지 않은 선택이다.”
“위치를 알려줘.”
“서문 밖 묘지 입구에서 남쪽으로 백 보. 사람 사는 곳처럼 안 보이는 주막이 하나 있어. 간판도 없고 불빛도 희미해. 그런데 찾는 사람은 다 찾아 들어가.”
서문경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검을 집어 허리에 찼다.
“정보 대가로 받을 물건은 이미 탁자 위에 있다.”
만독지환을 다시 내려놓지 않은 채였다. 화소월의 시선이 잠시 그의 손을 스쳤지만,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가 만든 새로운 정보를 기다리겠다. 사영의 행방이라든가, 독의 반응이라든가.”
서문경이 계단을 향해 발을 돌렸다.
“서문경.”
화소월의 목소리가 등을 멈추게 했다.
“매화 두 번 피면… 알겠네.”
그 말에 서문경은 고개를 반만 돌렸다. 화소월은 찻잔을 정리하며 말을 이었다.
“앞으로 암호로 쓰지. 누군가 ‘매화 두 번 피다’라고 하면 나를 통해 온 사람이라고 치자.”
서문경은 답하지 않고 계단을 내려갔다. 화개루 문을 밀고 나서자 저녁 무렵의 붉은 빛이 길바닥을 물들이고 있었다.
서문 밖으로 향하는 길은 인적이 드물었다. 해가 지면서 묘지 입구 쪽엔 안개 비슷한 어스름이 땅바닥에 깔렸다. 남쪽으로 백 보를 걸으니 과연 간판 없는 주막 하나가 불빛을 흘리고 있었다. 문틈으로 새어 나오는 등불 빛은 가물거렸고, 주변엔 술기운 대신 약초 썩는 듯한 냄새가 감돌았다.
서문경은 주막 앞에 멈춰 섰다. 품에서 만독지환을 꺼내 손바닥 위에 올렸다. 병을 감쌌던 천이 풀리며 녹색 유리병이 저녁 어스름 속에서 희미하게 빛났다.
그 순간, 병 입구에서 옅은 향이 풍겼다.
서문경의 손끝이 미세하게 굳었다. 이 냄새였다. 전생, 만독지환이 온몸으로 퍼지던 날 밤에도 이 향이 났다. 살 속에서 무언가가 기어가는 듯한 고통보다 먼저 온 것은 이 비릿하면서도 달콤한 냄새였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손바닥에 올린 병은 단단했고, 향은 독소의 완전한 확산을 막기 위해 병 안에 보존된 잔향에 불과했다. 진품이라는 증거이자, 분석을 위한 첫 단서였다.
서문경은 병을 다시 천으로 싸서 품에 넣었다. 왼손으로 낡은 문짝을 두드렸다.
세 번. 짧고 조용했다.